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우리 속의 사자가 될 것인가 배고픈 초원의 사자가 될 것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5. 3. 12. 09:32

 

 

우리 속의 사자가 될 것인가 배고픈 초원의 사자가 될 것인가?

 

 

 

사람들은 매일 행위를 한다. 크게 신체적 행위, 언어적 행위, 정신적 행위 이렇게 세 가지 행위를 한다. 이를 한자어로 신구의삼업(身口意三業)’이라 한다. 그래서 매일 업을 짓고 산다. 단 하루도 업을 짓지 않는 날이 없다. 늙어서 죽을 때 까지 이러한 행위는 계속 된다.

 

매일 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위는 어떤 것일까? 아마 직업일 것이다. 직업이야말로 일생에 걸쳐서 을 짓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직업을 잘 가질 필요가 있다.

 

 

 

 

 

 

 

도저히 맞지 않아서

 

같은 빌딩에 알고 지내는 사장님이 있다. 업종이 같아서 종종 식사도 하고 차도 함께 마신다. 나이가 지긋한 이 사장님은 아들 교육을 잘 시켰다. 아들 중의 하나가 최고 명문대 법대를 졸업하였다. 고시에 여러 번 도전하였지만 운이 없어서인지 매번 고배를 마셨다고 하였다.

 

사장님의 아들은 나이가 차서 더 이상 고시에 도전할 수 없어서 진로를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국가정보를 다루는 기관과 금융관련 기관에 원서를 냈다고 한다. 모두 합격하였다고 한다.

 

아들은 처음에는 정보기관에 마음을 두었다고 한다. 하는 일에 비하여 월급도 좋고 모든 면에서 대우가 좋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정보기관을 포기하고 금융관련 기관으로 돌렸다고 하였다. 그것은 정보기관 특유의 이미지와 하는 일 때문이라 하였다. 자신의 적성에는 도저히 맞지 않아 좋은 조건임에도 포기하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정보기관을 폄하 하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면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 뒷조사나 하고 음모를 꾸미는 직업을 가질 수 있다. 그것도 평생 그런 일에 종사하였을 때 그런 일에 매우 익숙해질 수 있다. 특히 중상모략, 권모술수, 마타도어 등에 능하다면 그러한 분야에서 업을 쌓는 것이 된다. 그결과 직업과 관련된 특유한 이미지가 형성되고 또한 그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세상에는 갖가지 직업이 있다. 이렇게 직업이 많다는 것은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것이고, 육고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축산을 한다. 옷이 필요하면 옷을 만들어 팔고, 집이 필요하면 집을 만들어 파는 직업이 생겨난다. 이렇게 필요에 따라 발생되는 직업은 수 만 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직업이 수 만가지라면 수 만가지 업을 쌓게 된다. 그런 직업의 근본 바탕은 항상 신체적 행위, 언어적 행위, 정신적 행위 이렇게 세 가지 행위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농사를 짓는 것은 주로 신체적 행위에 따른 것이고, 아나운서처럼 말로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언어적 행위에 따른다. 소설가처럼 글을 쓰는 사람은 정신적 행위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행위를 한다는 것은 살아 있음을 말한다. 만일 행위를 하지 않는 다면 어떻게 될까? 움직임이 없이 가만 있다면 사실상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다. 연금에 의지하여 편안한 생활을 보낸다면 행위는 거의 없게 된다. 노후가 보장 되어 있다면 굳이 산업전선에 나서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럴 경우 행위가 없고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살아 있어도 사실상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연금혜택도 없고 노후보장도 되어 있지 않는 자들은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 어떤 식으로도 생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살아 있는 것이 된다.

 

움직인다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반면 움직임이 없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다. 나이가 들어도 삶의 현장에서 땀흘려 일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들이 비록 연금혜택도 없고 노후도 보장 되지 않아 하루벌어 하루먹고 살아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건강한 것이고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반면 연금혜택으로 살아 가거나 돈이 많아서 굳이 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움직임이 없이 산다면 죽은 목숨이다.

 

하루하루가 권태의 연속이고 삶이 지겹게 느껴진다면 괴로움이다. 그래서일까 율장대품에 따르면 재벌의 아들이라 볼 수 있는 야사가 환락의 생활과 권태에 지쳐 ! 괴롭다 . ! 고통이다 ”라고 절규하는 장면이 나온다. 쾌락의 추구가 즐거움도 될 수 있지만 지나치면 고통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삶이 권태로울 때

 

삶이 권태로울 때가 있다. 한마디로 심심해서 못견디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즐길거리를 찾아 나선다. 주로 육체적 쾌락에 대한 것이다. 오욕락을 만족시키는 삶을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즐겨도 결국은 로 귀결 되고 만다. 이는 어떤 개방녀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다.

 

팟케스트방송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어느 자유분방한 개방녀는 하루밤 만을 위한 원나잇스탠드(One Night Stand)’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매번 후회하였다고 한다. 즐길 때는 좋았지만 지나고 나면 허무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쾌하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극단적 쾌락은 매우 저급한 것임을 말한다. 육체적 쾌락에 엑스터시가 있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은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도 극단적 쾌락의 추구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S56.11)”라 하였다.

 

미래 새로운 태어남을 유발 하는 행위

 

오욕락에 탐닉하는 것에 대하여 저열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천박한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이라 하여 비속하다고 보았다. 또 오욕락에 탐닉 하는 자들은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 배우지 못하였다는 것은 가르침을 접하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오욕락,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다 보면 남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오욕락과 관련된 직업을 가지면 어떻게 될까? 역시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남는 것이 있다면 오욕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행위일 것이다. 그런 행위가 쌓이고 쌓여 업이 되고, 업은 미래 새로운 태어남을 유발하여 자신이 쌓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이 가르침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하고 있는 행위는 반드시 미래의 새로운 태어남을 유발하고 만다. 더구나 그 행위가 평생 동안 축적되고 축적되어 굳어진다면 미래 어떤 운명으로 태어날지는 확정적으로 된다.

 

거짓말을 일삼아 평생 사기만 치며 사는 사람은 그 업이 너무 커서 그 업력에 따라 그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날 수밖에 없다. 가진 것이 많아서 아무 하는 일 없이 쾌락을 즐기다 권태에 못이겨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 역시 그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EBS에서 본 극한직업

 

TV에서 즐겨 보는 프로가 있다. EBS에서 방송하는 극한직업이다. 우리 사회에서 소위 3D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극한직업프로를 보면 참으로 아름다워 보인다. 비록 더럽고 힘들고 어렵고 남들이 알아 주지 않는 직업에 종사하지만, 정작 종사자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지만 무엇 보다 자신이 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 하기 때문이다.

 

대리석을 가공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분진에 시달린다. 그러나 자신이 연마한 대리석이 건물의 외관을 장식하였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석탄을 캐는 광부 역시 자신이 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한다. 그래서 하루 일과가 끝나고 목구멍의 분진도 씻어 낼 겸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하는 장면은 아름다워 보인다. 하릴없이 재벌2세들이 권태에 못 이겨 맛집순례 하며 즐기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일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래서일까 가장 아름 다운 모습은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을 때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움직이고 있을 때를 말한다. 다름 아닌 노동이다. 그래서 “두 팔의 힘으로 모으고 이마의 땀으로 벌어 들이고(A8.54)” 라 하였다. 불로소득이 아닌 자신의 팔뚝의 힘으로 벌고, 이마의 땀방울로 이루어진 것이 가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EBS극한직업에서 자신의 할 바를 다하는 사람들은 매우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였을 때

 

사람들은 행복과 불행을 말한다. 직업적으로 보았을 때도 행복과 불행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좋은 직장을 가졌다고 하여 반드시 행복할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큰기업에서 연봉을 많이 받고 있지만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결코 행복하다고 볼 수 없다. 고용보장과 연금보장이 되는 공무원사회에서 일하고 있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마치 정권의 개가 되어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일하고 있다면 결코 행복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EBS에서와 같이 더럽고 힘들고 어려운 일에 종사하여도 자신이 하는 일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아 가치를 부여 한다면 행복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가치관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 하면 행복한 것이고, 자신이 하는 일이 가치가 없다고 여기면 불행한 것이다.

 

고용이 보장 되는 좋은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다. 또 큰기업에서 연봉을 많이 받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자신이 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 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의 사자와 같다. 사육사가 주는 고기만을 먹고 우리에 갇혀 사는 사자에게는 야성(野性)이 없다. 우리 속에 갇혀 사는 사자는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주인이 주는 것만 받아 먹는 돼지와 다름 없다.

 

고용도 보장 되어 있지 않고 미래도 불투명한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가 지금 여기서 자신이 하는 일이 여러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우리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고, 사회에서 꼭 필요한 일이고, 누군가는 해야 되는 일이라고 가치를 부여 하면 행복한 사람이다. 마치 야성의 사자가 초원을 거니는 것과 같다.

 

 

우리 속의 사자가 될 것인가

배고픈 초원의 사자가 될 것인가?”

 

 

 

2015-03-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