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나도 시인이 될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5. 5. 18. 17:45

 

 

나도 시인이 될 수 있을까?

 

 

 

안양아트센터에서

 

자주 다니는 길이 있다. 점심 때 밥 먹으로 갈 때 다니는 길이다. 안양문예회관 앞길이다. 지금은 이름이 안양아트센터로 바뀌었다. 이름도 시대를 따라 가나 보다. 문예회관이라는 좋은 말이 있음에도 아트센터라는 영어식 표현을 사용하였다. 동사무소가 주민센터로 바뀌듯이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좀 더 고상해 보여서 일 것이다.

 

청명한 오월 아트센터 건물에 플레카드가 나부낀다. 세로로 길게 드리워져 있는 플레카드 중 하나에 눈길이 꼽혔다. 거기에는 ‘2015 안양문인협회 시화전이라는 글씨가 써 있다. 기간을 보니 지금이다. 점심 먹으로 가는 것을 잠시 뒤로 미루고 홀에 들어 갔다. 시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화전이 열리고 있는 공간으로 들어 가 보았다. 입장료는 없이 무료로 누구나 자유로이 시와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넓직한 실내에 사람은 거의 없다. 아마 한가한 오전이어서 일 것이다. 여유 있고 편안하게 시와 그림을 보았다. 시화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시와 그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붉은 노을이 퍼지며 서서히 밝아오는 동녘

 

시화중에 일출이라는 작품을 보았다.

 

 

 

 

 

고요속에 앉아

바다 너머로 시선을 묶고

임을 기다린다.

잔잔한 바다 가운데에

떠 있는 고기잡이배들이

수평선을 가로막으며 분주히 움직인다.

여명에 쫓기어

숨 가쁘게 달려가는 고기잡이배 뒤로

수평선이 밝아온다.

임이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 숨죽이며 지켜본다.

붉은 노을이 퍼지며 서서히 밝아오는 동녘.

임의 모습이 보이자 드넓은 바다가 홍안이 된다.

검붉은 구름 속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며 나타난 임!

수줍은 듯 가볍게 떨고 있는 홍안의 바다를 굽어본다.

 

(일출, 김미자)

 

 

시를 보니 아침바다의 모습이 떠 오른다. 그런 바다는 삶의 바다이다. 고기잡이 배들이 아침 일찍 바다에 나가 조업을 하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다. 그런데 서서히 동녘이 밝아 온다고 하였다. 새벽을 말한다.

 

새벽은 전조이다. 무엇의 전조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해가 뜰 전조이다. 해가 뜨기 전에 동쪽 하늘이 훤해 지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시인은 붉은 노을이 퍼지며라 하였다. 태양이 떠 오르기 전에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는 것이다.

 

벌건 하늘은 새벽에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해가 지고 난 직후에 서쪽 하늘에서도 볼 수 있다. 청명한 날 약간의 구름이 있을 때 해질녘의 하늘은 벌겋게 달구어진다. 해가 지고 나서도 서쪽 하늘은 벌겋게 물들어 있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저녁 노을

 

저녁놀은 아름답다.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그래서일까 박완서 작가의 소설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에 따르면, 작가는 유년시절 벌겋게 달구어져 있는 노을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는 왜 울었을까?

 

서쪽하늘에서 벌건 노을을 보면 장관이다. 다구나 해가 질 무렵 한줄기 햇살이 빨갛게 물든 단풍잎에 비칠 때 아름답다. 그러나 인생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이 보았을 때는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 다울 것이다.

 

빨간 단풍에 석양의 햇볕으로 반짝일 때 황혼의 노인은 자신의 삶을 본다. 고독하게 홀로 살아 온 노인이 저녁노을을 바라본다. 황혼에 이른 노인이 붉게 타는 저녁 노을을 하염없이 바라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벌겋게 달구어진 서녘은 눈물나게 아름다울 것이다. 그런데 박완서 작가는 유년의 나이에 벌겋게 달구어진 저녁노을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하였다.

 

그 님이 있기에 힘겨운 세상을

 

시인은 해뜨기 전 동녘을 노래 하고 있다. 해뜨기 전에 동쪽 하늘이 마치 저녁노을 처럼 붉은 노을 졌다고 한다. 고기잡이 배들의 분주한 삶의 현장에서 붉은 노을은 이제 시작 되는 생명력이 넘쳐 흐른다. 

 

마침내 해가 떠 올랐다. 동녘의 붉은 노을은 해가 떠 오르기 전조 이었던 것이다. 거인은 먼저 커다란 그림자를 던진다고 하듯이 해가 또 오르기 전에 새벽부터 먼저 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해가 떠오르자 바다는 바다가 홍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하늘과 바다가 붉게 물든 것이다.

 

새벽을 던지며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떠 오른 해는 애타게 기다리던 님이다. 그 님이 있어서 하루가 시작 되고, 그 님이 있어서 세상이 밝아지고, 그 님이 있기에 힘겨운 세상을 살아간다. 그 님이 없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스마트폰과 카톡이 만났을 때

 

시인이 되고 싶었다. 아니 시가 쓰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오래 되지 않았다. 카톡방에 초대받고 나서부터 이다. 이전에는 오로지 글만 썼으나 카톡방에 간단한 글을 올리면서부터 시라는 것을 써 보게 되었다.

 

시를 배워 본적도 없고 써 본적도 없지만 익숙하다. 그것은 아마도 글을 써서 일 것이다. 지난 9년 간 거의 매일 글을 쓰다시피 하고 있다. 그것도 장문의 글이다. 이렇게 글쓰기를 생활화 하다 보니 글쓰기는 일상이 되었다. 밥먹는 것이 일상이듯이 밥먹듯이 쓰는 것이다. 그런 글 역시 어디서 배운 적도 없고 이전에 쓴 적도 없다. 그날 그날의 느낌을 솔직하게 이야기 하듯이 써 내려 가는 것이다.

 

요즘은 스마트폰시대이다. 그리고 카톡시대이다. 스마트폰과 카톡이 만났을 때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카톡이나 밴드 등 SNS놀이터나 다름 없다. 그때 그때 생각나는 것을 짤막하게 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더러운 마음이 가라 앉으면

 

새벽을 좋아한다. 해가 뜨기 전에 새벽에는 모든 것이 착 가라앉아 있다. 마치 흙탕물이 시간이 지나자 정화 되어 투명하게 바닥이 보이는 것과 같다. 더러운 마음도 정화 되어 있는 것 같다.

 

더러운 마음은 다섯으로 볼 수 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 분노,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한, 의심 이렇게 다섯 가지를 말한다. 이를 오장애또는 오개라 한다.

 

오장애는 물의 비유로 설명된다. 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다섯 가지 색깔로 물든 물’로, 분노 ‘부글부글 끓는 물’로, 해태와 혼침은 ‘이끼가 낀 물’로, 흥분과 회한은 ‘바람이 불어 파도치는 물’로, 의심은 ‘흐린 흙탕물’로 묘사 된다. 이렇게 물이 오염되어 있으면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음이 탐욕, 분노 등으로 가득할 때 대상에 쉽게 휩쓸린다. 만약 탐욕으로 가득하다면 자신의 본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여 격정에 사로 잡혀 있다면 격정의 노예가 되어 이끌려 갈 것이다.

 

새벽이 되면 탐욕, 분노 등 다섯 가지 더러운 마음은 가라앉아 있다. 마치 흙탕물이 정화 되어 바닥이 보이는 것과 같다. 이때 시상이 잘 떠 오른다. 그래서 손안의 작은 컴퓨터인 스마트폰의 메모를 활용한다. 가장 편한 자세로 똑똑 두드리다 보면 시가 하나 완성된다.

 

자작시 땅의 끝에서

 

카톡방에 초대 받은 이후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된 것은 반년 밖에 되지 않았다. 매일 새벽 정신이 맑을 때 똑똑 두드려 쓴 시를 카톡방에 올려 놓는다. 그렇다고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떠 오른 생각을 잡아 놓았는데 그대로 보내기 아쉬운 것이다. 그래서 블로그에 별도의 방을 하나 만들어 보관 하고 있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막다른 골목, 절벽, 동굴, 해안가 

더 이상 나아 갈 수 없네.

 

막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이

삶의 벼랑에 서 있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네.

 

이 거센 삶의 흐름을

도저히 건널 수 없네.

 

삶의 끝에 이른 사람이

갈 데까지 가보네.

 

가다 가다 가보니

땅의 끝이네.

 

막다른 골목, 절벽, 동굴, 해안가 

더 이상 나아 갈 수 없네.

 

막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이

삶의 벼랑에 서 있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네.

 

이 거센 삶의 흐름을

도저히 건널 수 없네.

 

삶의 끝에 이른 사람이

갈 데까지 가보네.

 

가다 가다 가보니

땅의 끝이네.

 

(땅의 끝에서, 진흙속의연꽃, 2015-04-03)

 

 

 

 

지난 4월 해남 땅끝 마을에서 일출을 보고 그 느낌을 적은 것이다. 이런 시 역시 새벽에 적었다. 해가 뜨는 것을 보고서 그 감흥을 스마트폰 메모에 담은 것이다.

 

나도 시인이 될 수 있을까?

 

시를 써 본적이 없다. 그러나 시는 매우 친숙하다. 매일 글을 쓰다 보니 매일 시를 접한다. 특히 사구게형식으로 되어 있는 시를 많이 접한다. 그래서 좋은 시는 외기도 한다.

 

수 많은 시를 접하고 해석하고 글을 써 왔다. 시를 별도로 배우지 않았어도 시의 형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제대로 배운 바가 없기 때문에 시를 배워야 겠다고 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시화전 플레카드를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시화전 구경을 하게 되었다.

 

시화전을 다 구경하고 난 다음에 안내 데스크로 갔다. 어떻게 하면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인가를 물어 보기 위해서이다. 안내 하는 분에 따르면 입선 경력이 있는지 물어 본다. 신춘문예에 당선 된 적이 있는지, 권위 있는 문예지에 추천받은 적이 있는지, 개인 창작집을 발행한 적이 있는지 등을 말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다만 지난 9년 동안 블로그에 글을 써 왔다고 하였다. 이에 정회원 가입신청서를 제출하라고 한다. 심사 해서 알려 주겠다고 한다.

 

 

 

 

 

 

 

 

 

 

 

요즘 시를 쓰고 있다. 시를 배워 본적이 없지만 시의 형식을 갖추어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주로 새벽녘이다. 온갖 오염원이 착 가라 앉은 새벽시간에 떠 오르는 생각을 시의 형식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일터로 가는 길에 자연의 변화를 보면서 시상이 떠 올랐을 때 그 자리에 멈추어 스마트폰을 똑똑 두드린다.

 

나도 시인이 되고 싶다. 누군가 시인 자격증을 주어서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시를 배워 시를 써 보고 싶다.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솔직한 느낌을 시어로서 표현 하고 싶은 것이다. 과연 나도 시인이 될 수 있을까?

 

 

2015-05-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