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몸과 마음은 상호의존적일까? 죽음의 삼요소와 상수멸정

담마다사 이병욱 2015. 2. 21. 11:59

 

몸과 마음은 상호의존적일까? 죽음의 삼요소와 상수멸정

 

 

 

식으면 맛이 없다

 

명절 때는 과식하기 마련이다. 또 과음하기 마련이다. 오랫동안 인연이 있는 사람들과 이런 자신과 주변 이야기, 세상이야기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러다 보면 많이 먹게 되고 많이 마시게 된다.

 

먹고 마실 때는 좋다. 그러나 반드시 후유증을 남긴다. 특히 술이 그렇다. 자신의 주량을 넘어 마신 경우 시간이 지나면 불쾌로 나타난다. 몸과 마음이 엉망이 되어서 과음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 더구나 취중에 말과 행동에 있어서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에 활기를 넣어 주는 것은 뜨끈한 꿀차가 최고일 것이다.

 

따끈한 꿀차를 입에 넣으면 속이 부드러워진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면 식기 시작한다. 완전히 식었을 때 해장의 효과는 거의 없다. 따뜻하였을 때 마시는 것과 차갑게 식었을 때 마시는 것은 효과에 있어서 천지차이가 난다.

 

따끈한 원두커피나 따뜻한 차한잔을 마시면 삶의 활력소가 된다. 공통적 현상은  식으면 맛이 없다는 것이다.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찬밥보다 더운 밥이 훨씬 낫다. 국이나 찌게도 마찬가지로 따끈할 때 먹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찬 음식 보다 따뜻한 음식이 우리 몸에 더 좋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몸이 식는다면

 

지금 여기 찻잔이 있다. 도기로 된 찻잔이다. 도기로 되어 있다는 것은 보온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도기로 된 찻잔에는 따뜻한 차가 올려져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차가워 진다. 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식어 버린다. 식어 버리면 차의 사망이라 볼 수 있다. 싸늘하게 식은 차나 커피, 꿀차는 용도폐기 된 것과 다름 없다. 그러나 사람의 몸은 식지 않는다.

 

 

 

 

 

 

사람의 몸은 늘 36.5도를 유지한다. 만약 사람의 체온이 35도 이하로 떨어지면 저체온증이라 하여 생명이 위독하다. 반대로 42도를 넘으면 단백질의 성질이 변하여 인체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 그래서 항상 36.5도를 유지 하는데, 이는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 한 체온의 변화는 없다. 나이가 팔십이나 구십이 된 노인이라도 36.5도를 유지 하기 때문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버티는 가장 큰 이유는 식사를 하기 때문이다. 만일 밥숟가락을 놓게 된다면 더 이상 체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이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일까 밥숫가락을 놓다는 말이 죽음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따뜻한 찻잔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식어 버린다. 이는 차의 사망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식지 않는다. 음식이 계속 공급되는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음식공급이 안된다면, 즉 밥숫가락을 놓게 된다면 체온 36.5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식어 갈 것이다. 이는 인간의 사망이라 볼 수 있다.

 

죽음의 삼요소

 

차나 커피의 사망과 인간의 사망과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싸늘하게 식어 버린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온기가 사라졌을 때 움직임은 없다. 그것은 죽음이다. 팔십년 구십년을 살아 온 사람에게 온기가 사라졌을 때 마치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 쓸모없는 나무 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머지않아 이 몸은

땅 위에 눕혀지리라. (dhp41)

 

 

게송을 보면 죽은 시체에 대하여 쓸모없는 나무 조각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생명이 끝난 것을 말한다. 게송에서는 의식 없이 버려진 것이라 하였다. 의식(viññāa)의 떠남(apeta)은 나무토막과 다름 없음을 말한다.

 

초기경에서는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해 놓고 있다. 맛지마니까야에서 죽은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 되어 있다.

 

 

“벗이여,

세 가지 상태

즉 생명력과 체열과 의식이

이 몸을 떠나면,

여기 이 몸은

무정한 통나무처럼 버려지고,

던져져 누워있게 됩니다. (M43)

 

 

사리뿟따는 육체적 죽음에 대하여 생명력(āyu) 과 체열(usmā)과 의식(viññāa) 이렇게 세 가지 요소가 몸을 떠났을 때 죽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생명력은 주석에 따르면 살아있는 몸의 물질적 현상을 유지하고 활기를 불어넣는 생명력(jivitaindriya:命根)을 말한다.(Pps.II.350)”라고 되어 있다.

 

몸에서 의식만 떠나서는 죽는 것이라 볼 수 없다. 상수멸정에 들어간자의 경우 의식이 소멸한 상태이지만 죽었다고 볼 수 없다. 식물인간의 경우 의식은 없지만 생명력과 체열이 있으므로 죽은 것이 아니다. 생명력과 체열, 그리고 의식이 모두 소멸하여야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생명력과 체열은 상호의존적 관계

 

죽음의 삼요소는 생명력과 체열과 의식이다. 이중에서 생명력과 체열은 몸과 관련이 있고, 의식은 마음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몸과 마음이 있어야 산사람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몸이 죽으면 마음도 죽는 것일까? 반대로 마음이 죽으면 몸도 죽는 것일까 

 

죽음의 삼요소 중에 생명력과 체열은 몸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이에 대하여 초기경에서는 상호의존적 관계로 보고 있다. 그래서 생명력은 체열을 조건으로 존재합니다.(M43)”체열은 생명력을 조건으로 존재합니다. (M43)라 하였다.

 

생명력과 체열의 상호의존적 관계는 생명력은 체열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습니다체열은 생명력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생명력과 체열은 둘 중에 하나만 없어도 함께 사라지는 것과 같다.

 

단멸론이 왜 모순인가

 

죽음의 삼요소 중에 생명과 체열은 상호의존적이라 하였다. 그래서 하나가 파괴 되면 나머지도 함께 파괴 된다. 그러나 삼요소 중에 의식은 이와 다르다.

 

죽음의 삼요소에 의식이 있다. 그런데 경에서 생명과 체열이 파괴 된다고 하여 의식까지 파괴 된다는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의식은 생명력과 체열과 상호의존적 관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단멸론자들은 몸과 마음을 상호의존적 관계로 본다.

 

인터넷시대에 가장 악취나는 이론이 단멸론이다. 한마디로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이론이다. 이를 부처님의 상호의존적 연기로 그럴 듯 하게 포장하여 몸과 마음은 상호연기 한다고 설명하다. 상호의존하여 연기 하기 때문에 몸이 파괴 되면 마음도 파괴 되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교학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악취나는 단멸론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단멸론은 경전을 근거로 하였을 때 모순이다. 왜 그런가? 상호의존적 연기라면 마음이 파괴 되었을 때 몸도 파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수멸정에서 출정한 자들은 죽지 않는다. 만을 그들의 주장대로 몸과 마음이 상호의존 된 것으로 보아 마음이 파괴 되었다면 상수멸에 들어간자는 그대로 죽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출정하는 것을 보면 단멸론이 모순임을 알 수 있다. 단멸론이 모순 인 것 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경전의 가르침

- 생명력은 체열을 조건으로 존재합니다.(M43)

- 체열은 생명력을 조건으로 존재합니다.(M43)

 

(설명)

- 죽음의 삼요소(생명력, 체열, 의식)중에서 생명력과 체열만 상호의존적으로 봄.

- 의식은 생명력과 체열과 상호의존적이 아님

 

(2)단멸론

- 몸은 마음을 조건으로 존재하고, 마음은 몸을 조건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은 상호의존한다.

- 몸과 마음이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에, 몸이 파괴되면 마음도 파괴되고, 마음이 파괴되면 몸도 파괴된다.

 

(설명)

- 몸과 마음을 상호의존적으로 보지만 경전적 근거 없음

- 몸이 먼저 파괴 되는 것은 성립될수 있지만, 마음이 먼저 파괴되는 것은 모순임(상수멸정에서 출정하는 것을 설명해야함)

- 마음은 파괴 되지 않고 조건에 따라 재생연결식이 되므로 마음은 파괴 되지 않음(아라한은 제외) 

 

비교를 해보면 모든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단멸론자들이 단순하게 몸과 마음을 상호 의존적 연기로 보아 설명하는 것은 경전적 근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모순이다. 특히 마음도 파괴 되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은 모순의 극치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파괴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상수멸정상태로 설명될 수 있다.

 

상수멸정상태에서는

 

선정이 깊어져서 상수멸에 이르면 마치 죽은 듯이 보인다. 그러나 죽음의 삼요소 중에 생명력과 체열만은 남아 있다. 다만 의식은 사라져 남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단멸론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이다. 단멸론자들은 몸과 마음을 상호 의존적으로 보아 한쪽만 파괴 되어도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수멸 상태에서는 몸과 마음을 상호의존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의식이 파괴되어도 몸이 파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생명력과 체열은 남아 있는 것이다.

 

만일 상수멸정에 들어간자가 의식이 사라졌을 때 동시에 생명력과 체열도 함께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죽은 상태와 같기 때문에 아마 출정후에 되돌아 오지 못할 것이다. 이는 모순이다. 그래서 죽음의 삼요소에서 몸의 요소라 볼 수 있는 생명력과 체열은 상호의존적 관계가 성립하지만, 몸의 요소와 마음의 요소는 상호의존적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벗이여, 이러한 생명력의 형성과 느낌의 상태는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벗이여, 생명력의 형성과 느낌의 상태가 동일한 것이라면, 수행승이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들었을 때에 그 상태에서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벗이여, 생명력의 형성과 느낌의 상태가 다른 것이므로, 수행승이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들었을 때에 그 상태에서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M43)

 

 

경에서는 생명력느낌을 예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느낌은 상수멸에서 ()’를 말한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생명력의 형성과 느낌의 상태가 동일한 것이라면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상호의존적 연기라면이라는 뜻이다. 마치 생명력과 체열이 상호의존적인 것과 같다. 생명력이 소멸하면 체열 또한 소멸하기 마련이므로, 만일 생명력과 느낌이 상호의존적이라면, 상수멸상태에서 느낌이 소멸하면 생명력도 소멸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수멸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이는 모순이다. 그래서 죽음의 삼요소 중에 생명력과 체열은 상호의존적이지만, 생명력과 의식 또는 체열과 의식은 상호의존적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단멸론자들이 단순무식하게 몸과 마음이 상호의존하여 한쪽이 파괴되면 다른 쪽도 파괴되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는 경전적 근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모순이다. 그리고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는 엉터리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2015-02-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