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움직이지 말라고? 가만 있으면 다 죽는다! 바른불교가 희망이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6. 11. 10:52

 

 

움직이지 말라고? 가만 있으면 다 죽는다! 바른불교가 희망이다

 

 

 

성시화운동의 장본인

 

황국저지! 바른불교재가모임의 법우님들이 황국저지를 위하여 국회앞에서 피켓팅을 하였다. 불교를 포함하여 천주교, 기독교 등 종교단체 다수가 참가하여 황교안총리인준저지를 위한 행동에 돌입하였다. 대부분 재가단체들이다. 이중 가장 돋보이게 활동한 단체가 바른불교재가모임이다.

 

6월 초여름의 뙤얕볕 아래에서 법우님들이 조를 짜서 시간대별로 피켓팅을 하였다.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다. 늘 그렇듯이 생업때문이다. 그렇다고 참가한 사람들이 여유가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남다른 희생과 봉사정신의 발현이라 본다.

 

 

 

 

 

 

바른불교재가모임에서는 황교안후보자의 종교편향에 대하여 수 차례 지적하였다. 그것은 일반 평균 국민수준보다 못한 종교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복음화를 외쳤다. 특히 기독교교도소 설립단체 아가페에서 활동하면서 성시화(聖市化)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편향된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자가 총리로 되는 것은 국민통합의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그럼에도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에서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기득권자들이 항상 하는 말은

 

기득권자들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가만 있으라라는 말이다세월호사건때도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멘트가 나왔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순진한 학생들은 연달아 방송되는 말만 믿고 가만 있다가 떼죽음을 당했다.

 

종단에서도 가만 있으라고 말한다. 인천의 스승이라는 스님들이 알아서 할테니 신도들은 믿고 따르라 한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경악할만한 소식만 들려 온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만 깨끗하면 되지 않느냐고. 어느 스님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권승마피아들이 헤쳐먹어도 묵묵히 정진하는 다수의 스님들이 있기에 안전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신도들도 깨끗하게 살면 종단이 자정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소금덩어리의 경(A3.99)’이 떠 올랐다.

 

선행을 강물처럼 하였을 때

 

소금덩어리의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소금덩어리를 갠지스 강에 던져 넣는다고 하자.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갠지스 강의 물은 그 소금덩어리 때문에 짜져서 마실 수 없는가? (A3.99)”라고 되어 있다. 작은 물 그릇에 소금덩이를 넣으면 너무 짜서 마실 수 없다. 그러나 물타기를 하면 덜 짜게 되어서 마실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소금덩이는 악행으로, 물은 선행으로 비유된다.

 

물을 많이 타면 탈수록 덜 짜게 될 것이다. 그런데 소금덩이를 갠지스강에 던져 버리면 어떻게 될까? 아마 조금도 짠맛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선행을 강물처럼 하였을 때 이전의 악업은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악한 짓을 했어도

착하고 건전한 일로 덮으면

구름에서 벗어난 달과 같이

이 세상을 비춘다.”

(Dhp 173)

 

 

소금덩이경을 보면 개인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종단의 비리에 적용한다면 무리가 따른다. 마치 공업(共業)’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일부 사람들은 한국불교의 문제가 일부 스님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라한다. 이는 전형적인 물타기이다. 공업의 논리로 물타기를 하는 것이다.

 

공업의 논리로 물타기 하나?

 

부처님은 한번도 공업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초기경전 그 어디에도 공업이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업은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경전인 화엄경에 공업이라는 말이 한번 나온다.

 

화엄경 여래수량품에 이런 것이 모두 중생들의 공업과 보살들의 선근으로 일으키는 것인데라는 표현이 있다. 이와 같은 공업에 대하여 학자들은 객관의 세계를 형성하는 업이라고 표현한다. 현재의 한국불교의 모습은 불자들 개개인의 업이 쌓인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일부는 동의하지만 전체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왜 그런가? 업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개인의 업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였다. 그래서 항상 이 사람에게 행위가 주인이고, 행위가 상속자이고, 행위가 모태이고, 행위가 친족이고, 행위가 의지처이다.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하면,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 하였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항상 반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공업의 논리로 물타기를 하는 종단의 태도는 바른 해결방법이 아니다.

 

가만 있으면 다 죽는다

 

막행막식하는 스님이 있을 때 스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라며 지적해야한다. 그럼에도 그 스님을 위해 열심히 기도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권승마피아의 파계행위를 용인하면서 나 자신만 깨끗이 살면 종단이 자동으로 정화되는 것일까? 종교편향으로 얼룩진 자를 내버려 두어도 그 버릇이 고쳐질까?

 

기득권자들은 늘 가만 있으라고 한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 있으면 자신들이 알아서 잘 한다는 것이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말이다. 기득권자들은 왜 이렇게 말할까? 그것은 지금 이대로가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기득권자들은 지금 이대로 영원히!”라며 건배 할지 모른다.

 

적년 세월호 100일 촛불 문화제에 갔었다. 그때 인상적인 그림을 보았다. 이를 디카로 찍어 블로그에 기록으로 남겼다. 그림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가만 있으면 다 죽는다

 

 

 

 

 

 

 

바른불교 모임에서는 현실참여를 한다. 잘못된 점에 대하여 잘못 되었다고 말을 한다. 말을 해야 할 때 말을 하지 않는 침묵은 이다. 그러나 할말을 하면서 침묵하면 이다. 이렇게 할 말을 할 줄 아는 바른불교재가모임이 자랑스럽다.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려거든

 

스님들이건 신도들이건 종단의 현실에 대하여 모두 침묵모드에 들어 간 듯 하다. 또 한편으로 나 자신만 착하고 건전하게 살면, 그런 사람들이 많아 질수록 정화 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자애의 마음을 방사해도 직접 만나 보시하는 것만 못하다. 그래서 청정도론 자애수행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보시는 조어되지 않은 사람을 조어하고

보시는 모든 이로움을 성취시킨다.

보시와 상냥한 말씨를 통해 시주자는 편안해지고

시물을 받는 자는 머리를 숙인다.

(청정도론 2, 9)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려거든 직접 만나는 방법이 가장 빠르다. 만나서 보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은자는 시주에게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도 좋지만 잘 못된 것을 잘 못되었다고 직접 지적해 주는 것이 정법을 수호하는 가장 바른 방법이다.

 

바른불교가 희망이다

 

바른불교에서는 현실참여도 열심히 하지만 내실도 다진다. 그것은 공부모임이나 행사 또는 봉사모임으로도 나타난다. 매주 토요일 강독과 강좌모임이 있다. 굳이 스님이 아니어도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기 있기 때문에 자체 강사를 활용한다. 바른불교모임이 한국불교의 희망이다

 

 

 

 

 

 

 

 

고귀한 사람은 만나면 좋고

함께 지내면 언제나 행복하다.

어리석은 자들을 멀리 여의면,

언제나 행복을 여의리.”

(Dhp 206)

 

 

2015-06-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