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 부끄러움과 창피함

담마다사 이병욱 2015. 3. 30. 17:11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 부끄러움과 창피함

 

 

 

 

 

법과 제도만 있으면 사회질서가 유지될 수 있을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논란, 종교계의 범계행위를 보면 아무리 법과 제도를 잘 만들어 놓았다고 하더라도 의식이 따라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흔히 제도개혁과 의식개혁을 말한다. 제도개혁은 되었지만 의식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낮에 한 말 다르고 밤에 하는 행동이 다르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잘 만들어진 제도가 있음에도 낯부끄러운 일이 발생하는 것은 의식이 따라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것이다.

 

부끄럼과 창피함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가 히리(hiri)와 옷땁빠(ottappa)이다. 이에 대한 또 다른 한자어는 양심과 수치심이다. 한자어로는  ‘참()’과 ‘괴()’라 한다.

 

 

부끄러움=양심=히리(hiri)=()

창피함=수치심=옷땁빠(ottappa)=()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그 말이 그 말 같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악행’을 저지르는 것과 관계가 있다.

 

지금 악행을 저질렀는데 이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면 부끄러운 것이다. 그런 부끄러움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히리(hiri) 한자어로는 ()’이라 하고 또 양심이라 한다. 이렇게 내적으로 스스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을 부끄러움이라 한다.

 

창피함이란 무엇일까? 지금 악행을 저질렀다면 누군가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언제 발각될지 두려워할지 모른다. 이렇게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여 두려워하는 것이 창피함이라 한다. 그래서 창피함에 대한 빠알리어는 옷땁빠(ottappa)이고 한자어로는 ()’라 하고 또 수치심이라 한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선한 마음이다. 반면에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것은 불선한 마음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양심(hiri)과 수치심(ottāpa) 25가지 선한 마음으로 분류 되어 있다그런데 부끄러움과 창피함이라는 말은 초기경전 도처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남을 화내게 하고, 이기적이고,

악의적이고, 인색하고, 거짓을 일삼고,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 (stn133)

 

 

경에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라 하였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지금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는 자가 있는데, 그가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하여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리고 계속 악행을 해서 지탄을 받아도 그러건 말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마디로 ‘후안무치’이고 얼굴에 철판을 깐 자들이라 볼 수 있다.

 

부끄러움(양심)과 창피함(수치심)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도 같은 것이다. 만일 양심과 수치심이 없는 사회라면 어떻게 될까? 도저히 있어서는 안될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이 비일지비재하게 발생할 것이다.

 

친딸을 성폭행하였다는 뉴스가 간간히 있는데 이처럼 근친상간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비만 오면 물고기들이 떼 죽음 당하였다는 뉴스를 본다. 비가 올 때 몰래 오폐수를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 역시 양심과 수치심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심이 실종 되고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그런 사회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도박을 일삼고 더구나 매관매직까지 하는 스님들이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창피함을 모르기 때문에 천박한 행위를 서슴없이 한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세계에 따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믿음이 없는 자는 믿음이 없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창피함을 모르는 자는 창피함을 모르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배움이 없는 자는 배움이 없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게으른 자는 게으른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새김이 없는 자는 새김이 없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지혜롭지 못한 자는 지혜롭지 못한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s14.17)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끼리 어울리고, 창피함을 모르는 자는 창피함을 모르는 자와 관계를 맺는다. 이렇게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철면피들이 모였을 때 ‘개판’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한국불교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에게 정복당해 있다. 그래서 아무리 잘못을 해도 처벌하지 않는다. 도박을 해도, 술판을 벌여도, 은처를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거짓과 위선과 모순을 고발하면 오히려 보복을 당한다. 이렇게 양심 없고 수치심이 없는 자들에 정복당한 한국불교는 ‘천박한 자들’의 것이다. 그래서 언제 또다시 국민들의 지탄을 받을 지 알 수 없다.

 

만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회라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장이 될 것이다. 그런 사회는 다름아닌 짐승의 세상이다. 약자는 잡아 먹히고 강자는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세상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은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다. 그리고 양심과 수치심은 인간사회를 수호 하는 두 가지 법이다.

 

 

2015-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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