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깨달음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5. 6. 4. 09:45

 

 

깨달음에 대하여

 

 

 

 

스님들은 깨달음에 대하여 거창하게 이야기 합니다. 선방에 앉아서 화두를 들어야만 깨닫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초기불교적 관점으로 본 다면 깨달음은 사성제를 아는 것입니다.

 

사성제는 초전법륜경(S56.11)에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반야심경 외듯이 초전법륜경을 욀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자랑같지만 초전법륜경을 빠알리어로 모두 외운 바 있습니다. 글자는 1,004자 입니다.

 

깨달음은 괴로움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생노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 했듯이 괴로움을 떠나서 깨달음을 논할 수 없습니다. 당면한 괴로움을 해결하지 않고서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불교적 깨달음이라 볼 수 없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의 목적입니다. 먼저 괴로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고성제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듯이,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괴로움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합니다. 고성제는 결론적으로 오취온(五取溫)’입니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사성제는 괴로움의 원인(고성제)과 발생(집성제)이라는 2지 연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를 확장하면 12지 연기가 됩니다. 원인과 발생을 알았다면 괴로움의 소멸(멸성제)과 소멸방법(도성제)이 없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사성제를 알았을 때, 그리고 실천하여 괴로움이 소멸되어 해탈 되었을 때 윤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앎()과 봄()이 생겨납니다.  해탈지견입니다. 이것이 불교적 깨달음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열반을 체험하였다 하여 끝이 아닙니다. 열반 체험은 경험되지만 남아 있는 번뇌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세한 번뇌이지만 완전히 소멸되려면 최대 일곱생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번뇌가 쉽게 소멸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사띠와 삼빠잔나의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가르침을 늘 기억하여 되새기며, 대상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분명히 아는 것 입니다. 사성제를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았으면 그 깨달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깨어 있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여기 저기 태어나

오랜 세월 윤회했네.

 

이들 진리를 보았으니

존재의 통로는 부수어졌고

괴로움의 뿌리는 끊어졌고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어졌네.”

(D16. S56.21)

 

 

깨달은 자들은 자비롭습니다. 이미 탐욕과 성냄과 같은 거친 번뇌가 소멸 되었기 때문에 그 자리를 관용과 자애로 채워져서 자비의 마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사람들이 괴로움의 바다에서 헤매는 것을 보고 불쌍해 보고 있을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전도하게 됩니다.

 

 

2015-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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