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오물장에서 핀 홍련화

담마다사 이병욱 2015. 2. 17. 15:39

 

오물장에서 핀 홍련화

 

 

쓰레기더미에서도 장미는 필 수 있을까? 늘 회자 되는 말이 있다. 유래는 한국전쟁당시 외국언론 사설에 실렸기 때문이다. 1953년 한국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영국의 더 타임즈지에서는 폐허가 된 한국에서 건강한 민주주의가 소행하기를 기대하기 보다는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라고 보도 하였다. 모든 것을 절망적으로 보고 작성한 기사라 본다.

 

쓰레기 더미 위에서 홍련화가 피어나듯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은 피지 않는다. 조건이 만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쓰레기 더미에서 연꽃은 필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법구경 게송이 말해 준다.

 

 

Yathā sakāradhānasmi    야타 상카라다나스밍

ujjhitasmi mahāpathe     웃지따스밍 마하빠테

Paduma tattha jāyetha    빠두망 땃타 자예타

sucigandha manorama    수찌간당 마노라망.

 

Eva sakārabhūtesu       에왕 상카라부떼수

andhabhūte puthujjane      안다부떼 뿌툿자네

Atirocati paññāya          아띠로짜띠 빤냐야

Sammāsambuddhasāvako       삼마삼붇다사와꼬.

 

(빠알리어, Dhp58-59)

 

 

1.

사거리에 버려진

쓰레기 더미 위에서

그곳에 맑고 향기롭고 사랑스런

홍련화가 피어나듯.

 

눈멀고 쓰레기와 같은

일반사람 가운데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제자는

지혜로 밝게 빛난다.

 

(전재성님역, Dhp58-59)

 

 

2.

大道に捨てられた

塵芥(ちりあくた)の山堆(やまずみ)の中から

香しく麗しい蓮華が

生ずるように。

塵芥にも似た盲(めしい)た

凡夫のあいだにあって、

正しくめざめた人(ブッダ)の弟子は

智慧をもって輝く。

(中村元역, Dhp58-59)

 

 

3.

한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더미 속에서도

은은하게 향기를 뿜으며

연꽃이 피어오르듯이

 

버려진 쓰레기처럼

눈먼 중생들 속에 있으면서도

바르게 깨달은 사람의 제자는

지혜로써 찬란히 빛나리라

 

(법정스님역, Dhp58-59)

 

 

4.

如作田溝 여작전구

近于大道 근우대도

中生蓮花 중생연화

香潔可意 향결가의

 

有生死然 유생사연

凡夫處邊 범부처변

慧者樂出 혜자락출

爲佛弟子 위불제자

 

(한역, Dhp58-59)

 

 

5.

큰길가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맑은 향기로운 연꽃이 피어나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하듯이

 

교화되지 못하여 눈멀고 어리석은

쓰레기 같은 사람들 속에서

항상 맑은 지혜로써 영광스러이 빛나는 이들

이는 실로 최고 정각자의 성 제자들이다.

 

(거해스님역, Dhp58-59)

 

 

6.

As in a pile of rubbish

cast by the side of a highway

       a lotus might grow

       clean-smelling

       pleasing the heart,

so in the midst of the rubbish-like,

people run-of-the-mill & blind,

       there dazzles with discernment

       the disciple of the Rightly

       Self-Awakened one.

 

(Thanissaro Bhikkhu, Dhp58-59)

 

 

 

 

 

 

첫 번째 게송을 보면 사거리의 버려진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연꽃이 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지 말라는 영국 언론의 사설과는 다르다.

 

범부들 중에서도 성자가 출현할 수 있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맑고 향기롭고 사랑스런 홍련화가 피어난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연꽃은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서도 필 수 있음을 말한다. 맑고 청정한 곳에서만 연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송에서 쓰레기 더미라 하였을 때 이는 매마른 쓰레기장이 아니라 오물로 가득찬 물웅덩이와 같은 곳으로 볼 수 있다. 오물이 범벅이 된 진흙탕 물속에서도 매혹적인 연꽃이 피어 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두 번째 게송을 보면 범부들 중에서도 성자가 출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첫 번째 게송에서 쓰레기더미속에서 연꽃이 필 수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범부중에서 성자가 출현할 수 있음을 진흙탕속에서 피어난 홍련화로 비유한 것이다.

 

뿌툿자나(puthujjana: 범부)?

 

범부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뿌툿자나(puthujjana)’라 한다. 전재성님은 일반사람으로 번역하였다. 타닛사로빅쿠는 people’이라 하였다. 범부와 관련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Eva sakārabhūtesu       andhabhūte puthujjane : DhpA.I.445-446에 따르면, 일반사람은 범부 즉, 뿌툿자나를 말하는데, 쓰레기 더미처럼 많은 오염이 생겨난 자라는 뜻이다. 큰 길에 버려져 있는 쓰레기 더미와 같다. 역겹고 혐오스러워도 향기로운 연꽃이 생겨난다. 매력적이고 유쾌해서 왕이나 대신의 머리 위에 놓일 가치가 있다.

 

(법구경 694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표현 되어 있는 뿌툿자나에 대한 설명을 보면 매우 가혹함을 알 수 있다. 마치 사거리 진흙탕속에 버려진 쓰레기와 같은 존재가 범부라는 것이다. 오줌과 똥, 쓰레기로 범벅이 된 오물장에서 악취가 나듯이 범부 역시 악취가 나는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팔만사천대겁을 살아도

 

범부 또는 일반사람을 뜻하는 빠알리어 puthujjana는 어떤 뜻일까? 빠알리사전 PCED194를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이 정의 되어 있다.

 

 

puthujjana: lit.: 'one of the many folk', 'worldling', ordinary man, is any layman or monk who is still possessed of all the 10 fetters (sayojana, q.v.) binding to the round of rebirths, and therefore has not yet reached any of the 4 stages of holiness (s. ariya-puggala).

(puthujjana , 빠알리사전 PCED194)

 

 

사전에 따르면 뿌툿자나는 문자적으로 사람들, 속인, 일반사람의 의미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승려라고 하더라도 열 가지 족쇄에 매여 있는 자 역시 범부로 본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아가 있다는 유신견을 가진자, 즉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지 못한 자는 모두 범부라 본다는 것이다.

 

욕계천상은 물론 색계와 무색계의 천신들 역시 범부의 범주에 들어간다. 물론 색계 정거천에 사는 불환자들은 제외 된다. 팔만사천대겁을 사는 비상비비상처천에 사는 천신 역시 범부에 해당된다.

 

팔만사천대겁을 살아도 죽으면 윤회할 수밖에 없다. 또 머리를 깍고 가사를 걸치고 있다고 할지라도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지 못한 자는 모두 범부에 속한다. 그래서 윤회할 수밖에 없다.

 

열 가지 족쇄(sayojana)

 

범부의 특징은 열 가지 족쇄(sayojana)에 묶여 있는 자들이다. 열 가지 족쇄 또는 열 가지 장애는 다음과 같다.

 

 

(1) personality-belief (sakkāya-diṭṭhi, q.v.),

(2) sceptical doubt (vicikicchā q.v.),

(3) clinging to mere rules and ritual (sīlabbata-parāmāsa; s. upādāna),

(4) sensuous craving (kāma-rāga, 4.v.),

(5) ill-will (byāpāda),

(6) craving for fine-material existence (rūpa-rāga),

(7) craving for immaterial existence (arūpa-rāga),

(8) conceit (māna, q.v.),

(9) restlessness (uddhacca, q.v.),

(10) ignorance (avijjā, q.v.).

 

 

이와 같은 열 가지 족쇄에 묶여 있는 한 죽음과 재생이 반복되어 끊임 없이 윤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족쇄를 끊어 버리면 더 이상 범부가 아니다. 이를 사향사과의 아리야 뿍갈라(ariya-puggala)’라 한다.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제자(Sammāsambuddhasāvaka)

 

주석에 따르면 범부들은 악취나는 존재들이다. 오물장 속에서 살아 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탐욕이라는 오물, 성냄이라는 오물 등 온갖 오염원으로 살아 가는 자들이 범부들이다. 또 범부들은 눈먼 자들이라 하였다. 마치 맹인과도 같은 것이다.

 

악취나고 눈이 먼 자들이 일반사람들이다. 그럼에도 현자들이 출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마치 오물장속에서 피어나는 연꽃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눈멀고 쓰레기와 같은 일반사람 가운데(Eva sakārabhūtesu andhabhūte puthujjane)”라 한 것이다.

 

두 번째 게송에서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제자는 지혜로 밝게 빛난다 (Atirocati paññāya Sammāsambuddhasāvako)”라 하였다. 여기서 Sammāsambuddhasāvako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제자라 번역되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Sammāsambuddhasāvako : DhpA.I.445-446에 따르면, 쓰레기 같이 가치 없는 범부로 태어났더라도, 무지하고 지각없는 사람들 사이에 태어났더라도, 번뇌를 끊는 수행승은 그 자신의 통찰력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재난과 그것의 여읨의 이익을 보고, 집을 떠나 출가하여, 계행과 삼매와 지혜를 닦아 마침내 궁극적 해탈을 이룬다.

 

(법구경 695번 각주, 전재성님)

 

 

Sammāsambuddhasāvako에서 사와까(sāvaka)는 부처님의 제자라는 뜻이다. 거해스님은 최고 정각자의 성 제자들이라 하였다. 타닛사로빅쿠는 the disciple of the Rightly Self-Awakened one’라 하였다.

 

아리야 뿍갈라(ariya-puggala)

 

Sāvaka에 대하여 PCED194를 찾아 보면 ‘a hearer; a disciple’의 뜻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아리야사와까 (ariya-sāvaka)의 의미로 사용된다. 성스런 제자라는 뜻이다. 사향사과 또는 사쌍팔배의 성자를 말한다. 이를 아리야뿍갈라(ariya-puggala)’라고 한다. 사향사과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The one realizing the path of Stream-winning (Sotāpattimagga).

2. The one realizing the fruition of Stream-winning (Sotāpattiphala).

3. The one realizing the path of once-return (Sakadāgāmiphala).

4. The one realizing the fruition of once-return (Sakadāgāmiphala).

5. The one realizing the path of Non-return (Anāgāmimagga).

6. The one realizing the fruition of Non-return (Anāgāmiphala).

7. The one realizing the path of Holiness (Arahatta-magga).

8. The one realizing the fruition of Holiness (Arahatta-phala).

 

(ariya-puggala, PCED194)

 

 

부처님의 성스런 제자를 뜻하는 사와까에 여덟 가지 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영어설명을 보면 공통적으로 ‘The one realizing’이라 되어 있다.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가 인식론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깨달은 자(The one realizing)

 

초기불교에서는 존재론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인식론을 이야기 한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초전법륜경에서 나에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S56.11)”라는 구절일 것이다.

 

자신의 번뇌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청정한지는 오로지 자신만이 알 수 있다. 스스로 알게 되었을 때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스스로 선언하게 된다. 이것이 아라한선언이다.

 

아라한선언에 대하여 부처님은 앎과 봄이 생겨났다. (Ñāañca pana me dassana udapādi)”라 하였다. āa :)과 봄(dassana: )이 생겨났다는 것은 깨달았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는 인식론적 종교임에 틀림 없다.

 

똥구덩이서 사는 자들

 

깨달은 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범부들은 오물장속에서 사는 것과 다름 없다. 탐욕, 성냄 등 각종 오물이 범벅이 되어 살고 있지만 조금도 떠나려 하지 않는다. 마치 똥으로 사는 자들과 같다. 마치 똥이 좋아 똥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과 같다.

 

똥구덩이서 사는 자들이 있다. 그래서 어떤 똥벌레가 똥을 먹고 똥으로 배를 채우고 똥으로 충만하고도 그 앞에 큰 똥덩이가 남아 있다면, 그 똥벌레는 ‘나는 똥을 먹고 똥으로 배를 채우고 똥으로 충만하고도 그 앞에 큰 똥덩이가 남아 있다.’고 다른 똥벌레들을 무시한다. (S17.5)”라 하였다. 마치 똥구덩이 사는 구더기가 깨끗한 곳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기어이 똥구덩이로 향하는 것과 같다.

 

주석에 따르면 범부에 대하여 쓰레기 더미처럼 많은 오염이 생겨난 자그리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재난을 모르는 자라 하였다. 이와 같은 범부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있다. 그것은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가죽끈에 묶여 있는 경(S22.100)’에서 개의 비유에 대한 것이다.

 

어느 비구니 학인 스님으로부터 책을 받았는데

 

몇 주전 택배를 받았다. 어느 비구니 학인 스님이 비밀 댓글을 보내 와서 답장을하였다. 그런 인연으로 불교명상음악씨디를 택배로 발송하였다. 그러자 여러 가지 물건과 함께 귀중한 책을 하나 선물 받았다. 그 것은 파아옥 사야도가 지은 업과 윤회의 법칙이라는 책이다.

 

 

 

 

파아옥사야도의 업과 윤회의 법칙

 

 

두툼한 책의 첫 장에 차꼬경이 소개 되어 있었다. 책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듯한 상징적인 경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차꼬라는 말이 매우 생소하였다. 각주를 보니 속박된뜻이라 한다.

 

차꼬라 하였는데

 

각주에 따르면 차꼬는 말, 개 등의 움직임을 제한하기 위하여 채우는 나무조각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국어 사전을 찾아 보니 두 개의 긴 나무토막을 맞대고 그 사이에 구멍을 파서 죄인의 두 발목을 넣고 자물쇠를 채우게 한 옛 형구, ‘자꾸’의 방언라 되어 있다.

 

책에서 차꼬경이라 소개되어 있는 경은 가죽끈에 묶임 경(Gaddulabaddha sutta , S22.100)’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되어 있다. Gaddulabaddha‘Gaddula (leather strap) +baddha(trapped)’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Gaddulabaddha의 의미는가죽끈으로 묶어 놓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무로 만든 형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차꼬라는 말은 지나치다고 본다.

 

가죽끈에 묶여 있는 개는

 

개가 가죽끈에 묶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개는 원환에 의존하는 바보이다. 가죽끈은 견해와 같고 기둥은 자신의 몸과 같다. 가죽끈으로 묶인 개가 기둥을 따라 맴도는 것처럼 견해와 갈애로 자신의 몸을 묶은 범부는 자신의 몸을 따라 윤회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상윳따3, 427번 각주)”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목줄에 묶여 있는 개는 다름 아닌 범부를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죽끈에 묶여 행동반경이 제한 되어 있는 것이 범부의 삶이다. 그렇다면 가죽끈에 묶여 있는 개는 어떤 상태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죽끈에 묶인 개가 견고한 막대기나 기둥에 단단히 묶여, 그 막대기나 기둥에 감겨 따라 도는 것과 같다. 만약 그가 가면, 막대기나 기둥으로 가까이 가게 되고, 만약 그가 앉으면 막대기나 기둥으로 가까이 앉게 되고, 만약 그가 누우면 막대기나 기둥으로 가까이 눕게 된다.

 

(Dutiya gaddulabaddha sutta-가죽끈에 묶임의 경2, 상윳따니까야 S22:100, 전재성님역)

 

 

이 구절을 보면 기둥에 묶여 있는 개가 비참한 신세임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개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다.

 

개는 기둥을 중심으로 하여 개의 목에 매달려 있는 줄의 길이를 넘어 설 수 없다.범부도 개와 마찬가지 일 것이다. 범부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이라 여긴다면 목줄에 묶여 있는 것과 같다. 자신의 몸이 기둥이고, 자신의 몸과 마음이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유신견은 가죽끈과 같은 것이다.

 

윤회하는 뭇삶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 즉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을 때 이는 유신견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윤회하는 삶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회하는 범부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커다란 바다가 마르고 닳아서 존재하지 않을 지라도,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는 뭇삶에게 괴로움의 종식이 있다라고 나는 설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산의 제왕 수미산이 소모되고 파괴되어 존재하지 않을 지라도,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는 뭇삶에게 괴로움의 종식이 있다라고 나는 설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광활한 대지가 소모되고 파괴되어 존재하지 않을 지라도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는 뭇삶에게 괴로움의 종식이 있다라고 나는 설하지 않는다.

 

(Pathama gaddulabaddha sutta-가죽끈에 묶임의 경1, 상윳따니까야 S22:9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우주적 스케일로 윤회의 두려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존재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무명과 갈애가 남아 있는 한 한량없이 윤회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더구나 우주가 모두 불타 없어지더라도 결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실감나는 비유가 가죽 끈에 묶인 개이다.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부처님은 가죽끈에 묶여 있는 개나 유신견에 사로 잡혀 있는 범부나 다를 바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죽끈에 묶인 개가 견고한 막대기나 기둥에 단단히 묶여, 그 막대기나 기둥에 감겨 따라 돌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고귀한 님을 보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Pathama gaddulabaddha sutta-가죽끈에 묶임의 경1, 상윳따니까야 S22:99, 전재성님역)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여겼을 때 가죽 끈에 묶인 개의 신세와 다름 없음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오취온에 대한 것이다.

 

눈멀고 쓰레기와 같은 일반사람

 

오취온은 고성제와 같다. 부처님은 고성제에서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라고 말씀 하셨다.

 

오온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죽끈에 묶인 개의 신세와 같은 것이다. 그런 사람을 뿌툿자나, 즉 범부 또는 일반사람이라 한다. 그런데 범부는 사향사과의 성자 이외의 모든 존재가 이에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지 못하면, 지금 제아무리 놓은 지위에 있는 자라도 범부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그가 머리를 깍은 비구일지라도 유신견을 가지고 있으면 범부이다. 팔만사천대겁을 사는 비상비비상처의 존재도 유신견을 가지고 있으면 중생이다. 그런 범부에 대하여 법구경에서는 눈멀고 쓰레기와 같은 일반사람 (sakārabhūtesu andhabhūte puthujjane)”라 하였다.

 

오물장에서 핀 홍련화

 

부처님은 범부중에서도 성자가 출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마치 쓰레기 더미로 범벅이 되어 오물장과도 같은 진흙탕속에서 핀 홍련화와 같은 것이다.

 

 

사거리에 버려진

쓰레기 더미 위에서

그곳에 맑고 향기롭고 사랑스런

홍련화가 피어나듯. (Dhp58)

 

눈멀고 쓰레기와 같은

일반사람 가운데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제자는

지혜로 밝게 빛난다. (Dhp59)

 

 

2015-02-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