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세상은 있다 없다? 어디에 내기를 해야 하는가
6월 13일 휴휴재 강좌에는 9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저 멀리 대구에서 케이티엑스 타고 법우님이 오셨습니다. 대전에서 인천에서 오신 분도 있습니다. 김성수교수님의 강좌는 프로젝터를 이용하여 진행 되었습니다. 노트북을 프로젝터로 연결하여 대형화면으로 본 것 입니다. 처음 시도해 본 것으로 앞으로 유용하게 사용 되리라 봅니다.
김교수님이 준비한 자료 중에 태양의 일생 동영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태양은 45억년 정도 되었다 합니다. 태양으로 인하여 생명체가 존재하고 문명을 이루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큐를 보면 지금 빛나는 태양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언젠가는 백색왜성이 되어서 사라질 운명인 것 입니다.
하늘에 일곱개의 태양이
태양이 팽창할 때 열로 인하여 지구상의 모든 것을 태워 버립니다. 이 장면을 보자 초기경에서 ‘일곱개 태양의 출현에 대한 경’이 떠 올랐습니다. 세상의 종말에 대한 경 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런데 오랜 기간이 경과되면 언젠가 한번은 일곱 번째의 태양이 나타나는 때가 닥친다. 수행승들이여, 일곱 번째의 태양이 나타나면, 이 대지는 산의 제왕 수미산과 더불어 불이 붙고, 불타오르고, 온통 불꽃에 휩싸인다.
수행승들이여, 이 대지가 산의 제왕 수미산과 더불어 불이 붙고, 불타오르고, 연소되면서 불꽃이 바람에 날려 하느님의 세계에 까지 도달한다. 수행승들이여, 산의 제왕 수미산과 더불어 불이 붙고, 불타오르고, 연소되고 파괴되면서 커다란 불더미에 제압되어 백 요자나 크기의 봉우리도 괴멸되고, 이백 요자나 크기의 봉우리도 괴멸되고, 삼백 요자나 크기의 봉우리도 괴멸되고, 사백 요자나 크기의 봉우리도 괴멸되고, 오백 요자나 크기의 봉우리도 괴멸된다.
수행승들이여, 이 산의 제왕 수미산이 불타서 연소되면, 결코 재나 검댕이를 남기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버터나 참기름이 불이 타서 연소되면, 결코 재나 검댕이를 남기지 않듯, 수행승들이여, 이 산의 제왕인 불타서 연소되면, 결코 재나 검댕이를 남기지 않는다.”
(Sattasuriyuggamana sutta -일곱개의 태양의 출현에 대한 경, 앙굿따라니까야 A7:66, 전재성님역)
이와 같은 경의 이야기에 대하여 현실성 없는 황당한 이야기 또는 신화적 이야기라 할 수도 있을 것 입니다. 자신의 깜냥(感量)과 과학적 상식의 잣대로 판단하면 있을 수 없는 이야기 입니다. 물질에 바탕을 둔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속된말로 ‘구라’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방편 입니다.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근기가 다양하다 보니 ‘대기설법’한 것 입니다. 그래서 팔만사천 법문이 나왔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진리는 존재론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에 기반 합니다. 앏(知)과 봄(見)에 따른 깨달음 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삼계 육도 이야기는 전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불자들은 그저 그러려니 하며 수용하면 됩니다.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대어 ‘틀렸다’라고 한다면 ‘초딩’의 발상입니다. 판단을 유보하면 됩니다. 부처님이 다양한 근기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방편설법 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겁화(劫火)가 일어날 때
일곱 태양 출현의 경을 보면 태양의 일생 동영상과 유사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종말에 대하여 다루고 있기 때문 입니다. 재앙의 전조는 가뭄 입니다. 극심한 가뭄이 지속될 때 하늘에 또 하나의 태양이 떠 오릅니다. 두 개의 태양으로 인하여 강과 호수가 마릅니다. 이어서 세 개, 네 개 태양에 이어 다섯 개가 되면 바다가 마릅니다. 마침내 하늘에 태양이 일곱개 떠 올랐을 때 세상은 하나의 불덩이가 되어 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일곱개의 태양이 출현하였을 때 세상은 종말에 이릅니다. 경에 따르면 “버터나 참기름이 불이 타서 연소되면, 결코 재나 검댕이를 남기지 않듯, 수행승들이여, 이 산의 제왕인 불타서 연소되면, 결코 재나 검댕이를 남기지 않는다.”라 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그런데 청정도론에 따르면 겁화가 일어났을 때 색계 초선천까지 파괴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옥에서 부터 차례로 파괴 되어 인간은 물론 욕계천상, 그리고 대범천이 사는 색계초선천까지 불에 의하여 파괴 되어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태양이 팽창하여 주변의 행성을 삼킨 후에 백색왜성이 되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논장에 따르면 세상은 주기적으로 파괴됩니다. 1겁으로 주기로 하여 겁화(劫火)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겁은 색계초선천의 대범천 수명과 같습니다. 그래서 1겁을 주기로 우주가‘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고 보는 것이 불교적 세계관입니다.
왜 세상은 주기적으로 파괴될까?
그렇다면 왜 세상이 주기적으로 파괴 될까요? 청정도론에 따르면 인간의 탐욕이 치성하였을 때라 합니다. 이는 일견 타당성이 있습니다. 무분별한 개발로 인하여 자연과 환경이 파괴 되었을 때 재앙이 닥칩니다. 오존층이 파괴되면 기상 이변이 일어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현재 지구를 몇 번 파괴하고도 남을 핵폭탄이 있다고 합니다. 만일 전쟁광에 의해서 잘못 사용된다면 인류는 멸망할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자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극에 달했을 때 겁화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청정도론에서는 겁화가 일어나는 원인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1) 탐욕이 극에 달하였을 때
불에 의해 색계초선천까지 파괴.
2) 성냄이 극에 달하였을 때
물에 의해 색계2선천까지 파괴.
3) 어리석음이 극에 달하였을 때
바람에 의해 색계3선천까지 파괴.
이렇게 본다면 색계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불환자들이 산다는 4선천의 정거천을 제외하고 모두 겁화의 대상이 됩니다. 법화경에서 3계화택의 비유가 있는데 색계도 안심할 수 없는 곳입니다. 물론 무색계도 안심하지 못합니다. 수명과 공덕이 다 하면 더 아래 세상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흐름에 든 자만이 안심할 수 있습니다. 불환자의 정거천도 그런 곳 중의 하나입니다.
불교적 세계관이 있는데
지옥이나 천상 등 외부세계가 존재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것이라 믿지 않는다면 허무주의자 되기 쉽습니다.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다 하여 내생이나 윤회를 믿지 못하면 역시 허무주의가 되기 쉽습니다.
허무주의는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단멸론적 견해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분명히 외부 세계는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아비담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이 외부의 세계라는 것은 다름이 아닌 우리 마음에 있는 미세한 여러 계층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서 기재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비담마가 철학적 이상주의자들이 주장하듯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이나 비실재로 외부세계를 이해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외부세계는 엄연히 실재 하며 객관적인 사실로 존재 한다. 그러나 외부세계란 항상 마음에 의해서 이해 되는 세계이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여러 유형의 마음들이 외부로부터 자신에게 나타나는 대상의 성질을 결정 한다. 그래서 마음이 없으면 외부세계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5장 2절, 대림-각묵스님역)
결국 마음입니다. 마음에 의해서 세상은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이는 물질에 기반한 존재론과는 다른 것입니다. 과학이 물질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론적 사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입니다. 마음으로 알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외부의 세계는 마음이 만들어낸 세계입니다.
자신이 태어나기에 적합한 세상이 태어납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자신의 행위에 따른 것입니다. 오계를 어겨 중죄를 저질렀다면 그런 중업에 적합한 악처에 태어나는 것이고, 선정수행공덕을 쌓았다면 그에 걸맞는 세상인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세계관은 형성조건에 따라 분류됩니다.
누군가 평생 믿음과 보시와 공덕의 생활을 하였다면 그 과보로 천상에 태어날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오계를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형성조건에 따라 불교에서는 31개의 세계가 있습니다. 흔히 3계6도의 세계라 합니다. 이런 세계가 물질을 기반으로한 존재론으로 본다면 허구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식론적인 관점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불교는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입니다.
형성조건에 따른 불교적 세계관(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서 부록)
마음은 행위를 유발하기 때문에 신구의 삼업의 결과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래십력’에 따르면 ‘업이숙지력’이라 하여 “과거, 미래, 현재의 업보에 관해 조건과 원인을 살펴 여실히 그 과보를 분명히 안다.(M12)”라 하였습니다. 이는 마음이 일으킨 의도적 행위라 볼 수 있는 신구의 삼업에 대한 과보의 결과에 따라 세계가 결정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부처님은 ‘편취행지력’이라 하여 “모든 운명으로 인도하는 길에 관해 분명히 안다.(M12)”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운명이란 업에 따른 과보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지옥, 축생 등 육도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러한 다섯 갈래의 운명이 있다. 다섯 갈래란 어떠한 것인가? 지옥, 축생, 아귀, 인간, 천상이다. (M12)”라 하였습니다.
저 세상에 대하여
마음에 의해서 세상이 발생합니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상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나는 축생계의 생물들처럼 그렇게 다양한 어떠한 다른 종류의 생물도 보지 못하였다. 수행승들이여, 그 축생계의 생물들조차도 마음에 의해서 다양해진 것이다. (S22.100)”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마음에 의하여 생물들이 형성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존재론적 방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을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과보는 이 생에서 뿐만 아니라 내생에서도 받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저 세상’에 대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존]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견해를 갖는다면, 그는 잘못된 견해를 갖는 것입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사유를 한다면, 그는 잘못된 사유를 하는 것입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언어를 말한다면, 그는 잘못된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그 세계를 아는 거룩한 이들에게 적대하는 것이 됩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그는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는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려주면서 스스로를 칭찬하고 남을 비난합니다. 이와 같이 그는 악한 계행을 실천하며 앞서 있었던 선한 계행을 버립니다.
이와 같은 잘못된 견해, 잘못된 사유, 잘못된 언어, 거룩한 이에 대한 적대,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려줌, 스스로를 칭찬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 이러한 여러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잘못된 견해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빤나까경-Apaṇṇaka sutta-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저 세상은 없다.’고 견해를 갖는 것에 대하여 “그는 잘못된 견해를 갖는 것입니다.”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내세를 인정한 것이다. 내세가 있다면 당연히 윤회가 있는 것이고 또한 외부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강병균 교수는 내세와 윤회를 부정합니다.
이전에 강병균교수는 “종교인들은 ‘내세가 없다면 지금 제멋대로 살다가 가면 될 것’이라며 ‘내세가 없다는 주장’을 공격하는데, 이는 어불성설적인 주장이다.”이라 하였습니다. 부처님이 저 세상이 있다고 하였음에도 강병균교수는 내세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강병균교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한 것이고 잘못된 견해임에 틀림 없습니다.
어디에 내기를 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내세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 자신의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다 하여 ‘내세는 없다’라 한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요? 정말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또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검증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고 단멸론적 견해대로 살아야 할까요? 마치 ‘파스칼내기’명제처럼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세존]
장자들이여, 이것에 대하여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된 뒤의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그러한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비난받는다.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비난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실천하여 한 쪽만을 충족시키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버리고 있다.’
(아빤나까경-Apaṇṇaka sutta-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과 “저 세상이 있다면” 이렇게 두 가지로 말씀 하셨습니다. 저 세상이 있다는 것은 내세가 있고 윤회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저 세상이 없다는 것은 내세도 윤회도 없다고 주장하는 단멸론적 견해를 말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단멸론적 견해가 매우 손해 보는 장사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단멸론자의 말을 믿고 내세를 부정하였을 경우 불운에 떨어질 것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단멸론적 견해를 믿고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며 막행막식하며 살다 죽었을 때 저 세상이 없으면 참으로 다행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 세상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참으로 낭패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공덕도 짓지 않고 막행막식하며 살았기 때문에 지옥과 같은 악처에 떨어질 것은 뻔하기 때문입니다.
저 세상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반반의 가능성이 있다면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내세와 윤회를 믿고 착하고 건전하게 사는 것에 내기를 걸어야 할 것 입니다.
2015-06-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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