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화가 나서 왔습니다” 불자들을 화나게 하는 승려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4. 12. 13:33

 

화가 나서 왔습니다불자들을 화나게 하는 승려들

 

 

한국불교에서 종단 수뇌부의 비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진다. 몇 년 전 전국을 강타 하였던 승려도박사건은 일반국민들도 알고 있다. 공중파방송을 타기만 하면 삽시간에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 불자들은 부끄럽고 창피하였다.

 

불자가 아닌 사람들도 승려의 고액도박에 대하여 분개하는 것을 보았다. 승려가 도박을 하였다는 것 자체를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있다.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로 알고 있다. 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승려에 대하여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승려들은 끊임 없이 범계행위를 하거나 세간의 상식과 어긋난 행위를 하여 새로운 문제거리를 만들어 낸다.

 

화가 나서 왔습니다

 

최근 동국대사태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학교를 접수하려는 행태가 마치 정화라는 이름 하에 벌어졌던 절뺐기의 연장선상으로 보여진다. 이에 학교의 주인이나 다름 없는 학생들의 반발이 거세다. 불의와 부도덕이 판치는 종단과 타락한 권승들에 항의하기 위하여 학생들이 행진을 하였다.

 

학생들은 조계사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조계사 경내에 있는 권승들의 근거지나 다름 없는 총무원 청사 근처에 발도 붙이지 못하였다. 조계사 일주문 맞은 편에서 성토대회를 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백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학생들을 지지 하는 재가불교단체와 학교동문들도 모였다. 길 건너 편에는 총무원을 보호 하려는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다. 마치 일촉즉발 전쟁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한편에서는 수성하려 하고 또 한편에서는 공성하려 한다. 조계종의 상징과도 같은 조계사와 총무원 청사를 놓고 공성하려는 측과 수성하려는 측이 조계사길을 사이에 두고 대치 하고 있다. 경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학생수 보다 월등히 많은 병력을 주변에 배치 해 놓고 있다.

 

총무원은 경찰병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 같다. 만일 경찰이 없다면 학생들은 권승들이 장악하고 있는 총무원 청사 앞에서 시위를 할 것이다. 그러나 경찰이 막아 주고 있기 때문에 길 건너 편에는 들어 갈 수 없다.

 

학생들은 연단을 만들어 놓았다. 학생회 간부 되는 학생이 연설을 하는 것을 들었다. 분노에 가득찬 연설이다. 기억에 남는 말은 화가 나서 왔습니다라는 말이다.

 

학생들은 왜 화가 났을까? 그것은 절차를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제도와 시스템이 있음에도 승려들은 밀어붙이기 식으로 학교를 장악하려 하였다. 그 과정이 교계언론에 보도 되었는데 한편의 서글픈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빼앗는데 있어서 선수들

 

한국불교에서 코미디와 같은 상황을 자주 본다타락한 승려들이 잊을 만하면 보여주는 블랙코미디이다. 승려들이 도박을 하고 밤샘술판을 벌이는 것도 일종의 코미디이다. 머리를 깍은 승려들이 담배를 꼬나 물고 카드를 돌리는 장면을 보면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일까? 회색승복을 입은 승려들이 술과 안주가 질펀한 술상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듯한 장면 역시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일까? 

 

탐욕에 불타는 승려들은 빼앗는데 있어서 선수인 것 같다. 과거 절을 빼앗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었다. 그 과정에서 살인도 났었다. 이런 전통이 있어서일까 총무원청사를 점거 하면 성공한 쿠데타로 간주 하던 시대도 있었다. 

 

과거 종권다툼이 일어나면 총무원청사는 공성과 수성의 대상이었다. 각목을 든 승려들이 청사를 점거 하기 위하여 공격하는가 하면, 청사안의 승려들은 필사적으로 수비한다. 이런 공성과 수성의 공방전이 전국에 생중계 되었다. 심지어 CNN을 통하여 전세계로 알려졌다.

 

동국대 사태 역시 절뺐기의 연장선상이다. 과거 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밀어 붙이는 것을 보면 스님들이라 볼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을 승보라고 여긴다.

 

고개만 까닥했다는 이유로

 

스님들은 스스로 승보라 한다. 코미디 같은 예가 있다. 2013년 불교방송에서 스님들들의 막말 퍼레이드가 있었다. 이사회에서 스님이사와 재가이사의 막말이 교계신문에 실렸다. 이런 사건 자체가 코미디이었다. 그런데 코미디는 계속 되었다. 가장 우스운 코미디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벌어졌다.

 

교계신문에 따르면 방송을 진행하는 어느 스타스님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고개만 까닥했다는 이유로 불교방송사장을 ‘승가모독’이라 몰아 부쳐 파업을 한 것이다.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S스님은 공손하게 인사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승가모독이라 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은 승보임에 틀림 없다.

 

스님들은 진짜 승보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스님들이 일방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스님들이 재가자에게 삼배를 요구 하듯이 스스로 스님을 승보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결과 스님들은 부처님과 동급이 되었다. 하지만 이는 넌센스이다. 그리고 코미디와도 같다.

 

믿을 게 없어서 중들 말을 믿어?”

 

법정스님은 스님들을 믿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살아 생전 믿을 게 없어서 중들 말을 믿어?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중놈 말을 어떻게 믿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사람에 의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자에게 의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스님을 믿고 스님에게 의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스님이 잘못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그 스님이 도박사건에 연루되고 밤샘술판을 벌인 명단 중의 한사람이라면 이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마치 부처님처럼 믿고 의지하던 스님이 도박승, 은처승 이었다면 실망감이 매우 클 것이다. 그것을 이유로 하여 불교계를 떠 날지도 모른다.

 

스님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되는 이유

 

사람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된다. 믿을 사람을 믿어야겠지만 사람들은 언제 변할 지 알 수 없다. 스님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스님을 승보라 하여 삼보 중의 하나로 간주 하고 있지만 그 스님이 언제 어떻게 어떤 사건에 연루 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에는 스님을 함부로 믿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사람을 믿으면 다섯 가지 허물이 생길 것이니, 저 사람이 혹 계()를 범하고 율()을 어겼을 때에는 대중들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을 공경하던 사람들은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은 나의 스승으로서 나는 스승을 존중하고 존경하는데, 대중 스님들은 그를 버리고 천대한다. 그러니 내가 이제 무슨 인연으로 저 절[塔寺]에 들어가겠는가?' 

 

 그리하여 그가 절에 들어가지 않으면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고,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면 법을 듣지 못하게 되며, 법을 듣지 못하면 착한 법에서 물러나거나 그것을 잃게 되어 바른 법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첫 번째 허물이라 하느니라

  

다음에는 사람을 공경하고 믿을 때 공경을 받는 사람이 계를 범하거나 율을 어겨서 대중 스님들이 그를 칭찬하지 않으면, 그를 공경하고 믿던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은 나의 스승으로서 나는 스승을 존중하고 공경하는데, 지금 대중 스님들은 칭찬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내가 이제 무슨 인연으로 저 절에 들어가겠는가?' 

  

그리하여 그가 절에 들어가지 않으면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고,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면 법을 듣지 못하게 되며, 법을 듣지 못하면 착한 법에서 물러나거나 그것을 잃게 되어 바른 법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두 번째 허물이라 하느니라

 

 또 만일 저 사람이 가사와 발우를 가지고 다른 지방을 유행하게 되면, 그를 공경하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공경하는 사람이 가사와 발우를 가지고 인간 세상을 유행하고 있으니, 내가 이제 무슨 인연으로 저 절에 들어가겠는가?' 

  

그리하여 그가 절에 들어가지 않으면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고,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면 법을 듣지 못하게 되며, 법을 듣지 못하면 착한 법에서 물러나거나 그것을 잃게 되어 바른 법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세 번째 허물이니라

 

 다음에는 그가 믿고 공경하는 사람이 계를 버리고 속세로 돌아가면, 그를 공경하고 믿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람은 나의 스승으로서 나는 스승을 존중하고 공경하는데, 그는 계를 버리고 속세로 돌아갔으니, 나는 이제 그 절에 들어갈 수 없다.'

 

그리하여 그가 절에 들어가지 않으면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고,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면 법을 듣지 못하게 되며, 법을 듣지 못하면 착한 법에서 물러나거나 그것을 잃게 되어 바른 법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네 번째 허물이라고 하느니라

  

다음에는 그가 믿고 공경하는 사람이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고 나면, 그를 공경하고 믿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은 나의 스승으로서 나는 스승을 존중하고 공경하는데, 목숨을 마쳤으니, 이제 무슨 인연으로 그 절에 들어가겠는가?' 

 

 그리하여 그가 절에 들어가지 않으면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고,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면 법을 듣지 못하게 되며, 법을 듣지 못하는 까닭에 착한 법에서 물러나거나 그것을 잃게 되어 바른 법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다섯 번째 허물이라 하느니라

 

 그런 까닭에 비구들아, 마땅히 '부처님에 대한 무너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과, 법과 승가에 대한 무너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성취하고 거룩한 계를 성취하리라'고 이와 같이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과환경(過患經), 잡아함경 제30권 제837)

 

 

경에서 스님을 믿었다가 실망한 케이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마치 요즘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신도들이 절을 떠나는 이유가 스님들이 계행등과 관련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름 아닌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가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부처님 뵈러 절에 가지 스님보고 절에가나?”라는 말이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스님들, 더구나 속세로 환속한 스님들을 보면 절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점차 멀어질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고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에 의지하라고 하였다. 이 때 상가는 성스런 상가를 말한다.

 

스님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무식한 소리

 

한글삼귀의문에서는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 되어 있다. 이는 스님을 승보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님을 승보로 보았을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스님의 계행이 엉망일 때 스님들 전체가 욕먹을 뿐만 아니라 불교계전체 역시 욕을 먹게 된다.

 

몇 년 전 어느 시인이 댓글을 주었다. 고등학교 교사를 지낸 바 있는 시인은 스님을 승보로 간주하였을 때 문제점에 대하여 자신의 교사생활을 예로 들었다. 옮기면 다음과 같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도 "스님에게 귀의한다"는 것을 "승가에 귀의한다" 혹은 "승단에 귀의한다"로 바꾸어야 한다고 불교티브이 송현 시인의 행복발견 특강에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스님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말도 되지 않는 무식한 소리라고 봅니다.  스님과 승단이란 개념은 하늘과 땅만큼 의미가 다릅니다

 

가령, 승려 개인 중에는 화투도 치고 안쳤다 하고, 고급 룸살롱에 가고 안갔다 하고, 2차 가고도 안갔다 하고, 마눌 감춰두고도 안 안감춰 두었다고 하고, 엄청난 시줏돈 가로채고 안 챘다 하고 , 영가 천도한다고 엄청난 돈을 받아챙기고 아니라고 오리발 내밀고, 점봐주고 돈 받고도 돈 안 받았다고 하고 별별 또라이 별별 함량미달 승려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승려 개인을 비판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마땅히 비판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님들의 집단인 승단 혹은 승가를 함부로 매도하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승려 집단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교사 중에 영 실력도 없고 엉터리들이 있다고 해서 교사라는 직업 자체를 매도해서는 안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삼귀의 셋째 줄은 당장 "승단에 귀의한다" 혹은 "승가에 귀의한다"로 바로 잡는 것이 상식에도 맞는 일입니다.

 

(S시인)

 

 

시인은 말하기를 스님과 승단은 다른 것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한글삼귀의에 따르면 승단으로서의 개념인 상가(Sangha)에 대하여 스님들 이라고 적용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스님들이 잘못 하였을 때 모든 비난이 승단으로 집중되는 폐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스님들의 허물이 발견 되었을 때 이를 비난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승가을 비난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스님들의 일탈이 발생되었을 때

 

우리나라 불자들은 스님을 부처님 보듯이 한다. 이는 스님을 승보로 간주 하고 있기 때문이디. 그런데 부처님과도 같은 스님이 도박을 하고, 음주를 하고, 폭행을 하고, 은처를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물론 일부라고 할지 몰라도 결국 스님들 전체를 욕보이는 것이 된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승가전체가 타락한 집단으로 간주 된다. 결국 일반사람들은 불교전체가 잘못됐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비난하고 혐책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자들은 자신을 불자라고 감히 내놓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불교계를 떠나거나 심지어 개종도 일어날 것이다.

 

사람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스님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지금 계행이 훌륭하다고 하여 끝까지 가리라는 보장이 없다. 수 많은 스님들이 도중에 속퇴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스님을 승보로 간주 하는 것은 넌센스이고 코미디이다.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스님을 승보로 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한국에서만큼은 스님이 부처님과 동격이다. 이는 자멸행위와도 같다. 스님들의 일탈이 발생되었을 때 불교계 전체가 매도 될 수 있기 때문이디. 그러나 시인의 표현대로 승가를 승보로 간주 하면 문제는 깨끗이 해결된다. 도박, 음주, 은처 등의 범계행위가 발생하였을 때 계행이 엉망인 스님의 일탈로 간주 하면 되기 때문이다. 믿을 것은 오로지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뿐이다.

 

 

2015-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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