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재가자도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 미디어붓다에 글을 올리고(3)

담마다사 이병욱 2015. 3. 10. 17:43

 

 

재가자도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 미디어붓다에 글을 올리고(3)

 

 

 

 

 

 

숨어 있는 진주

 

스마트폰으로 인하여 가상공간과 현실공간의 구분이 없어진 시대를 살고 있다. 손안에 있는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글을 접할 수 있고 사진이나 동영상 등의 자료를 공유할 수 있다. 불교와 관련된 콘텐츠도 마찬가지이다. 검색 등을 통하여 양질의 콘텐츠를 접하였을 때 눈이 확 트여 지는 것 같다. 숨어 있는 진주를 발견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소위 고수들이 있다. 현실에서는 만나기 힘들지만 사이버상에서 우연하게 만날 수도 있다. 올려진 글은 공유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공이 느껴지는 글을 접하였을 때 글을 읽는 맛이 난다. 그런 글은 몇 번이고 읽어 본다. 마치 음식을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듯이 내공이 느껴지는 고수들의 글을 읽어 보면 읽는 맛이 난다.

 

비록 댓글형식일지라도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근거하여, 그것도 실참수행의 경험이 녹아 들어간 글을 발견하면 진흙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듯 하다. 스리랑카에 산다는 S불자와의 댓글 논쟁으로 알게 된 J님의 글이 그것이다.

 

재가자도 수행을 해야

 

사이버상에서 많이 배우고 있는 J님의 글 중에 S님이 올린 글에 대한 반론 성격의 글이 있다. 김나미박사가 불교평론에 올린 깨달음과 열반의 상관관계라는 글을 S님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이에 대하여 J님은 S님의 불교관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처음에는 매우 긍정적이었으나 실체를 알고 나서 부터 점차 비판으로 가더니 이제 잘못된 불교관에 대하여 따끔한 회초리를 드는 것 같다. S님의 불교관에 대하여 J님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보살의 견해에   동조하는 실론섬님의 견해는 크게 이야기 하면, 정견이 바로 서지 않은 것이다. 재가자의 수행을 왜 가벼운 명상정도로 하고 란 말을 하게된 이유를 알것도 같다.

실수행에 대해서 매우 무지하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단 오분이라도 십분이라도 명상을 꾸준히 하는 습관이 들은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할수가 없다.
말로만 중도가 8정도라는 강력한 실천체계라고 글쓰기하면 무엇하는가?
앙꼬 없는 진빵같은 밋밋하고 공허한 넋두리에 불과할뿐이다.

아마 여기에 실론섬님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연꽃님도 들어와 볼것이다.
그외에 사람들도 가볍게 볼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재가자중에서 남모르게 수행에 습관이 붙은 사람들도 제법 있다고 알고 있다.
물론 그들역시 경전도 읽으면서 수행에 습관이 붙어서, 같이 사는 가족들이 예전과 다르게 많이 변했다라는 이야기도 듣는 다고 한다......

잘되면 고뜨 라부.......성자의 호적에 올릴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사람들도 있는것 같다. 그러한 이 시대에 수행을 등한시 한 말씀의 종교만으로 기독교처럼 가능할까?.
의문이다.

붓다의 깨달음은 다른것이 아니다....
간단하다....
4
성제의 깨달음이다...........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붓다는 위빠사나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삼명으로 깨달은 것이다...
무엇을 깨달았는가?   4성제를 깨달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누진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번뇌의 소멸........번뇌의 종식................완전한 행복...........
결국 닙바나, 열반에 도착했다란 이야기 다...........
연기만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인과.연기를 아는것만으로 붓다의 4성제의 깨달음에 도달하는것은 아니다.
연기.인과란 사성제를 깨닫기 위한   집성제라는 부분, 즉 그럼으로 집착을 버려라........갈애가 종식시켜라...............그러므로 윤회의 고리가 끊겨질수 있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실수행에 있어서 다 쉰소리일뿐이다.

결국 수행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도성제, 8정도라는 깨달음을 얻기위한 안전한 방법인 8가지를 닦는 것이다....
(J)

 

 

J님에 따르면 재가자도 수행을 해야 함을 강조한다. 수행하는 것 없이 이론적으로 만 아는 것은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그러면서 깨달음에 대하여 사성제가 깨달음이다라 하였다. 사성제를 실천할 수 있는 수단이 팔정도이지만 부처님은 삼명중의 하나인 누진통으로 부처님이 깨달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대승보살행과 실천불교

 

J님의 문제 제기에 대하여 S님은 자신만의 불교관을 제시한다. 그것은 대승보살행에 대한 것이다. 초기불교주의자로 알고 있으나 S님의 글을 보면 보살사상을 대단히 강조한다. S님의 연이은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님의 말씀대로 붓다의 깨달음이 사성제입니다.
그런데 사성제보다 그 근본적인 깨달음이 그분을 정등각자로 이끌었습니다.
자설경(Udana)에는 붓다께서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후 법열을 만끽하며 7일동안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연기"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성제도 결국 연기법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Udana 에 보시면 보리수라는 소제목하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초기불교로 나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번에도 거론을 하였지만 "초기불교 = 참선과 또다른 사띠등의 수행법" 이라는 묘한 방법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붓다의 자비심이나 보살행을 배울 생각은 안하고 대승불교의 참선과 또다른 수행법을 배우는 범주에만 머무는 것은 실로 안타깝습니다.

초기불자로 자처하는 분들치고 연기법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연기법이란 실생활에서는 실천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가? 대답은 우리들은 연기적 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나홀로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일체의 존재현상이 상호 연기적 관계임을 말하는 것이 불교가 아니던가요? 개인의 몸과 마음이 다른 영역과 온전히 분리될 수 있는가요? 사념처라 하여 존재 현상을 살피는 위빠사나 수행 또한 크게 보면 모든 존재들의 상관성과 변화성을 잘 살피자는 것이 아니던가요?

그런 점에서 근자의 한국에서의 초기불교의 방향과 그 내용이 대개 심리치료나 마음수양, 그리고 명상으로 흐르는 것은 대단히 안타깝습니다. 연기법의 실천행은 간데도 없고 그 연기론의 적용대상과 범주를 개인의 몸과 마음 문제에 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S)

 

 

초기불교란 자비심과 보살행입니다. 실천불교입니다. 스스로 개인 마음 닦는것이 아닙니다. 기억이 희미합니다만 중국의 마조스님은 제자들이 마음 닦는다고 앉아 있을 때 마다 그 옆에서 기왓장을 들고와서 돌로 갈았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기왓장을 돌로 갈아봤자 거울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의 여러 수행법중에서 그 어떤 깨달음보다도 가장 큰 깨달음을 가져오는 수행법이 "자비행 수행법"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닦아서가 아니라 자비행의 실천으로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띠 사마다 위파사나 모두다 좋은 수행법입니다. 하지만 이것만 강조한다면 대승불교의 화두참구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지요? 집착을 버리는 것이 불교인데 사띠니 하면서 집착하거나 화두에 집착하거나 50 100보 아닌가요?

혼자 앉아서 명상하는 것도 좋지만, 불우시설에 가서 봉사활동하는 것도 마음을 한결 행복하게 하는 수행법입니다.

팔정도가 수행법입니다. 그럼 그런 팔정도란 무엇 무엇이 있는가는 "스승님들의 가르침"에 올려 놓았습니다. 무엇이 팔정도의 여덟 덕목인지 하나하나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올바른 생활도 팔정도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팔정도는 수행승에게만 국한되는게 아닙니다. 팔정도는 중생이라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진리입니다.

(S)

 

 

연달아 실려 있는 S님의 글을 보면 보살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대하여 부정하는 듯한 내용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재가자들이 앉아서 수행하는 것 보다 불우시설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

 

S님의 불교관은 대승보살사상에 입각하여 생활불교라는 독특한 개인적인 견해 말한다. 이와 같은 불교관에 대하여 J님은 다음과 같이 장문으로 답한다.

 

 

오해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37보리분법들 모두는 깨달음이 아니다...
4
성제를 깨닫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방법들이란, 조도품이라는 것이다.
37
보리분법안에 8정도가 있는 것이다......
8
정도의 완성이 붓다의 깨달음은 아니다.
4
성제를 깨닫게하는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안전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말 역시,   쉰밥이고 쉰소리이다........

중도가 8정도의 강력한 실천체계다라고 한 실론섬님의 글을 보면, 미안한 말이지만, 수행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 아니다. 8정도 수행을 실제 잘 모른다는 것이다.....
경전을 읽으면서도, 보살이야기 하는 것 보니, 정견에서 부터 헤메고 있다.......
이론과 지식만으로 붓다의 깨달음을 도달했다면, 불교에 관심있던 아인슈타인이 단지 물리학자로 남았을까? 우스개로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8
정도 수행은 아는 것 처럼, 정견으로 부터 시작한다.....
정견이란 사성제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한 방법이 경전을 듣고, 선우들과 법담을 나누고............다 정견을 갖추련는
시도이다......

정견에서..........4성제의 바른 이해를 아는 것으로 해서, 견해에서 바른 사유, 즉 올바르게 생각하게 된다...........

8
정도를 계,,혜의 3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8정도의 순서를 보면, ,,정으로 되어있다.
8
정도의 혜는 붓다의 깨달음의 지혜에 속하지만, 그 범위는 작은 지혜 일뿐이다.
사성제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는 것이다....
4
성제를 깨달은 지혜와 동급이란 소리가 아니다.....
4
성제를 통해 깨달은 지혜의 범위는 8정도의 정견의 혜학을 포용하고 매우 넓다.
초보불자들은   8정도의 정견,정사유가 혜학이라고 해서, 이것을 헸깔려한다.

8
정도의 완성이 곧 깨달음은 아니라고 했다..... 깨달음을 얻는데 도와주는 역활을 하는 방법,길이라고 했다..........

다쌍가라고 있다.....10가지가 있다..........
그런데 이런것 역시 실수행에서 쉰밥이다.....쉰소리이다.
지나치면 이론학자들의 문자타령이나 하게 된다.............

8
정도의 수행은 정견으로 시작해서..............정정으로 끝난다.........
올바른 8정도의 수행의 완성은 정정으로 끝난다........

예전에 실수행을 많이 했음을 짐작하게 하던 분이었는데, 선정을 갖추면, 정견 정사유가 혜학이 생길것이다라고 하는 글들을 봤다.

8
정도의 정학과 혜학에 대해서, 8정도의 혜학을, 즉 정견과 정사유를 완벽한 지혜와 약간은 혼동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켜봤다.

이 분은 현생에 일단 수다원획득이 목표라고 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개인적으로 수행을 더 한 이후에, 남방에 가서 비쿠가 되겠다라는 글과 남방이면 어디를 가겠다하는 구체적인 글들을 멀리서 지켜봤다.
선업이 많이 쌓은 분처럼 느껴지니, 그의 선업에 의해서 선택되어질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비교적 나이가 젊은 분 같았는데 참 대단한 분이었다. 멀리서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그의 삶의 여정에서 원하던 바 그 이상을 얻기를   바랬다..

이것도 쉰소리이다.....

마치 중생이 아프면 보살이 아프다는 소리와 같은 쉰소리에 쉰밥이다.

대승은 붓다를 가볍게 본다. 아라한들을 가볍게 보다....
가소로운 짓을 하는 것도 모르고, 자신의 악업을 쌓는것도 모르면서,
보살행이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보살수행으로 보살이 되서, 윤회의 수레바퀴를 끊어버릴수 있는 계기를 가질지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세세생생 보살도 행하면서 윤회속에서 .............
수기도 안 받은 자들이 보살,보디사트바라고 헛소리 하면서, 악업을 짓는다
자신뿐만 아니라, 남에게 조차.
., ...........삼보자체를 다 부정하는 훼불, 훼법,훼승 하는 것을 옹호하는 실론섬님의 경안이란 것이 실수행없는 사상누각의 이론과 교리에 함몰되어버린 자 들 중의 하나란 생각이 든다.

중생이 아프면, 보살이 아프다........?.
보살이 아픈것은 갈애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갈애는 고사하고, 감각적 욕망속에 허우적 되기때문에   윤회속의 비참한 존재이기 대문이다.......?

아주 웃긴소리를 천연덕스럽게 한다.
아라한뿐만이 아니라, 수다원 성자.......작은 수다원조차도 되지못하는 자들이 아라한 위에 십지 보살을 만들어놓고, 모래탑을 짓고, 모래로 밥을 만들라고 하는 격이다.

(J)

 

 

글을 쓴지 여러 해 되었다. 경전을 근거로 글쓰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작성해 놓은 글을 보면 얼마나 경전에 충실한 것인지 알 수 있다. J님의 글을 보면 초기경전에서의 가르침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수행경험이 적은 자들을 위하여 체계적으로 수행방법을 알려 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마치 수행지도를 받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리고 몰랐던 사항이나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 정리가 되는 것 같다.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표현

 

J님의 반박문에 대하여 S님은 자신의 불교관에 대하여 다시 정리하여 설명한다. 이는 다름 아닌 생활불교에 대한 것이다. S님이 생각하는 생활불교는 어떤 것일 것일까?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제가 대승불교에 대한 글을 쓰는 의도를 굉장히 왜곡하시는 것 같습니다. ^^
그리고 글의 내용이 제가 주장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소용돌이를 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대승불교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만 초기불교를 대승(큰 탈것)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 불교의 한 줄기인 "대승불교"가 근본불교와 비교하여 옳으니 그르니 하는게 아닙니다. 님처럼 생각한다면 대승불교에 대해서는 더이상 법담을 나눌 부분이 없는 듯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붓다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으신 것은 "연기" 입니다. 그건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연기법을 이야기했고 팔정도를 이야기했고 자비와 보살행을 이야기 했으며 그리고 관념불교가 아니라 인과법에 충실한 실천불교를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저는 머리깎고 출가한 수행승도 아니고 전문학자도 아닙니다. 그러니 님이 말하는 몸과 마음만 들여다보는 그런 사띠수행이라면 하지 않습니다. 그건 대승불교의 화두참선이나 오십보 백보이니까요. 대신에 저는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고 가능하면 "죽일 놈, 짐승만도 못한 놈, 사기꾼.." 소리를 죽을 때 듣지 않을려고 나름대로 노력합니다. 그게 수행이라면 저도 수행을 하는 것이겠지요.

근본불교 = 자비와 보살행입니다. 45년 붓다의 생애가 그것을 웅변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자비와 보살행인가? 우리들은 연기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비심을 마음속에서만 낸다고 행으로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을 것입니다. 자비나 보살행은 끊임없는 노력과 연습 그리고 부단한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팔정도 수행의 일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띠수행보다 천배 만배 어려운 수행입니다.

또한 님에게는 아라한이 왜 대승불교인들에게 폄훼되고 보살상을 만들어 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봤자 열린 마인드가 아니라서 님의 번뇌만 늘어날 것 같습니다. 힌두교가 바다를 보고 바다라고 하면 외설이고, 불교가 바다를 보고 바다라고 하면 진리는 아닙니다. 그냥 바다는 바다라는 진리일 뿐입니다. 누가 말을 하든간에...

각자 생각하는 대로 불교를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자업자득 인과응보이니까요.

(S)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일단 표현을 하면 그 사람의 내면이 드러난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말이나 글은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표현 하는 것이 된다.

 

누군가 자신의 견해를 자신만의 표현법을 사용하여 말하였을 때 그 표현방법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 말을 잘 하지 못해 단답형으로 말하거나, 글을 쓰지 못하여 단답형으로 글을 썼을 경우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침묵을 지키는 자에 대하여 도인아니면 돌인이라 하였다. 도인에게는 침묵이 일수 있지만, 표현하는데 한계를 갖는 이가 침묵한다면 그 침묵은 금이 아니라 이라 하는 것이다.

 

말이나 글로 표현된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S님의 글을 보면 연기, 깨달음 등을 이야기 하지만 결국 보살행, 현실행복론, 생활불교론으로 귀결된다. 더구나 근본불교 = 자비와 보살행입니다라 한다. 이런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경전을 폭넓게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초기경전에 대하여 그다지 신뢰하지 않아서 발생되는 문제라 본다.

 

경전을 대하는 태도

 

초기경전에서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고 신비한 내용이 나올 때 이를 무시한다면 경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놓칠 수 있다. 이럴 경우 단지 그러려니하고 받아 들이면 그만이다. 그런 현상에 대한 진위 여부를 따져 경전의 조작여부를 논한다면 결국 경전에 대한 의심과 불신만 더 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성자가 되는 조건 세 가지 중에 의심에 대한 것이 있다. 가르침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는 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한다.

 

전승된 가르침은 일단 믿고 보아야 한다. 경전에 대한 진위 여부를 따지기 전에 믿는 것부터 시작된다. 물론 깔라마경에서 합리적 의심에 대한 내용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가르침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 외도에 대한 것이라 본다. 만일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한다면 자등명 법등명이 성립하지 않는다.

 

경전에 대한 진위 여부를 따지기 전에 경전을 일단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 어느 정도 지혜가 성숙하였을 때 진위 여부를 따져도 늦지 않다. 그렇다고 하여 7년 임신과 같은 것을 사실로 믿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러려니하며 받아 들이면 그뿐이다. 그 대신 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주목한다. 그리고 다른 경들과 어떻게 엮어져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사띠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S님의 불교관에 대하여 J님은 어떻게 반론하였을까? 매우 쉽고 누구나 이해 하기 쉬운 문체로, 때로는 재미 나게 표현 하였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장문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위에 이야기도 다 쉰소리일뿐이다...찬밥도 아니고,먹을수 없는, 먹으면 병에 걸리는 쉰밥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붓다의 8정도수행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결국 8정도수행을 실수행으로 좁혀가면, 정념과 정정이 남는다........
사띠와 사마디가 남는다.......

남방에서 수행의 부류가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마디를 약하게 하고, 사띠를 강조하는 것
다른 하나는 사마디를 강조해서 자나,즉 선정으로 들어가는 것..

8
정도의 실수행을 구체적으로 줄여보면, 사띠와 사마디 두개이다.....

사띠란 것은 불법수행의 기초이고 토대이다.......
결국 거의 다 가,   이 사띠의 강력한 완성은 사마디를 자나로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 이견이 있다.........

그러나 사마디를 약하게 하고 상대적으로 사띠를 강화하려는 수행은 붓다생존시의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삼명.육신통, 상수멸.....이런것에 도달하기 아마 힘들것이다.......

그것이 순수위빠사나 수행일것이다.....찰나삼매,찰나사마디를 이용한 위빠사나수행..

그 방법이든, 저 방법이든, 결국 다 사띠가 중요한 것이다...

재가자들은 사띠를 하는 것에 즐거움, 즉 기쁨과 행복감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한 연구를 해야 한다. 어떻게 사띠를 하는것에 재미를 붙여서 조금이라도 더 사띠를 할수 있을까? 하는 사유와 고찰을 연구해봐야 한다....
그것에 재미를 붙여서 습관을 들이는 방법을   심도있게 연구해봐야 한다.......

사띠란 결국 지켜보기이다....
무엇을 지켜보는 가? 결국 대상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다..
어떻해 지켜봐야 하는가?.........자신의 몸과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신구의.....
즉 행동,, 생각등을 영화를 보듯이   다른 사람 입장에서 지켜봐야 한다

바른사띠란...............결국 이 대상을 지켜보는 것을 행위자와 관찰자로 나누는 것이다......
행위자가 하는 것을 관찰자가 지켜보는 것이다.
행위하는 것은 다 오온이다..........단지 나는 지켜보는 자로 만족하자..

행동과 말과 생각 즉 신, ,의 는 다 오온에서 행하는 것이다.........
관찰자역시 오온중의 하나이지만, 순수한 마음이라고 해두자........

이 일상생활에서의 사띠가 발전되면 좌선과 행선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의 현상을 지켜보게 해야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다..

행위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라는 관점으로 지켜보는 것이다.....
지켜보는 자가 행위하는 자에 함몰되서, 영화속 주인공이 되어 지켜보는 관객이 되지 않고 영화속 주인공처럼 같이 눈물을 흘리고 기뻐하게 된다.......
관찰자가 행위자가 되는 순간이 올때마다 사띠하고 있음을 놓쳐군 하면서 다시 처음의 그 위치로 다시 관찰자를 둔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등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관찰자가 서서히 분리하게 된다....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관찰자를 몸과마음인 오온에서 분리해 놓고 본다.
관찰자가 행위자에 함몰되서 감시 관찰하는것을 망각하고 같이 슬프고 웃고 그런다
그럴때 놓아버리기를 하는 것이다. 난 관찰자이지, 행위자가 아닌데, 내가 슬프고 아플필요가 무엇인가?.행위자가 아픈것이지, 관찰자인 내가 아픈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지혜들이 생겨나게된다......

이것이 집성제를 이용한 놓아버리기.즉 집착을 놓아버려라라는 집성제의 초기의 실천이다.....

내가 아픈것이 아니다........난 관찰자이다, 관찰하는 내가 아플이유가 없다....
행위자가 아픈 것이다........행위자가 아픈데, 관찰자가 같이 따라가서 아픈것은 멍청한 짓이다........이런 작은 지혜들이 생기게 되면서, 관찰자가 행위자로부터 자연적으로 분리하게 됨이 시작한다....

그것이 놓아버리기, 방하착의 연습이고, 거창하게 이야기 하면, 사성제의 집착을 버려라......라는 갈애의 연기를 죽여가는 초기의 과정이다...........

그러나 자아의식,에고의식은 아라한에 가서 끊어진다...
아나함에서는 감각적 욕망이 사라졌다고 해서, 미세한 자아의식,에고의식이 남는것이다. 우열의식이라는 아만.존재하려는 미세한 욕구등이 남아 있는 것이다.

행위자.......이놈이 행동, , 생각등을 관찰자가 지켜보는것에서 의도없이도 관찰자가 분리되어 행위자를 지켜보게 될때, 때로는 아무 의도없이 행동하고 있는 자기를
빤히 지켜보는 자가 있다고 느껴질때...........사띠가 강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는 자아의식,에고의식은 행위자를 지켜보면서 관찰자가 행위자에 함몰되어, 웃고 울고 아프고 하게 만든다......
그러나 지켜보기를 통해서 이 관찰자에게 작은 지혜가 싹이 트게 된다.
원하던 지혜가 아니고, 의도하지 않는 지혜가 관찰자에게서 싹이 터서, 행위자에 함몰되는 관찰자를 제어하게 된다.........
이것이 사띠와 삼빠잔나는 결국 함께 간다라는 의미이다.

일상생활에서 사띠의 훈련, 연습은 매우 중요하다. 하면 한만큼 드러나게 낸다.

이것이 구체적인 행선이나 좌선으로 연결 시켜본다.

좌선을 한다......
자신을 지켜본다.........난 관찰자.................다리에 통증이 생긴다..아프다.
아픈것은 행위자..........
관찰자가 행위자에 함몰되면 아픈 다리르 풀게 한다........
그러나 작은 지혜가 생겨서, 아픈것은 내 몸과 마음, 즉 오온이지, 즉 행위하는놈들이지 관찰자가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지혜의 일어남으로 다리푸는것을 막게 한다.....

.
이러한 것이 책을 통해 얻은 지식과 구별되는 수행으로서 얻은 지혜의   차이인것이다.

우리들의 정신은 수,,,식으로 되있다.........문제를 일으키는 마음은 거의 다가 행온이다.....즉 움직이게 하는 것들은 거의 다 가 행온이다.........

이것의 대표적인 것이 오개이다..다섯가지 장애...........감각적욕망,악의 나태와 혼침, 들뜸과 후회, 회의적 의심................


사띠의 일차 목적은 고요함이다.........
고요해지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움직이지 않기 위해서 행위자와 관찰자가 분리되어야 한다.
관찰자가 행위자에게 함몰되어 몸이나 마음이나 움직이게 하려는 충동이 생길때
이것을   멈추게 해주는 역활을 하는 것이 작은 지혜이다..........

즉 사띠와 삼빠잔나는 같이 간다......

몸과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요소인 이 다섯가지는 다 행위자인것이다.........
관찰자가 지켜보면서, 움직임이 멈춰지고, 대표적인 다섯가지 행위자인 오개가 마음속에 사라질때가   선정에 드는 것이다.................

이때 행위자는 없다............오직 관찰자만 있다...........
의지,의도가 2선정에서 사라진다고 한다....

관찰자의 대상은 지복이다..........................나중에 평온,평정으로 연결된다........

마음에서 움직이게 하는 요소들, 즉 행위자는 사라져 버렸다..
오직 관찰자가 지복이란 심일경성의 지경에 이르렀다.
마음의 힘은 강력하게 된다...

마음을 속일순 없다.....
자신의 마음이 깨긋하지 못하면, 결코 선정에 들어갈수 없다..
설사 스킬로 선정에 들어가더라도, 금방 튕겨나온다.
이것이 마음의 본질적인 힘이다...........
마음을 자신이 속일수 없다..........

이것의 완성이 8정도의 색계 4선이라는 정정의 완성이다.........

이것이   8정도의 정견과 정 사유를 더 강하게 보충시키는 역활을 해준다....


그러다가 최종목적지에서는 마지막 붙잡고 있는 관찰자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것을 열반이라고 한다..........그것을 알수없다고 하고 체험한다고 한다..

결국 마음이 번뇌에서 사라짐, 마음이 족쇄에서 풀려남을 안다. 마음이 자유로움을 안다.....마음이 집착하지 않는다.......갈애가 생길 건덕지 조차 없다.........
(J)

 

 

글을 읽어 보면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사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사띠란 결국 지켜 보기라 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지켜 보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처에 가면 늘 듣는 말이 있다. 그런데 행위자와 관찰자로 나누어 지켜 보는 것이라 하였다. 수행처에서 마음을 보는 수행, 즉 심념처에 대한 것이다. 마음이 마음을 보는 수행이라 하였는데 위 글에서는 매우 알기 쉽게 설명하였다. 그래서 마치 수행지침서처럼 보인다. 이런 내용은 인터넷은 물론 수행처에서도 접하기 힘들다.

 

J님의 이어지는 글을 보면 S님에 대한 실망을 엿볼 수 있다. 일련의 게시물을 죽 지켜 보았을 때 처음에는 S님에 대하여 경안이 있는 것으로 보았으나 날이 갈수록, 새로운 글이 올라 올수록 견해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경안이 없음으로 결론이 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매우 긴 글이지만 연속으로 이어지는 네 개의 글에서 알 수 있다.

 

 

1) 아라한의 권위를 부정하고 참칭하고 모독하는 자들

 

 

연기를 통해서 안것이지, 연기만을 깨달았다고 해서 사성제를 깨달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소리 역시 실수행에서 쉰소리이고 쉰밥이다....

결국 재가자의 수행은 행위자와 관찰자의 분리의 힘을 키우는 것에 있다......

행위자가 아픈 것이지, 관찰자인 내가 아픈 것이 아니다...........
이것이 지속되면 행위자역시 일어나고 사라지고............사라지고.........붕괴되고........
이것이 무상의 기초에 대한 앎과 봄,즉 지견이 지혜로서 생기는 것이다.......

자 내가 아프다.......다리가 아프다.............이것이 에고의식,자아의식이다.........
나라고 여겨지는 다리가 아픈것이지, 진짜 나인 관찰자가 아플이유가 없다........
이 관찰자가 행위자인 아픈다리에 함몰되지 않고 계속 지켜보면, 그 행위자역시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게 된다.............이러면서 행위자에 대해서 집착함을 버리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8정도 수행에서 4성제중의 하나인 집성제의 실천수행의 시작인 것이다.
버려라.......놓아버려라...........방하착해라............

이러한 것들 역시 자기가 자기것으로 만들지 않은면 다 공염불이고 ,다 쉰소리,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일뿐이다......


아픈것이 관찰자인 내가 아니고, 오온이라는 행위자일뿐인데.........
결국 지켜보기를 통해서 자신의 행위자자체도 일어나고 사라지는데.............아픔이 어디 있는가?

결국 행위자도 일어나고 사라지고 붕괴된다............
관찰자역시 나중에 사라지게 된다.......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라는 보살...........
아프다라는 보살은 행위자가 아픈 거냐? 관찰자가 아픈거냐?.

중생이 아픈것은 중생이란 행위자가 아픈거냐? 중생이란 관찰자가 아픈거냐?.

그런것을 가르쳐 주는것이 진정한 보디 사트바, 가짜 보살아닌, 진짜 보살이었던 석가모니불이 하신 것이다.......

남을 도와줄때도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을 밥을 사줄수 있고, 돈을 도와줄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이 그런것에 길들여지게 되어 생계에 대한 일을 등한시 하게 하면,이사람한테 도와준다는 것이 이사람으로 악업을 짓게 유도할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오계를 지킨다.......
하나를 어겼다. 마음이 괴롭다. 집착함때문에 괴롭다.
나는 안돼.........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낟........
이것은 자신에 악의이다..........
마음역시도 조건생 조건멸이다.....................
사띠함을 놓쳐서 그랫으니 괴로운 마음도 순간인 것이다. 놓아버리고 다시 새로운 선한 마음을 갖는것이 올바른 것이다.....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중에서...........
자애수행은 선천적으로 자애심,동정심이 많은 사람들한테 쉽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일반인들한테는 이것이 어렵다...........
자애수행의 기본은 자신에 대한 자애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에 대한 악의가 생각외로 깊이 다 박혀있다.

이것이 사띠를 통해서 어느정도 고요한 마음상태를 유지한 상태에서 자애수행을 하면 자애수행이 강력하게 될수 있다.......

중생이 아프면 보살이 아프다?........
그 보살은 어디가 아픈가?........

관찰자 아픈가? 행위자가 아픈가?......
관찰이나 하고 있는 가?.
관찰자의 분리는 고사하고, 행위자가 아플 것이다..........

이런 자들이 아라한의 권위를 부정하고 참칭하고 모독한다.........

결국 불 법 승.......삼보를      부정하고 모독하는 것이다.

회교도인 자도, 불교명상을 배우면서, 회교도를 버리고 불교도가 되었다는 소리도 있다....
실수행없는 지혜는 지식일뿐이다.
재가자의 명상은 사띠수행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긴글 적었는데..........
더이상 여기에 적을일이 없을 듯 하네요.......
굿럭.........
(J)

 

 

2) “완전한 착각이었네요

 

 

글들을 이어적다가 님의 글을 늦게 읽었습니다. 더 해봐야 쓸데없는 이야기 같지만, 더 할말도 없고 해서 한자 더 적어봅니다.

붓다가 본 연기와 님이 본 연기는 같을수가 없습니다.
님이 연기를 잘 알아서 현싫속에서 그렇게 실천 하고 있는데 왜 깨달음에는 근접하지 못하는 지요...
붓다의 깨달음은 사성제입니다.연기는 중요한 역활을 하겠지요. 그러니 집성제로서 한기둥을 맡고 있는것입니다.그러나 집성제는 버려라입니다.
도성제는 닦아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8정도 수행을 통해서 얻은 연기로 사성제를 깨달은 것입니다. 님이 생각하는 그런 연기로 사성제의 깨달음에 근접할수가 없습니다.


님이 연기를 핑계로 현실속에서의 치고박고 하는 생활에서의 자비는 기독교에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구원 받으세요 라는 이름으로 충분히 넘치게 잘 하고 있습니다..


님은 몸과 마음만 보는 사띠수행을 안하겠다고 했습니다.
중도가 8정도의 강력한 실천수행이다라는 님의 말에서 내가 오해를 한듯합니다.
님이 수행도 하면서 경전공부도 하셧으니 저런 말을 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네요. ^^

중도가 8정도의 강력한 실천체계이지, 사상이 아니다라는 말은 립써비스용이었나 보네요.........

내 글에서 쉰밥, 쉰소리라고 굳이 말한 것은 구체적인 실수행에 들어가는 방법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사띠 수행은 하든지, 안 하든지는 님의 취사선택입니다만.
사띠수행은 당연히   몸과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우주를 보고, 쓸데없는 왜 조주는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는가? 라는 대상을 갖고 하는것이 아닌, 붓다가 이야기 하신 몸과 마음, 즉 오온, 정신과물질을 보는 것입니다.
연기를 이야기 하면서 정신과 물질에 대해서, 명색에 대해서 수행을 하는 것은 당연한것입니다.....
님은 연기 인과라고 이야기 하는데, 님이 이야기 하는것은 붓다가 말씀하신 연기의 인과의 근원적인 이야기 가 아닙니다. 왜 연기를 이야기 한줄 아십니가?.

현실속에서 치고 박고 열심히 살면서 보살도행하라고 해서 붓다가 연기를 이야기 한줄 아십니까?............

무명을 이야기 하면서, 존재의 족쇄를 무는 감옥의 철장을   부수라고, 연기를 이야기 한겁니다. 연기가 님이 생각하는 그런 작은 의미의 인과가 아닙니다.......


내가 이야기 햇습니다. 붓다의 깨달음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고.......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결국 무명에 대한 인과는 세세생생 보살도 행한다고 주장하면서 윤회하는 겁니다..
지옥도 가보고, 4악처에서도 가보고............
단지 현생에서 지금 인간이라고 보살도 행한다고 하는 겁니다.
붓다는 보살도 행한다고 해서, 보살수행한다고해서 사악처 면한다는 이야기 안했습니다.............

8
정도 수행에서 님이 제기한 정어 정업, 정명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님과 나는 그러한 점을 보는 데에 있어서 서로 관점이 틀리지요.......

님 말대로 경전은스님들 위주로 첨삭이 된것입니다.
당연하지요. 붓다는 재가자가 아닙니다......
출가하신분입니다. 붓다의 예리함을 깊이 생각안해보셨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8정도에 정어 정업 정명을 남긴 것은, 재가자도 수행해야 한다는 묵언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출가자의 계목이 227계인데, 몬 정명이란, 바른 직업이 필요합니까?.

8
정도의 계학의 내용들을 보면, 재가자에게도 수행을 하라는 의미도 추론됩니다.
왜 그런 추론은 못하시는 지 이해가 안갑니다.

님이 중요시 여기는 보살...보디사트파가 붓다에게 언젠가 붓다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은 자라는것을 님은 잘 아시면서, 희안한 이야기를 합니다.
초기불교 배우신분이 결국가서는 대승의 힌두논사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격입니다.

바른말, 바른 행동, 바른 직업 이런 내용은 유일신교에는 없습니까?.
님이 중생속에서 서로 얽혀서 남도 나도 다 얽혀 있다라는 것은 인드라망이야기 입니다. 연기와 인드라망을 혼동하지 마세요..인드라망 이야기역시 힌두논사들 이야기입니다....
붓다가 말씀한 진정한 연기,인과가 아닙니다.

출가승을 왜 존경해야 하는 지 아십니까?.....연기,인과에서 남들보다 더 절박하게 윤회의 위험성을 보기에 오욕락을 버리고 출가해서 그 얻은 도를 타인들에게 베풀어 줄수 있기 때문입니다...

님은 윤회의 위험성을 절박하게 보지도 못하시는 분이 ,연기,인과를   중요시하게 여기면서 현실생활에서의 열심히 서로 돕고 살아가는게 최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이제는 8정도의 실수행의 기초가 되는 사띠 수행도 안한다고 하고요.
사띠의 대상인 자신의 오온,   몸과 마음의 대상도 부정하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님이 현실생활할때 조차도, 사띠가 부족하면, 결국 탐진치의 극단으로 갑니다.
그래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겁니다..
요새 공기총사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경전상으로만 8정도를 공부한 사람중에서도 그런 공기총 사건으로 살인을 저지를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히 미래에 있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띠수행을 안하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님의 선택사항이지, 내가 강요할 건덕지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지식으로 만든 논리, 지식으로 꾸역꾸역 우겨논 뇌의 작용보다, 실수행으로 얻은 지혜의 힘과는 비교할수 없습니다....
또 실수행에서 현실생활에서도 당연히 유용하게 쓰일수 있는 것이구요......

정어 정업 정사유만 하니, 결국 님은   사띠도 정정진도 사마디도 안하고, 결국 8정도의 시작점인 정견과 정사유도 보살에 대한 현실생활에 만족하는 듯 한데, 8정도가 중도의 강력한 실천체계란 말을 할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희안한 일이다라고 느낍니다

난 물론 님이 연꽃님보다 수준이 높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띠수행을   골방에 화두수행만 하는 자들에 비교해서 그런 사띠수행은 안하겠다고 하니, 내가 보기에는 오십보 백보입니다...


님이 주장하는 그 희안한 연기, 인과논리로 현실생활에서 선행을 베풀고 열심히 치고 받으면서 열심히 현실 생활하는것에 만족하고, 몸과 마음을 보는 사띠수행이라면 안하겠다라는 말은 전혀 연기와 인과를 모르는 무지한 생각이라는 겁니다.

연기,인과만 가지고 어떻게 사성제를 깨닫나요?.
집성제의 원리.........집착을 버려라............집착을 만드는 갈애를 버려라......여기서   연기의 고리를 끊으라고 한겁니다.

또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삼명중의 두번째 신통력인 천안통으로   중생들의 생멸지, 즉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를 안 것입니다....여기에는 자신에 대한 집착을 갖는 것이 고의 원인이 된다라는 연기와 인과가 적용된겁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 붓다가 깨달앗을까요? .............
님의 완전한 오버센스입니다.........경전의 글자조합에 의한 자구풀이에 만족하는....

내 글에 분명히 전에 적었습니다.......
삼명중 마지막 신통인, 누진통으로.......고통이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사라짐을 알고..........란 사성제를 통해서 깨달은 것입니다.....

(J)

 

 

3) 오십보 백보

 

님의 말대로, 또 위와같은 학자들의 견해대로 의하면, 붓다의 성도직전의 삼명중.....
숙명통, 천안통에서..............깨달아야 하는 겁니다.........
숙명통에서 업을.......
천안통에서 연기를...........

누진통을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누진통에서 사성제의 전체가닥을   꿰뚫어 본것입니다.........
물론 천안통, 다른 말로 집성제의 연기,인과가 중요한 역활을 했겟지요......
붓다가 연기로 깨달았다하면, 숙명통, 천안통에서 끝낫어야 합니다.....
그 이후 반조가 들어갓겠지요....
누진통으로 사성제를 전체적으로 종합해서 깨닫고 반조에 들어간 것입니다..
경전을 깊이 읽어 보고, 법다운 추론을 해보세요..

누진통,즉 사성제의 깨달음 이후, 오랜 나날들을 지복속에서 좌선 경행등의 반조 합니다.........그것이 소위 말하는 열반락이라는 겁니다....... 고통의 소멸에서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지고의 행복, 완전한   행복...........
이러한 것들을 아라한들이 같이 느낀겁니다............

부파불교에서 아라한들이 깨달음이후 죽을날만 기다렸다는 대승의 힌두논사들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는데 너무 어이가 없엇습니다...
만약 그러한 아라한이 있었다면, 대승의 힌두논사들은 그런 아라한의 이름을 정확히 자신의 경전에다   기술했을 것입니다....
완전히 아라한을 공격하기 위한 주 타켓을 삼기 위해서라도.........

님이 알고 잇는 , 죽을 날만 기다리던 아라한들의 이름은 누구입니까?.
난 기본적으로 어이가 없습니다..그래 기껏 남방불교에서 교학의 고장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초기공부하셨다는 분이 보살행에 대한 힌두논사들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사람에게는 잔영의식이란게 있습니다....그림자 의식이지요.......
대승에서 출가승이 있다고 합시다.......그 분이 발심해서 초기불교를 공부하러 갓다고 칩시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기존의 한국에서 누렸던 출가승이란 지위의 덕택을 보고, 초기공부를 했다는 이유로 자신만의 위치를 기존 종단에서 만들어 가고..............
이분의 마음이 지향하는 곳은 초기불교승입니까?. 아님 기존 종단 승입니까?.......
머 무늬는 기존승단의 승복을 입고 있다고 치더라도.....그런 겉무늬는 무시하고...

이 분의 마음은 대승쪽에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계율을 보면 압니다.........
결국 현실적인 방법을 택하는 것이지요....
대승에서도 필요로하는 희소의 가치가 있으니........초기불교를 공부했다는.......

아쉽게도 이런 분은 숙명통이 없습니다.......
자신의 전생을 봤다면,   현실을 택하지 않치요.
아에 남방불교 비쿠가 되서, 한국에 다시 안 돌아오겠지요.......
윤회의 절박함을 직접 자기가 봤으니까........

그런데 한국에는 가출한 중들이 참 많습니다........
출가승이 아니고, 가출 승이 태반입니다.
가출승이 많은 이곳에서 그러한 발심을 내보고 가서 공부한 스님이 그래도 순수한 것이지요......
아마 절박하게 윤회의 위험성을 못 느끼셧을 테니까, 기존 종단의 계율로 기존 종단의 승복으로 주어진 곳에서 맡은 바 나름대로 순수하게 하지요.......
이런 분들은 거의 다 가 수행승보다는 교학승들이 많습니다..........
기존 대승의 그림자 의식이 거기가서 초기 공부한다고 해도 쉽게 벗겨지는게 아닙니다......
우리의 에고의식,자아의식보다야 약하겠지만, 그래서 계율을 보는 겁니다.....
엄격한 계율이 출가자는 지켜야 합니다.....
사실 한국에서 초기불교의   비쿠계율을 지키는 것이 무척 힘들겠지요.
그러나 아주 소수이지만, 그러한 분들이 있습니다.....
무늬만 테라와다승복을 걸친것이 아닌, 절절한 구도심으로 자기 목숨까지 받쳐서 가서 수행을 하고 다시 여기서 전도를 하고, 수행할때면 다시 돌아가서 오지에서 수행하고.......
그런 존경할만한 비쿠들이 극히 소수이지만, 보이지도 않지만, 그런 비투들이 있기에 남방불교의 맥이 지켜져 온것입니다......

님의 재가자로서의 수행과, 재가자로서의 현실에서의 인과의 삶이라는 두개의 주장을
각각 비교해보십시요.........
수행은 순수한 수행승 비쿠.......
현실속에서의 삶은 대승종단속의 초기불교 교학승들.

순수한 수행승들은 선정보다도, 열반보다도 사띠.특히 일상사에서의 사띠의 중요함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선정이나 열반이나 원한다고 해서 오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님주장대로 연꽃님이 초기불교 주장한다고 다 초기불교가 아니듯이, 님처럼 초기불교 경안 찾으면서, 사띠수행같은것은 안하겟다고 하고, 희안한 대승의 보살수행의 합리화 시키는 주장한다고 다 초기불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오십보 백보라는 겁니다.
똥묻은 개, 겨 묻은 개한테 뭐라고 한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만..

아시겟습니까?
님이 하고 자 하는 것은 보살이 되자 라고 하는 보살수행입니다......
8
정도의 사띠수행은 무시하고........

왜 불교를 믿을까? 의아합니다.
교회나 성당가면 님이 생각하는 그런 보살수행과 비슷한 일 많이 합니다.

몬일 터지면, 순수한 불자신자들은 창피하다고 까지 합니다.
중놈들이 술처먹엇네 하는 음주운전햇네 하고 방송나오면, 무료로 봉사하는데 불자라는게 그리 창피 할수 없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하나 여담으로 해두지요.
가끔 주말이면 산책을 갑니다.
산책반, 경행반이지요

몸이 불편한 노인네들, 중풍 걸린 노인네들이 운동하러 나오는 것을 봅니다.
난 그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단순히 걷지 말고, 이런식으로 걸어보면, 즉 행선의 기본을 가르쳐부면 치매예방도 낫고 산책하는 운동도 재미있게 느껴지고, 정신도 집중력이 쎄져서 좋아지고, 죽을때도 정신차리고 있어서 천국갈수 있다라고 뻥치면서 가르쳐부면 어떨까?.....라고 느낄때도 있습니다.

인과의 삶이 현실속에서 치고박고 하는것이 보살도를 중요시 하는 님한테, 님의 목숨이 한달 남았다고 하면, 그렇게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중요합니까?.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은 간사한겁니다............
그래서 사띠를 하는 겁니다.......마음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아시겟습니까?.....

(J)

 

 

4) “수행은 출가한 비쿠들만의 전유물이 될수 없다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목적은 단순히 자비행과 보살행의 실천만으로 충족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추구 했던 붓다의 자세한 설명
업의 법칙과 윤리에 대한 가르침
마음의 단련시키는 법
지혜를 계발하는 법등.....

님이 이야기 하는 현실생활에서의 자비행과 보살행은 극히 일부분적인 윤리에 대한 가르침 정도에 속한다.

담마의 샘물을 떠먹는 국자는 두가지의 큰 방법이 있다.
그것이 가르침의 학슴과 수행법의 훈련,즉 교학과 수행이란 두가지란 큰 범주 이다.

님의 현실생활에서의 자비행과 보살행의 강조, 즉 지나친 생활불교,참여불교에 대한 강조는, 수행을 출가승에게만 국한 시키고, 재가자에게 수행을 등한시 하게 하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라 개인적으로 느낀다...
원불사에서의 말씀의 종교라는 것이다.........
재가자에게 가르침만을 듣는 것으로는 필요충분조건이 될수 없다........
재가자역시 수행을 각자의 위치에서 해야 한다. 이것이 경전이란 문자를 통한 공부가 아닌, 자신의 몸과 마음이란 교과서르 가지고, 학습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가까운 실천이 바로 몸과마음에 대한 일상사에서의 사띠 수행이다.

님들의 주장은 결국 재가자에게 담마의 샘물을 몸과마음으로 공부하게 하는, 실수행을 경시하게 하거나, 등한시 하게 하고, 재가자에게 있어서 실수행을 장롱속에 처넣게 하는 매우 위험한 주장을 하고 있다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담마의 샘물은 경전만을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현실생활에서의 자비행과 보살행을 행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재가자에게 가르침과 수행이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함께 할때, 현실생활에서도 이 가르침과   수행이 자연스럽게 실천 되어 나가는 것이다.


님의 말대로, 힌두가 보든, 불교가 보든 바다는 같은 바다로서 존재한다.
바다는 우리의 믿음 여부와 관계없이 바다로서 존재한다....
이것은 심층적인사유와 고찰을 통해     점검과 조사를   거친 후의 생각은 아닌 것이다.

힌두는 힌두의 색안경을 쓰고 원래 있던 바다를 바다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는 불법의 가르침 대로,불법은 여실지견이다. 잇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그래서 색안경없이   여실지견해서 바다로 알고, 보는 것,즉 지 와 견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을 불법을 떠난 수많은 수행자들이 다 자신들만의 깨달음을 했다라고 주장한다.
붓다 생존시에도 나칸타 나타붓다,자이나교의 교주가 깨달았다고 이야기 주장했따
그 깨달음에 대해서 붓다는 조목조목 반박한다.
삼명경에서도, 요기의 수행자들의 깨달음에 대해서 조목 조목 반박한다.
힌두는 진아를 이야기 하고, 선불교에서는 진아,참나를 이야기 한다.
힌두의 아트만이 아니냐? 하니 무아를 깨달은 상태라고 이야기 한다.
다 깨달음은 깨달음인데,붓다의 깨달음과는 다른 것이다.
경전을 공부하고 붓다의 가르침대로 가르친 방법에 의해서 수행을 하는 이유가 붓다의 깨달음에 근접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같은 바다를 주장하더라도, 힌두의 바다와 불교의 바다와 다를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이와같은 붓다에 대한   예경과 붓다의 가르침을 소중히 하는 초기불교,즉 상좌부불교는 그래서 원천적으로 경전의 가필, 첨삭,삭제를 말할수 없는 위법행위로 간주한 것이다. 물론 긴 시간 동안 많은 순수한 붓다의 원음외에 많은 것들이 첨삭되었지만,그러한 것들을 보호하려는 테라와다의 소중한 전통과 원칙이 없었다면, 현재 존재하고 있는   니까야는 없어졌을 것이다. 중국에 남겨진, 아가마, 즉 아함경자체와 비교할때도 니까야와 많이 다르게 기록되지 않은가?.......
그러기에 테라와다의 이러한 전통은 매우 소중하고 중요한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기불교가 자비행,보살행의 실천이다, 현실불교,참여불교 라고 주장 하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 않다.

님은 존재에 대해서 상당히 후안 점수를 준다고 여긴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존재는 무명의 결과물이다. 존재는 필연적으로 인식의 전도를 할수밖에 없다........그러하기에 윤회의 흐름속에 허우적 될수 밖에 없는 것이 존재의 비참한 참모습이다.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에 존재는 잡혀 있을 수 밖에 없다.
인간을 떠나, 범천의 신들마저도, 특수한 고도의 수행자들마저도 그러한 인식의 전도로 존재에 대한, 진리에 대한   견해의 전도로 이어져 올수 밖에 없는 이유와 예들이 니까야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재가자들 역시 수행의 수레바퀴를 주어진 처지에서 돌려나가야 한다.

님의 말대로 그 예전에 현실에서 열심히 살고 불쌍한 이들을 구제 했던 경주 최부자역시 현실속에서 남을 도와주는 공덕만으로 윤회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하는 작은 계기를 만들수 없다. 그 의 계기를 만들어 줄수 있는   것이 수해이란,자신의 몸과 마음을 교과서로 삼아서 하는 수행이다.

수행은 출가한 비쿠들만의 전유물이 될수 없다.
오히려 힘든 현실을 살아가는데 세속인들에게 마음의 중심을 잡아주는데 수행이란 정신적 비타민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불법은 가르침과 수행...........즉 교법과 행법이란 두개의 축으로 되어 있다.
이 두개의 축은 재가자에게도 적용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남방의 유명한 고승들, 특히 그 나라에서는 성자의 최고지위를 얻었다고 칭송받는 분들이 재가자에게 법문을 하고, 재가자의 법담에 대한 질문, 수행에 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해주는 이유들이다.....

말씀의 종교, 현실,생활불교, 자비행과 보살행에 만족하자등......매우 근시안적이고 협소한 시각이다.

불법의 지평을 스스로 축소시키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재가자도 왜 수행을 해야 하는 가?.......
붓다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깊이 다시 한번 읽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J)

 

 

오랫동안 간직하고픈 글

 

중복되는 내용도 많이 있지만, 여러 편의 글을 통해서 불교에서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한국불교의 한계에 대하여 알 수 있을 것 같다. 더구나 인터넷에서 널리 알려진 인터넷 논객의 실상과 한계에 대하여 여실히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여진다. 오랫동안 간직하고픈 글이다. 그리고 몇 번이고 읽어서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귀중한 자료라 본다.

 

 

 

2015-03-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