담마의 거울

앙굴리말라와 효력을 상실한 업(ahosikamma)

담마다사 이병욱 2015. 4. 29. 19:24

 

앙굴리말라와 효력을 상실한 업(ahosikamma)

 

 

 

악행을 하고서도 잘 사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착하게 살면서도 가난하고 불행한 자들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다. 그러나 속단하기 이르다. 아직까지  행위에 대한 과보가 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행을 저지르고도 지금 여기에서 부유하게 잘 사는 자일지라도 조건이 성숙이 성숙되면 반드시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반드시 받게 되어 있다.

 

 

Madhuvā maññati bālo,      마두와 만냐띠 발로

yāva pāpa na paccati;    야와 빠빵 나 빳짜띠

Yadā ca paccati pāpa,    야다 짜 빳짜띠 빠빵

atha dukkha nigacchati.  아타 둑캉 니갓차띠

(Dhp69)

 

 

악행이 여물기 전까지는

어리석은 자는 꿀과 같다고 여긴다.

그러나 악행이 여물면,

어리석은 자는 고통을 경험한다.

(Dhp69, 전재성님역)

 

 

かなは、いことをっても、

そのいのれないあいだは、

それをのようにいなす。

しかし、そのいのれたときには、ける。

(Dhp69, 中村元)

 

 

어리석은 자는 나쁜 짓을 하고 나서도

그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는 꿀같이 생각한다.

불행한 결과가 눈앞에 닥쳐와서야

그때 비로소 뉘우치고 괴로워한다.

(Dhp69, 법정스님역)

 

 

過罪未熟 과죄미숙

愚以怡淡 우이이담

至其熟時 지기숙시

自受大罪 자수대죄

(Dhp69, 한역)

 

 

악행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동안

어리석은 자들은 그것을 꿀처럼 달게 여긴다.

그러나 악행이 마침내 결과를 이끌어 올 때

그들은 크나큰 고통을 겪는다.

(Dhp69, 거해스님역)

 

 

As long as evil has yet to ripen,

the fool mistakes it for honey.

But when that evil ripens,

the fool falls into

                      pain.

(Dhp69, Thanissaro Bhikkhu)

 

 

악행을 하고서도 잘 사는 사람들

 

악행을 예사로 저지른 자들이 잘 사는 경우가 있다. 이는 어리석은 자는 나쁜 짓을 하고 나서도 그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는 꿀같이 생각한다.”라는 구절로 설명 될 수 있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을 보면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는 어리석은 자는 그 행위가 꿀이나 단물처럼, 탐나고 매혹적이고 즐거운 것이라고 여긴다. 악한 행위가 현세에서나, 미래에서나 그 결과를 낳지 않는 한, 그는 그렇게 생각한다.(DhpA.II.50)”라 설명되어 있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라 한다. 만일 행위에 대한 과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금하는 그 어떤 것도 서슴없이 할 것이다. 대게 단멸론적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이다.

 

초기경전에서는 단멸론적 견해를 금하는 문구가 정형화 되어 있다. 그래서 보시에는 공덕이 없다. 제사의 공덕도 없다. 공양의 공덕도 없다. 선악의 과보도 없다… (M41)”라는 정형구가 있는데,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전도된 견해라 하였다.

 

전도된 견해를 가졌을 때 그 과보는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가르침이 아닌 것을 따르고 바른 길이 아닌 것을 실천하는 것을 원인으로 어떤 뭇 삶들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다. (M41)”라 하였다. 잘못된 견해로 막행막식 하며 살았을 때 악처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단멸론과 같이 전도된 견해가 있다면 당연히 바른 견해도 있다.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말한다. 그래서 늘 강조되는 것이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것등 열 가지 착하고 건전한 행위(십선행)를 하라는 것이다.

 

완전범죄를 하여도

 

법구경 세 번째와 네 번째 구절에서 그러나 악행이 여물면, 어리석은 자는 고통을 경험한다.”라 하였다. 여기서 경험한다(nigacchati)’는 것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악행이 여물어 어리석은 자는 현세에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고 내세에 지옥등에서 고통을 겪는다.(DhpA.II.50)”라 하였다. 현세와 내생에서 모두 과보를 받는 것으로 설명 되어 있다.

 

악행을 저지른 자들은 완전범죄를 하여도 자신만은 속일 수 없다. 범죄행위로 꿀맛과 같은 행복을 누리고 있을지라도 양심만은 속일 수 없다. 그에 따라 지금 여기에서 정신적 괴로움을 겪고 있다면 현세에서 과보를 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런데 현세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악행에 대한 과보는 내생으로 연결된다. 악처에 태어난다면 현세에서 보다 더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악행을 하면 현세에서도 고통받고 내세에서 고통받기 때문에 두 세계에서 고통받는다고 하였다.

 

업의 법칙(Kammaniyama)

 

씨앗을 심으면 그 종자에 따라 고유한 열매가 열린다.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선한 행위이든 불선한 행위이든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는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것을 업의 법칙(Kammaniyama)’라 한다. 행위의 결과로 나타는 것에 대하여 깜마위빠까(Kammavipaka)라 한다. 이를 업이숙(業異熟)이라 한다. 여기서 위빠까라는 말은 ‘result; fruition; consequence of one's actions’의 의미이다.

 

깜마위빠까에 대하여 업이숙이라 하였다. 그런데 한자어 이숙(異熟)’이라는 말은 달리 익는다는 뜻이다. 나쁜 행위를 하였을 때 즉각적인 과보를 가져 오기도 하지만 시간을 두고 과보가 나타날 수 있음을 말한다. 아직 조건이 성숙되지 않은 경우이다. 그러나 업이 열매를 맺기에 적당한 조건을 만났을 때 과보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시차를 두고 과보로 나타났을 때 아비담마에 따르면 네 가지로 설명된다. 성숙하는 시간에 따라 금생에 받는 업, 다음 생에 받는 업, 받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는 업, 효력을 상실한 업,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금생에 받는 업(diṭṭhadhammavedanīya kamma)

 

 금생에 받는 업이라는 말은 ‘diṭṭhadhammavedanīya kamma’의 번역어이다. 여기서 diṭṭhadhamma‘diṭṭha+dhamma’로 설명된다. 빠알리어 ‘diṭṭha’는 과거분사형으로 보여진의 뜻이고, ‘dhamma’현상을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diṭṭhadhamma보여진 현상이라 번역된다. 한자어로는 현법(現法)’이라 한다. 영어로는 ‘here and now’로 설명된다. 우리말로 지금 여기라는 뜻이다.

 

‘diṭṭhadhammavedanīya kamma’에 대하여 금생에 받는 업이라 하였다. 여기서 금생이라 한 것은 ‘diṭṭhadhamma’에 대한 번역이다.  이는 지금 여기라는 말 보다 범위를 더 넓게 잡은 것이다. 이렇게 금생이라 한 것은 다음 생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금생이라 한 것이다.

 

행위에 대한 과보가 즉각적으로 나타난다면 ‘diṭṭhadhammavedanīya’라는 말은 지금 여기서 나타나는 업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과보는 반드시 즉각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시차를 두고 나타나기 때문에 일생에서 언젠가 한번쯤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는다면 금생에 받는 업이라 할 수 있다.

 

다음 생에 받는 업(upapajjavedanīya kamma)

 

선한행위이든 악한행위이든 사는 동안 과보를 받을 수 있다. 완전범죄를 저지른 자가 나중에 꼬리를 잡혀 처벌 받게 되었을 때 현생에서 과보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현생에서 받지 않고 넘어 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다음 생에 받는 업(upapajjavedanīya kamma)’라 한다.

 

누군가 살인을 하여 완전범죄를 저질렀다. 발각되지 않아 처벌받지 않을 지라도자신만큼은 속일 수 없다. 그럴 경우 악처에 떨어질 것이다. 임종 순간에 범죄를 저지른 행위에 대한 끔찍한 표상이 떠 올랐을 때, 그 표상에 대한 재생연결식으로 악처로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럴 경우 다음 생에 받는 업(upapajja-vedanīya kamma)’이 될 것이다.

 

받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는 업(aparāpariyavedanīya kamma)

 

받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는 업(aparāpariya-vedanīya kamma)이 있다. 세 번째 생부터 받는 업이라 설명할 수 있다. 금생과 다음 생을 용케 비켜 갔지만 세 번째 생부터 조건을 만나면 성숙되어 과보를 받는 것을 말한다. 이 업은 윤회가 계속 되는 한 결코 그 효력이 상실되지 않는다. 받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은 업으로서 업의 과보로부터 누구든지 자유로울 수 없다.

 

효력을 상실한 업(ahosikamma)

 

마지막으로 효력을 상실한 업(ahosikamma)’이 있다.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에 따르면 업이 있었지만 그 과보를 가져올 기간을 넘겨버린 업이라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여 지은 업에 대한 효력이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다. 왜 그럴까? 행위를 지으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는 업의 법칙(Kamma-niyama)’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효력을 상실한 업은 누구에게 해당될까?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아라한의 경우에 마지막 임종시에 과거에서 지은 모든 업은 이 효력이 없는 업이 되어 버린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아라한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중죄를 저지른 자는 구원 될 수 없을까?

 

행위를 지으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지금 여기서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과보도 있고, 현생에서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나타나는 과보가 있다. 지금 악행을 하여 과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여 그 행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생에서 나타나지 않으면 다음 생에 발현되고, 또 그 다음 생에서 발현 되기 때문에 행위에 대한 과보는 반드시 받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중죄를 저지른 자는 구원 될 수 없을까?

 

어느 종교이든지 구원이 있다. 불교 역시 구원이 없지 않을 수 없다. 현재 까지 선행보다 악행이 많아서 내생에 악처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은 자일지라도 구원이 없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것이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연쇄 살인자라도 성자의 흐름에 들어 아라한이 되면 이전에 지은 악행은 모두 소멸된다. 그렇다고 하여 살아 있을 때 과보를 면하는 것은 아니다. 현생이나 이전 생에 살인을 저지른 자가 조건이 형성되어 업이 성숙되었을 때 아라한이라도 과보를 받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앙굴리말라경에서 알 수 있다.

 

 

angulimala

 

 

앙굴리말라는 연쇄살인자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을 만나 성자로 다시 태어났다. 이에 대하여  “앙굴리말라여, 그렇다면, 그대는 지금 싸왓띠로 가라. 가서 그 부인에게 ‘자매여,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진실로 당신이 잘 되고 당신의 아이가 잘 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하라.(M86)”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앙굴리말라는 거듭 태어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전의 삶은 죽고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말한다.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앙굴리말라는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났다. 연쇄살인범이라는 얼굴 그대로이지만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이전의 앙굴리말라는 죽었다. 마치 출가하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아 가기 때문에 이전의 삶은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앙굴리말라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에 얼굴모습은 옛날과 다름 없지만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성자가 된다는 것은 이전의 나는 죽고 새로 태어난 것과 같다. 그래서 경에서는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라 하였다. 이때  ‘고귀한 태어남’은 ‘ariyāya jāti’를 뜻한다. ‘성스런 태어남’이란 뜻이다. 이 말은 다름 아닌 성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앙굴리말라는 부처님 교단에 들어와 성자가 되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ariyāya jātiyā jāto)”라고 말하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앙굴리말라가 돌에 맞아 죽은 이유

 

앙굴리말라는 다시 태어나 새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살인업을 면할 수는 없었다. 앙굴리말라가 돌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번뇌 다한 아라한으로 거듭 났음에도 현생에서 살인업에 대한 과보를 피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이여, 그대는 인내하라, 그대가 업의 과보로 수년, 아니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을 지옥에서 받을 업보를 그대가 지금 여기서 받는 것이다.(M86)”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이는 무슨 뜻일까? 앙굴리말라가 아라한이 되어 다음생과 다음 생에 이어지는 어떤 생에서 체험되는 과보를 피해 갈 수 있었지만, 현세에서 체험될 수 있는 과보는 피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주에 따르면 “거룩한 님의 경지를 얻기 이전에 행한 행위의 현재적인 과보를 감지하는데 민감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불교적 구원이란?

 

앙굴리말라는 돌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아라한이었기 때문에 다시 태어남을 가져 오지 않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비담마에 따르면 효력을 상실한 업(ahosikamma)’에 해당된다.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설령 과거 전생에 살인업을 지었을지라도 더 이상 태어남이 없기 때문에 이전에 지은 업은 모두 효력이 상실되어 버린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의 구원은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 아라한이 되는 길 밖에 없다.

 

흉적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으로부터 구원 받았다. 이는 앙굴리말라가 예전에 나는 흉적으로서 앙굴리말라라고 알려졌다. 커다란 폭류에 휩쓸렸으나 부처님께 안식처를 얻었네.(M86)”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2015-04-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