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짧은 쾌락 긴 고통, 불사음계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2. 30. 20:30

 

 

짧은 쾌락 긴 고통, 불사음계에 대하여

 

 

 

착하게 살자하지만

 

착하게만 산다고 하여 다 좋은 것일까? 착하기만 하고 지혜가 없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불교에 대하여 하나의 게송으로 표현 한다면 칠불통계게를 들 수 있다. 그런데 게송과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백거이가 도림선사를 찾아가 “불법의 대의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도림선사는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이라 하였다. 그러자 백거이는 “ ‘모든 죄악을 짓지 말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받들어 행하라.(dhp183)’라는 말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는 말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한다. 그러자 선사는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알 수 있으나 여든 살 먹은 노인도 행하기 어렵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게송은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한 것이라 한다.

 

세살 먹은 아이도 할 수 있는 말이 착하게 살자이다. 그러나 번역을 보면 착하고 건전한 것이라 하였다. 이 말은 꾸살라를 번역한 것이다. 단지 착하게 사는 것 보다 더 수승한 삶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착하고 지혜롭게 사는 것을 말한다. 법구경에 꾸살라와 관련하여 또 다른 게송이 있다.

 

 

Yathāpi puppharāsimhā      야타삐 뿝파라시마

Kayirā mālāgue bahū      까이라 말라구네 바후

eva jātena maccena       에왕 자떼나 맛쩨나

kattabba kusala bahu  깟땁방 꾸살랑 바훙.

(Dhp53)

 

 

꽃들의 더미에서 많고 다양한

꽃다발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태어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많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이룰 수 있으리.

(Dhp53, 전재성님역)

 

 

うずめて

華鬘(はなかざり)をつくるように、

としてまれまたぬべきであるならば、

くのいことをなせ。
(Dhp53, 中村元)

 

 

쌓아 올린 꽃무더기에서

많은 꽃다발을 만들 수 있듯이,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

(Dhp53, 법정스님역)

 

 

多集衆妙華 다집중묘화

結鬘爲步瑤 결만위보요

有情積善根 유정적선근

後世轉殊勝 후세전수승

(Dhp53, 한역)

 

 

쌓아올린 꽃무더기에서

많은 꽃다발을 만들 듯,

사람은 태어났을 때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

(Dhp53. 거해스님역)

 

 

Just as from a heap of flowers

many garland strands can be made,

       even so

one born & mortal

       should do

 — with what's born & is mortal —

       many a skillful thing.

(Dhp53, Thanissaro Bhikkhu)

 

 

 

 

 

꾸살라(kusala), 착하고 건전한 행위

 

첫 번째 구절에 puppharāsimhā라는 말이 있다. 이는 ‘a heap of flowers’의 뜻이다. puppharāsi‘puppha(flower) +rāsi(a heap)’의 의미이다. 꽃다발을 만들기 위하여 꽃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말한다. 꽃집에서 화환을 만들기 위하여 여러 종류의 꽃이 종류별로 쌓여 있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여러 종류의 꽃 더미에서 꽃대를 한쪽으로 처리해서 여러 다양한 꽃다발을 만들 수 있다.(DhpA.I.419)”라고 설명되어 있다.

 

유능한 꽃다발을 만들 수 있는 기술자는 꽃이 있어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꽃더미가 있어도 꽃다발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이고, 원석도 가공해야 보물이 될 수 있듯이 아무리 가르침이 잘 설해져 있어도 이를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태어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많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이룰 수 있으리.”라 한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각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eva jātena maccena kattabba kusala bahu: DhpA.I.419-420에 따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불리는 살아있는 존재에 의해서 많은 착하고 건전한 일이 행해져야 한다. 죽기 쉽기 때문에 많은 착하고 건전한 일은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꽃다발은 많은 양의 꽃을 말한다. 꽃다발을 만드는 자는 유능한 장인이다. 그는 아직 그것들을 많은 꽃다발을 만들지 않았다. 유능하지 않은 장인은 꽃 더미가 많던지 적든지 성공할 수가 없다. 꽃더미의 양이 많을 때, 영리하고 유능한 장인이라면, 많은 다양한 꽃다발을 만들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이 적고 재산이 많다면, 많은 착하고 건전한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믿음도 크고 재산도 많다면, 많은 착하고 건전한 일을 할 수가 있다. 그러한 사람으로 비싸카(Visakha)를 들 수 있다. 그녀와 관련하여 이러한 비유가 설해진 것이다.

 

(법구경 674번 각주, 전재성님)

 

 

여기서 착하고 건전한 일꾸살라(kusala)’를 번역한 것이다. 불교사전에 따르면 kusala‘kammically wholesome’이라 설명되어 있다. ‘profitable, salutary, morally good, (skillful)’의 뜻이 있다. 이는 공덕을 뜻하는 뿐냐 (puñña)보다는 더 수승한 말이다.

 

뿐냐와 꾸살라

 

보시 등으로 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한다. 이럴 때 공덕이라는 말이 뿐냐이다. 그러나 꾸살라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뿐냐와 꾸살라의 차이에 대하여 꾸살라와 아꾸살라, 뿐냐와 빠빠는 어떻게 다른가(2012-09-27)’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뿐냐와 꾸살의 차이에 대하여 간단히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내용

 

  

상태

뿐냐

(Puñña)

공덕행

(meritorious deeds)

중생의윤회(samsara)적 삶 속에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

약간의 선행을 하는 것,윤회(samsara)적 삶 속에서 이해

윤회의 감옥

꾸살라

(Kusala)

건전하고 지혜로운 행동

(wholesome,skillful)

부처나 아라한의 전체 행동,

깨달은 사람

빠빠는 없고 심지어 뿐냐도 없음.

절대 공덕을 짓지 않음

해탈

 

 

뿐냐의 경우 보시 등 공덕행을 하면 천상에 난다는 것인데 이는 윤회하는 삶속에서 이해 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Kusala행은 윤회를 넘어 해탈로 가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꾸살라행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전재성님은 꾸살라에 대하여 착하고 건전한 행위라고 길게 번역하였다. 나까무라하지메는 いこと(착한 것)’이라 하였다. 법정스님은 거해스님은 착한 일이라 하였다. 한역에서는 善根이라 하였고, 타닛사로빅쿠는 a skillful thing(능숙한 일)’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꾸살라행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빠알리사전 PCED194에서는 ‘It is defined in M. 9 as the 10 wholesome courses of action (s. kammapatha).’라 되어 있다. 맛지마니까야 9번 경에서 열가지로 정의 되어 있다는 뜻이다. 맛지마니까야 올바른 견해의 경(M9)에 꾸살라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Katamañcāvuso kusala ? Pāātipātā veramaī kusala, adinnādānā veramaī kusala, kāmesu micchācārā veramaī kusala, musāvādā veramaī kusala, pisuāvācā veramaī kusala, pharusāvācā veramaī kusala, samphappalāpā veramaī kusala, anabhijjhā kusala, abyāpādo kusala, sammādiṭṭhi kusala, ida vuccatāvuso kusala.

 

[싸리뿟따]

벗들이여, 어떠한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입니까? 벗들이여,

1)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고,

2)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고,

3)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고,

4)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고,

5) 이간질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고,

6) 욕지거리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고,

7) 꾸며대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고,

8) 탐욕이 없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고,

9) 분노가 없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고,

10) 바른 견해가 착하고 건전한 것들입니다.

이것들을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Sammādiṭṭhisutta- 올바른 견해의 경, 맛지마니까야 M9, 전재성님역)

 

 

내용을 보면 천수경에서 십악행과 반대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하나 차이가 있다면 열 번째이다. 꾸살라행 열 번째를 보면 바른 견해가 착하고 건전한 것들입니다(sammādiṭṭhi kusala)”라 하였다. 이는 천수경에서 치암중죄금일참회와 대비된다.

 

천수경에서 치암중죄금일참회(癡暗重罪今日懺悔)’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단지 어리석은 중죄를 오늘 참회합니다라 되어 있다. 여기서 어리석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삿된 견해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micchādiṭṭhi akusala)”라고 명확하게 규정 되어 있다.

 

삿된 견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삿된 견해는 올바른 견해와 반대 되는 것을 말한다. 초기경전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은 모두 삿된 견해에 속한다. 삿된 견해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보시에는 공덕이 없다. 제사의 공덕도 없다. 공양의 공덕도 없다. 선악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마음에서 흘연히 생겨나는 존재도 없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며 스스로 깨달아 가르치는 올바로 도달된 수행자 성직자는 세상에 없다.’라고 전도된 견해를 갖습니다.

 

장자들이여, 이것들이 정신적으로 세 가지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따라 잘못된 길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장자들이여, 이와 같이 가르침이 아닌 것을 따르고 바른 길이 아닌 것을 실천하는 것을 원인으로 어떤 뭇 삶들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다. (M41)”

 

 

경에 따르면 잘못된 견해는 보시에는 공덕이 없다등 으로 인과를 부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단멸론적 견해이다. 보시의 공덕이나 선악의 과보를 인정하지 않았을 때 인생은 원타임이 될 것이다. 그 결과 허무주의적 단멸론적 견해로 귀결 된다. 그래서 열 가지 십선행 중에서 열 번째 항목에 대하여 삿된 견해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꾸살라행에는 뿌리

 

그런데 경에 따르면 열가지 꾸살라행에는 뿌리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는 수행승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Katamañcāvuso kusalamūla ? Alobho kusalamūla, adoso kusalamūla, amoho kusalamūla, ida vuccatāvuso kusalamūla.

 

벗들이여, 어떠한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의 뿌리입니까? 벗들이여, 탐욕이 없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의 뿌리이고, 성냄이 없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의 뿌리이고,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의 뿌리입니다. 이것들을 착하고 건전한 것의 뿌리라고 합니다.

 

(Sammādiṭṭhisutta- 올바른 견해의 경, 맛지마니까야 M9, 전재성님역)

 

 

착하고 건전한 행위(kusala)의 뿌리는 무탐, 무진, 무치임을 알 수 있다. 반면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akusala)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꾸살라행은 탐진치를 소멸해 가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단지 윤회의 과정에서 보시 등으로 공덕을 쌓는 공덕행, 즉 뿐냐(puñña) 보다 더 수승한 것이 꾸살라임을 알 수 있다.

 

불음주계에 대하여

 

공덕행이라 번역되는 뿐냐는 윤회하는 삶속에서 선행을 하는 것을 말하고, 착하고 건전한행위라 번역되는 꾸살라는 윤회하는 삶을 끝내기 위한 해탈을 지향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열 가지 착하고 건전한행위인 십선행과 오계를 비교해 보면 하나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음주에 대한 것이다.

 

오계에서는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에 취하는 것을 삼갑니다.”라는 불음주계가 있다. 그러나 십선행에서는 불음주에 관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렇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음주를 하면 불살생, 불투도, 불망어, 불사음 네 가지 계를 어기는 요인이 된다. 이런 이유로 십선계에 불음주계가 포함 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 

 

출가자는 재가자와 달리 술을 마실 기회도 없고 마실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음주 하는 것이 왜 오계를 어기는 근본적인 이유가 뙬까? 이에 대하여 술취한 자와 닭의 비유를 들 수 있다.

 

어떤 남자가 대낮부터 술을 마셨다. 이는 불음주계를 어긴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집 마당에 돌아 다니는 닭을 보았다. 자신의 닭이 아님에도 닭이 닭고기로 보여 그 자리에서 잡아 먹고 말았다. 이것으로 불살생계를 어겼다. 닭을 잡아 먹고 포만감에 누워 있는데 이웃집 여인이 나타나서 혹시 우리집 닭을 보지 않았나요?”라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술취한 자는 아니요, 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불망어죄를 어겼다. 그런데 술취한 자는 여인의 모습이 아름다워 순간적으로 욕정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웃집 여인을 강제로 성폭행하고 말았다. 이로서 불사음계를 어긴 것이다.

 

어느 재가 불자가 대낮부터 취하도록 마신 결과 오계를 모두 어겼다. 이는 술로 인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재가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오계를 준수해야 하는데 반드시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에 취하는 것을 삼갑니다.”라는 불음주계가 들어 갔다고 보여진다.

 

재가자의 오계와 출가자의 십선계

 

십선행에서는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에 취하는 것을 삼간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열 가지로 확장되어 불살생, 불투도, 불망어, 불사음 뿐만 아니라 이간질, 욕지거리, 꾸며 대는 것, 탐욕, 분노, 사견이 추가 되어 있다. 특히 탐욕과 분노를 삼가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탐진치를 소멸하는 삶을 말한다. 다름 아닌 출세간의 삶의 방식이다. 탐진치를 소멸로 해탈하여 궁극적으로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십선행, 즉 꾸살라행은 탐진치의 소멸을 목표로 하는 수행자의 삶의 방식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오계를 준수하며 보시 등으로 공덕행을 함에 따라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윤회하는 삶의 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다음 표와 같이 정리 할 수 있다.

  

 

 

  

십선계

오계

1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것

있음

있음

2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는 것

있음

있음

3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삼가는 것

있음

있음

4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삼가는 것

있음

있음

5

이간질하는 것을 삼가는 것

있음

-

6

욕지거리하는 것을 삼가는 것

있음

-

7

꾸며대는 것을 삼가는 것

있음

-

8

탐욕이 없는 것

있음

-

9

분노가 없는 것

있음

-

10

바른 견해

있음

-

11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에 취하는 것을 삼가는 것

-

있음

 

출가/재가

주로 출가자

주로 재가자

 

출세간/세간

주로 출세간의 삶

주로 세간의 삶

 

꾸살라행/공덕행

해탈을 지향하는착하고 건전하고 지혜로운 행위

천상을 지향하는

공덕행

 

해탈/윤회

해탈을 지향하는 삶

윤회하는 삶

 

 

이와 같은 분류방식이 반드시 맞지 않을 수 있다. 십선계에 불음주계가 없다고 하여 술을 마셔도 된다거나 오계에 욕지거리 하는 것이 없다고 하여 욕을 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오해이다. 다만 공덕행과 꾸살라행을 설명하기 위하여 편의상 나눈 것일 뿐이다.

 

부처님은 불자가 되려는 재가신자에게 마하나마여, 재가신자는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말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지 말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곡주나 과일주 등 취기있는 것에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재가신자는 계행을 갖춥니다. (S55.37)”라고 한 것으로 보아 오계준수가 주로 재가자에 해당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오계는 재가자뿐만 아니라 출가자 모두에게도 적용된다. 그런데 출가자에게 특히 적용되는 것이 열 가지 착하고 건전한 행위이다. 살라마을의 바라문장자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신 고따마여, 어떠한 원인 어떠한 조건으로 어떠한 뭇 삶들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까? 세존이신 고따마여, 어떠한 원인 어떠한 조건으로 어떠한 뭇 삶들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납니까? (M41)”라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촌장이여, 이 세상에 고귀한 제자는..”라 하여 법문 하였는데, 이는 열가지 착하고 건전한 행위에 대한 법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계는 윤회하는 삶속에서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며 공덕행을 하는 재가불자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행위의 두려움과 윤회의 두려움을 알아 출가한 출가제자 들에게는 해탈과 열반의 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출세간적 삶의 방식인 십선행을 말씀 하셨다. 십선행에는 오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소멸에 대한 것이 실려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분류 한다고 해서 출가와 재가의 가르침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재가 모두에게 적용된다. 다만 근기에 따라 차제설법을 한 것이다.

 

불사음계에 대하여

 

오계와 십선행에서 공통적으로 들어 가 있는 것은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이다. 이 중 불사음이 있다. 맛지마니까야 살라 마을 장자들에 대한 경에 따르면 불사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Kāmesu micchācārī kho pana hoti, yā tā māturakkhitā piturakkhitā mātāpiturakkhitā5 bhāturakkhitā bhaginirakkhitā ñātirakkhitā gottarakkhitā dhammarakkhitā6 sassāmikā saparidaṇḍā, antamaso mālāguaparikkhittāpi, tathārūpāsu cāritta āpajjitā hoti. Eva kho gahapatayo tividha kāyena adhammacariyā visamacariyā hoti.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떠나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삼갑니다. 어머니의 보호를 받고 있고, 아버지의 보호를 받고 있고, 부모의 보호를 받고 있고, 형제의 보호를 받고 있고, 자매의 보호를 받고 있고, 친족의 보호를 받고 있거나, 이미 혼인했거나, 주인이 있거나, 법의 보호를 받거나, 심지어 약혼의 표시로 꽃다발을 썼거나 한 여인과 관계하지 않습니다.

 

(Sāleyyakasutta-쌀라 마을 장자들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41, 전재성님역)

 

 

신체적으로 짓는 잘못된 행위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 그리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 중 세 번째 항 불사음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불사음계와 관련하여 메일을 받았는데

 

불사음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메일을 받았다.

 

 

사랑을 나눔에 있어 잘못된 행위를 하는데 부모형제자매와 친족의 보호를 받고 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약혼녀와 관계한다는 내용의 구절이 있습니다. 제가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일수도 있으나 그 주해의 내용에서 보호받는 것이 사랑을 나눔에 있어서 잘못된 행위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인가요, 아니면 보호를 받고 남의 여자를 범하는 불륜에 대한 것이 사랑을 나눔에 있어서 잘못된 행위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인가요?

(B법우님)

 

 

음행을 했을 때 누군가의 원한을 사게 되는 음행을 하지 말라는,  즉 사회 도덕적인 차원에서 음행을 하지 말라고 언급합니다. 즉 누구의 원한을 사지 않는 정당한 음행은 된다는 뜻으로만 봐야 하는 건지? 아니면 불사음 '삿된 음행'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 이러한 뜻에는 변태적인 성행위와 같은 부적절한 방법도 포함하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S법우님)

 

 

맛지마니까야 쌀라 마을 장자들에 대한 경(M41)에서는 음행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명시 되어 있다. 재가자라면 자신의 아내 이외의 여인과 관계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경을 보면 보호를 받는 여인과 관계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보호를 받지 않는 여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해도 되는 것일까? 또 경에서 여인만 언급되어 있다고 해서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해도 되는 것일 것일까?

 

법의 보호를 받는 것에 대하여

 

경에서 법의 보호를 받거나(saparidaṇḍā)’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 되어 있다.

 

 

saparidaṇḍā: MN.III.330에 따르면, ‘이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여자에게 가는 자에게 이 같은 처벌이 있다.’고 이와 같이 마을이나 집이나 거리에 관련하여 처벌이 설정된 것을 법의 보호를 받는 자(saparidaṇḍā)’라고 한다.

 

(맛지마니까야 725번 각주, 전재성님)

 

 

경에서는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어머니의 보호 등 열 가지가 열거 되어 있다. 열 가지 보호를 받는 여인에 대하여 삿된 행위를 하면 잘못이라는 것이다.

 

법구경에서는 남의 아내를 범하는 것(Dhp246)”에 대하여 자신의 뿌리를 파낸다.(Dhp247)”라 하였다.  여기서 남의 아내를 범하는 것에 대하여 보호자가 있거나 다른 사람의 보호를 받고 있는 여자를 범하는 것을 말한다.(DhpA.III.356)”라 되어 있다.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열 가지 보호 받는 여인이 열거 되어 있다. 이는 부모 또는법으로 보호 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법으로 보호 받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사람에 대하여 잘못된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보호 받지 못하는 매춘부라 하여 음행을 하면 어떻게 될까?

 

여색에 미치고, 매춘부와 놀아나고

 

보호 받는 여인에 대하여 잘못된 행위를 하였을 때 자신의 뿌리를 파낸다라 하였는데, 이는 파멸을 뜻한다. 또 법으로 보호를 받지 않는 매춘부와의 관계를 가졌다 하더라도 역시 파멸에 이를 것이라 하였다. 이는 숫따니빠따에서 잘 표현 되어 있다.

 

 

“여색에 미치고 술에 중독되고

도박에 빠져있어,

버는 것 마다 없애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stn106)

 

“자기 아내로 만족하지 않고,

매춘부와 놀아나고,

남의 아내와 어울린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stn108)

 

“젊은 시절을 지난 남자가

띰바루 열매 같은 가슴의 젊은 여인을 유인하여

그녀를 질투하는 일로 잠 못 이룬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stn110)

 

 

 여색에 미친다는 것은 여자에게 매혹되어 가진 것을 모두 주고 점점 여자에게 사로잡히는 것을 말한다. 주석에서는 매춘부나 남의 아내와 놀아 나는 자에 대하여 똥구덩이에 빠진 자와 같은 과보를 받을 것이라 하였다. 어느 간통자가 업보가 성숙하여 오랜 세월, 오랜 백년의 세월, 오랜 천년의 세월, 오랜 십만년의 세월을 지옥에 떨어져 그 업의 남은 과보에 의해 이처럼 스스로 초래한 자기 자신의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라 하였다. 이처럼 매춘부를 찾고 남의 아내를 탐하는 것에 대하여 파멸의 문으로 들어 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돈이 많은 노인이 있다. 그 노인은 애욕이 많아 젊은 첩을 두었다. 그러나 첩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할 때 어떻게 될까? 더구나 자신을 무시하고 다른 남자와 가까이 할 때 어떻게 될까? 아마 질투심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여색에 미친자, 남의 아내를 넘보는 자, 젊은 처로 인하여 질투하는 자 모두 파멸할 것이라 하였다. 

 

짧은 쾌락 긴 고통

 

이 세상에 법으로 보호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보호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법적으로 또는 폭력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하면 어떻게 될까? 거기에서 오는 쾌락은 어떤 것일까?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죄악을 얻어 나쁜 곳에 떨어진다.

두려워하는 남자가 겁에 질린 여자에게 얻는 쾌락은 적다.

왕 또한 무거운 벌을 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남의 아내를 범하지 말지니. (Dhp310)

 

 

게송에서 두 번째 구절 두려워하는 남자가 겁에 질린 여자에게 얻는 쾌락은 적다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남자가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 남자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여자로부터 얻는 쾌락은 적다.(DhpA.III.482)”라 하였다.

 

순간적인 욕정에 사로잡혀 여인의 뒤를 쫒아가 성폭행 하지만 얻는 쾌락은 적을것이다. 그 대신 긴 고통이 뒤따를 것이다매춘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짧은 순간의 쾌락을 맛 보지만 남는 것은 긴 고통일 것이다. 마치 연애는 짧고 생활은 길다라는 말이 있듯이, ‘짧은 쾌락 긴 고통인 것이다.  

 

착하고 건전하고 지혜롭게

 

흔히 착하게 살자라고 말한다. 초등학생도 아는 말이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 하였을 때 착하게 사는 사람을 말한다. 이처럼 착하게 산다는 것은 아름답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적으로 보았을 때 착하고 사는 것 플러스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지혜롭게사는 것이다. 그래서 착하고 지혜롭게살아야 한다. 그 말이 꾸살라(kusala)’이다.

 

꾸살라에 대하여 착하고 건전한 행위라 번역한다. 이는 열 가지 선업을 말한다. 신체적으로는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이고, 언어적으로는 거짓말, 이간질, 욕지거리 꾸며대는 것을 삼가는 것이다. 정신적으로는 탐욕, 분노, 사견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열 가지 행위를 하면 해탈에 이를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착하게 사는 것이 불교의 목적은 아니다. 착하게 살되 건전하고 지혜롭게 사는 것이다.

 

 

 

 

2014-12-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