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진리가 우리를 고귀하게 해준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3. 20. 14:15

 

진리가 우리를 고귀하게 해준다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

 

어떻게 해서 불자가 되는가? 답은 명백하다. 삼보에 귀의 하면 불자가 된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마하나마가 부처님에게 어떻게 해야 하면 불자가 됩니까?”라며 물어 보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마하나마여, 부처님에게 귀의 하고 가르침에 귀의 하고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재가신자가 됩니다.(S55.37)”라고 말씀 하신다. 여기서 참모임은 ‘상가(Sangha)’를 말한다.

 

불자가 된다는 것은 삼보에 의지하고, 삼보에 귀의 하고, 삼보를 피난처를 삼는 것을 말한다. 이는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 뒷받침 된다. 만약 삼보에 대한 믿음이 없거나 약하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할 것이다. 부처님이 팔정도를 닦으면 해탈과 열반을 성취한다고 하였는데, 삼보에 대한 믿음이 약한 자나 없는 자는 과연 그럴까?”하며 반신반의할 것이다.

 

가르침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면 불자라 볼 수 없다.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거나 긴가 민가 하였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이 눈에 들어 올 리 없다. 그래서 업과 업에 대한 과보, 그리고 내세와 윤회에 대하여 부정적 시각을 갖는다.

 

현실주의자들은 부처님은 현세적인 가르침을 펼치셨지 내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불자라 칭하면서 이런 현실주의자들은 매우 많다는 것이다. 단지 오계를 준수하고 열심히 행복하게 잘 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 말한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와서 보라라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보여 줄 것이 있기 때문에 와서 보라 하였지 보여 줄 것이 없는데 와서 보라고 했겠어요?”라며 어느 교수는 법문에서 말한다. 초월적이고 신비한 이야기, 내세와 윤회에 대한 것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와서 보라라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다.

 

오물장 같은 견해를 가진 외도

 

삼보에 귀의한 자를 불자라 한다. 반대로 삼보에 귀의하지 않은 자는 외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보면 외도와 대화가 무수히 등장한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가 대표적이다. 이와 같은 외도와의 대화에서 부처님은 연기법 등으로 모두 논파한다. 이런 과정이 초기경전에 설명되어 있다.

 

디가니까야에서 외도 뽓따빠다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지각이 인간의 자아입니까? 아니면 지각과 자아는 다른 것입니까?”라고 물어 본다. 유행자이자 외도인 뽓따빠다가 부처님을 떠 보기 위해 넌지시 질문한 것이다. 이런 식의 질문에 대하여 주석에 따르면 오물장같은 견해를 가진 자의 질문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답변을 유도하여 모순이 발견되었을 때 궁지로 몰아 넣기 위해서이다. 만일 부처님의 사상을 논파하면 명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외도의 질문 중에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무아윤회에 대한 것이다. 이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단골로 써 먹는 주제라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모순된 답변을 유도하여 궁지에 몰아 넣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이는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믿는 유아론자에게 있어서 무아윤회는 모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anaññasaraāna)

 

삼보에 귀의 하면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않는다. 이는 자귀의 법귀의법문에서 알 수 있다. 흔히 불자들은 자등명 법등명이라 말한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가르침을 등불로 삼으라는 말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섬으로 삼으라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자귀의법귀의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귀의법귀의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은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S22:43)”로 되어 있다. 여기서 자귀의법귀의 못지 않게 중요한 말이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anaññasaraāna)”라는 말이다.

 

부처님은 왜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고 하였을까? 이는 삼보 이외에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삼보라 함은 부처님(Buddha)’가르침(Dhamma)’상가(Sangha)’를 말한다. 이 세 가지 보배 이외 어떤 것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도 해당 된다.

 

부처님이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고 하였을 때 사람도 포함 된다. 설령 그가 사쌍팔배의 성자라 할지라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으면 안된다. 성스런 상가를 구성하는 성자는 공경과 공양의 대상이될 수 있지만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아서는 안된다. 만일 성인을 의지처로 삼았을 때 어떻게 될까? 아마 부처님과 동격이 될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보는 오로지 부처님 한분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가 된 성스런 상가는 모두 동격이다. 따라서 오로지 부처님 한분에만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오직 부처님과 담마와 상가

 

오가는 길목에 중형사이즈 교회가 있다. 그 교회에 담벼락에는 일년 내내 플레카드가 붙어 있다. 항상 붙어 있는 문구는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이다. 한마디로 오직 예수인 것이다. 다른 것에 대안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어느 국가대표 축구선수는 경기가 끝난 후 “Only Jesus”라는 문구를 속 셔츠에 써 놓은 것을 보여 주는 세레모니를 하기도 하였다.

 

불자들은 삼보에 귀의함으로서 불자가 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오직 삼보 뿐이다. 삼보는 부처님과 동격이므로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길은 오직 부처님입니다라고 패러디 할 수 있다.

 

둘이서 같은 길로 가지 마라하였는데

 

불교의 목적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행복하게 잘 살면 그만이라 한다. 그러면서 전도선언에서 표현되어 있는 행복론을 근거로 한다. 그런데 스님들도 법문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S4.5)”라는 전도선언문의 문구를 들어 불교가 행복의 종교라 말한다. 여기서 안락이라 번역한 것은 빠알리어 수카(sukhā)’를 말한다. 수카에 대하여 한자어로 ()’이라 번역되고 일반적으로 행복이라 말한다.

 

그러나 놓친 것이 있다. 그것은 이어지는 문구이다. 부처님은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라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청정한 삶이란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를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탐진치로 대표 되는 오염원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부처님은 전도선언에서 중생의 이익(hitā)과 행복(sukhā)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고 하였다. 그런데 둘이서 같은 길로 가지 마라라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최근 전재성박사의 불교TV 대담프로에 따르면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교단이 성립된지 채 일년 밖에 되지 않았을 때 60명의 제자가 생겼다. 그것도 양가집 자제로 이루어진 60명의 아라한들이다. 부처님도 아라한이므로 율장에 따르면 이세상에는 61명의 아라한이 생겨났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은 두명이서 일조가 되어 떠나지 말고 홀로 떠나라고 한 것이다.

 

둘이서 같은 길로 가지 말라고 한 것은 너른 지역에 이인일조가 다니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촉박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의 자비심의 발로라 볼 수 있다. 한 곳이라도 가르침을 알려서 행복으로 열반으로 이끌기 위한 자비심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부처님도 홀로 떠났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나도 역시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쎄나니 마을로 가겠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해탈과 열반의 기쁨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초기경전 그 자체는 열반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일점에 회귀하는 것처럼 포커스가 열반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경에서는 열반이라는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하여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방법을 제시한다. 때로 해탈과 열반의 즐거움에 대해서도 알려 준다. 이렇게 본다며 초기경전 그 자체는 오직 하나의 목표, 열반으로 가기 위한 지침서이자 참고서이고 나침반이다.

 

초기경전에서 열반에 대한 묘사는 무수히 등장한다.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에서는 아름다운 게송으로 열반에 대하여 묘사 되어 있고, 상윳따니까야 1권에서도 해탈과 열반의 즐거움을 노래한 게송이 매우 많다. 쿳다까니까야의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에서는 장로빅쿠와 장로빅쿠니들이 해탈과 열반의 기쁨에 대하여 게송으로 노래한 것을 묶어 놓았다. 그 중에서도 우다나에 다음과 같은 열반에 대한 묘사가 있다.

 

 

Yattha āpo ca pahavī 

tejo vāyo na gādhati,
Na tattha sukk
ā jotanti 

ādicco nappakāsati,
Na tattha candim
ā bhāti

tamo tattha na vijjati.

 

Yadā ca attanā vedī 

muni monena brāhmao,
Atha r
ūpā arūpā ca

sukhadukkhā pamuccatī"

 

[세존]

“물도 없고 땅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다.

거기에는 별도 반짝이지 않고

태양도 비추지 않는다.

또한 거기에는 달도 빛나지 않고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자인 바라문이 스스로

자신의 체험으로 알면

그는 물질계와 비물질계,

즐거움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리.

 

(Bāhiyasutta-바히야의 경, 우다나 Ud1.10, 전재성님역)

 

 

 

 

 

 

라따나경, 멧따경, 망갈라경에서도

 

불교의 목적이 열반이라는 것은 테라와다불교의 예불문이자 생활경전인 라따나경, 멧따경, 망갈라경에서도 표현 되어 있다.

 

라따나경에서는 그에게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은 없으니,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Sn2.1)”라 하였다.

 

멧따경에서는 삿된 견해에 의존하지 않고 계행을 갖추고, 통찰을 갖추어 감각적인 욕망을 다스리면, 결코 다시 윤회에 들지 않을 것이옵니다.(Sn1.8)”이라 하였다.

 

망갈라경에서는 감관을 수호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n2.4)”라 하였다. 이렇게 테라와다 예불문에서는 가르침을 실천하여 궁극적으로 열반을 성취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불교와 외도의 다른 점은?

 

불교는 열반의 종교이다. 이는 타종교와 가장 차별화 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외도와의 차별이다. 왜 그런가? 외도에는 열반이라는 말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삼보에 귀의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삼보에 대하여 반신반의하거나 긴가민가 하는 것이 아닌 확고한 믿음을 말한다.

 

어느 종교이든지 어느 사상이든지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불교는 행복 너머가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행복을 말하지만 행복 너머, 외도들이 넘보지 못하는 것, 즉 열반이 있다는 것이다.

 

외도들도 행복을 이야기한다. 보시하고 지계하면 불자들만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외도들도 천상에 태어난다. 불교에서 말하는 오계라는 것이 불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살생하지 말라등의 살도음망주라 표현되는 오계는 모든 종교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사회규범이고 도덕적 가치관이다. 그럼에도 오계가 마치 불교의 전유물인 것처럼 말하는 자들도 있다.

 

오계를 지켜야 불자라 볼 수 있을까? 일부만 맞다고 볼 수 있다. 오계는 불자에게 있어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그렇다면 충분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삼보에 대한 믿음으로 불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삼보에 대하여 반신반의 하면서 오계를 강조한다면 불자라 보기 힘들다.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 있다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오로지 행복론만 이야기 한다면 핵심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불교가 타종교와 가장 차별화 되는 것이 무아사상이고 열반론이다. 만일 이 두 사상을 이야기 하지 않고 오계준수나 행복론을 이야기 한다면 외도나 다름 없다.

 

외도들도 오계를 지키고 보시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 그러나 불교가 외도와 다른 것은 바로 무아사상과 열반이다. 그런 불교사상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부처님은 45년동안 전법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84천 법문이라는 방대한 가르침을 남겼다. 오늘날 책장 가득히 채워져 있는 빠알리니까야 번역본이 그것이다.

 

한 때 방 삼면에 책으로 채웠지만

 

사무실 한쪽켠 책장에 빠알리니까야로 가득하다. 이외 다른 서적은 비치 하지 않았다. 빠알리니까야가 있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방안 벽면에 책으로 가득하였다. 책장이 부족하여 벽돌을 쌓아 판대기를 대고 책장으로 활용한 적도 있다. 방안면이 모두 책장으로 둘러 쌓여 있었을 때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책을 사 모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도서관을 활용하였다. 주말에 마치 쇼핑하듯이 십 여권을 마구 고른다. 그러나 나중에 읽어 보면 반도 건지기 힘들다. 대부분은 건성으로 본다거나 아예 읽어 보지도 않는다. 한때 그런 방식으로 수년 간 책을 빌려 본적이 있다. 거의 천권에 이른다.

 

최근에는 책을 사지도 않고 빌려 보지도 않는다. 빠알리니까야 이외 책은 거의 없다. 빠알리니까야를 접하고 나니 다른 책을 보지 않게 된 것이다. 평소 궁금하였던 것이 니까야에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삶의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마다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하며 초기경전을 열어 본다. 특히 법구경을 열어 보면 금방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불교를 접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이전에는 참으로 궁금한 것이 많았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이다. 특히 자신의 힘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난감 하였다.

 

문제라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해결된다. 그러나 해결이 되지 않는 것도 있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당면하였을 때 기존 방식으로는 해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불교에 입문하게 되었다.

 

불교에 입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불교교양대학 동기생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대부분 사연이 있었다.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여 분을 참을 수 없어서 입교하였다는 사람도 있고, IMF로 길거리에 나 앉게 되어 마음을 안정하고자 들어 온 사람도 있었다. 이외 갖가지 사연을 들을 수 있었는데 어찌 보면 아쉬워서들어 온 케이스라 볼 수 있다.

 

사람이 편안하고 행복하면 굳이 종교를 가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위기에 닥치면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종교에 귀의한다. 평소에 찾지 않던 교회나 절을 찾는 것도 아쉽기 때문이다.

 

입시철이 다가 옴에 따라 자녀가 좀더 나은 성적을 받기 위하여 좀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하여 절을 찾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대부분 말할 수 없는 고민을 안고 찾아 온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유명기도처가 막다른 곳에 있는 이유

 

사람들은 살아 가면서 수 많은 문제에 직면한다.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또 문제가 생겨난다. 대부분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또 다쳤다든가 하여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해결되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 생노병사라 볼 수 있다. 또는 장애가 발생한 경우도 있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절대자에게 의존하고자 한다. 그래서 다니지 않던 교회에 가게 된다. 그리고 한번도 나가지 않던 절에 가서 기도를 한다. 세월호 유가족중의 어떤 이는 사고가 일어나자 한번도 찾지 않았던 하나님을 찾고, 부처님을 찾았다는 말을 하였다.

 

종교를 가질 때는 누구나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지금 잘 살고 있는데 교회나 절에 가서 기도할 이유가 없다. 성소에 가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지금 상태가 매우 절박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불교의 유명 기도처는 막다른 곳에 있다. 바다를 면한 곳, 절벽, 동굴 등 막다른 곳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막다른 곳에 몰린 사람이 막다른 곳에서 기도를 하면 기도발이 더 잘 먹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막다른 곳에 몰렸을 때,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을 때 절대자를 찾고 부처님을 찾는다. 그래서 한번도 나가지 않았던 교회나 절을 가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교회나 절에 다니는 사람 중에 이유 없이 다니는 사람은 없음을 말한다.

 

누구나 말 못할 고민을 안고 살아 간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있을 때 교회나 절을 찾게 될 것이다. 이는 무언가 해법이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서라도 해결코자 하는 것이다. 아마 생노병사 문제가 가장 큰 것이라 본다.

 

운명을 바꾸어 놓은 하루 밤의 대화

 

사람들은 절박한 상황이 아니면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그제서야 움직인다. 더구나 나에게 불이 떨어졌을 때 하필이면 나에게?”라며 의문을 품는다.

 

그렇다고 해결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속으로만 끙끙 않지만 좀처럼 해법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특히 불행에 닥쳤을 때 그렇다. 이럴 때 종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런 이야기를 명진스님의 책 스님은 사춘기에서 보았다.

 

최근 명진스님으로부터 책을 한권 받았다. 아는 지인과 함께 스님의 거처를 방문하였는데 친필사인과 함께 선물로 준 것이다. 그런데 책을 열어 보면 스님의 출가이유가 실려 있다.

 

스님은 고등학교 시절 입시를 앞두고 절에 공부하러 갔다고 하였다. 그곳에서 운명을 바꾸어 놓은 어느 스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님은 어떻게 해서 출가를 하였나요?”

 

출가자들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버스나 열차를 타고 가다보면 옆자리에 앉은 사람 중에 열에 아홉은 묻는다.

스님이 나를 한참 건너다보더니 물었다.

 

학생은 뭐 때문에 절에 와 있소?”

저는 대학 입시 준비하려고 와 있습니다.”

 

대학은 왜 가려고 합니까?”

좋은 데 취직하려고 가는 거죠.”

 

좋은 데 취직해서 그 다음에는?”

, 장가가서 자식 낳고 그렇게 사는 거죠.”

 

그렇게 살다가 나중엔 어떻게 됩니까?”

 

조금 짜증이 나려고 했다. 다 알고 있는 걸 왜 묻는단 말인가. 그래서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렇게 살다가 죽는 거죠, .”

그러면 그렇게 살다가 죽으려고 여기 와서 공부하는 겁니까?”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말이 좀 안되는 것 같기도 하고 갑갑하기도 하고 딱히 뭐라고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찜찜해서 앉아 있는데 스님이 불렀다.

 

학생?”

.”

 

무엇이 라고 대답했소? ‘라고 대답한 놈이 뭐요?”

 

누가 이 물음에 쉬이 대답할 수 있겠는가. ‘나는 누구인가?’이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계속 이어져 내려온 존재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다.

 

(스님은 사춘기, 25-26, 명진스님)

 

 

명진스님의 글에 따르면 매우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여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래 힘들게 살았는데 그때 마다 나만 왜 이렇게 불행할까?”라며 세상을 원망하며 살았다고 하였다.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진 채 교회에 가서 물어 보면 하나님이 시험에 들게 하기 위해서 시련을 주는 것이다라는 말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절에서는 전생에 자기가 지은 업을 지금 자기가 받는 거지라고 말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스님에 따르면 자업자득설법이 더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아마 그런 연유로 방학 때 절에 가서 공부하게 되었을 것이다.

 

남 보다 더 잘살기 위하여?

 

스님의 글에 따르면 절에서 하루 밤이 스님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어느 날 지나가던 객승과 한방에 자게 됨에 따라 주고 받은 대화로 인하여 결국 수행자의 길에 들어 섰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마디 말로 인하여 인생의 항로가 바뀐 것임을 알 수 있다.

 

중학교 때의 일이다. 아마 중학교 일학년 때라 기억한다. 윤리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각자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은지에 대하여 써 내라고 하였다. 그 때 당시 아마 과학자라고 써 낸 것 같다.

 

선생님은 학생들의 장래 희망을 하나 하나 읽어 주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탐정이다. 어떤 친구가 장래 희망을 탐정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아마 탐정소설이나 만화를 많이 보았던 것 같다.

 

어떤 친구는 장래 희망이 검사이었다. 검사가 무엇이지 잘 모르던 시절에 검사라 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검사라는 직업이 꽤 높은 직업이고 가기 힘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검사가 되고 싶다는 학생에게 선생님이 학생은 왜 검사가 되고 싶지?”라고 물었다. 이에 학생은 남보다 잘살기 위해서요.”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지적 사항이 나왔다. 남보다 잘 살기 위한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잘 사는 것과 남보다 잘 사는 것과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다.

 

중학교 일학년 때 검사의 꿈을 꾸었던 친구가 검사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검사가 되었을 것이라 본다. 남들은 꿈도 꾸지 못하고 그런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던 때에 남보다 더 잘살기 위하여 검사가 되고 싶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남보다 더 잘 산다는 것은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취직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예쁜 배우자를 만나서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오래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본다. 대부분 이런 삶의 방식을 따라간다. 그런데 명진스님은 그날 밤 어느 객승과의 대화를 통하여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그날 밤의 이야기를 듣고 발심출가 하여 지금까지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상가교수의 강의를 듣고

 

명진스님은 어느 객승과 하루밤을 보내면서 발심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것도 19살 때이다. 그래서 수행자로서 삶을 살고 있는데, 만일 그 스님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남들처럼 대학에 들어가서 취직하고 결혼하여 아들딸 낳고 잘 살았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항상 잘 사는 것은 아니다. 때로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못할 고민을 안고 살고 죽지못해서 사는 것이다. 남 보다 더 잘 살기 위하여, 행복해지기 위하여 삶을 살아 왔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절대자를 찾고, 절에 와서 부처님을 찾는 모양이다.

 

불교에 입문한지 11년이 되었다. 물론 중학교 시절에 종립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불교와의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후 이런 일 저런 일 겪고 난 후에 풀리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여 스스로 불교에 입문하게 되었다.

 

불교에 입문한 이후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불교와 관련된 이런 책 저런 책을 많이 보았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법문도 들어 보고 논문도 읽어 보았다.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스리랑카 교수의 영어강의 이었다. 불교TV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아상가교수의 초기불교강좌에 대한 것이다.

 

아상가 교수는 사성제에 대하여 매우 실감나게 설명하였다. 비록 자막으로 접한 것이긴 하지만 이제까지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하였다. 말 한마디에 인격적 변화를 일으켜 운명이 바뀐다는 말이 있듯이 아상가 교수의 강의 에서는 왜 불교가 위대한 종교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인 사성제가 왜 진리인지 알게 해 주었다.

 

진리가 우리를 고귀하게 해준다

 

아상가 교수의 강의를 듣고 소감문을 여러 차례 블로그에 올렸다. 그 중에 고성제에 대하여 오취온(五取蘊) 고통의 근원인 이유, 아상가교수의 사성제강의 고성제(2010-08-04)’라는 제목으로 올린 바 있다. 아상가 교수는 사성제에 대하여 고귀하고 성스런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 하였다.

 

 

첫째,

아리야삿짜는 고귀한 분들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고통을 초월한 부처님과 아라한을 포함하여

고귀한 분들이 깨달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둘째,

아리야삿짜는 진리자체가 고귀하고 위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귀한 진리라 한다.

 

셋째,

아리야삿짜는 이 진리가 우리를 고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를 고귀한 자리로 올려 놓아 주기 때문이다.

 

(불교영어도서관특강, 근본불교의 가르침, 3강 사성제의 가르침(1) 2008-01-10)

 

 

사성제에 대하여 아리야삿짜라 한다. 여기서 아리야라는 말은 고귀한, 성스런 뜻이다. 이에 대하여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세 번째 항의 아리야삿짜는 이 진리가 우리를 고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를 고귀한 자리로 올려 놓아 주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누구나 사성제의 진리를 실천하면 고귀한 자가 될 수 있다는 짤막한 말에 필이 꼽혔다.

 

앞으로만 구르는 진리의 수레바퀴

 

아상가교수의 강의는 전에 들어 보지 못한 것이다. 우리나라 스님들에게서는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내용이다. 그래서 강의내용을 노트에 녹취하고 이를 글로 작성한 것이다. 특히 고성제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전차의 비유가 와 닿았다. 왜 고성제가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일 수밖에 없는지 명확하게 알게 해 주었다. 강의를 듣고 요약하여 작성한 글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아리야는 성스럽다, 고귀하다, 거룩하다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말씀 중에 84천법문이 있지만 ‘아리야’자가 붙는 것은 사성제와 팔정도 둘 뿐이다. 그 중에 사성제는 진리 중의 진리로서 가장 고귀하고 성스런 진리이다.

 

이와 같은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하기 위하여 부처님이 법의 바퀴를 굴렸는데 최초로 법의 바퀴를 굴린 경전을 초전법륜경이라 한다. 여기에서 법의 바퀴를 굴린다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고대 인도에서 바퀴는 왕의 ‘무장장갑차’를 상징한다. 이 것은 왕의 권위를 나타 내는데, 왕은 언제나 전쟁을 하여 합병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어느 왕이 바퀴가 달린 장갑차를 몰아 이웃 나라로 진군 할 때,  이를 저지하거나 막지 않는다면 그 왕을 받아 들인다는 의미를 가졌다. 이것이 인도의 오랜 관습이었는데, 부처님도 전차의 수레바퀴를 굴릴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태자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장갑차가 아닌 법의 바퀴를 굴리기로 한 것이다.

 

부처님이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라고 말하며 사성제를 설하였을 때,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삶의 현실이 아니어요”라고 말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담마()의 바퀴를 누구도 막지 못하고, 되돌려 보낼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현실과 직면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최초로 법의 바퀴를 굴린 이래 지금까지 법의 바퀴는 끊임없이 굴러가고 있다. 바로 지금 사성제를 언급 하는 것도 부처님의 법의 바퀴가 마치 전차처럼 앞으로 굴러 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진흙속의연꽃, 오취온(五取蘊) 고통의 근원 이유, 아상가교수의 사성제강의 고성제(2010-08-04))

 

 

고성제에 대한 설명에서 전차바퀴의 비유를 들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은 진리의 바퀴를 굴렸다는 것을 말한다. 그 진리의 수레바퀴는 오로지 앞으로만 전진하는 바퀴라는 것이다. 후진은 물로 옆으로도 갈 수 없다. 오로지 앞으로 나아 갈 수밖에 없는 진리의 수레바퀴를 말한다.

 

괴로움이 성스런 진리일 수밖에 없는 이유

 

부처님이 사성제라는 진리의 수레 바퀴를 굴렸을 때 아무도 막을 자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마치 전륜왕이 전차부대 등의 사군을 이끌고 진격해 들어 가는 것과 같다. 전륜왕이 전차 바퀴를 굴릴 때 상대방은 맞서 싸우든가 성문을 열어 주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할 것이다.

 

전륜왕이 막강한 사군을 동원하여 성채로 진격하였을 때 결국 성문을 열어 주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사성제의 진리로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렸을 때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라라고 설하였을 때, 누군가 그것은 사실이 아니에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리를 진리로서 받아 들여 졌을 때 법의 수레바퀴는 굴러 가는 것이다. 그런 진리의 수레바퀴는 부처님이 오비구들에게 처음 굴리 이래 지금까지 굴러 왔다. 후진도 없고 옆으로 가지도 않고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 가는 진리의 수레바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Rājāhamasmi sela                

dhammarājā anuttaro,            
Dhammena cakka
vattemi         

cakka appativattiya.         

 

“셀라여, 왕이지만 나는

위 없는 가르침의 왕으로

진리의 바퀴를 굴립니다.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

 

(셀라경, 숫따니빠따 Sn3.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왕이라 하였다. 그런데 진리의 바퀴는 결코 거꾸로 되돌릴 수 없는 바퀴라 하였다.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 가는 바퀴를 말한다. 왜 그런가?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도 사성제의 진리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성제로 요약된다. 팔만사천 법문이 모두 사성제로 포섭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성제의 진리는 초전법륜경에 설명되어 있다. 불자라면 반야심경 외우듯이 초전법륜경에 실려 있는 사성제를 외워야 할 것이다.

 

윤회하지 않음을 스스로 알게 되었을 때

 

사성제에서 강조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라 볼 수 있는 열반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멸성제에서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S56.11)”라 하였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닦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도성제이다. 도성제에서는 올바른 견해 등 팔정도를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닦았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완성된다.

 

팔정도를 닦았을 때 모든 오염원이 소멸된다. 완전하게 청정하게 되었을 때 스스로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akuppā me ceto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S56.11)”라는 아라한 선언을 하게 된다. 이는 해탈했음을 스스로 아는 ()과 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완전히 청정하게 되었을 때 다시는 윤회하지 않을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이렇게 초전법륜경에서는 열반이 불교의 목적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표현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교가 행복의 종교라거나 현세에서 계나 지키며 잘살면 그만이라 한다면 외도라 볼 수 있다.

 

불교, 뭐 별거 아니네

 

외도들도 불교를 공부하고 있다. 아마 제대로 공부하면 삼보에 귀의하며 불자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단지 지적호기심으로 또는 학문적으로 접근한다면 불교, 뭐 별거 아니네하며 돌아 설 것이다.

 

이는 불교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불교에 대하여 행복론적으로 접근하였을 때 아무런 차별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성제의 진리를 알게 되었을 때 불자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사성제의 진리는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진리의 수레바퀴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믿는 목적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행복이다. 그러나 행복이 불교의 최종목적이 아니다. 최종 목적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

 

청정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가 어느 정도인지 자신이 얼마나 청정한지는 자신이 잘 안다. 마침내 완전히 청정하게 되었을 때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스스로 아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외도들은 이런 불교의 목적을 모른다.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을 위하여

 

불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양가집 자제들이 앞다투어 출가 하였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정형구를 볼 수 있다.

 

 

그는 오래지 않아, 그러기 위해 양가의 자제들이 당연히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그 위없는 청정한 삶을 바로 현세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 그는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곧바로 알았다.”(S6:3)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적호기심이나 학문의 대상이 아니다. 또 현세에서 행복하게 잘살면 그만이라는 행복론도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 막다른 곳에 몰린 사람, 생사의 기로에 있는 사람 등 절박한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종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사성제의 가르침은 인식의 전환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삼보를 의지로하고, 삼보를 귀의처로 하고, 삼보를 피난처로 하는 불자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경전은 성보나 다름 없다.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졌을 때 경전은 맹신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다.

 

부처님께 안식처를 얻었네

 

기로에 선 사람,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 막다른 곳에 다다른 사람에게 사성제는 구원의 메시지이다. 더구나 가르침을 실천하여 완전하게 청정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곧바른 앎이 생겨 난다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사실을 사실로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외도임에 틀림 없다.

 

사성제를 알면 불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죄를 많이 지은 흉적이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안식처가 된다. 그래서 앙굴리말라는 커다란 폭류에 휩쓸렸으나 부처님께 안식처를 얻었네.(M86)”라 하였다.

 

 

1. 

예전에는 방일하여도

지금은 방일하지 않은 자

그는 세상을 비추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2.

저질러진 악한 일을

선한 일로 덮으니

그는 세상을 비추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3.

참으로 젊은 수행승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그는 세상을 비추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4.

나의 적들은 법문을 들어라.

나의 적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라.

나의 적들은 가르침으로 이끄는

훌륭한 사람들과 사귀어라.

 

 

5.

을 설하고

원한이 없는 것을 찬양하는 자에게

올바른 때에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따라 수행하라.

 

 

6.

관개하는 사람은 물꼬를 트고

활 만드는 자는 화살촉을 바로잡고

목수는 나무를 바로잡고

현자는 자신을 다스린다.

 

 

7.

어떤 사람들은 몽둥이나

갈구리나 채찍으로 다스린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이

몽둥이 없이 칼 없이 다스려졌네.

 

 

8.

예전에 살해하는 자였던 나는

이제는 살해하지 않는 자이네.

오늘 나에게 진실한 이름이 있으니

아무도 ‘해치지 않는 자’였네.

 

 

9.

예전에 나는 흉적으로서

앙굴리말라라고 알려졌다.

커다란 폭류에 휩쓸렸으나

부처님께 안식처를 얻었네.

 

 

10.

예전에 나는 손에 피를 묻히는

앙굴리말라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존재의 그물을 끊고

내가 귀의한 것을 보라.

 

 

11.

이와 같이 나쁜 곳으로 이끄는

많은 악업을 짓고

아직 그 업보에 맞닥뜨리지만

부채 없이 음식을 즐기네.

 

 

12.

 

어리석어 무지한 사람들은

오로지 방일에 탐닉한다.

슬기로운 자는 방일하지 않기를

마치 최상의 보물을 수호하듯 하네.

 

 

13.

방일에 빠지지 말라

감각적인 쾌락에서 기쁨을 찾지 말라.

방일하지 않고 명상하는 자

크고 한없는 즐거움을 얻으리라.

 

 

14.

밝혀진 가르침들 가운데

그 최상의 것에 나는 도달했다

내가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나는 환영하여 거절하지 않네.

 

 

15.

나는 세 가지 밝은 지혜를 얻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성취했다.

내가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나는 환영하여 거절하지 않네.

 

(Agulimāla sutta- 앙굴리말라의 경, 맛지마니까야 M86, 전재성님역)

 

 

 

2015-03-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