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글을 써서 뭐할꺼냐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5. 5. 16. 11:16

 

글을 써서 뭐할꺼냐고?

 

 

 

 

 

글을 쓴다고 하였을 때 듣는 이야기가 있다. “글 써서 뭐할건데?” 라는 말이다. 물질적 가치만을 따지는 시대에 글 쓰는 행위를 이해 하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매일 글을 쓰고 있다. 긴 글이다. 시간이 갈수록 길이는 늘어나고 내용은 깊어진다. 경전이나 논문, 기사의 내용을 인용하여 글을 전개 하기 때문이다. 글의 길이와 함께 글 쓰는 시간도 늘어난다. 열 페이지 분량의 글을 작성하면 오전 일과가 훌쩍 지나가버릴 정도이다.

 

최근 어떤 이를 만났다. 글을 쓴다고 하니까 돈이 되는지 묻는다. 물질과 돈의 가치를 우선시 하는 세상에서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말이다. 돈이 안 되는 글쓰기에 올인 하는 것에 대하여 이해 하지 못하겠다는 발상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조언한다글을 유료화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블로그 방문자에게 돈을 받자는 것이다. 하루 일과의 절반을 할애하여 작성된 글에 대하여 돈을 받으면 수입이 생겨 날 것으로 보는 것이다. 아직까지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어떤 이에게는 돈도 안 되는 글쓰기가 부질 없는 짓으로 비추어진 것 같다.

 

돈과 관련하여 어떤 이는 책을 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한다. 수 천 개의 글에서 정수만 뽑아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팔면 돈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 역시 물질적 가치를 우선시 해서 한 말일 것이다.

 

물질적 소유와 돈의 가치를 우선시 하는 세상에서 글쓰기는 미친짓이다. 돈도 되지 않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 하는 것에 대하여 쓸데 없는 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글쓰기에 대하여 돈에 포커스를 맞춘다면 글쓰기는 노동이 된다. 글쓰기를 전문으로 하는 전업작가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글을 왜 쓰느냐?’고 묻는다. 글을 써서 뭐할꺼냐?’고 묻는다. 그럼에도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저기 산이 있어 올라 가듯이, 삶이 있어 글을 쓰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떠오른 생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쓴다. 그리고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 쓴다.

 

세월은 흘러간다. 10대가 20대가 되고, 20대는 30대가 된다. 그렇게 흘러 가다 보니 40대가 되고 50대가 되었다. 60대가 되고 70대가 될 것이다. 마침내 죽음의 침상에 누웠을 때 지나간 시절이 꿈결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삶이 순간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순간이다. 팔만사천대겁을 산다는 비상비비상처천의 존재도 수명이 다하면 죽어야 한다. 임종에 이르렀을 때 이전의 삶은 꿈만 같아서 순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순간을 산다. 순간에 오감을 만족시키는 삶을 말한다. 잘 먹어야 행복하고, 잘 마셔야 행복하고, 잘 배설해야 행복한 삶이라 본다. 한마디로 즐기기 위해 사는 것이다. 여기서 즐김행복과 동의어이다.

 

여기 한평생 오감으로 즐기며 산 사람이 있다. 죽음의 침상에 누웠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마음껏 즐기며 살았기 때문에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라고 말할까? 반대로 즐기지 못한 삶을 산 자는 어떤 생각이 들까? 여한이 있는 삶을 산 자가 생을 마감하였을 때 유행가 가사처럼 한 많은 이 세상~”하며 자신과 세상을 한탄할까?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다. 부자와 가난한자, 잘난 자와 못난 자를 가리지 않는다. 누구나 죽음의 침상에 눕게 된다. 역시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더구나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 온다

 

건강할 때는 건강의 고마움을 잘 모른다. 아파 보아야 건강의 소중함을 실감한다. 살아 있을 때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이대로 천년 만년 살듯하다. 그러나 주변을 보면 보인다. 늙은이, 병든이, 죽은이를 말한다. 이는 일종의 경고이다보고서 깨우치라는 천사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애써 외면하려한다.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즐기기에 바쁘다.

 

어떤 사람이 묻는다. “글써서 뭐할건데?” “그래서 어떻게 어쨌다는 거냐””라고 묻는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패러디 할 수 있다. 오로지 즐기며 사는 즐겨서 뭐할건데?”라고 되물을 수 있다.

 

사람들은 평생 즐기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 여긴다. 그러나 죽음의 침상에 누웠을 때 모든 것이 드러난다. 인생의 성적표는 임종시에 받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평생 즐기며 산 자에게는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설령 여한 없이 살았다 하더라도 무언가 허전하고 허무할 것이다. 그래서 단멸론자가 되는지 모른다.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자들이 있다. 이들을 단멸론자 또는 허무주의자라 한다. 이런 견해를 가진 자들은 내생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즐거운 느낌에 올인 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인생이 원타임(one time)’에 지나지 않다면 즐기는 삶에  올인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요즘 광고를 보면 단멸론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삶을 부추기는 것 같다. 언젠가 어느 광고에 지금 이 순간을 즐겨요!”라는 멘트가 있었다.

 

즐기는 것이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즐거울 ()’자와 행복을 동일시 한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오감으로 즐기는 삶을 말한다. 하지만 엄밀히 보면 단멸론적이고 허무주의적 삶의 방식이다.

 

인생은 원타임이 될 수 없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설명 되는 연기법에 따르면 행위에 대한 과보를 피해 갈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죽음 이후의 내생이 필연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다. 단멸론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죽음이후에는 내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막행막식하며 사는 삶에 대한 과보는 반드시 받을 수밖에 없다.

 

내생이 있다면 결코 즐기는 삶을 살 수 없다. 자기자신의 개인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고 베푸는 이타적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삶은 지금 이순간을 깨어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항상 현재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누구나 오래 살고자 한다. 그런데 영생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깨어 있는 삶이다. 누군가 항상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영원히 산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죽지 않는 것이다.

 

불사의 경지에 이르려면 마음을 항상 현재에 놓으면 된다. 마음이 지나간 과거나 오지 않은 미래에 가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만 머물러 있다면 영원히 사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죽지도 않는 것이다.

 

누군가 글을 왜 쓰냐고 묻는다. 글을 써서 뭐할꺼냐고 묻는다.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흘러가는 생각을 잡기 위해서,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 비워내는 삶을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라고궁극적으로 청정한 삶(brahmacariya)’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2015-05-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