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축생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일상에서 수행하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5. 3. 19. 09:16

 

축생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일상에서 수행하기

 

 

 

즐겨 보는 방송이 있습니다.  EBS교육방송입니다. 요즘에는 채널이 하나 더 늘어 볼거리가 많습니다. TV를 보긴 하지만 공중파 방송은 잘 보지 않는데 EBS만큼은 예외입니다. 그래서 저녁에는 EBS로 거의 채널 고정 입니다각종 교양프로나 다큐프로가 많기 때문 입니다.

 

EBS에서는 인문학강좌를 비롯하여 세계테마기행극한직업 등 볼거리가 넘쳐납니다. 더구나 대형 고화질(HD)화면으로 제공되는 영상을 보면 현지에 있는 듯 실감 납니다.

 

다큐프로에서 관심 있게 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물의 왕국과 같은 프로입니다. 이런 프로를 접하였을 때 인간의 삶도 동물의 삶이나 다름 없음을 느낍니다. 먹고 번식 하는 것 말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특징 지우는 것은 오로지 생존본능입니다. 생존하기 위하여 먹습니다. 상위포식자는 하위포식자를 먹고 삽니다. 이렇게 동물의 세계는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 입니다. 그런 와중에 빼놓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번식입니다.

 

동물다큐를 보면 생존하기 위하여 먹고 번식하기 위하여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행태를 보면 이와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오히려 동물보다 더 못한 면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은 살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마치 먹기 위하여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공중파 방송은 물론 케이블에 이르기까지 먹거리 프로가 넘쳐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물은 먹기 위하여 사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오로지 생존하기 위하여 먹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인간이 동물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고 봅니다.

 

인간이 동물보다 못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낳은 자식을 돌보지 않는 것입니다. 베이비박스라 하여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보도나 해외 입양이야기를 보면 동물 보다 못하다고 여깁니다. 아무리 환경이 열악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새끼를 버리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물은 새끼가 다 자랄 때 까지 정성스럽게 돌보아 줍니다.

 

인간이 동물 보다 못한 결정적인 것이 있습니다. 이는 조류다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조류다큐를 보면 어미새는 열심히 알을 품습니다. 알에서 깨어나면 열심히 먹이를 날라다 주지요. 하지만 새끼새가 날 때 까지 입니다. 날기 시작하면 더 이상 먹이를 주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떤가요. 나이가 20이 넘어도 돌봐주고 심지어 결혼한 자녀에 대하여 AS까지 해 줍니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인간이 동물보다 더 수승한 존재라고 볼 수 있을까요?

 

축생보다 못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성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 봅니다. 경전을 접하고 수행을 하는 것은 인간답게 사는 것 너머 입니다. 그런 가르침이 반드시 교회나 절에 가야만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을 잘 보면 얼마든지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온갖 정보로 넘쳐 납니다. 그 중에는 유익한 정보도 있지만 쓰레기정보가 더 많습니다.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감각적 정보가 넘쳐 나는 것이 현실입니디. 이런 때 좋은 글을 접하면 한줄기 시원한 바람을 접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공감하였을 때 나의 것이 됩니다.

 

비록 자신이 경험하지 않았지만 공감하였다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런 글이 있습니다. 댓글에서 퍼온 것입니다. 대화체 형식으로서 천천히 공감해 가며 읽어 가다 보면 글이 어느새 자신의 것이 되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제목을 일상에서 수행하기라고 붙여 보았습니다.

 

 

 

Bird

 

 

 

일상에서 수행하기

 

 

1) 왜 관찰해야 하는가?

 

첨삭이 되었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을 지라도, 경전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2600년전의 구술이 현재에도 남아서 보존되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세존의 가르침에 더 가까운 것만이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 ,생존력이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전에 있는 신화적인 내용을 아무것도 모르는 이 들에게 함부로 이야기 하는 것은 신중하게 해야 겠지요. 자칫하면 불교도를 광신적인 철없는 자로 타종교인들에게 매도 당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경전보다 더 위험한 맹신이 사람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 분들의 행위, 계율, 일을 벌이는 것등을 점검해야 되겠지요.....이것이 안되니, 사이비들이 날 뛰는 겁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겠지요.....어설픈 사람에 대한 맹신이 사이비들을 만들어 내는 더 큰 문제점이라 여깁니다.....불교나 타종교나 다 마찬가지 겠지요.

 

다시 원점으로.........전적으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다른 수행법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팔정도수행을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결국은 선정을 얻는 것입니다....

선정, 자나를 얻는 것입니다.....그러나 이것이 평생을 수행하는 수행승에게 조차 만만하지가 않치요...

 

붓다가 도를 깨닫지 못한 비구들에게 숲으로 가라 했으면, 그 숲에서 비구들은 순수위빠사나 수행식의 사띠수행을 하고 있엇을까요?......

비내리고, 축축한 동굴속에서, 추위에 떨고, 이름모를 짐승들의 소리들에 마음이 두려움이 가득차 있을때, 과연 찰나 사마디라는   정도의 사마디를 가지고 무상이다, 고다, 무아다.....이런 사띠수행을 하고 있었을까?..........사실 개인적으로 의문입니다.....

 

선정, 즉 자나라는 것은, 신체의 오감각에서 마음이 해방된 것입니다.....

우리의 육문으로 들어오는 감각중, 다섯가지가 멈추는 것이지요......

그리고 6식인 마음중에서, 마음을 교란시키는 다섯가지 적들이 잠들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순수한 영역만 남아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레 500백대가 지나가도 수레 소리를 못 듣는다고 경전상에 있습니다.

이 선정이 얻기 힘드니까, 혜해탈자 중에서, 색계 선정을 거치지 않은 혜해탈자에 대한 수행이 미얀마식 순수 위빠사나 선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유사선정...........오감각이 사라져 버린, 몸이 사라져버린, 순수한 마음이 지복속에서 평온쪽으로 점차 세련되어 가는 것.............이것을 지복속의 평화라고 합니다.

 

결국 몸이, 고통이구나.......집착의 근원지 이구나.....라는 것을 대충 알게 됩니다.

이것이 일종의 고성제를 조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붓다는 아나빠나 사띠라는 색계 4선을 통해서 3명으로 4성제를 깨달아 붓다가 되어 오랜시간 지복속에서 좌선과 경행등으로 반조하며 가르침을 다듬었습니다.

 

어떤 이들의 글에서, 아잔차의 깨달음이 선정이었지 열반을 경험한 것이 아니다.

아잔차의 깨달음은 혜해탈, 색계선정을 경험한 후에 통찰지로 깨달은 것이지...

라는 수준높은 분들의 글을 봤습니다.........

난 아잔차의 깨달음의 글에서, 아무것도없고,다 부서져가고 있다. 세상이 우주가.....

결국 나는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이었다, 남들과 다른 나의 견해를 지켜갈수 있엇다.라고 하는 구절에서 그가 상수멸정을 경험한 양면해탈자였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없다.................라고 한 그 의 말에서 그런 것들을 느낍니다.

 

선정은 행복입니다........지복입니다......관찰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열반은 완전한 행복입니다......무집착을 향한 행복입니다. 고통이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고통을 만드는 자들이 남김없이 사라졌습니다, 관찰자마저도 다 사라졌습니다....

 

궁극적 해탈의 3가지 방법은 무상해탈, 무원해탈, 공해탈/ 무상,,무아/를 통한 해탈입니다..........

 

존재의 3특상은 무상은 고이고 고는 무아입니다.......무상 == 무아......입니다.

사실 무상,고를 안다고 해고 우리는 사실 모릅니다..

무상, 고를 안다면, 당장 가족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붓다의 제자가 되어 숲으로 갔을 겁니다.

무상과 고는 안다고 느끼는 우리의 인식은 무아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조차 힘듭니다.

염세적이고 허무하고 뭔가 자아가 없는 공허함속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사실 무상, 고도 모르는데.....

결국 무상 ,, 무아는 똑 같은 것의 다른 이름인데.........무아상경에 정확히 있습니다.

 

흔히 신통을 이야기 합니다......무당이나. ....떼와닷타나..........신통이 색계 선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주문을 통해서, 다른 영적인 것과의 접촉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합니다.......유치하고 결국 타락시키게 하는 신통이겠지요....

 

 

2) 삼특상에 대하여

 

붓다는 신통을 부정하지 않앗습니다. 사실 붓다의 깨달음에 도달하게 한것은 자나라는 직접적인 원인과 조건으로 삼명이라는 신통력으로   사성제를 깨달은 것입니다....

37보리분법에 4여의 족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경전을 보면서도, 경전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 내면을 깊이 조사해보면 사실 믿지 않습니다.

윤회와 업, 전생과 현생과 후생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 깊이 믿지 않습니다.

내생을 믿고, 붓다의 가르침의 일정부분을 믿는다고 하면, 사실 때려칠 직업들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어부들......원양어선 종사자들........술집.......가게에서 술장사.......여관업 등등...........

 

예전에는 옷감이 없고 비싸도, 여성들이 옷으로 가렸는데, 눈만 떠서 티브나 길거리를 지나면 몸을 노출 시키는 짧은 옷들, 달라붙는 옷들, 레깅스라고 하나요?.....

이런것들이 더 비싸고 잘 팔리는 감각을 유혹시키는 곳에 우리의 마음은 길들여 집니다.

오계를 지킬라고 하지만, 회사생활하기에 술을 끊기가 쉽지 않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는 데, 오계를 지킬라고 하면 직장을 때려쳐야 합니다......

사실 경전을 읽고 보고 믿는 다면서도, 사실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은 경전을 믿지 않습니다...

단지 믿는다고 여기는 것 뿐이지요.........착각하는 것이지요.....

 

만약에 우리가 자신의 전생정도를 보고, 자신의 다음의 후생정도를 볼수 있는 신통을 가질 정도의 선정에 능숙하게 숙달되었다고 칩시다.......

술을 먹을 정도의 직장, 술을 팔아야 하는 가게, 물고리를 자는 원양어선의 선장..등등

오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할까요?.......

가족에 대한 걱정, 현재 자신에 대한 처지에 대한 비관, 현재 자기자신에 대한 득의 만만함..........이런것에 집착하는 것들이 많이 사라질 겁니다........

 

너도 나도 다 머리 깍고 수행하러 가지 않을까요?....

불법의 위대성은 세간의 진리, 세간의 종교로 그 어떤 것으로도 포용할수 없습니다...

축적승, 권승들이 자신의 전생과 자신의 내생을 알 정도의 수행을 해서 알고 보면 저럴까요?.......

지옥에 가 있을때는, 때는 이미 늦으리.................가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반적인 의식이라는 , ...............사실 식...........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이 식 이라는 놈이 다 전도시키는 것입니다.......

이 말썽장이고 심술부리고 사고치는 이 식이라는 주범을 감시하고 제어하고 통제하는것이 관찰자로서 자기 자신의 내부에   cctv를 다는 것이지요.....

좋은 기능을 갖고 있는 씨시티브는 나쁜일을 하는 범죄자가 될때, 말을 해줍니다.

그것 나쁜짓이다..이러이러하다..........경전에의하면, 불법에 의하면.........비싼기능을 장착한 씨씨티브일수록 더 높은 수준의 충고와 조언과 지혜를 일깨워줍니다.

이것이 관찰자로서의 지켜보기 사띠와   이해와 앎이라는 삼빠잔나가 함께 간다라는 말입니다......사띠는 단순히 지켜보기가 아닙니다........사띠는 깊어지면 고요와 삼빠잔나라는 지혜를 가지고 옵니다.....

 

우리는 우리마음에 우리 자아라는 에고에 씨씨티브를 사실 달고 있지 않지요.

동성애의 결혼이 일상화되갈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거 다 감각적 욕망이거든요........

이 감각적욕망이 존재를 만들어가는 제일 앞장 선 주범이고, 집착을 만들어내는 제일 나쁜 놈이거든요.......

우리는 이런 도덕성이 붕괴되어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불법을 안다는 것,또 불법에서 정법을 알고 배우고 수행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선업의 열매입니다.......

 

다시.....8정도수해잉 구체적으로 자나, 선정증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안되니, 이름있는 미얀마의 사야도가, 위빠사나 선정 4단계.......이런 쓸데없는 법문을 하는 것입니다.......

색계 4선과 위빠사나 선정4단계를 비교한 글을 보고 개인적으로 ...............햇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이론에 의해서 실수행을 짜맞추려는 패햬라고 봅니다....

선정이라는 자나는 오감이 없는데.........마음만이 있는 상태인데.......위빠사나 4선이라고 해서, 위빠사나의 16단계 지혜를 색계 4선으로 대치하려는 법문....

교학에 정통한 분인데, 수행도 겸비한 분일텐데.... ..

사람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됩니다.........

 

8정도의 색계4선후, 사실 본격적인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이 이루어진다고 개인적으로봅니다..............그것이 무색계처를 거쳐, 상수멸로 들어가고 나오는 양면해탈자 일테고, 색계 선정 후 위빠사나 통찰지로 깨달음을 얻은 혜해탈자라고 봅니다.

선정증득없는 혜해탈만으로는 진정한 무상,,무아를 알기가 힘들 것이라 개인적으로 여깁니다....

 

쓸데없이 장황하게 왓다리 갓다리 썻는데요.

선정을 얻는 것이 사실 붓다의 실수행에서의 첫번째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바탕은 계율수지와 일상에서의 사띠 수행이고요...

 

존재의 삼특상인, 무상, , 무아라는 삼특상을 대승에서는 상,,,정이라고 햇습니다...........

열반을 실체화시키는 것은 마음을 실체화시키는 것 그 이상으로 붓다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알수 없다...........아무것도 없다.......................아무것도없음의 행복이다...

탐진치의 소멸, 고통의 근원지의 소멸, 고통의 싹의 소멸,....완전한 행복입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하니까..........초기불자들은 무아를 열반으로 착각합니다........

 

무상과 고는...........조건 지어진.................것들로........

 

무아는 제법무아로.......................유위법, 무위법을 다 포함하는...........

그래서 혹자는 무아를 비아로, 내가 아닌, 자아가 아닌 그 무엇이 있다..........단지 내가 아니다..........로 원래의 기만된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쓸데없는 노력을 합니다........

 

무아가 단순히 유위법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반도 무아입니다.....비아가 아닙니다.....

그러나 무아가 곧 열반이 아닙니다........

무상,, 무아는 열반으로 인도하는 수레, 고속도로, 방법이지..........

무아가 제법무아라고 해서 무아가 열반은 아닌것입니다........

열반을 알수 없다..........체험해라............

사실 무아자체도 다 초워랳버린 조건없는 완전한 행복이 열반입니다......

그 나머지들은 다 유사 선정이고, 다 유사 열반입니다.......

행복........지복/ 평화..............완전한 행복..........입니다.

 

무상해탈을 통해

무원해탈을 통해

공해탈을 통해.

 

즉 무아는 열반이 아닌, 열반으로 가는 방법, 길 입니다.

열반을 뭔가가 있다라고 한다면, 유아, 유론에 사로잡혀 붓다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외도가 되는 겁니다...

단지 알수 없다, 체험해라.고통의 소멸이다........차라리 완전한 행복이다......

조건을 벗어낫다.......

 

이고득락으로.............완전한 행복.......

생각이 끊어진 이상한 상태에 있던 체험을 열반의 체험이라고 하는데, 99.99가 다 귀신굴에 들어간겁니다........무기공이고, 바왕가 의식입니다....

열반은 그런 단순한 체험이 아닙니다....

자신이 잘 알텐데요........자신의 번뇌가 깨어졌음을...

이런 주장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그래서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겁니다.

의심하고 점검하십시요........모든 면을....

완전한 믿음보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사람에게 하는 것이 나을듯합니다.

무아는 방법이라는것, 무아가 곧 열반은 아니라는 것.

쓸데없는 소리로 중언부언했나요?

취사선택하시기를......

 

 

3) 일상에서 수행하기

 

그러나 보살행이라는 미명하에, 구체적인 보살을 만들어 놓은 근본적인 이유가 사실 아라한을 참칭,모독하기 위한 것이 거든요.

2600년 전에 붓다는 오직 한분입니다. 대 아라한이십니다. 결국 아라한들을 부정하는 어떠한 시도는 결국 불법의 정법을 해칠수 밖에 없는 것 쪽으로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도 사실 형성작용이라는 상카라의 작용이라 볼수 있습니다.

 

결국 아라한의 권위를 부정하는 보살 수행이, 근레에 붓다로 살자라는 붓다수행으로 또   만들어져 갑니다.

 

타종교에서 볼때는 별 차이 없는데, 이면을 아는 이들이 보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으니, 정법에 가까우신 분들이 이의를 제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웃긴 것은 붓다로 살자.....붓다처럼 살자.......라는 양쪽의 주장에 대해서

붓다를 더 정확히 아는 분들의 주장인 붓다처럼 살자라고 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하신 분들이   승납이 더 짧은 출가자라는 것........

 

한국불교의 현주소 아닐까요?....승납이 더 많으신 구참 승려가 붓다에 대해서 더 모른 다는 것이.........

이제는 알때가 되엇을 텐데, 아직도 무엇이 붓다인지, 붓다의 정법이 무엇인지, 붓다의 계율준수의 힘이 승가를 보호하는 힘인줄을 모르는 것이 한국 불교의 현주소입니다.

 

사실 나는 실론섬님과 다르게, 권승과 축적승들 다 공기 좋은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으면 좋겠어요, 수행을   하든, 거기서 축적을 하든, 입장료를 받는.........

 

사실 백주 대낮에 그것도 종로에서 중들의 행패가 전파를 타고 뉴스를 탈때, 창피하거든요.이건 출가자라는 승려들이 붓다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행동만 해서 뉴스지면을 장식하고 있으니.....

 

또 이와 반면에 대승의 순수한 소수의 스님들을 제외 한, 일부 몰지각한 초기불교의 명상인 호흡명상의 선정을 가르친다라는 핑계로 결국 장사하는 대승의 중들과 거기에 놀아 나는 어설픈 아줌마 보살들......

 

이런   중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초기불교명상을 이용해서 축적을 하고 노후보장용 선원을 만들고, 헛소리로 방송에서 마케팅선전 하면서, 순수하지 못한 장사꾼짓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붓다가 돈 받고 명상을 가르쳤습니까?......가서 법문보면 바라이죄에 해당되는 것들이던데, 멀 체험한 척 하는 헛소리를 하는지....

사실 이런 자 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대승의 승복을 입고 있어도, 순수하게 자신의 배움을 가르치는 극히 소수의 존경스러운 스님들도 있지요.

 

그래서 합리적인 점검과 의심을 해야지, 출가자라고 함붐로 사람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됩니다. 벌여놓은 일들을 보면 대강 다 현실적으로도 다 짐작 할수 있습니다.

 

사실 타종교, 기독교등의 신자들을 불교도로 오게 하는 능력이 한국의 대승에는 별로 없습니다.

순수 위빠사나 명상의 전파가 기독교등 타종교의 신자들이 작은 체험을 통해 불교도로 오게 할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매일 하느님과 예수님과 대화하는것이 아닌데, 불교명상은 마음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자들에게 직접 체험해보게 하거든요. 이것이 세존의 담마의 위대함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적용되는 담마를 몸과마음을 통해서 작은 체험을 갖게 하는 것.....

불교명상의 저력이지요....이 저력이 불교의 지평을 한국에서 더 넓힐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호국불교라는 것이 사실 말이 됩니까?. 승복을 벗고 나서 전쟁에 참여했어야지...

 

불교명상의 작은 체험은 붓다에 대한 알고싶음으로 가서 경전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붓다를 많이 알게 되면, 붓다에게 빠져버릴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수행은 점점 더 발전되어 갈수 밖에 없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위빠사나 수행법을 가르친 마하시 사야도는 대중적으로 쉽게 접할수 있는 불교명상법을 전파한   노련한 전법가라고 생각합니다. 체험에서 오는 것은 쉽게 잊혀지지 않으니까요...결국 붓다에 빠질수 밖에 없게   되가는 과정의 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붓다와 담마가 괜히 위대한 것이 아니겠지요.

 

이런 저런 이유로, 교학과 수행은 일반 재가자도 같이 해 나가야 합니다. 또 그것으로 얻은   정신적인 능력으로 사회에 되돌려 주는 것이 바로 붓다의 자비의 실천이 되는것이라 여깁니다.

 

자기전에 호흡을 보세요.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을 보다가 잠에 들면 깊은 숙면이 됩니다. 일어나자 마자, 먼저 자신의 마음상태를 보고 잠시 앉아서 단지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을 보면 됩니다. 이것이 재가자의 하루의 죽음과 다른 하루의 태어남에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이것이 하루라는 시간동안의 재생이란 윤회가 될수도 있습니다.

머무르지도 말고, 애쓰지도 말고......

특정부위의 호흡에 집착하려고도 하지말고, 단순히 마음으로 호흡이 들어오고 나감을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본다라는 마음가짐으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과 도 압니다....

호흡을 보다가 숙면에 들때, 일어나서 바로 마음을 보면, 마음이 깨긋합니다.잠시 오분이고 십분이고 편안히 호흡을 봅니다. 호흡이 안보이면 몸의 감각을 , 마음을 봅니다.......집착함없이 일부러 뭔가를 만들려고, 뭔가를 해석하고 설명하려고 하지도 말고..........

이것이 습관이 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수 있습니다.

재가자의 수행이란 것이   별것이 아닙니다...

습관을 들이기 힘들다는 것이지, 자기전에 오분 시분, 일어나서 오분 십분........으로 습관이 들여 나가는 것........

이것이 재가자의 수행의 싹을 심는 겁니다...

나중에는 자신은 하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스스로 합니다.

마음이 자고 일어낫는데,눈뜨자마자 마음상태를 보게 하고,   스스로 앉게하고,스스로 호흡을 보게 합니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집착하지 않고, 머무려고 하지도 말고, 애쓰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습관을 들이면서, 스스로에 만족함을 부여하면서 휴식하는 것.......

이런 간단한 것으로 부터 재가자의 명상은 시작해야 합니다....

재가자의 명상이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잘때, 일어날때, 그때 잠시라도 해보십시요.

 

(지켜보면서님, 인터넷 댓글에서)

 

 

 

지켜보면서님의 글입니다. 허락 없이 옮긴 것에 대하여 용서바랍니다. 애써 작성한 글에 대하여 공유하기 위해서입니다.

 

글에서 머물지도 말고 애쓰지도 말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1권 첫 번째 경에 실려 있는 게송입니다. 태어나 삶을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어떤 태도로 수행에 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짤막한 게송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벗이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흐름을 건넜습니다.

벗이여,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흐름을 건넜던 것입니다.(S1.1)

 

 

 

2015-03-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