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보현봉이 바라보이는 휴휴재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5. 5. 17. 12:54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보현봉이 바라보이는 휴휴재에서

 

 

 

남들 앞에 서 본 적이 없는데

 

남들 앞에 서 본 적이 없다. 엄밀히 말하면 교육을 해 본 적이 없다. 교육을 받고 살았어도 남을 가르쳐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남들 앞에 서게 되었다. 그것은 니까야강독모임에서이다.

 

살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진다. 생각지도 않은 일에 휘말릴 수도 있다. 사건이나 사고가 예고 없이 발생할 수 있듯이 살다 보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사건이나 사고에 개입 될 수 있다. 그것이 좋은 일일 수도 있고 좋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모임이라는 것은 바쁘게 살아 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번거로운 것이다. 자신의 한몸 편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모임이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은 시간낭비일지 모른다. 이익이나 이득이 되지 않을 때, 건질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 그렇게 생각 할 것이다.

 

작년 까지만 해도 집과 사무실을 오가는 삶을 살았다. 일인사업자로 살면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며 살았다. 그렇게 십년을 살았다.

 

이전에는 직장에 얽매이는 삶이었다. 월급생활자로서의 삶이 모두 그렇듯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냈다. 그러다 보니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상이었다.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잃어 버린 것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안정적인 생활을 바라는 자들은 직장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고정적으로 들어 오는 월급이 있어서, 나쁘게 말하면 월급받아 먹는 재미로 노예와 갚은 삶을 사는 것이다.

 

일인사업자로서의 삶은 자유롭다. 쉽게 말해서 일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노는 입에 염불한다는 말이 있듯이, 노느니 글을 쓰고 있다. 그런 글쓰기가 9년이 되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였다. 9, 햇수로 10년 글을 쓰다 보니 글의 양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블로그에 매일 올리다시피 하는 글의 양이 3,600개 가량 된다. 그러다 보니 검색에서 대부분 걸린다. 그 결과 이름이나 얼굴은 몰라도 필명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올해부터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재가단체 모임에 가입하게 되어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한번 하게 되면 빠지지 않는다. 종교모임이나 동창모임 역시 빠짐 없이 참석한다. 이번에 가입한 재가단체모임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빠짐 없이 참석하고 적극적으로 참여 하고 있다.

 

니까야강독모임의 좌장을 맡고

 

재가모임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았다. 그것은 니까야강독모임의 좌장을 맡은 것이다. 아마 인터넷에 글을 쓰고, 교계언론에 기고를 하고, 카톡과 밴드에서 눈에 띄게 활동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매우 부담스럽다. 그것은 한번도 강단에 서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0년 전에는 전자제품을 개발하는 엔지니어로서의 삶을 오래 살았고, 이후에는 사무실에 틀어 박혀 오로지 글만 쓰고 살았는데 강독모임을 이끌어 달라는 요청에 마음의 부담을 느꼈다.

 

요즘 표현에 대략난감이라는 말이 있다. 난감은 난감인데 대략난감이라 한다. 대략난감은 무슨 뜻일까? 인터넷국어사전을 찾아 보니 “1. 자신의 상황이 대체적으로 난감한 상황에 놓였거나 당황했을 때 쓰는 말. 2.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쓰임.”라고 설명 되어 있다. 사전의 설명대로 대략난감한 상황이었다. 니까야강독모임을 이끌어 달라는 요청에 대략난감했던 것이다.

 

니까야강독모임은 회원들이 함께 니까야를 독송하는 모임이다. 돌아 가며 한 문단씩 읽는 형식을 말한다. 그리고 궁금하거나 의문 나는 사항이 있으면 토론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누군가 이끌어 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은 교학에 대하여 많이 알아야 하고 또한 수행경력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부족한 사람에게 맡긴다면 대략난감해 하지 않을 수 없다.

 

모임에 교학적으로나 수행으로나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런 사람이 있어서 함께 배우는 시간을 가진다면 모두를 향상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사람이 없어서 강독모임의 좌장을 맡기로 하였다.

 

교재는 맛지마니까야로 정하였다. 너무 길지도 않고 너무 짧지도 않은 중간정도 되는 길이어서 선정하였다. 그런 맛지마니까야는 교학과 수행에 대한 핵심적인 가르침이 잘 요약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번역자 전재성박사는 머리말에서 초기불교 경전 가운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체계화시킨 경전으로 모든 불교교리의 원천이 될 만큼 중요한 경전입니다.”라 하였다. 그런 맛지마니까야에 대하여 명상수행의 바이블이라고도 한다.

 

마치 깊은 산중에 온 듯

 

니까야강독은 휴휴재에서 열렸다. 부암동에 있는 개인 사저이다. 단체를 이끌어 가는 사람의 집으로서 비어 있다. 주로 경전공부모임방으로 활용된다. 다실이 있어서 밤샘 법담도 나눌 수 있도록 해 놓았다.

 

휴휴재에 오면 마치 깊은 산중에 온 듯 하다. 서울 중심에서 고개만 하나 넘으면 다른 세계가 펼쳐 지는 것이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별천지에 온듯하다. 정면에는 국립공원 북한산이 보인다. 가장 높이 보현봉이 솟아 있고 그 옆에 문수봉이다.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서 전망이 무척 좋다.

 

 

 

 

올라 가는 길은 가파르다. 그것도 구불구불한 작은 골목길과 계단을 숨이 차도록 걸어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올라 서면 달라진다. 산의 정상에 오르면 피로가 풀리듯이, 오르고 나면 오른 보람을 느낀다. 저 멀리 북한산 자락이 파노라마치기 때문이다.

 

 

 

 

 

삼귀의와 축복경을 낭송하고

 

모임은 7시부터 시작 예정이었다. 그러나 느슨한 형태의 모임은 제때에 시작하는 경우가 드물다. 이날 모임도 마찬가지이었다. 늦게 참석한 사람까지 합하여 모두 12명이었다.

 

강독을 시작하기 전에 돌아 가며 간단한 자기소개가 있었다. 늘 보는 회원님들이 많다. 그러나 처음 온 분들도 많았다. 저 멀리 미국 뉴욕의 조계사에서 온 분도 있었다. 친구와 함께 온 것이다. 멀리 대구에서 KTX타고 일부로 참석한 분도 있고 인천에서 온 분 역시 먼길을 일부로 찾아 왔다.

 

간단한 자기소개가 끝나고 본격적인 강독에 들어 갔다. 들어 가기 전에 간단한 의식을 하였다. 삼귀의와 예불문 낭송이다. 삼귀의는 모임의 취지에 맞게 낭송하였다. 그것은 기존 한글삼귀의문을 따르지 않고 수정된 삼귀의문을 사용하였다. 한글삼귀의문에서는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되어 있으나, 모임에서는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고 바꾸어 낭송하였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승보는 스님이 아니라 승가이기 때문이다.

 

삼귀의문을 낭송할 때 노래로 하지 않았다. 법회를 하면 삼귀의할 때 노래 형식으로 하지만 모임에서는 노래형식이 아닌 읽듯이 낭송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래서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고 읽듯이 낭송하였다.

 

다음으로 예불문 낭송이 있었다.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위대한 축복의 경(Sn2.4)’이다. 긴 길이의 경을 모두 합송하였다. 합송하는 순간만큼은 모두 거룩해 보였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경전독송을

 

니까야강독 첫번째 모임이다. 선정된 경은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의 경(M1)’이다. 이를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뿌리에 대한 법문 경(M1)’이라 하였다. 모든 가르침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핵심 법문이라는 뜻이다.

 

근본법문의 경 내용은 매우 길다. 이렇게 긴 것은 뻬얄라 (peyyala), 즉 반복구문생략처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려 50페이지에 달한다. 근본법문의 경의 경우 반복구문이 너무 많아 지루하다. 그래서 이번 강독회에서는 반복구문이 생략된 문장을 사용하였다. 거의 대부분 책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반복구문이 생략된 경을 카페에 올려 놓았다. 그래서 독송할 때는 스마트폰을 보고 하였다.

 

맛지마니까야를 책으로 구입하려면 비용이 많이 든다. 신심이 있는 불자라면 책을 사는데 주저 하지 않을 것이다. 책이라는 것은 사두면 무조건 남는 것이고, 또한 경전은 성보와 같기 때문에 부처님 모시듯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책이 없다. 그럴 경우 수십페이지 달하는 경을 인쇄할 수밖에 없다. 50페이지에 달하는 경을 10명 분 인쇄한다면 무려 500장이 소요된다. 이는 넌센스이다. 그래서 고민하였다. 해결방법으로서 스마트폰을 생각하게 되었다.

 

요즘 누구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다. 사실상 손바닥 안에 있는 작은 컴퓨터라 볼 수 있다. 언제 어디에서든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검색할 수 있다. 카페에 올려 놓은 근본법문의 경도 스마트폰을 이용하면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보면서 경전을 독송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프린트물을 준비하고

 

모두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카페에 올려져 있는 글을 찾았다. 문단별로 되어 있는 경을 돌아 가며 한사람씩 읽었다. 이렇게 경전 읽기가 모두 끝나고 나서 그 다음 해야 할 일은 궁금한 사항에 대한 토론이다. 그러나 대부분 경전을 처음 접한 사람들이 많아서 경의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였다고 본다. 그래서 별도로 프린트물을 준비하였다.

 

이전에 근본법문의 경과 관련된 글을 여러 편 올렸다. 주로 각주에 실려 있는 내용을 근거로 하여 작성된 글이다. 참고로 올렸던 글은 다음과 같다.

 

 

1)

교학만 배웠을 때물라빠리야야경(근본법문의 경, M1)

http://blog.daum.net/bolee591/16155413

 

2)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 가운데 생각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생각하며” 왜곡된 사유의 전개과정

http://blog.daum.net/bolee591/16156177

 

3)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최진석교수의 노자강의

http://blog.daum.net/bolee591/16156078

 

 

이 세 가지 글을 참고하여 또 하나의 글을 만들어 내었다. 일종의 짜깁기라 볼 수 있다. 그렇게 만든 글이 왜곡된 사유에 따른 유위적 조작의 과정(2015-05-16)’이다. 이 글을 모두 프린트하여 이날 강독회 교재로 삼았다.

 

X에 대하여

 

사람들은 끊임 없이 접촉하며 살아 간다. 눈이 있어서 보고, 귀가 있어서 듣는다. 그러다 보면 대상에 휘둘리게 된다. 그렇다고 눈막고 귀막고 살 수 있을까? 눈과 귀를 가리고 살아도 일어나는 생각은 어찌 할 수 없다. 불현듯 내 돈 떼어 먹고 달아난 사람이 생각 났을 때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눈이 있어서 본다.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한다. 보이기 때문이다. 지나는 길에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걸어 간다. 눈이 있어서 보여진 것이다. 그러나 보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이럴 때 단지 예쁘네또는 섹시하네라 하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상에서 발생한다.

 

길거리에서 예쁘고 섹시한 대상을 발견하였을 때 여러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를몰래카메로로 담은 동영상을 유튜브로 보았다. 대부분 한번 쳐다 본다. 몰래 훔쳐 보기도 한다. 더 관심 있다면 따라 가려 한다거나 말을 걸어 보려 할 것이다. 이는 대상에 휘둘린 것이다. 단지 예쁘네를 넘어 예뻐 죽겠네로 발전한 것이다. 대상을 거머 쥐려는 탐욕이 일어난 것이다.

 

근본법문의 경에 가장 먼저 나오는 정형구가 있다. 그것은 “그는 땅을 땅으로 여기고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 땅을 생각하고 땅 가운데 생각하고 땅으로부터 생각하며 ‘땅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땅에 대해 즐거워한다. (M1)”라는 정형구이다.

 

땅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그래서 X로 놓을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그는 X X으로 여기고 X X으로 여기고 나서, X를 생각하고 X가운데 생각하고 X으로부터 생각하며 ‘X는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X에 대해 즐거워한다.”라고 바꿀 수 있다.

 

X대신에 여자를 집어 넣을 수 있다. 그러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X를 여자로 바꾸면 “그는 여자를 여자로 여기고 여자를 여자로 여기고 나서, 여자를 생각하고 여자가운데 생각하고 여자로부터 생각하며 ‘여자는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여자에 대해 즐거워한다.”로 된다.

 

X에 대한 것은 매우 많다. 경에서는 불을…, 바람을…, 존재들을…, 신들을…, 창조신을…, 하느님을…, 빛이 흐르는 하느님 나라의 신들을…, 영광으로 충만한 하느님 나라의 신들을…, 위대한 경지로 얻은 하느님 나라의 신들을…, 승리하는 하느님 나라의 신들을…, 무한한 공간의 세계를…, 무한한 의식의 세계를…, 아무 것도 없는 세계를…,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를…, 보여진 것을…, 경험된 것을…, 인식된 것을…, 하나인 것을…, 다양한 것을…, 모든 것을…, 열반..(M1)”라 하였다.

 

X X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이다. X X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상상의 나래를 펴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왜곡된 사유가 일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왜곡된 사유는 유위법적 조작에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본 것에 대하여 본 것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행위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번뇌 망상이 일어난다. 이와 같은 왜곡된 사유에 따른 유위법적 조작의 과정을 설명해 놓은 가르침이 근본법문의 경(M1)’이다.

 

그들은 왜 환희용약하지 않았을까?

 

근본법문의 경 말미에 이런 말이 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 수행승들은 세존께서 하신 말씀에 만족하지 않았다.”라는 표현이다. 대승경전에서는 부처님이 설법하면 제자들이 환희용약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뿌리가 되는 법문을 하였음에도 제자들은 기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왜 그랬을까? 주석에 따르면 바라문출신 수행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당시 고대인도에서 바라문 계급은 카스트의 최상층에 있었다. 바라문 출신들로서 배울 만큼 배운 새내기 수행승들이 부처님의 뿌리에 대한 법문을 들었다. 그런데 법문을 듣고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그것은 자만심에 기인한다. 부처님 못지 않게 배우고 학습했다고 자부 하는 브라만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수행승들이 만족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이 법문이 그들 자신의 자만심이 상처받기 쉬운 영역까지 너무 깊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Mdb.1165)”라 하였다.

 

불교의 성립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역사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부처님당시 고대인도에서는 바라문위주의 사회이었다. 사성계급의 정점에 바라문계급이 있어서 바라문이 주도하는 계급사회이었다. 그런데 바라문교의 특징은 최고신이자 창조주이자 제의의 대상인 브라흐마가 있다. 또 개별적인 자아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소아는 대아와 합일하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은 것이다. 이를 범아일여(梵我一如)라 한다. 우주의 근본인 브라흐마와 개인의 중심인 아트만이 궁극적으로 같다는 사상을 말한다.

 

부처님은 브라만교를 부정하였다. 이는 우주의 근원이자, 존재의 근원이고, 창조주이고 최고신인 브라흐마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또 변치 않는 개별적 자아가 있다는 아뜨만을 부정하였다. 부처님이 연기법에 따른 무아의 가르침을 펼친 것은 고대인도의 역사적의미로 보았을 때 브라만교를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브라만교를 비판하며 성립된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의 경은 브라만교를 부정하는 법문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자부심이 강한 브라만 출신들의 수행승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경의 말미에 그들 수행승들은 세존께서 하신 말씀에 만족하지 않았다.(M1)”라 하였을 것이다.

 

범부와 학인은 어떻게 다른가?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다. 이는 대상을 거머 쥐려는 탐욕이 발동된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탐욕으로 산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assutavā puthujjana)’이라 하였다.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을 범부라 한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아무리 상식이 풍부해도 있는 그대로 알고 보지 못하면 모두 범부에 해당된다. 그래서 ‘assutavā puthujjana’에 대하여 각주에 따르면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배우거나 수행을 성취한 적이 없고 번뇌와 잘못된 견해에 사로잡힌 일반사람들을 말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그치는 자들이 있다. 본 것으로 인하여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자들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위없는 안온을 구하려 배우는 학인이라 하였다. 여기서 학인은 세카(sekha)’를 말한다. 각주에 따르면 세카에 대하여 보다 높은 수행을 쌓은 부처님의 제자를 의미한다.”라 하였다. 이는 사쌍팔배의 성자 가운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무학의 아라한을 제외 한 일곱 분의 성자가 세카인 것이다.

 

세카에 대하여 학인이라 한다. 아직 배울 것이 더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런 학인은 나이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어려도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성자이다. 공양과 공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학인들은 대상을 제대로 본다는 사실이다. 본 것은 단지 본 것에 그치는 것을 말한다. 본것을 대상으로 하여 사유의 왜곡과 유위의 조작에 따라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범부와 학인의 차이점이 있다. 경에 따르면 대상과 접촉하였을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를 여자의 비유로 들 수 있다. “그는 X X으로 여기고로 시작되는 정형구에서 X대신 여자를 집어 넣은 것이다. 그래서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단계

일반사람(assutavā puthujjana)

학인(sekha)

1

그는 여자를 여자로 여기고

그는 여자를 여자로 곧바로 알고

2

여자를 여자로 여기고 나서,

여자를 생각하고

여자를 여자로 곧바로 알고 나서,

여자를 생각하지 않고

3

여자가운데 생각하고

여자 가운데 생각하지 않고

4

여자로부터 생각하며

여자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며

5

‘여자는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여자는 내 것이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6

여자에 대해 즐거워한다.

여자에 대해 즐기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충분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비교표를 보면 범부와 학인의 태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런 차이는 가르침을 접하였는지 접하지 않았는지 차이이다. 그리고 실천수행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의 차이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유학, 즉 학인의 경우 수행의 과정에 있다. 미세하게나마 번뇌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충분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러나 번뇌 다한 무학의 아라한에게 번뇌망상이 일어날 리 없다. 그래서 경에서는 그는 그것을 완전히 알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완전히 알아 버리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그래서 탐--치로 대표되는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은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번뇌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에 대하여 여실지견(如實知見, yathā-bhūta-ñāa-dassana)’이라 한다.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일찍이 부처님은 법을 청해 듣고 법에 대하여 대화를 하는 것을 권장하였다. 이는 망갈라경(축복경)에서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tn266)”라 하였다. 길을 함께 가는 도반들과 가르침을 서로 논의 하는 것은 행복을 넘어 축복이다.

 

출재가를 막론하고 수행자에게 있어서 도반은 자신의 향상을 시키는데 있어서 도움이 된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청정한 삶을 사는 도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진실로 나에게 유익함이고 진실로 나에게 큰 이익이다. (S4.22)”라 하였다.

 

어느 날 아난다는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이러한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절반에 해당합니다. (S3.18)”라 하였다. 좋은 도반은 인생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라고  감탄한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의 말을 부정한다. 그러면서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이러한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에 해당한다. (S3.18)”라 하였다. 부처님은 좋은 도반을 만나는 것에 대하여 삶의 절반이 아니라 삶의 전부라 하였다.

 

청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스승도 있어야 하고 도반도 있어야 한다. 특히 도반의 경우 삶의 전부와 같다고 하였다. 이는 서로를 향상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북한산 보현봉이 바라보이는 휴휴재에서 좋은 도반들과 법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2015-05-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