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왜곡된 사유에 따른 유위적 조작의 과정

담마다사 이병욱 2015. 5. 16. 12:23

 

왜곡된 사유에 따른 유위적 조작의 과정

 

 

1) 희론(papañca:망상)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할 때 망상이 될 수 있다. 이를 빠알리어로 ‘빠빤짜(papañca)’라 한다. 빠빤짜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희론()’으로 번역하였다. 희론은 무의미하고 무익한 의론을 말한다. 그렇다면 희론은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초기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해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 (M18)

 

 

 

papañca

 

 

희론의 발생은 시각, 청각 등 여섯 가지 감각능력에 따른 접촉으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석에 따르면 빠빤짜(희론, 망상) 1) 갈애에서 만들어진 희론, 2) 견해에서 만들어진 희론, 3) 자만에서 만들어진 희론 이렇게 세 가지로 설명되어 있다.

 

지금 여기에서 ‘접촉’에 따라 발생된 것은 ‘느낌’이다. 그런데 초기경에 따르면 느낌 이후에 두 가지 방식으로 전개 된다. 하나는 연기의 회전이다. 이는 다름 아닌 십이연기를 말한다. ,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으로 전개 되는 연기의 회전을 말한다. 또 하나는 희론으로의 전개이다.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망상(희론)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느낌은 두 갈래로 방향으로 진행된다.

 

2) 왜곡된 사유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희론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왜곡된 사유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곡된 사유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사람들은 생각하며 산다. 이 생각이라는 말을 한자어로 ‘사유(思惟)’라 한다.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이 사유이다. 그런데 사유는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조작되는가? 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의 경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그는 땅을 땅으로 여기고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 땅을 생각하고 땅 가운데 생각하고 땅으로부터 생각하며 ‘땅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땅에 대해 즐거워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나는 말한다.” (M1)

 

 

생각을 뜻하는 빠알리어가 ‘만냐띠(maññati)’이다. 만냐띠에 대한 각주를 보면 ‘왜곡된 사유’라 설명되어 있다. 초불연에서는 ‘허황된 생각(공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생각이 발전 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생각의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 것이다. 오로지 생각으로만 이루어진 구조물이다. 이를 ‘망상’이라고 하고, ‘희론’이라고도 한다. 모두 유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다.

 

3) 유위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법화경에서는 이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고 있다. 소위 현상계와 절대계(이법계)이다. 그래서 현상계 너머에 있는 세계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현상계 너머에 무위의 세계가 있다고 보는 것은  희론이다. 그렇다면 희론의 바탕이 되는 유위는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에서 업의 경(Kammasutta, S35:146)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지나간 업이라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시각은 유위적으로 형성되고 유위적으로 의도 된 것으로

과거의 업이라고 알아야 하고 또한 보아야 한다.” (S35:146)

 

 

각주에 따르면, “유위적 조작은 사실을 괴롭히고 허구를 통제하는 유위법적인 형성을 통해서 밝혀 지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를 시각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4) 왜곡된 사유에 따른 유위적 조작의 과정

 

업의 경(35:146)’각주에는‘근본법문의 경(M1)’에서 “땅에서 땅으로..”로 시작 되는 절에 대한 각주가 있다. 어떻게 생각이 유위적으로 조작되는지에 대한 과정이다.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의 경(M1)’에도 유사한 설명이 되어 있지만 ‘업의 경(35:146)’에 실려 있는 각주를 참고 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왜곡된 사유에 따른 유위적 조작의 과정

단계

    

  

격변화

 

1

땅을 땅으로 여기고

일반사람은 X X로 지각한다.

대격

있는 그대로 지각

2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 땅을 생각하고

그는 X X로 지각하면서

X를 생각한다.

지각의 사유화

3

땅 가운데 생각하고

그는 X가운데 생각한다.

처격

‘나’처럼 여김

4

땅으로부터 생각하며

그는 X로부터 생각한다.

탈격

‘나’에 대한 관심이 더욱 증폭

5

‘땅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그는 ‘X는 나의 것(또는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유격

‘나의 소유’란 자아관념의 기초가 형성

6

땅에 대해 즐거워한다.

그는 X를 즐거워 한다.

‘나의 소유’를 향수함

 

 

 

이것이 일반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각하는 단계이다. 보고, 듣는 등 여섯 가지 감각능력에 따라 생각이 일어나면서 생각이 왜곡되는 과정이다. 여섯 단계를 보면 제대로 보지 못하였을 때, 제대로 듣지 못하였을 때 어떤 결과에 이르는지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왜곡된 사유의 종착지는 다름 아닌 ‘망상’이고 ‘희론’이다. 각주에서 각 단계별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1단계에서는 단순히 즉각적인 체험으로써의 지각에 대한 알아챔을 지시한다. 지각은 다른 것이 아닌 X에 대한 지각으로만 인식된다. 이 때 사물은 있는 그대로 지각된다. 문제는 2단계 부터이다.

 

2단계에서 6단계 까지는 지각이 주관속에 존재하게 되는 지각의 사유화 현상의 기본 구조를 보여 준다.

 

2단계는 즉각적인 체험속에 열려져 있는 대상을 주관속으로 가져 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때 ‘생각한다(maññati)’는 말은 X를 지각하면서 주관으로써의 아만(mana)과 그 아만을 관련된 대상을 개념적으로 사유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3단계에서는 X가 아만을 부여 받았으며 이러한 부여로 아만은 단순히 개념으로써가 아니라, 구체적인 X와 관련된 포괄적인 주체로써의 ‘나’처럼 여긴다.

 

4단계에서는 이 ‘나’가 X로부터 분리된다. 이 단계에서는 ‘나’에 대한 관심이 더욱 증폭 되는 것을 의미한다.

 

5단계에서는 주객의 분리가 명백해졌으며, 분리된 ‘나’와 X사이의 명백한 관계는 ‘X는 나의 것(또는 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소유’란 자아관념의 기초가 형성된다.

 

6단계에서는 ‘나의 소유’인 X를 향수하는 단계로, 이것을 토대로 더욱 존속하려는 ‘존재에의 갈애(유애)’가 성립하면서 ‘나의 존재’가 성립하고 ‘나의 존재’를 토대로 모든 체험에서 분리된 영원한 ‘나의 자아’란 관념이 형성된다.

 

자아가 있다면 본질적으로 불변의 실체라는 속성을 갖고 있으므로 ‘나의 소유’란 사물의 실체성의 근거가 되며, ‘나의 존재’란 그러한 나의 소유를 토대로 성립하는 것으로 행위의 주체가 되며, ‘나의 자아’란 그러한 나의 존재를 토대로 성립하는 것으로 인식주체의 근거가 된다. 이렇게 해서 유위적 세계가 성립한다.

(업의 경, 35:146 각주)

 

 

망상에 대한 단계적 설명을 보면 필연적으로 ‘존재론’으로 귀결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유행자 왓차곳따의 여래 사후 존재 여부 네 가지와 ‘세상은 영원한가’ 등의 네 가지를 포함하여 여덟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설명을 하지 않았다.

 

5) 왜곡된 사유에 실체를 부여하면

 

만냐띠는 왜곡된 사유이다. 대상자체에서 유래하지 않는 그 대상에 대한 특징이나 의미를 부여하는 사유를 말한다. 이런 인식론적인 왜곡은 순간적인 지각의 경험가운데에서도 자아 중심적인 관점이 침투 함으로써 일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갈애, 자만, 견해에 지배당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된다.

 

갈애는 이를 테면, 내적인 땅의 요소인 머리카락 등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일으키는 것이고, 자만은 그 욕망과 탐욕의 성취함과 성취하지 못함에 따라 ‘나는 우월하다. 나는 동등하다, 나는 열등하다.’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고, 견해는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라 한다. 이것이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범부)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이를 만냐띠라 한다.

 

만냐띠 6단계를 보면 지각된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관계아래서 상상된 자아감각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생각에 실체를 부여한 것이다. 그런 예가  ‘근본법문의 경(M1)’에 있다. 그래서 경에서는  땅 뿐만 아니라 물, , 바람, 존재, 신들 등 수 많은 대상이 등장한다. 그 중에 창조주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창조주를 창조주으로 여기고 창조주를 창조주으로 여기고 나서, 창조주를 생각하고 창조주 가운데 생각하고 창조주로부터 생각하며 ‘창조주는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창조주에 대해 즐거워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나는 말한다.” (M1)

 

 

정형구에서 땅 대신 창조주를 대입한 것이다. 6단계의 법칙을 적용하면 창조주는 존재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창조주는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향수하기 때문이다.

 

6) 잘 배운 고귀한 부처님의 제자는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범부)들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봄으로 인하여 왜곡된 사유가 발생된다. 그 결과 왜곡된 사유에 대하여 자기 것이라 여기고 여기에 실체성을 부여 한다. 그렇다면 잘 배운 고귀한 부처님의 제자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경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거룩한 님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곧바로 알고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곧바로 알고 나서,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 가운데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며, ‘하느님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하느님에 대해 즐기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벗어 났기 때문이다.” (M1)

 

 

여기서 거룩한 님은 아라한을 말한다. 하느님은 ‘브라흐마(Brahma)’를 발한다. 고대 인도에서 브라흐마는 창조주이자 절대신이다. 오늘날의 유일신교의 유일신과 같은 개념이다. 그래서 번역자는 브라흐마에 대하여 ‘하느님’으로 번역하였다.

 

번뇌 다한 아라한은 업을 짓지 않는다. 보아도 그저 볼 뿐이고, 들어도 그저 들을 뿐 더 이상 갈애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라한은 대상을 곧바로 알 뿐만 아니라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제거 하였으므로 하느님에 대하여 영원한 실체라 생각하지 않는다. 또 그것에 환락을 즐기지도 않는다.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고귀한 제자들이 대상을 보는 태도이다.

 

 

“바히야여, 그렇다면,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다. 바히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바히야여,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다. 바히야여, 그대가 그것과 함께 있지 않으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 속에 없다. 바히야여, 그대가 그 속에 없으므로 그대는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그 양자의 중간세상에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 (Ud1.10)

 

 

“말룽끼야뿟따여, 그대에게 보이고 들리고, 감각되고 인식된 것에 관하여 말한다면,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각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된 것만이 있을 뿐이다. 말룽끼야뿟따여,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각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된 것만이 있을 뿐이라면, 말룽끼야뿟따여, 그대는 그것에 의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는 그것 안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그것 안에 있지 않으면, 여기나 저기나 그 양자 사이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자체가 괴로움의 종식이다. (S35.95)

 

 

2015-05-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