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재가자 주제에 시건방진 모습을”미디어붓다에 글을 올리고 나서(1)

담마다사 이병욱 2015. 3. 10. 09:55

 

 

재가자 주제에 시건방진 모습을미디어붓다에 글을 올리고 나서(1)

 

 

 

 

 

 

 

미디어붓다에 글을 올리고 있는데

 

미디어붓다에 글을 올리고 있다. 매주 두 편의 글을 선별하여 올린다. 블로그에 작성된 글 중에서 반응이 좋은 글을 골라서 다시 한 번 살펴 본 후에 이미지와 함께 메일로 발송하면 된다.

 

미디어붓다에 칼럼을 쓴지 이제 한달이 다 되어 간다. 그 동안 일곱 차례 올린 글에서 몇 가지 반응을 보게 되었다. 칭찬하고 격려하는 글도 있지만 악의적인 비난이나 비방의 글도 보였기 때문이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다. 타 칼럼니스트와 달리 아무런 백그라운드도 없기 때문에 시기와 질투에 따른 비난의 글을 예상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블로그에서 발생하였다. 마치 스토커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어느 해외불자의 블로그를 통해서이다.

 

해외불자는 우리나라에서 인터넷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면서 글을 쓴 이로 잘 알려져 있다. 사실 초기에 글을 보면서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태도가 바뀌었다.

 

해외불자는 처음에 격려도 해주고 잘못도 바로 잡아 주는 등 배려를 하였다. 그러나 행복론에 대한 논쟁이 있고 난 후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마치 하이에나처럼 헐뜯기에 바쁜 것 같다. 마치 광팬이 한순간에 손바닥 뒤집듯이 스토커로 변신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더구나 어느 카페에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갖가지 모욕적인 용어를 써 가며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런 연유로 한동안 본 블로그의 댓글을 폐쇄 하기도 하였다.

 

그 해외불자불로거는 그 카페를 떠났다. 그것도 자신이 작성한 모든 글을 지우고 떠난 것이다. 아마 이카페 저카페 다니면서 돌아다니며 떠나기를 거듭한 것으로 알고 있다.

 

재가자 주제에 시건방진 모습을

 

해외불자 S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미디어붓다에 실린 글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의 글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연꽃의 글을 비판함 (2015-03-05)”라는 글을 보았다. 본격적인 비판글이라 볼 수 있다.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우리들은 오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뿐더러 그리고 재가자의 조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채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불교관이나 교리 수행등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못할 이유는 없으나 ...

재가자 주제에 시건방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선불교의 선입견도 문제이지만 ... 초기불교 한다고 하는 재가자들이 너무 시건방진 경우를 많이 봅니다. 불교 tv 에도 몇몇 법사라는 분들이 나오는 것을 봤는데 솔직히 불교방송에서 초기불교에 대한 무지와 그리고 시간이나 떼우는 식은 아닌지 생각해 봤습니다.

초기경전에 나오는 붓다의 가르침을 비추어 한국의 대승불교를 보면 수행승중 단 한명도 비판의 화살로 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손가락질을 하는 재가자는 과연 얼마나 오계를 지키며 얼마나 재가자의 조건을 충족하고 있는지 되돌아 보라는 것입니다.

오계 조차도 제대로 지키면서 살아가기 어려운게 중생들의 삶입니다.
그까짓 머리로 하는 관념의 불교는 쓰레기보다 못한 것입니다.

한국에도 테라와다 종단이 정식 불교법인으로 등록이 되어 있고 최고 어른도 계십니다. 초기불교를 지양하는 사찰도 이제는 몇군데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굳이 초기불교의 잣대로 한국불교에 대해서 운운하기 전에 그런 사찰에 가서 공양도 올리고 오른쪽 무릎을 꿇고 절도 해보시고 남방가사 입으신 분들의 발등에 입을 맞추어 경배를 드려 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재가자라고 자신의 교리나 수행등등에 대한 의견을 발표하고 주장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글로 번역된 빠알리 경전 집에다 모셔놓고 그것 앵무새처럼 되풀이 한다고 공덕이 생기지 않습니다. 초기불교권의 수행승들이나 초기불교를 공부하신 학자분들의 글들을 반면교사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목장의 울타리에 소의 숫자를 늘릴 생각은 안하고 남의 목장의 소의 숫자나 세고 있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도록 노력하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S)

 

 

해외불자 S의 글에 따르면 재가자 주제에 시건방지게라 하였다. 초기불교한답시고 재가자가 너무 시건방지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글을 쓴다는 것이다. 주제파악을 하라는 말과 같다. 한번도 스리랑카 등 현지에 와서 테라와다 불교에 대하여 체험해 보지 않은 자가 관념적으로만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면서 오계도 지키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자애와 연민으로

 

이와 같은 S의 글에 어느 불교인이 댓글로서 반박하였다. 편의상 J라 한다. 그런데 J님의 글을 읽어 보면 내공을 느낄 수 있다. 수행은 물론 교학에도 매우 밝은 선지식이라 보여진다.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글을 읽어 보면 인품을 알 수 있다. 그런 J님의 글 중에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연꽃님이라는 분과 일면식도 그 분의 사이트에서 단 하나의 댓글도 써본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여러 댓글을 적게 된 것은 연꽃님의 글이 불법을 부정하기 위한 작의적인 불법안티로 적은 글이 아님을 잘 느끼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오류........그것을 지적해주면 됩니다......자애로......연민으로........
그것의 선업은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고............이것역시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모두 다 최종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뿐입니다.

공식적인 언론에다 고배율의 현미경으로 세균을 잡아내는 것 같은 글을 새벽 명상후 봤습니다
행복감이 지나쳐서 들뜸으로 글을 적으니 순 오타와 반대로의 글을 적어서 간신히 정신차려서 정정으로 봉합을 했지만.....

연꽃님한테 실례가 되는 말이지만, 국민학생   때리는 심성 안좋은 대학생이란 생각이 들엇습니다. 어린학생의 순수한 마음을 이해하기 보다는, 대견하게 여기고 , 격려해주기 보다는, 이것은 잘못된 일이니, 넌 맞아야 돼......라는 식의.....

그런식의 경안이라면 무슨 유익함이 자신이나 타인에게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도 들고.......

차라리 경안보다, 사과의 맛을 한잎이라도 직접 먹어보는 수행을 통해 법안을 여는 것에 이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도 들고..
(J)

 

 

개인적으로 연꽃님은 그러한 경전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오류와 확장해석은 좋은마음으로 지적해주면 되는것이겠지요.

왜냐면 우리 모두는 다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경안이 있는 자와, 경안이 없는 자...현실에서는 대단한것처럼 보이지만, 법안을 가진 혜안있는 사람들이 볼때는, 결국 오십보 백보일뿐입니다.....

현실에서는 179 180의 키가 1센티미터에 의해서 엄청 큰 차이겠지만요.....
법의 관점에서는 다 무상// 무아...입니다.......삼계의 모든 존재, 범천의 신까지도 다   떵이라는 악취가 나는 오물덩어리다라는게 성스러운 율의 입장이라 합니다.

결국 각자의 지은 업대로 가는 것이 불교도의 현실적인 냉정함,냉철함 (?) 이겟지요

연꽃님은 긍정과 부정의 양 저울을 계량화하면, 긍정적인 역할이 훨씬 더 많다고 여깁니다..

지켜보면서........

(J)

 

 

요즘은 인터넷시대이다. 올린 글은 누구나 볼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다. 그런 글에 댓글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댓글을 올릴 때도 매우 신중해야 한다. 아무리 익명으로 소통하는 인터넷시대라 하더라도 글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기 때문이다.

 

S님에 대한 J님의 두 편의 댓글을 보았다. S님의 일방적인 비난에 대하여 일면식도 없는 님이 이렇게 방어를 해주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게 생각한다.

 

J님에 따르면 자애와 연민으로 보아 달라고 한다. 잘못이 있고 오류가 있을 때 이를 침소봉대하기 보다 잘 가르쳐준다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지적해 주는 것이 좋다고 한다.

 

상대방을 알려면

 

이때 까지만 해도 J님은 S님에게 상당한 신뢰를 보낸다. 그러나 이는 S님에 대하여 몰랐기 때문으로 본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사람은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도 오랫동안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대왕이여, 그들이 계행을 지키는지는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같이 살아보아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S3.11)”라 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아는 방법은 계행을 지키는 지는 1) 함께 살아 보아야(Savāsena) 알 수 있고, 정직한지는 2)서로 대화를 통해 왕래를 해 보아야(Savohārena) 알 수 있고, 견고한지는 3)재난을 만났을 때(Āpadāsu) 알 수 있고, 지혜가 있는지는 4) 논의를 통해서(Sākacachāya)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No

구 분

아는 방법

1

계행

sīla

함께 살아 보아야

Savāsena

2

정직

soceyya

서로 대화를 통해 왕래를 해 보아야

Savohārena

3

견고

thāma

재난을 만났을 때

Āpadāsu

4

지혜

paññā

논의를 통해서

Sākacachāya

 

 

 

보관할 가치가 있는 글

 

J님은 이어서 실참수행에 기반한 교학적 가르침도 길게 설명하였다. 보관할 가치가 있어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붓다는 아는 자, 깨달은 자 입니다. 그래서 붓다 입니다.
우리는 흔히 깨달음 병에 도취한 자 들을 한국불교에서도   많이 봅니다.
그들은 붓다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알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붓다의 깨달음은 사성제입니다....
즉 사성제를 깨달은   자 가 붓다 입니다.

경전에도 있는 바와 같이.
고성제는..........고에 대해서 알라 입니다.......생로병사등.
집성제는.......... 집착을 버려라........
멸성제는...........열반에 도달해라..
도성제는..........8정도를 닦아라.......입니다.

관념불교는   단지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것이 부처다 라고 몸으로도 수행하는듯해도, 붓다의 깨달음이 무엇인가? 붓다는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는가?에 조차도 알지 못하면서 깨달음병에 도취한 자들이 수천년의 긴 시간동안 있었습니다.

그 폐해들의 문제점들이 썩어 문드러져서     현대의 물질적 풍요의 시대와 더불어, 축적하는 중들의 문제들이 하나 둘씩 나오는 것에 불과 합니다.

고성제의 고통을 알라..........태어남이 괴로움이다.........이것이 대승의 보살도로 다시 태어나자고 하는 것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세세생생 보살로 태어나, 보살행을 한다. 즉 삶, 태어남이 고통이라는 것 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고성제에서 고를 알아라.....라고 하지만, 고를 알라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러한 고리는 집성제,멸성제, 도성제에 대한 무지로 연결되고, 결국 가서는 붓다의 깨달음은 사성제를 깨달은 것이다......라는 것조차 모르는 중들이 됩니다.
이것역시 관념의 불교입니다. 이것이 1600년 역사의 전통을 갖고 있다는 한국불교의 자화상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것은 자가 충전해서 자가 발전으로 더욱 더 성장해 나갑니다.
대표적인 것이, 불법승 삼보에 대한, 승보에 대한 관점입니다.
예전이야 몰랐다고 치더라도, 지금은 알때가 되었지 않습니까?....

승보........48배의 성자...이것은 출가자 뿐만 아니라, 세속에서의 성자역시도   포함되는 참사람들의 모임임도 부정합니다..
이러한 주장들 역시,1600년 전통이라는,   출가 전문집단에서 하는, 관념의 불교일뿐입니다.

더 확장해석하면, 삼보의 불보, 법보 조차도, 무엇이 붓다인지, 무엇이 담마인지도 사실은 잘 모르는 것입니다........승보를 모르는 것 처럼......
그래서 이부처 저부처 만들어 놓고,   보살들 끌어들여 천도제 제사지내고...
무엇이 담마인지 모르니, 마음을 실체화 시키면서, 법보라고 합니다.

불법승, 삼보 전부가 다 관념불교로 이루어진 것, 단지 몸으로 수행을 하지만,
결국 그들은 마음을 실체화시키는 작업을 심도 있게 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소위 고승이라는 자들의 법문을 보면,그러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이야 조심하는 편이지요, 일반 재가자들이 깨어있으니, 함부로 진아를 찾자이야기 하면 바로 반박하는 글이 나오니, 진아,참나가, 깨달음을 이룬 상태이지 실체화된 자아의 개념이 아니다...그것이 무아의 상태다...라고 우스운 핑계를 되지요.

붓다의 깨달음은 사성제를 깨달은 것이다를 모르는 선사들이 자기식의 깨달음으로 대자유인의 경지니 뭐니 하던 것들이 진아,참나란 표현에 신중해지는 것을 봅니다.

연기,인과는 집성제입니다......4성제의 틀안에 있는.......집착을 만드는 갈애를 요소로해서, 무명이란 사성제를 모르는 무지의 근거로 인해 돌고도는 윤회의 폭류속에 갇혀 버리는 것.......
결국   조건생하고 조건멸한다라는 연기 역시 사성제의 큰 틀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8정도라는 안정된 방법으로 통해서, 멸성제가 붓다의 궁극적인 가르침의 최고 정상입니다...
인과,연기를 알고 윤회와 업을 알면, 그작업은 단지 현생만으로 국한될수 없습니다.
삶이 이어지는 한, 끝없이 작업해야할 가장 큰 목표입니다.

실론섬님이 주장하시는, 재가자로서의 연꽃님의 관념식 불교가 선사들의 마음을 실체화시키고, 진아 참나법문에 있어서 신중하게 만드는, 붓다의 깨달음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조금의 고뇌에 찬 사유도 할수 있게 한 결과를 낳게 한, 재가자에게 그러한 정법을 널리 알리게 한   인과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라 여깁니다.

만약에   실론섬님의 주장대로 연꽃님이 관념식 불교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1600년의 불교의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 불교역시   대표적인 관념식 불교에서 벗어나지 못햇다고 생각합니다.권승이란 표현도 아까운, 쓰레기 잡승들의 현실적 욕구충족을 위한 "축적"의 하나의 수단이 되어버린것이   일상화 된것이 요즘의 모습아닐까요?.

대승의 옷을 입고, 남방불교에 가서 공부하고 수행하고 오시는 스님들의 글과 법문에서 두갈래가 있다고 느낍니다....
하나는 대승이란 자신의 그림자를 벗겨내기 힘들다는 것........이러한 분들이 거의 대부분이라 개인적으로 여깁니다.

다른 한 부분은 비록 소수이지만, 정법의 향기에 비로소 도취할수 있었던 전생의 선업을 가지신 분들.......

외적인 구별은 실론섬님이 주장하는 바대로, 계율수지에 있습니다.
계율을 잘 지키는 분 들, 그럴라고 노력하는 분들은 점점 더 정법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신 것이라 느낍니다..

(J)

 

 

J님의 글을 읽어 보면 모든 것이 명쾌 하다.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이는 글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실참수행에 근거하여 교학적으로 확인 되었기에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다. J님의 글을 읽어 보면 이전에 경전을 근거로 하여 올린 글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경전의 틀을 벗어 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속)

 

 

2015-03-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