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도법스님에게 묻는다, 부처님에게 왜 “석가 그대에게”라 하였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5. 4. 15. 15:37

 

도법스님에게 묻는다, 부처님에게 왜 “석가 그대에게”라 하였는가?

 

 

 

환상이 깨지고

 

사문 일면과는 일면식도 없다. 그럼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교계언론에서 일련의 행태를 접하고 나서부터이다.

 

사문 일면의 행태를 보면 본 받아서는 안될 것 들이다. 아이들이나 학생들의 교육에도 좋지 않다. 그것은 행보가 너무 파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파격이 결국 승리를 거둔 것일까 최근 교계언론에 따르면, 법원에서는 사문 일면의 손을 들어 주었다.

 

사문 일면의 경력을 보면 화려 하기 그지 없다. 종단에서 요직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사회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생명나눔실천본부이다.

 

언론에 보도된 것으로 본다면 사문 일면은 훌륭한 사문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누구나 겪어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번 동대 이사장 선임과 관련된 파문을 보면서 사문 일면의 적나라한 면을 보게 되었다. 그에 따라 막연히 가지고 있던 환상도 깨졌다.

 

자정센터의 우려대로

 

사문 자승과 역시 일면식도 없다. 그럼에도 총무원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기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역시 본받아서는 안될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교육상 좋지 않다. 그것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사문 자승이 총무원장 재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여지 없이 깨졌다. 단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없던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문 자승은 총무원장에 재선 되었다.

 

불자들이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오계이다. 한자어로 ----라 하여”~하지 말라로 끝난다. 오계가 비록 강제적 조항은 아니지만 종교인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도덕적 규범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강조 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럼에도 사문 자승은 오계를 어겼다. 단순히 망어죄만 지은 것이 아니다. 사실상 오계 전체를 어긴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런 사문 자승은 현재 한국불교를 대표 하는 자리에 있다.

 

사문 자승에 대하여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총무원장이 되기 이전에 교단자정센터에서 성명서가 나왔다. 그 때 당시 우려하였던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조계종은 비구종단이다. 독신출가자가 교단의 근간인 종단이다. 비구-대처 분규의 과정에서 나타났던 숱한 비법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 ‘불법에 대처 없다’는 그 원칙 하나로 대표성을 얻고, 유지되어 온 종단이 바로 조계종이기에 그렇다. 비록 얼룩진 교단현대사를 통해 부적격 승려가 적지 않고, 계행이 많이 퇴색하였다고는 하나, 그 대상이 평범한 장삼이사라면 모를까, 총무원장이어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가 “조계종 총무원장은 독신 비구여야 한다”는 이런 상식중의 상식을 고심 끝에 천명할 지경에 이르렀는지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은처승, 도박승, 부패승은 교단을 붕괴시키고 불법을 쇠멸시키는 사자신충들이다. 자비행의 대상이 될지언정 그가 12백만명을 대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최소한의 상식이 이번 선거에서는 통용되지 않고 있다. 대중의 민의를 검증하는 축제가 아니라, 조계종은 물론 한국불교 전체를 나락에 빠뜨리는 독화살이 될까 우려스런 지경이다.

 

2009 10 13

교단자정센터 대표 김희욱

 

(獨身 아니면 후보에서 물러나라”자정센터, 사실상 특정후보 퇴진 촉구

“은처승이 1천2백만을 대표할 수는 없어” “승단이 승보 지켜야…이대론 불교 쇠퇴”미디어붓다 2009-10-13)

 

 

2009년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교단자정센터에서 나온 성명서의 일부이다. 총무원장 후보는 은처승이거나 도박승이거나 부패승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정센터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되었다. 그 결과 사문 자승은 내리 두 번 총무원장에 당선되었다. 교계 소식통에 따르면 삼선에 도전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이상하고 수상하고 아리송해

 

사문 도법이 있다. 사문 도법과 일면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토론회에서 몇 마디 나누었기 때문이다. 먼 발치에서 대화 하였으므로 일대일로 만난 것은 아니다. 사실상 일면식이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사문 도법은 아리송하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별이 잘 가지 않는다. 겉으로는 사문인 것처럼 보이나 행동하는 것은 잘 구별 되지 않는다. 종교평화선언을 추진 할 때도 우군인지 적군인지 구별이 잘 가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어서 이상하고 수상하고 아리송하기만 하다.

 

사문 도법은 종단에서 중책을 맡고 있다. 종단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중책을 연이어 맡고 있는 것에서 본다면 사문 자승과 한배를 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과연 불교도인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불교인 같으면서 불교인이 아닌 것처럼 비추어지기 때문이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글

 

이상하고 수상하고 아리송한 사문이 도법이다. 더구나 중책을 맡고 있을 당시 발언을 보면 더욱 더 의혹을 증폭시킨다. 미디어붓다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시시비비를 논하는 것이 죄악인양 치부되는 일이 번다한 불교계에서 시시비비를 논하려 하는 것 자체가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시비비가 없는 집단은 마치 고인물이 썩어가는 것처럼 생명력을 잃게 마련이기에 무모하고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또 한 번 시시비비를 논하고자 한다. 묵빈대처라 무시하면 그만일지도 모르지만,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어서 이 글을 쓴다.

 

최근 <불교신문>에 기고한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장 도법 스님의 기획연재 ‘붓다, 스스로 묻고 답하다’의 한 편을 읽었다. 평소 그 분의 글을 잘 읽지 않는 터라 모르고 넘겼는데, 종단의 한 중진스님으로부터 ‘이 기자가 한 번 읽어보았으면 좋겠다’는 요청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그 글은 이 기획연재의 11번 째 글, ‘실체 알 수 없는 깨달음 앞에서 무력하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글[불교신문2963/20131120일자]이었다.

 

(석가, 그대는 언제 깨달았냐고? 교주에게 그대? 지나친 不敬아닌가, 미디어붓다 2013-12-11, 이학종 기자)

 

 

기자에 따르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사문 도법이 불교신문에 기고한 글이다. 불자로서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종의 고발문을 쓴 것이다. 대체 어떤 내용이 들어 있길래 기자는 흥분하였을까?

 

석가 그대에게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문제의 불교신문을 검색해 보았다. 조계종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장 사문 도법이 문의 형식으로 작성한 글이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3-2.

 

역사적 경험인 붓다의 일생으로 미루어 볼 때 먼 훗날을 기약하고 깨달음을 추구하도록 하는 한국불교인들의 수행은 무언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나의 진리는, 나의 가르침은 누구나 바로 이해, 실현, 증명된다고 하는 붓다의 말씀에도 어긋난다. 여하튼 45여 년 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심오한 깨달음을 위해 일생을 바쳐 노력하는 분들이 무수히 많다.

 

그런데 깨달음에 도달했다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간혹 있긴 하지만 솔직히 크게 매력적이지 않다. 그 삶과 내용이 베일에 가려져 아리송하고 위선적으로 여겨져 신뢰와 존경심이 생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지하게 삶을 모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깨달음을 찾아 내면을 향해, 또는 밖의 세상을 향해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깨달음을 이루지 못해 쩔쩔매고 있다.

 

아무리 보편타당하게 말하고 행동해도너 오매일여 됐어? 신비한 삼매 체험 했어?’ 하면 서리 맞은 호박잎처럼 풀죽는다. 아무리 진실하고 겸손하고 평화롭고 자비롭게 해도못 깨달았잖아. 그거 다 헛거야. 부질없는 거야. 중생노름일 뿐이야하면 할 말을 잃는다.

 

현실의 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기독교인들이 실체를 알 수 없는 신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듯이 실체를 알 수 없는 깨달음 앞에서 무력하게 무릎 꿇게 되어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주소가 아닌가 싶다. 한국불교의 비극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깨달음을 신비화하고 먼 훗날 도달해야 할 신비한 목적지로 설정하면서부터 길을 잃게 되었다는 판단이다.

 

과연 붓다가 제시한 깨달음이 먼 훗날 도달해야 할 저 멀리 있는 신비한 목적지인가. 바로 알고 실천해야 할 지금의 일인가. 당연히 지금의 일이어야 옳다. 붓다가 만 생명에게 희망의 등불로 제시한 깨달음이 오늘날 한국불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통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수십 년 동안 전심전력으로 추구해도 안 되고 세세생생을 기약해야 하는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일까. 만일 한국불교인들이 믿는 것처럼 현실에서 거의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면, 세세생생을 기약해야 하는 것이라면 깨달음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길을 누구에게 권할 수 있겠는가. 누가 그 길을 가겠다고 나서겠는가. 현재의 삶에 무슨 희망의 길이 되겠는가.

 

혹시 붓다가 향락주의와 고행주의의 길에서 해탈, 깨달음, 열반을 찾았던 것처럼 한국불교인들도 왜곡된 길에서 붓다처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붓다가 버리고 떠난 길에서 해답을 찾는 꼴인데 당연히 해답이 나올 턱이 없을 터이다.

 

한 인간의 상식으로 검토하면 할수록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깨달음을 찾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반드시 명료하게 정리해야 할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첫 제안자이며 길 안내자인 붓다에게 묻는다.

 

ㆍ석가 그대에게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ㆍ석가 그대는 언제 깨달았는가.

ㆍ석가 그대는 깨달음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불교신문2963/20131120일자]

 

(<11>실체 없는 깨달음 앞에서 무력하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도법스님, 불교신문 2013-11-19)

 

 

 

동국대학교 팔정도 부처님상

 

 

 

문제의 글은 마지막 세 구절이다. 그것은 석가 그대에게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석가 그대는 언제 깨달았는가” 석가 그대는 깨달음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라는 말이다.

 

? 석가?, ? 그대?

 

여기서 사문 도법은 부처님에게 석가라 하였다. 마치 동네 아저씨 이름 부르듯이 석가라 한 것이다. 상식있는 불자라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 사문들은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것 같다.

 

현재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으로 있는 사문 일감 역시 석가가 그랬고, 달마가 그랬던 것처럼…. (불교신문3009)”라 하였다. 마치 동네에서 김씨, 이씨, 박씨 부르듯이 석가라 한 것이다. 이런 호칭에 불자들은 동의하기 힘들다.

 

초기경전을 보면 이교도들이 부처님을 부를 때 고따마라 하였다. 고따마는 족성을 말한다. 저자거리에서 김씨또는 박씨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은 반드시 바가와라 하였다. 바가와는 우리말로 세존이라는 뜻이다.

 

세존이라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라는 뜻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세존이란 이름은 어머니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 아니다. 세존이란 해탈의 구경에 이른 분인데 이것은 제불세존이 보리수 아래에서 일체지를 얻음과 함께 실현하신 개념이다.(vsm,17.55)”라 하였다.

 

정법이 사라져 존재하지 않았을 때 일체지를 증득한 부처님이 출현하였다. 정법이 살아 있는 한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세존이라는 칭호를 붙인다. 정법시대에 오로지 한분만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라는 뜻에서 세존, 즉 바가와라 한다.

 

초기경전에서는 반드시 세존이시여라며 대화가 시작 된다. 그러나 이교도들은 고따마여라며 대화를 한다. 이렇게 부처님을 부르는 호칭만으로도 불교도인지 이교도인지 알 수 있다.

 

고따마여라 하면 이교도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 어떤 사문들은 석가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스스로 자신이 이교도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일반적 상식을 가진 불자라면 감히 석가라 할 수 없음에도 어떤 사문들은 석가라 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은사를 향해서도 ‘그대’라고 부르는가?”

 

사문 도법은 부처님에 대하여 동네 아저씨 이름 부르듯이 석가라 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그대라 하였다. 그대라는 말은 무엇인가? 국어 사전에 따르면 벗이나 아랫사람을 대접하여 점잖게 높여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그대라는 말은 상대방에 대하여 하대하는 말이라 볼 수 있다.

 

사문 도법은 자신의 기고문에서 석가 그대에게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고 의문하였다. 석가라 한 것도 모자라서일까 그대에게라 하였다. 그래서 석가 그대에게라 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문 도법은 부처님 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음에 틀림 없다. 마치 사문 도법이 부처님을 제자를 대하듯이, 또는 아랫것 대하듯이 하대하는 것이다. 이런 문구에 대하여 기자는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혔다.

 

 

기자는 이 질문을 읽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질문이 성립되는지 아닌지를 따질 수도 있겠지만, 교주를 향한 도법 스님의 지극히 불경한 표현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불제자라면,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교주 석가모니를 향해 ‘하대’의 표현인 ‘그대’라는 말을 감히 사용할 수 있는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석가, 그대는 언제 깨달았냐고? 교주에게 그대? 지나친 不敬아닌가, 미디어붓다 2013-12-11, 이학종 기자)

 

 

칼럼을 쓴 기자는 사문 도법의 도발적인 표현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고 하였다. 불자로서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고 묵과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기자는 도법 스님이 석가모니에게 사용한 표현처럼 만일 도법 스님을 향해 “스님은 스님의 아버지를, 또는 스님의 은사를 향해서도 ‘그대’라고 부르는가?”라고 되묻는다면 어떻게 답하실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질문에 대한 사문 도법의 답변을 보지 못하였다.

 

로히니가 사문을 좋아 하는 이유

 

불자들은 사문을 좋아 한다. 그리고 존경한다. 재가자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실행한 것이 커다란 이유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버리기이다. 온갖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뿐만 아니라 버려야 겠다는 마음까지 버리고 출가한 사문에 대하여 재가자들은 경외의 시선을 보낸다. 그런 사문들을 좋아 한다.

 

초기경전에서도 사문을 좋아 하는 게송이 있다. 테리가타(장로니게)에 로히니경이 있다. 소녀 로히니가 출가 하기 전에 자신의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아름다운 시로 표현한 것이다. 옮기면 다음과 같다.

 

 

로히니

 

 

(로히니의 아버지가 말하였다)

“너는 잠이 들 때에도 잠을 깰 때에도

사문들을 말하는구나.

사문의 칭찬을 입에 달고 있구나.

얘야, 너는 출가 수행녀가 되겠구나.(271)

 

너는 사문에게 많은 양의 음식과 음료를 보시한다.

이제 로히니야, 너에게 묻겠는데

어째서 그토록 사문을 좋아하는지 말해보렴.(272)

 

그들은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게으르고

남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고,

갈망으로 가득하고 맛있는 것들을 찾는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그토록 사문을 좋아 하느냐?(273)

 

(로히니가 말하였다)

“사랑하는 아버지, 당신은 오랫동안 사문에 대하여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계행과, 지혜와, 정진에 대하여 찬탄하겠습니다.(274)

 

그들은 일하기를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훌륭한 일을 하며 욕망과 성냄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75)

 

그들은 세 가지 악의 뿌리를 남김없이 제거하고

청정한 행을 닦아 모든 악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76)

 

그들은 몸에 의한 행이 청정합니다.

말에 의한 행이 청정합니다.

생각에 의한 행이 청정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 합니다.(277)

 

그들은 티가 없고 진주조개처럼

안과 밖이 청정하고

깨끗한 특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78)

 

그들은 학식이 많고 가르침을 지니고

거룩하고,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목표와 담마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79)

 

또한 그들은 하나로 집중된 마음으로

마음챙김에 머뭅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0)

 

그들은 먼길을 행각하고, 마음챙김에 머물고

지혜롭고 산란하지 않으며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1)

 

어떤 마을이든지 떠날 때는

어떤 것에라도 뒤돌아보지않습니다.

아무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2)

 

그들은 재물을 창고나, 단지나, 바구니에 저장하지 않으며

완전히 조리된 음식만 탁발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3)

 

그들은 동전이나 금과 은을 지니지 않습니다.

그날그날 탁발한 것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4)

 

그들은 여러 다른 가문에서, 다른 지역에서 왔지만

서로간에 친근하게 대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5)

 

“오, 사랑하는 로히니야, 너는 정말로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이 집에서 태어났구나.

너는 부처님과 가르침에 신뢰심이 있고

승가에 참으로 깊이 존경하는구나.(286)

 

“아버지, 괴로움이 두렵고 달갑지않으시다면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하십시요.

그리고 계행을 지키십시요.

그것이 아버지를 행복으로 이끌 것입니다.(288)

 

“나도 그처럼 훌륭하신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하겠다. 그리고 계행을 지키겠다.

그것은 나를 행복으로 이끌 것이다.(289)

 

(테리가타 271~289, 로히니 비구니, 일아스님역)

 

 

게송을 보면 로히니가 사문을 좋아 하는 이유가 죽 나열되어 있다. 요지는 탐욕과 성냄을 끊어 버려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 것을 좋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걸식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쌓아 두면 썩는다

 

걸식하는 것은 소유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에 대한 적절한 구절이 재물을 창고나, 단지나, 바구니에 저장하지 않으며 완전히 조리된 음식만 탁발합니다.”일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쌓아 놓지 않음을 말한다. 탁발에 의존하는 것 자체가 무소유를 실천하기 때문에 쌓아 놓을 수 없다.

 

만일 사문이 금이나 은을 받는다든가 쌀을 받아 쌓아 놓았을 때 어떻게 될까? 아마 탁발 나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힘들게 멀리 나가서 걸식하지 않고 주거지에서 음식을 해먹으면 될 것이다. 이는 쌓아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쌓아 놓으면 썩는다는 사실이다. 돈이나 은이든 곡식이든 쌓아 놓았을 때 부패한다. 축적되면 될수록 더욱더 부패한다. 마찬가지로 사문이 금이나 은, 곡식을 받았을 때 부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로히니는 어떤 마을이든지 떠날 때는 어떤 것에라도 뒤돌아보지않습니다. 아무 미련 없이 떠납니다.”라 하였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집착도 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그날그날 탁발한 것으로 살아가는 사문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사문의 일탈행위에 대하여

 

한국불교의 사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자꾸 쌓아 놓기 때문이다. 감투를 서로 차지하려 것도 쌓아 놓고자 함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쌓아 두면 쌓아 둘수록 썩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생겼을까? 사문이 절도를 하는가 하면 사문이 거짓말을 일삼고 있다 

현재 한국불교의 사문들은 많은 것을 쌓아 두고 있다. 너무 쌓아 두기 아까워서일까 소비를 하려 한다. 도박을 하고 음주를 하고 은처하는 것도 쌓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꾸 축적하면 점점 더 썩어 갈 뿐이다. 누군가는 이런 현상에 일부 사문들에 국한 된것이라 할지 모르겠다. 대다수의 사문들은 지금 이순간에도 열심히 수행정진하고 있다고 주장할 지 모른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일부 사문의 문제라 하여도 한국불교를 대표한다. 왜 그런가? 한국불교에서는 사문을 승보로 간주 하기 때문이다.

 

사문을 승보로 간주 하는 한 사문의 범계 행위에 대하여 일부 현상이라 볼 수 없다. 사문이 승보이기 때문에 한국불교의 승가 전체가 썩었다고 보고, 더 나아가 한국불교 전체가 썩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 문제 되는 스님을 어떻게 분리해서 대응해야 할까? 그것은 승보의 개념을 바꾸는 것이다.

 

삼귀의문에서 거룩한 스님들에게 귀의합니다라는 말 대신에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고 바꾸면 깨끗이 해결된다. 왜 그런가? 승가를 승보로 보면 일부 문제를 일으키는 사문의 행위에 대하여 일탈로 간주하면 되기 때문이다.

 

사문을 승보로 보면 한국불교 전체가 매도당한다. 그러나 승가를 승보로 바꾸었을 때 사문의 범계 행위는 일탈행위에 지나지 않아 승가전체와 한국불교 전체가 매도 당하지 않는다.

 

도법스님에게 묻는다

 

사문 일면과 사문 자승을 좋아 하지 않는다. 오계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사문 도법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사문 도법은 아군인지 적군인지, 불교도인지 이교도인지 잘 구별 되지 않는다. 그것은 기고문에서 석가 그대는이라 하여 부처님을 능멸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사문 도법에게 묻는다. 사문 도법은 부처님에게 왜 석가 그대에게라 하였는가?

 

 

 

2015-04-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