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글쓰기는 강력한 현실참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5. 6. 9. 10:05

 

글쓰기는 강력한 현실참여

 

 

 

지금은 스마트폰시대이다. 해뜨기 전 새벽 가장 편안한 자세로 오늘도 스마트폰 메모를 활용한다. 오로지 오른쪽 엄지만을 이용하여 자판을 똑똑 쳐 나간다. 자주 치다 보니 익숙하다. 이제 컴퓨터 자판 보다 더 익숙하다.

 

세상은 연결 되어 있다

 

매번 토요일 만나는 법우님이 있다. 저 멀리 구미에서 KTX를 타고 저녁모임에 참석하는 열혈법우님이다. 지난번 봉원사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매일 아침 대구에서 구미까지 버스로 출근 하는데 글을 본다고 하였다. 개인의원을 하다 보니 인사 문제 등 골치 아픈 문제가 많은데 신기하게도 그날 글에 해법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댓글을 통해서도 접하고 만나서도 듣는다. 이렇게 본다면 글이 누군가에는 영향을 주고 있음에 틀림 없다.

 

세상은 연결 되어 있다. 네트워크만 깔려 있으면 실시간으로 소통이 가능하다. 그것은 일대다(一對多)의 형식이다. 전화만 있던 시절에는 일대일(一對一)통신이었으나 인터넷시대에는 불특정다수와 소통한다. 물론 본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요즘 시대에 철저하게 선택에 달려있다. 그래서일까 카톡이나 밴드에서 탈퇴하는 사람들도 많다. 안보면 그만 일 텐데 굳이 퇴장해는 이유는 무엇일까?

 

퇴장하는 이유를 물어 보았다. 업무에 방해되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 한다. 알림소리가 번거롭다고 한다. 그럴 경우 알림을 오프로 하면 될 것이다. 그럼에도 퇴장을 하는 이유는 자주 보게 되기 때문이라 한다. 불이 들어오면 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 없이 퇴장해 버리는 것이다.

 

퇴장하는 이유는 많이 있을 것이다. 가장 많은 이유는 도움이 안되어서 나가는 것이라 한다. 그런 이면에는 홀로 고고하게 살고 싶다는 심리도 깔려 있을 것이다. 이는 SNS상에서 소통되는 이야기가 거의 잡담수준이어서 배울 것이 없다고 보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한마디로 삶에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퇴장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이해관계에 매우 민감한 현대인들에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또 하나의 퇴장 이유를 보면 특정인에 대한 거부감이다. 대게 아는 사이로 묶여져 있는 SNS에서 견해가 다를 때 조용히 퇴장한다.

 

그 사람을 알려거든

 

접촉하기 전에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사람의 계행을 알려면 함께 살아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도 오래 살아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함께 살다 보면 드러나기 때문이다. 평소 모르고 지냈던 것들이 함께 살다 보면 드러나는 것이다. 연애할 때는 모든 것이 장점으로 보였으나 결혼하여 살다 보면 숨어 있는 단점이 드러나 보이듯이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면 드러나는 것이다. 낮에 한말 다르고 밤에 행동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있다. 언행일치가 안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계행이 어떤지 알려면 함께 살아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 사람이 정직한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서로 대화를 통해 왕래 해 보아야 알 수 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한 입으로 두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사람에게 말하는 것과 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다르고, 예전에 한 말과 지금 한 말이 다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말에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대화를 해보면 그 사람이 정직한지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강건한지는 위기에 닥쳐 보아야 알 수 있다. 상대방에게 재난이 닥쳤을 때 보면 알 수 있다. 대부분 줄행랑을 치고 발뺌을 한다. 그것은 자신의 불익과 관련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기적 행동을 하게 된다.

 

또 한편으로 그 사람이 강건한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이나 재물이나 건강을 잃었을 때, 즉 재난을 당하였을 때이다.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매우 비통해 한다. 재물을 잃었을 때도 건강을 잃었을 때도 비통해 하며 심지어 가슴을 치며 울부짓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강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접한 자는 부처님의 여덟 가지 원리를 알기 때문에 비통해 하지도 않고 가슴을 치며 울부짓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강건한 자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그것은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이라는 여덟 가지 원리, 즉 팔풍(八風)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팔풍으로 살아 간다. 바람 부는 대로, 깃발 날리는 대로 살아 간다. 그러나 강건한 사람들은 팔풍에 휘둘리지 않는다. 세상이치가 그러한 줄 알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재물과 건강의 상실을 겪더라도 비통해 하고나 가슴을 치며 울부짓는 등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 사람이 강건한지는 재난을 만났을 때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지혜가 있는지에 대해 알려면 토론을 해보면 알 수 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보면 금방 드러나듯이 대화를 하다 보면 지식이나 지혜, 공부나 수행의 정도가 드러난다. 결국 인격이나 인품도 드러난다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는 것 같다

 

선가용어 중에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는 말이 있다. 입만 벙긋하면 어긋난다는 말이다. 그럴 경우 가만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가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하여 알 수 없다. 그러나 토론을 해 보면 다 드러난다. 그 사람의 정신적 수준이 드러나는 것이다.

 

제자가 자신이 체험 한 것을 점검 받기 위하여 스승을 찾는다. 이때 그의 얼굴 표정은 온화하고 은은하며 깨끗하다. 그는 스승을 향해서 공손하고 부드럽게 인사를 한다.  또한 스승에게 예의가 바르고 조용하게 보고 한다. 이 때 스승은 제자가 어느 단계의 지혜에 올라와 있는지 안다.

 

토론을 해 보면 모든 것이 다 드러난다. 그 사람의 지혜가 열악한지 수승한지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지혜가 열악한 자는 수행의 경지에 대하여 의미 있는 말로 표현을 하지 못한다. 반면 지혜가 있는 자는 의미 있는 말로 표현한다. 이는 탐구하는 자세와 말솜씨와 질문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심오하고 고요하고 승묘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 넘고 미묘하여 오직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말로 표현한다. (A4.192)”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얼마나 지혜가 있는지, 그 사람이 얼마나 깨달았는지에 대해서는 토론을 해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산중에 홀로 피는 꽃은

 

지금은 SNS시대이다. 지인들이나 불특정다수와 소통하는 시대이다. 소통하는 것이 잡담수준에 머문다면 시간낭비 일 것이다. 그러나 잘 활용하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이다. 시간이 돈인 시대에 돈도 안되는 글을 써서 공유 하는 것도 일종의 나누고 베풀고 보시 하는 행위이다. 결국 모두를 향상(向上)으로 이끄는 아름다운 마음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꽃은 피고 진다. 꽃이 필 때 한번 쳐다 보게 된다. 꽃이 피어야 그런 나무가 있었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꽃이 핀다는 것은 존재를 과시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저 깊은 산중에 홀로 피는 꽃이 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으니 언제 피었는지도 모른다. 꽃이 피고 져도 아무도 모른다. 독각승(獨覺乘)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홀로 깨쳐 홀로 사는 사람을 독각승이라 한다. 다른 말로 벽지불승, 연각승, 중승이라고도 한다. 마치 산중에서 피었다 지는 꽃처럼 나홀로 사는 깨달은 자를 말한다. 나홀로 살아가니 그런 사람이 있는 줄 조차 모른다. 고통스럽게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독각승을 보면 쳐 죽여라!”라는 극단적인 말이 나왔을 것이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 또 꽃이 피면 향기를 낸다. 열매와 향기는 이로운 것이다. 꽃이 피어 있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그 과정에서 내뿜는 향기 또한 아름답다. 더구나 열매를 맺어 과실을 얻는다면 금상첨화이다. 도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글쓰기는 강력한 현실참여

 

한 사람의 도인이 출현 함으로 인하여 그 도의 향기가 널리 퍼져간다. 이에 대하여 소설가 김정빈님은 ‘향기와 벌나비’ 이론으로 설명하였다. 꽃에서 향내가 나면 그 향내를 찾아 벌과 나비가 찾아 온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은 자가 나타나면 그 향내가 날 것이다. 그 도의 향기를 따라 사람들이 몰려 들 것이다.

 

도인 곁에 있으면 굳이 “도가 무엇입니까?” 라든가 “깨달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스승의 얼굴과 행동에 모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승이 있는 도량에 있는 것 자체가 공부가 되는 것이고, 스승 옆에 있는 것 자체가 가장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소설가는 다음과 같이 벌나비이론을 시로 말하였다.

 


나부터 닦자,

그럼으로써 내면에 향기가

가득한 사람이 되자.

그러면 먼저 나 자신이 행복해질 것이고,

자연스럽게 남들에게도 이익이 미칠 것이다.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 그 과정에서 향기를 내 뿜는다. 도의 향기이다. 꽃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지 못하지만 도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간다. 꽃의 향기는 고작 몇 미터에 지나지 않지만 도의 향기는 마을 전체에 퍼진다. SNS시대에 네트워크가 깔린 곳이라면 어디에나 퍼져 나간다. 그래서 모두를 향상으로 이끈다. 카톡과 밴드, 페북 등 SNS와 블로그와 카페, 게시판 등의 인터넷에 글을 쓰는 것은 강력한 현실참여이다.

 

 

2015-06-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