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 ‘바른불교 재가모임’의 삼귀의제창

담마다사 이병욱 2015. 4. 1. 10:41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 ‘바른불교 재가모임의 삼귀의제창

 

 

바른불교 재가모임이 탄생하였다. 우희종교수의 주도로 결집된 새로운 재가단체이다. 정식명칭은 청정불교를 위한 바른불교 재가모임이다.

 

재가불교단체 창립에 참여하고

 

3 31일 저녁 7시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린 창립행사에 참여 하였다. 참여 하게 된 동기는 권유에 의한 것이다. 어떤 연유로 불교NGO카톡방에 초대되었고, 글로서 활동을 하다 보니 연결된 것이다. 그래서 창립을 위한 준비모임에 한번 참석하였고 이날 창립행사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두문불출하다시피 하였다. 집과 사무실을 오가는 생활만 하였다. 사무실에서는 일도 하지만 일이 없을 때는 글을 썼다. 그런 생활을 지난 10년간 해 왔다. 그러다 보니 사실상 산속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번잡한 도시에 있지만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고요한 산사, 또는 선방과 다름 없다. 그런데 인연이 되어서일까 이렇게 참여 하게 되었다.

 

불교단체에 참여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4년 불교교양대학과 인연 맺은 것을 제외하고 한번도 불교단체에 참여 한 적이 없다. 대불련 등 여러 불교단체가 있지만 한번도 제발로 찾아 간 적이 없다. 다만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한분의 스님을 제외하고 스님과의 교류도 없었다. 이렇게 불교문외한이 이번 재가불교단체 창립에 참여 하였으니 커밍아웃이라 보아야 할까?

 

참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

 

참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있다. 그것은 삼귀의문때문이다. 새로 창립된재가불교 단체에서는 삼귀의문을 바꾸겠다고 하였다. 이말에 매료 되어 흔쾌히 참여 하였다.

 

우리나라에 여러 불교단체가 있지만 아직까지 한글삼귀의문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 하였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 한글삼귀의문의 부당함을 호소 하는 명망가의 글을 본 적이 있지만 재가단체에서 이슈화 한 것을 보지 못하였다. 당연히 승가에서는 문제 삼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문제인가?

 

현행 한글삼귀의문을 보면 --이렇게 삼보에 귀의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불자라면 당연히 이와 같은 삼귀의문을 받아 들인다. 그러나 한글로 풀어 쓴 내용을 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한글 삼귀의문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이와 같은 한글삼귀의문은 법회 때 마다 사용된다. 그래서 불자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제까지 그렇게 배워 왔고 그렇게 불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말은 맞지 않다. 왜 맞지 않은가?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스님들께 귀의하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스님들께 귀의하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초기경전 어디에도 스님들, 즉 빅쿠들에게 귀의하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은 승가(상가)에 귀의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세존이시여, 이제 저는 세존께 귀의 합니다.

또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수행승의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 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다하도록 귀의 하겠습니다.” (Vin.I,16)

 

 

“마하나마여, 부처님에게 귀의 하고

가르침에 귀의 하고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재가신자가 됩니다.”(S55.37)

 

 

율장대품에서 야사가 부처님에게 삼보에 귀의 하겠다고 하였다. 이때 수행승의 참모임에 귀의합니다라 하였다. 여기서 참모임은 상가(sagha)를 번역한 말이다. 한자어로는 僧伽(승가)’라 한다.

 

재가신자 마하나마는 부처님에게 귀의 하고 가르침에 귀의 하고 참모임에 귀의합니다라 하였다. 여기서 참모임에 귀의합니다라는 말은 “sagha saraa gato hoti”이다. 상가(sagha), 즉 수행승의 공동체에 의지하고 귀의 하고 피난처로 삼겠다는 말이다. 그 어디에도 스님들, 즉 빅쿠들에게 귀의 한다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과 삼보는 동격이다

 

불자들은 삼보에 귀의한다. 만일 불자가 삼보에 귀의하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외도나 다름 없을 것이다. 왜 외도인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께 귀의하라고 한다. 대체 이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한국불교는 크게 잘못 되었다. 오늘날 스님들의 범계행위가 끊이지 않는 것도 한글삼귀의문이 잘못된 데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스님을 부처님과 동격으로 놓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삼보는 모두 동격이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는 사실상 같은 말이라 볼 수 있다. 등식으로 표현 하면 부처님(Buddha)=가르침(Dhamma)=상가(Sangha)’가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정법이 살아 있는 한 부처님은 오로지 석가모니 부처님 그 분 한 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스님들을 끼워 넣었을 때 어떻게 될까?

 

정보는 오픈 되고 공유화 된다

 

현행 한글삼귀의문은 문제가 많다. 만일 대승불교 전통만 있다면 문제삼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스님을 삼보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는 다양한 전통의 불교가 들어와 있다. 그 중에 남방불교라 불리우는 테라와다불교도 있다.

 

요즘은 빠알리니까야가 한글로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테라와다 수행법이 유행 이다. 이는 글로벌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인터넷과 정보통신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 모든 정보는 오픈되고 공유화 되는 인터넷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스마트폰 보급으로 인하여 누구나 이동중에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글로벌시대이고 정보통신 시대이다. 그래서 정보는 오픈되고 공유화 된다. 불교관련 정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이슈화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한글삼귀의문이 대표적이다.

 

스님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한글삼귀의문은 언제 나왔을까? 1970년대 초반으로 본다. 한문으로 된 귀의불(歸依佛), 귀의법(歸依法), 귀의승(歸依僧)을 한글화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이를 노래 형식으로 만든 것이 한글삼귀의문이고 현재 각종법회에서 불려지고 있다.

 

한글삼귀의문이 나올 당시에는 소수가 정보를 독점하던 시기이었다. 인터넷도 없었고 스마트폰도 없던 시대에 승가의 주도로 만들어진 것이 한글삼귀의문이다. 그렇다면 스님들께 귀의한다는 한글삼귀의문이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승가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해방후에 승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불교신문 연재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여섯째, 신도가 스님에게 삼배하는 예법을 시행했다. 당시까지도 조선조 오백년간의 억불숭유정책의 잔재가 남아 유력한 신도들은 절에 와서 스님들을 종 부리듯이 했다. 이러한 때에 스님들이 승보(僧寶)로서 삼보(三寶)라는 위상을 세우고 신도가 귀의 3배하는 의식을 마련했다. 이것은 승가의 위의를 확립하려는 고육지책이었고, 또한 스님들에게는 불법의 전승자로서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도록 하는 취지였다.

 

(봉암사 결사와 현대 한국불교의 과제, 불교신문 2291/ 11일자)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승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스님들은 사대문안에 출입할 수 없었고 천민이나 다름 없었다. 더구나 일제시대에는 육식대처가 허용됨에 따라 대부분의 스님들이 처를 두고 살았다. 이렇게 땅에 떨어진 스님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 독신비구승들에 의하여 추진 되었다. 불교사적으로 봉암사결사라 한다.

 

기사에 따르면 삼배이야기가 나온다. 신도들이 스님을 찾아 뵐 때 삼배의 예를 올린다. 그런데 삼배의 전통이 성철스님으로부터 비롯 되었다는 것이다. 땅에 떨어진 스님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본다.

 

삼배의 예는 스님을 승보로 간주 하기 때문이다. 기사에서 언급된 것처럼 스님들이 승보(僧寶)로서 삼보(三寶)라는 위상을 세우고 신도가 귀의 3배하는 의식을 마련했다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땅에 떨어진 스님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삼배제도가 만들어 졌고 또한 한글삼귀의문에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문구가 들어 갔다고 본다.

 

삼배제도와 한글삼귀의문은 폐지 되어야

 

1947년 봉암사 결사로 스님에 대한 삼배제도가 생겨났다. 1970년대 초반 승가의 주도로 한글삼귀의문이 만들어졌다. 이 두 가지 사건을 보면 공통적으로 스님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스님을 승보로 간주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과 동격의 위치에 있는 것을 말한다.

 

스님에 대한 삼배, 한글삼귀의문에서 스님들께 귀의에 대한 것은 시대가 나은 산물이다. 그 때 당시 땅에 떨어진 스님들의 권위, 승가의 권위를 살리기 위하여 고육지책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 보인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단 하루면 세계 어느 곳이나 도달 할 수 있는 글로벌시대에 살고 있고, 더구나 손바닥에 안에 누구나 컴퓨터 하나를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공유화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더 이상 은폐될 수도 없고 숨길 수도 없다.

 

구시대의 산물인 삼배제도와 한글삼귀의문은 폐지 되어야 마땅하다. 스님에 대한 삼배와 스님을 승보로 보는 귀의문으로 인하여 스님들은 부처님의 위치에 까지 올라가 있다. 이에 신도들은 스님을 마치 부처님 대하듯 한다. 그러나 스님은 수행자들이다. 수행자들은 공경과 공양의 대상이 될지언정 의지처, 귀의처,피난처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부처님이 자귀의와 법귀의를 말씀 하시면서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스님의, 스님의 의한, 스님을 위한 불교

 

삼보에 귀위함으로서 불자가 된다. 삼보는 붓다와 담마와 상가를 말한다. 이 세가지는 모두 동격으로서 오로지 석가모니 한분에 대하여 의지하고 귀의하고 피난처로 삼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한글삼귀의문에서는 스님들을 승보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신도는 스님을 부처님 보듯이 하고, 스님은 마치 부처님처럼 여긴다. 그래서일까 한국불교는 스님의, 스님의 의한, 스님을 위한 스님들의 세상이 된 것 같다.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온갖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다. 승가에서 터져 나오는 비리를 보면 일반사람들의 도덕적 평균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집단처럼 보인다. 정봉주의 전국구 생선향기에서 처럼 썩은 냄새가 천지를 진동한다. 이런 사실이 카페, 블로그, 페이스북, 심지어 카톡방 등 SNS를 통하여 급격하게 전파 되고 공유화 되고 있음에도 승가에서는 모르고 있는 듯 하다.

 

일부 권승들에 의하여 저질러 지고 있는 추문은 왜 일어나고 있을까?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먼저 들라면 스님을 승보로 간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한글삼귀의문에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문구 영향도 있을 것이다.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 놓아야

 

스님을 승보로 보는 한 사부대중의 평등은 이루어 질 수 없다. 스님을 승보로 보는 한 한국불교에서 썩은 냄새는 계속 진동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어떻게 되돌려 놓아야 하나? 그것은 승보의 개념을 바꾸는 것이다. 한글삼귀의문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말 대신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로 바꾸어야 한다. 그런 시도가 이번 바른불교 재가모임에서 있었다.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

 

새로 창립된 재가불자단체 바른불교 재가모임에서 삼귀의문이 제창되었다. 반주로만 나오는 익숙한 음조에 참석한 회원들이 따라 불렀다. 회원들은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라고 불렀다. 이어서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 하였다.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이다. 비록 승가에 귀의합니다라는 말이 어색하긴 하였지만 그래도 불교단체의 공식행사에서 불렀다는 것은 한국불교 역사에서 커다란 사건이라 본다. 왜 그런가? 시작은 미미하였지만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없이 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북경에 있는 나비의 날개짓이 다음 달 뉴욕에서 폭풍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얼핏 사소해 보이는 작은 차이가 나중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말이다.

 

 

 

 

 

주사위는 던져 졌다

 

주사위는 던져 졌다. 재가불자단체의 창립일에 스님들을 승보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대신 원래 부처님 가르침대로 승가를 승보로 복원시켜 놓았다. 이런 시도가 이제 막 출범하는 작은 재가단체에서 시작 되었지만 그 파급효과는 어디까지 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가다가 말지 아니면 큰 변화를 이끌어 낼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한국불교의 개혁을 위한 시동이 걸렸다는 사실이다.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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