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가문의 영광인가? 통합본 상윳따니까야에 실린 ‘진흙속의연꽃’

담마다사 이병욱 2015. 3. 13. 21:26

 

 

가문의 영광인가? 통합본 상윳따니까야에 실린 진흙속의연꽃

 

 

 

블로그라는 새로운 소통수단

 

확실히 예전과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옛날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여기서 옛날이라고 한 것은 불과 삼사십년전의 일을 말한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컴퓨터라는 것이 없었다. 전화가 유일한 소통수단이었다. 그것도 귀한 물건 이었다. 컴퓨터가 대중화 된 것은 이십여년전이다. 2000년에 들어 서면서부터 인터넷이 일반화 되었다. 그것도 매우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그런 영향이어서인지 카페나 블로그라는 새로운 소통수단이 생겨 났다. 이후 전개 되는 소통수단을 보면 거의 광속의 변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지털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디지털기기에 따른 소통수단이 당연한 것이라 여길 것이다. 마치 철도가 놓여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기차 타는 것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전과 이후의 변화를 지켜 보았던 사람들은 변화를 실감한다. 인터넷에서 소통하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인터넷으로 소통하며 살아 온지 10년이 되었다. 2005년 처음으로 블로그를 만들었으니 십일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 동안 수 많은 글을 쓰고 익명의 수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여 왔다.

 

오로지 필명으로 소통하는 시대에 실명을 알고자 한다거나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고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넷상에서 그 사람에 대하여 알려고 하려거든 그 사람이 남긴 흔적을 보면 알 수 있다. 남겨진 글을 보고서 그 사람의 인격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인터넷에 남겨진 글과 사진 등은 사실상 그 사람의 얼굴과도 같고 그 사람의 인격이라 볼 수 있다.

 

인터넷에 여러 가지 소통수단이 있다. 가장 많이 즐겨 찾는 카페나 블로그 또는 게시판 뿐만 아니라 메일도 있다. 그런데 메일은 일대일 소통수단이다. 그래서 좀 더 심도 있게 견해를 주고 받을 수 있다.

 

단행본 상윳따니까야에 진흙속의연꽃필명이

 

최근 메일을 하나 받았다. 단행본 상윳따니까야에 대한 것이다. 메일에 따르면 최근 발간된 단행본 상윳따니까야에 진흙속의연꽃이라는 필명이 거론 되어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책을 발간할 때 머리말을 보면 후원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나온다. 또 편집을 하는데 도움을 준 봉사자의 이름이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책의 서두에 그것도 권위를 갖는 경전의 번역서에 이름이 실려 있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일 것이다. 그런데 한번도 후원한 적이 없고 더구나 전재성박사와 일면식도 없는데 필명이 실려 있다고 하니 매우 의아해 하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아마 잘못 보았겠지라며 넘겼다. 그런데 이어지는 메일에서 필명이 들어 있는 페이지까지 알려 주었다.

 

선물로 받은 단행본 상윳따니까냐야를 열어 보았다. 메일에서 알려 준대로 정말 진흙속의연꽃이라는 필명이 언급되어 있다. 책의 서두에 전집해제가 있는데  필명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그리고 이번에 통합개정판에서는 진흙속의 연꽃 님의 지적 고양이의 경의 우화에서 생쥐와 고양이의 위치가 역전되지 않았나 하는 점에 대해 검토한 결과 역자가 생물학적 관점을 정당화하려고 성급하게 번역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화적인 논리의 관점을 복원하고, 이전의 번역은 사실상 이전 번역은 오늘날 보면, 생물학적으로 더욱 명증적이기 때문에 빠알리어로 환원하여 퇴현 판본을 만들어 주석에 집어넣어서 이전의 번역도 함께 고려 하도록 실었습니다.

 

(전집해제 32p, 통합본 상윳따니까야, 전재성박사)

 

 

 

 

통합본 상윳따니까야 32페이지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이렇게 필명이 거론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우스개 소리로 하자면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왜 그런가? 번역작업하기도 어렵지만 후원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번역서가 출간되기 까지 도움을 준 사람들의 명단을 실어 주는 것이 하나의 예의인 것 같다.

 

이번 통합본에서도 후원자의 명단을 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성균대학교 유필화 교수의 추천사를 볼 수 있다. 머리말에는 1999년부터 2007년 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던 월주, 청화, 도법, 수경, 동진, 상원, 성타, 원해, 일연, 일철, 정대, 지홍, 명성, 학담스님이 언급되어 있다. 또 재가자로서는 황경환, 김광하, 최훈동, 전현수, 유필화, 박승관님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번 통합본 출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한분의 스님을 소개 하고 있다. 머리말에 따르면 통합본 출간에 필요한 비용 일체를 부담한 벽안스님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까밀라, 박은현, 이준용, 김현수 님에게도 감사 한다고 쓰여 있다.

 

이렇게 고귀한 성보 같은 통합본 상윳따니까야에 이름이 실려 있다는 것은 보통불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가문의 영광이라 생각한다. 한번 보고 마는 소설책이 아니라 늘 수지독송하는 성보로서 책에 이름이 실려 있다는 것은 무척 자랑스런 일이라 보여진다. 그런데 한번도 후원한 적도 없고 그렇다고 책을 내는데 도움을 준 적이 없건만 진흙속의연꽃이라는 필명이 실려 있다는 것에 대하여 감격하였다.

 

시공을 초월한 강력한 소통수단

 

성보 같은 경전에 필명에 실려 있다는 것에 대하여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비록 실명은 아니고 필명일지라도 이렇게 이름이 실려 있다는 것은 인터넷 시대에 있어서 소통의 산물이라 본다. 만일 인터넷과 같은 소통수단이 없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세상은 확실하게 변하였다. 아날로그 시대부터 디지털 시대를 살아 왔기 때문에 그 변화를 실감한다.

 

인터넷시대에 한사람의 생각이 영향을 줄 수 있다. 인터넷의 속성상 시간과 공간의 장애를 받지 않기 때문에 네트워크만 깔려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소통이 가능하다. 올려진 글이 십년전의 것이라도 검색만 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종종 댓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수 년전에 올려진 글임에도 소감에 대하여 짤막하게 코멘트 해 놓은 것을 보면 인터넷에 올려진 글은 시공을 초월하여 누군가에는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통합본 상윳따니까야 실린 고양이의 경에 대한 이야기 역시 시공을 초월한 강력한 소통수단으로서의 인터넷이 영향을 끼쳤기 때문으로 본다. 그렇다면 전재성박사가 언급한 고양이의 경은 어떤 내용일까?

 

정반대의 번역을 접하고

 

전재성박사는 전집해제글에서 고양이 경(Biālasutta, S20.10)’에 대하여 생물학적 관점으로 접근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빠알리원문과는 정반대의 번역이 되었다. 그러나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발간된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원문대로 번역되어 있다. 과연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 해야 할까?

 

빠알리 원문에 따르면 초불연 번역이 맞고,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전재성박사가 맞다. 이렇게 정반대의 번역을 접하고 상당한 혼란의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두 번역을 비교 하였다. 그것이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고양이의 경(S20.10)에서(2013-10-15)’라는 제목의 글과, ‘쥐가 고양이를 먹었나? 고양이가 쥐를 먹었나? 논란의 고양이의 경(S20.10)(2013-10-19)’라는 제목을 가진 두 개의 글이다.

 

첫 번째 글이 올려지자 넷상에서는 반응이 뜨거웠다. 이른바 댓글 공방이 벌어진 것이다. 빠알리 원문을 직역한 것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서 번역한 것이 맞는지에 대한 공방이다.

 

빠알리 원문을 있는 그대로 번역한 것이 옳다는 것에 대한 의견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보디스님과 초불연 두곳에서 동일한 번역이고 한분이 다른 번역이면, 당연히 그 한분이 "왜 정반대의 번역을 하였지?"라고 해야 올바른 접근이 아닐까요? 제가 보기엔 보디스님과 초불연 번역이 훨씬 합리적으로 말이 되는것 같아요.

(수카 법우님)

 

 

두 번역서에서 정반대의 번역이 실려 있는 것에 대하여 초불연 번역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이유는 빠알리원문대로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빅쿠보디의 번역도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어느 법우님은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쥐가 씹어 먹히는 와중에 고양이의 내장을 갉아먹기에 쥐를 '노리고 있던' 고양이가 고통을 당한다?
쥐도 음식이 필요하고 고양이도 음식이 필요하고 수행승도 그러하지만, 생존을 위해 먹을것을 구하는 문제나 먹을 때 급하게 먹고 천천히 먹고 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봅니다.

(수행자 법우님)

 

 

글을 보면 고양이에 씹혀 먹힌 쥐가 고양이의 내장에 들어가 창자를 갉아 먹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라고 의문을 표한다. 이는 앞서 언급된 전재성박사의 생물학적 관점에서 본 합리적 의문과 같은 것이라 본다. 

 

이렇게 서로 다른 번역에 대하여 댓글공방이 이어지자 어느 법우님은 중간의 위치에서 양시론적 견해를 내 놓았다.

 

 

학문적 규명을 꼭 해야만 하겠다 라면 모르겠으나 두 분의 번역은 해탈로 가는 길을 감에 있어서 문제삼을 필요까진 없다고 봅니다. 고양이를 수행자로 비유했다고 읽든 쥐를 수행자로 비유했다고 읽든지 간에 결론은 수행자는 싸띠를 잘 해야 된다는 의미니까 말이죠.

(금강승)

 

 

법우님의 글에 따르면 둘 다 모두 맞다는 양시론적 견해이다. 중요한 것은 사띠라는 것이다. 고양이가 쥐를 물었는지, 반대로 쥐가 고양이를 물었는지에 대하여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글의 문맥을 보아야 함을 말한다. 왜냐 하면 두 개의 번역서의 내용이 상반되는 것이긴 하지만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행자가 감각적 대상을 만났을 때 잘 사띠해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두 번역서에서 고양이의 경을 보면 정반대의 번역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떤 내용일까?  번역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1) 빠알리원문

Atha kho bhikkhave, mudumūsī gocarāya pakkami. Tamena biālo gahetvā sahasā asakhāditvā ajjhohari. Tassa mudumūsi antampi khādi, antaguampi khādi. So tato nidāna maraampi nigacchi, maraamattampi dukkha.

 

2) 전재성님역
그때 그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왔다.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뜯어먹었다.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S20.10)

3) 각묵스님역

그때 생쥐가 그곳에 나타났다. 고양이는 그것을 씹지도 않고 바로 삼켜 버렸다. 그러자 그 생쥐는 그 고양이의 큰창자도 갉아먹고 작은 창자도 갉아먹었다. 그 때문에 고양이는 죽음을 만나고 죽음에 버금가는 괴로움을 받게 되었다. (S20.10)

4) 빅쿠보디역

Then that mouse came out for food, and the cat grabbed it and swallowed it hastily, without chewing it. Then that little mouse ate the cat's intestines and mesentery, and on that account the cat met with death and deadly suffering. (S20.10)

 

 

번역을 보면 전재성님의 번역과 각묵스님의 번역이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다른 부분은 빠알리어“Tassa mudumūsi antampi khādi, antaguampi khādi.”문구이다. 이 문구에 대하여 각묵스님의 번역과 빅쿠보디의 번역은 일치 한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번역은 정반대이다.

 

빠알리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고양이가 생쥐를 통째로 삼키고, 삼켜진 생쥐는고양이의 창자를 긁어 먹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따졌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쥐가 고양이의 뱃속에 들어 가는 순간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쥐가 고양이 뱃속에서 살아 있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산채로 먹힌 생쥐가 고양이 몸속에서 생존을 위하여 고양이 창자를 갉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깔라마의 경에서

 

이와 같은 정반대의 번역에 대하여 댓글공방이 치열하였다. 그래서 두 번째의 글에서는 깔라마의 경(A3.65)’의 비유를 들어 합리적 추론에 따른 의심을 할 수 있음을 밝혔다. 물론 깔라마의 경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하라는 말은 없다. 만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하라고 한다면 자등명법등명이 성립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삼귀의에서 법귀의에 대한 것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A3.65)”라 한 것은 외도의 견해를 말한다. 여기서 성전은 부처님 당시 베다를 뜻한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부처님의 말씀이더라도 합리적으로 의심하라고 말한다. 이를 더 확장해서 니까야에 쓰여 있다고 해서 모두 믿지 말라고 말하기 까지 한다.

 

니까야를 의심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경을 읽으면서도 과연 부처님이 정말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라며 의심 할 것이다. 더구나 악마나 하늘사람 등 초월적 존재가 나타난다든가, 마치 굽혔다가 편사이에 하고 나타나는 것처럼 표현 되었다면 역시 믿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경전의 내용에 대하여 진위여부를 판단하여 취사 선택한다면 남아 있을 경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어 결국 남는 것은 대념처경과도 같은 수행관련 경만 남을 것이다. 그럴 경우 부처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소중한 메시지를 놓칠 수 있다.

 

상식적으로 고양이의 창자에 들어가 쥐가 고양이의 창자를 갉아 먹는 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럼에도 빠알리원문에는 그런 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빠알리 원문을 잘 분석해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그것은 빠알리원문에서 ‘땃사(tassa)’라는 대명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대명사 땃사에 대하여 고양이로 보면 초불연 번역에서와 같이  “그 생쥐는 그 고양이의 큰창자도 갉아먹고”가 된다. 반면 땃사에 대하여 쥐로 본다면 전재성님의 번역대로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가 된다. 따라서 인칭대명사 ‘땃사(tassa)’ 에 대하여 고양이로 보느냐 쥐로 보느냐에 따라 번역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서일까 글이 나온지 2년이 지난 시점에서 가장 최근에 댓글을 주신 법우님은 다음과 같이 글을 올려 놓았다.

 

 

제 생각 또한 전재성님의 번역이 맞다고 여겨지지만 판단을 유보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빨리어를 알고 직접 해석해봐야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의 짧은 지식에 의하면 쥐는 아마 고양이 뱃속으로 들어가는 즉시 소화효소에 의해 분해되고(!) 있을 것이기에 고양이의 창자를 물어뜯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볼딱지법우님, 2015-02-26)

 

 

가장 최근에 글을 주신 법우님에 따르면 판단을 유보하겠다고 하였다. 합리적으로 추론 하였을 때 전재성님의 번역이 맞긴 하지만 빠알리어 원문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오역을 시인하고

 

인터넷시대를 살고 있다. 사이버세상과 현실세상의 구별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인터넷에 글을 올려 놓으면 시공을 초월하여 누구와도 소통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전에 올려 놓았던 고양이 경에서의 정반대 번역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런 영향을 이번 통합본 상윳따니까야 전집해제글에서 보게 되었다.

 

전재성님은 해제글에서 생물학적 관점신화적 관점이라는 두 가지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해제글을 보면 생물학적 관점에 대하여 생물학적 관점을 정당화하려고 성급하게 번역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라 하여 사실상 번역에 무리가 있었음을 시인하였다. 그럼에도 오늘날 보면, 생물학적으로 더욱 명증적이라 하였다.

 

생물학적 관점에 따른 번역이 오늘날 과학적 상식에 맞는다. 그럼에도 빠알리 원문을 중시하여 신화적인 논리의 관점을 복원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번 통합본 개정판에서는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1) 변경전

그때 그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왔다.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뜯어먹었다.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S20.10, 개정판)

2)변경후

그때 생쥐가 먹이를 구하로 나왔다.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씹지 않고 먹었다. 생쥐는 고양이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고양이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S20.10, 통합본 개정판)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전의 개정판에서는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로 되어 있는데, 통합본 개정판에서는 생쥐는 고양이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라고 정반대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변경한 것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Atha kho bhikkhave, mudumūsī gocarāya pakkami. Tamena biālo gahetvā sahasā asakhāditvā ajjhohari. Tassa mudumūsi antampi khādi, antaguampi khādi. So tato nidāna maraampi nigacchi, maraamattampi dukkha. : 이 문장에 관한 한, 종래의 역자의 번역은 논리적이나 문법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오역이다. 그러나 번역은 종래의 전통적인 빠알리본은 생물학적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선입관 때문이었다.

 

그래서 빠알리원전에서 밑줄 그은 세 군데는 역자가 고쳐서 퇴현 판본을 만들어 번역한다면, 종래와 같이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 ‘수행승들이여, 그때 그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왔다.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뜯어먹었다.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Atha kho bhikkhave, mudumūsī gocarāya pakkami. Tamena biālo gahetvā sahasā asakhāditvā ajjhohari. Tassa biālo antampi khādi, antaguampi khādi. Sā tato nidāna maraampi nigacchi, maraamattampi dukkha)’

 

(2914번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놀랍게도 오역을 시인하고 있다. 이전 번역에 오류가 있었음을 솔직히 인정한 것이다. 다른 번역서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표현이다. 그러는 한편 퇴현본에서는 빠알리 문구를 바로 잡아 이전 번역처럼 적용하였다고 하였다.

 

빠알리원문과 퇴현본의 차이점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빠알리원문 번역

Tassa mudumūsi antampi khādi, antaguampi khādi. So tato nidāna maraampi nigacchi, maraamattampi dukkha.

생쥐는 고양이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고양이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2) 퇴현본 번역

Tassa biālo antampi khādi, antaguampi khādi. Sā tato nidāna maraampi nigacchi, maraamattampi dukkha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뜯어먹었다.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퇴현본에서 바뀐 것은 Tassa 다음에 mudumūsi(생쥐)가 아니라 biālo(고양이)임을 알 수 있다.

 

사띠를 놓쳤을 때

 

사람들은 상식에 근거하여 살아 간다. 상식에 어긋나는 행위에 대하여 이상하고 수상하게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경을 보면 종종 일반상식과 맞지 않는 내용도 발견된다. 그렇다고 경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생쥐가 고양이 뱃속에 들어가면 죽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원문을 보면 생쥐가 고양이 뱃속에 들어가 고양이 창자를 갉아 먹은 것으로 표현 되어 있다. 그럴 경우 고양이는 극심한 통증을 느낄 것이다. 그것도 죽을 정도의 고통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경에서는 왜 고양이의 비유를 들었을까? 경에서 이어지는 문구를 보면 알 수 있다. 고양이와 쥐의 비유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을 하기 위해 마을이나 거리로 들어가는데 몸을 가다듬지 않고 말을 조심하지 않고 마음을 수호하지 않고 주의 깊음에 머물지 않고 감관을 제어하지 않고 간다고 하자.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했기 때문에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Biālasutta-고양이의 경, 상윳따니까야 S20.10, 전재성님역)

 

 

경을 보면 야하게 옷을 걸쳐 입은 여인은 생쥐로 비유된다. 그리고 여인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는 빅쿠는 고양이로 비유 된다. 상식에 어긋나는 이야기이지만 고양이는 생쥐를 통째로 삼키고, 삼켜진 생쥐는 고양이의 창자를 갉아 먹어 고양이는 죽을 정도의 고통을 겪는다. 마찬가지로 오전에 탁발 나간 빅쿠가 옷을 가볍게 걸친 여인을 보고 욕정이 일어난다. 이 욕정으로 인하여 빅쿠는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다. 이는 사띠를 놓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거룩한 계율안에서 그 배움을 버리고 타락하는 것은 죽음이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죄악에서 벗어남을 알더라도 이러한 죄악에 오염되는 것은 바로 죽을 정도의 고통이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배워야한다. ‘우리는 신체를 가다듬고 언어를 다스리고 정신을 수호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감관을 제어하고 마을이나 거리로 탁발하러 가리라.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Biālasutta-고양이의 경, 상윳따니까야 S20.10, 전재성님역)

 

 

계율의 중요성에 대한 것이다. 매혹적인 대상과 마주쳤을 때 감각적 욕망에 끄달린다면 계율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마음은 오염원에 의하여 오염되고 마는데 이는 죽을 정도의 고통을 야기 하고 말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신체를 가다듬고 언어를 다스리고 정신을 수호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감관을 제어해야 함을 말씀 하셨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사띠(알아차림)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띠가 중요할까?

 

여인 보기를 가족보기처럼

 

종종 댓글을 받는다. 그런 글중에서는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글이 있다. 도움이 되기 때문에 여러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 진다. 최근 사띠의 중요성에 대하여 인상적인 글을 보았다.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마음이 깨끗해져야 하기에, 일상에서 사띠수행이 중요한 것입니다..사띠가 마음을 지켜주니까요. 결국 계행을 깨끗하게 해주는 역할과 사띠수행을 통해 어느 정도의 고요를 얻게 되면서, 선정으로 들어가기 위한 마음상태를 만들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일상적인 사띠수행이 계행이라는 덕행도 지키고 마음도 고요하게 해주는 역활을 하기에 사띠가 불법수행의 기본이고 토대이다라는 것입니다.

 

(J법우님)

 

 

J법우님이 올린 글의 일부이다. 사띠는 마음을 지켜 주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계행이다. 항상 사띠를 유지하고 있으면 계행은 자동으로 지켜 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띠수행이 계행이라는 덕행도 지키고 마음도 고요하게 해주는 역활을 하기에 사띠가 불법수행의 기본이고 토대이다.”라 하였다.

 

오전에 탁발을 나간 빅쿠가 옷을 가볍게 걸친 여인을 보았어도 사띠를 유지한다면 생쥐가 고양이 창자를 갉아 먹는 듯한 극심한 죽을 정도의 괴로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띠를 유지하여야 할까? 초기경 주석에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어머니의 연배의 여성에 대해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좋다. 자매 연배의 여성에 대해서는 자매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좋다. 딸의 연배의 여성에 대해서는 딸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좋다. (Smv.582-583)”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여인 보기를 가족보기처럼 하라는 것이다.

 

불량품은 구매 하지 않듯이

 

통합본 상윳따니까야 필명 진흙속의연꽃이라는 이름이 실린 것에 대하여 우스개 소리로 가문의 영광과도 같은 것이라 하였다. 경전이 다른 책과는 달리 성보(聖寶)’와 같이 소중하게 다루어 하는 것이기에 서문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는 것은 감격스런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런데 후원을 해서 올라 간 것도 아니고 교정 등 봉사를 해서 올라 간 것이 아니다. 단지 블로그에 비교번역을 실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공유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오역을 바로 잡게 되었고 세상에 필명도 알려 지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 보다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번역자의 태도라 본다. 이는 번역자의 양심에 속하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 되었다고 인정하고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였을 때 뒷탈이 없다. 그렇다고 하여 일일이 오류를 기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전집해제글에 따르면  배우고배운다.’에 대하여 전념하고전념한다.’는 식으로 그 밖에 어떤 표현은 소리 없이 조용히 바로 잡았다.”라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매우 바람직하다. 마치 끊임 없이 상품을 개량해 나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십년가 상품개발을 이십년 하였다2005년 까지 이십년간 셋톱박스를 개발하였는데 회로설계를 비롯한 하드웨어를 담당하였다. 아날로그 시대부터 디지털로 변환이 이루어진 시기에 이르기 까지 위성방송과 케이블과 관련된 각종 셋톱박스를 수 없이 개발하였다.

 

제품이 개발되면 생산이 되고 필드에 깔린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첫 개발제품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 하고 있다. 생각지도 않은 문제점이 필드(현장)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필드에서 발생된 문제점을 취합 하여 수정과 보완 작업에 들어 간다. 이렇게 끊임 없이 개량하는 것이 시장에서 팔린다.

 

오늘날 명품은 끊임 없이 보완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번역서도 마찬 가지 일 것이다. 부피도 방대하기도 하지만 내용도 심오하기 때문에 오역이나 탈역, 오타 등이 일어 날 수 있다. 그래서 초판본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개정판이 나올수록 점점 나아진다.

 

소비자는 불량품을 사지 않는다. 그래서 불량품은 시장에서 도태 되고 만다. 전자제품처럼 번역서도 끊임 없이 교정해 나가야 한다. 또한 오류가 있으면 알려 주어야 한다. 그래야 더 나은 번역서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오류 없는 번역서를 가지게 되었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이 제대로 전달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승리 하는 것이다. 이번에 통합본 상윳따니까야의출간에 심혈을 기울인 전재성박사님에게 감사 드린다.

 

 

 

2015-03-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