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에서
하지가 되면
해가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반면 밤의 길이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하지가 되면 낮의 길이가 절정에 달한다. 북반구 북극권 추운지방에서는 ‘하지제(夏至祭)’ 라 하여 축제가 열린다.
하지가 몇 일 남지 않았다. 낮의 길이가 길어진 요즘 살맛 난다. 덥기는 하지만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하므로 못사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의 계절이다. 그러나 하지가 지나면 해가 짧아진다. 음의 기운이 서서히 세지는 터닝포인트가 된다. 그러고 보면 하지가 되기 이전이 가장 좋을 때이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하였다. 사물은 완성된 시점에서 붕괴한다는 말이 있다. 주가가 시세분출하고 하고 나면 이후로 내리막길이다. 그래서일까 일본 료안지(龍安寺)에서의 돌은 모두 15개 이지만 어느 곳에서 보아도 14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꽉 찬 달처럼 15개 아니라 14개인 상태로 있고 싶은 것이다. 양의 기운이 절정에 이르는 하지를 맞으며 항상 14개이고 싶다.
료안지(龍安寺)
양의 기운이 절정으로 치닫는 요즘 새벽도 일찍 찾아 온다. 해가 뜨지 않았음에도 네 시대만 되면 창밖이 훤하다. 부지런한 자들은 이런 새벽을 놓치지 않는다.
새벽에는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떠오른 생각을 붙들어 매는데는 스마트폰만한 것이 없다. 필기구를 쥐는 것 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마치 밤낚시 하듯이 조용히 앉아 똑똑 두드려 본다.
막강한 정부도 메르스만큼은
세상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은 모두 뜻대로 되는 듯하다. 약자나 소수자의 외침을 묵살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변화를 요구하는 세력을 불온시하여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분쇄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아 왔다.
세월호유가족들이 그렇게 대통령면담을 요구하며 길바닥에서 수십일 보냈건만 끝내 불발 되었다. 유가족과 시민들이 수 없이 개선을 요구하며 행진하였으나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를 맞아야 했다. 부정선거를 고발하는 촛불집회를 해도 공권력이라는 폭력을 행사하여 모조리 분쇄 시켜 버렸다. 이렇게 막강한 정부가 메르스에 대해서는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
요즘 뉴스를 들을 때 마다 공포를 느낀다. 3차 감염을 넘어 4차 감염 이야기가 나온다. 이곳 저곳 지방에서도 감염자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변화를 요구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신속히 대처하던 정부가 허둥지둥하며 속수무책이다. 아마 기득권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바이러스인 것 같다.
동일 유전자를 가진 바이러스
바이러스가 왜 무서울까? 그것은 전파의 속도에 있다. 사람을 숙주로 한 바이러스도 생존해야 하기 때문 이다. 그런데 바이러스의 유전자는 모두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마치 나와 똑같은 사람이 수억만명, 수십억만명 있는 것과 같다.
바이러스는 조건이 맞으면 무한증식을 한다. 그 크기가 너무 작아 공기 중으로도 전파된다. 공기를 통해 날아 다니다가 숙주를 만나면 자체분열하여 세력을 넓혀 나간다. 물론 몸 안의 항체를 이겨냈을 때이다. 만일 몸 안에 외부바이러스를 퇴치 할 수 있는 면역체계가 있다면 맥을 추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이유는 유전자가 단순하고 동일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 유전자는 모두 똑같다. 모두 같기에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단점도 있다. 유전자가 같기 때문에 몰살된다. 백신이 개발 되어 몸에 투여 되면 몰살 되어 전멸된다. 유전자가 같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동일 유전자를 가졌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오래 전에 전멸했을 것이다.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침투하였을 때 동일유전자를 가졌다면 거의 대부분 다 죽는다. 나와 똑같은 유전자를 갖는 사람이 수억만명, 수십억만명 있을 때 바이러스로 인하여 전멸 될 수 있다. 마치 백신으로 바이러스가 전멸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인간의 유전자는 모두 다르다.
인류가 살아남은 이유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다 다르다. 일란성 쌍둥이라도 자세히 보면 다른 구석이 있다. 이렇게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류라는 공통유전자가 있기는 하지만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에 바이러스의 공격에 살아 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메르스의 공포가 한창이다. 그러나 살아 남는 사람도 있다. 이는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모두 동일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면 이 세상은 시체더미로 넘쳐 날 것이다. 아무리 바이러스가 무섭기로 인류가 오늘날까지 살아 남은 것은 유전자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성향은 왜 모두 다를까?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에 얼굴도 다르다. 그렇다면 성향이 다른 것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초기경전에 다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M135)”
이와 같은 정형구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업의 차별로 인하여 생긴모습이나 성향이 다름을 말한다. 또 태어나는 조건도 다르다. 모두가 업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이라 한다.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
업이란 무엇일까? 다름아닌 ‘행위’를 말한다. 빠알리어로는 ‘깜마(kamma)’라 하고 영어로는 ‘액션(action)’이라 한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짓는 행위를 말한다.
사람들은 매일 업을 짓고 있다. 아니 매순간 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행위가 미래의 과보를 불러 일으키는 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의도(cetana)’가 실려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심코 곤충을 밟았다고 하여 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일 의도를 가졌다면 업이 된다. 우발적 살인은 정상참작 되지만 계획적 살인은 중벌에 처해 진다. 동네깡패 보다 조직폭력배에게 죄를 더 엄중하게 적용하는 것도 의도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도가 실려 있지 않으면 미래의 과보를 불러 오지 않는다.
업에는 선업도 있고 악업도 있다. 그래서 ‘선인선과 악인악과’라 한다. 그런데 이런 과보는 현생 뿐만 아니라 내생에서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악인이 잘 사는 것은 아직 악과보가 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전의 선과보로 인하여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선업에 대한 공덕이 다하면 악행에 대한 과보가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현생에 나타날 수도 있고 내생에 받을 수도 있다. 한번 의도적 행위를 하면 그 의도에 걸맞는 과보를 반드시 받게 되어 있다. 이것이 업의 법칙이고 세간의 정견, 업자성정견이다.
업보(業報)는 있으나 작자(作者)는 없다
업자성정견에 따르면 우리는 윤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우리는 업의 상속자라 보았을 때 행위가 윤회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일공경에 따르면 “업보(業報)는 있으나 작자(作者)는 없다”라 하였다. 또 청정도론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기며
과보는 업이 그것의 근원이다.
업으로부터 다시 태어남이 있고
이렇게 해서 세상은 계속된다.”
(청정도론, 제19장)
게송을 보면 업이 윤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로 시작되는 정형구와 일치한다. 더구나 정형구에서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M135)”라 하였는데 이는 업의 윤회를 의미한다.
포항공대 강병균교수는
업자성정견은 세간적정견이다. 사성제는 출세간적 정견이다. 그런데 과학을 전공하는 어느 교수는 불교에 대하여 과학적 잣대를 대어 재단한다. 포항공대 강병균교수를 말한다.
강병균교수의 기고문을 보면 존재론에 기반한다. 우리의 몸을 중심으로 불교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초기경전에 쓰여 있는 주옥같은 가르침이 대부분 부정된다.
강교수는 연기론에 대하여 진화론을 접목시키는가 하면 정신작용에 대하여 식물이나 광물까지 확장하여 설명한다. 그래서 “해결책은 둘 중 하나이다. 6도윤회론을 개정하거나 폐기하거나! 6도윤회에 식물계를 집어넣어 7도윤회론으로 바꾸거나, 정 그게 싫으면 아예 6도윤회론을 포기하면 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햐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해결해야 한다. 몸과 마음을 떠나 식물, 광물, 유전자 등 물질에 기반한 존재론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과학에 근거하여 불교를 설명하는 강교수의 글을 보면 부처님 가르침 대부분은 폐기 되어야 한다. 그 중에 세상의 발생에 대한 것이 있다. 내용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장아함경 기세간경(紀世間經)에 의하면 인간의 기원은 천인이 지구상으로 하강해서 인간이 된 걸로 나온다. 그러므로, ‘지구상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명이 탄생하고, 그 생명이 단세포생물로부터 출발하여 어류 파충류 포유류 영장류를 거치며 진화하여 마침내 인간이 되었다는’ 진화론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남진제 북송담’의 진화론 부정 정당한가, 강병균교수, 법보신문 2015-06-10)
강교수는 장문의 글에서 진화론에 기반하여 불교를 설명하였다. 그러다 보니 세상의 발생원리에 대하여 설명한 경이 엉터리가 되었다. 진화론에 따르면 기독교의 천지창조만큼이나 황당무게한 것이다. 이런 강교수의 글을 보면서 마치 초딩(초등학교 학생)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처님이 세상의 발생에 대하여 설명한 것은 브라만교의 영원주의를 논파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고대인도에서 전승되어온 우주론을 알기 쉽게 설명한 것이다. 또한 아란냐경(D27)에서는 계급의 발생원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고대인도 전승설화를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경에 표현된 세상의 발생원리에 대하여 마치 기독교의 천지창조와 동급으로 취급하여 진화론이라는 잣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불자들은 초기경전에 쓰여 있는 육도윤회나 세상의 발생원리에 대하여 그저 그러려니 하며 받아 들인다. 과학문명의 시대에 틀렸다고 내치기 보다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기 때문이다.
초기경에 쓰여진 내용 대부분이 근기를 고려한 방편설법이라 할 때 그러려니 하며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이다. 그럼에도 과학적 검증의 잣대로 모조리 부정한다면 한마디로 초딩 같은 발상이다. 과연 불교경전이나 제대로 읽어 보고 글을 쓰는 것인지 교리나 제대로 알고 말을 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부처님의 관심사는 이 몸과 마음을 관찰함으로 인하여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성제를 설한 것이다. 따라서 사성제를 논하지 않는 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아무리 새로운 이론을 들고 나와도 사성제에서 벗어나면 사견이다.
부처님은 출세간적으로 서성제의 진리를 설하였다. 세간적으로는 업이 자신이 주인임을 반조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출세간적 정견은 사성제이고 세간적 정견은 업자성정견이다.
무엇이 윤회하는가?
업자성정견에 따르면 업이 윤회 한다. 어떤 변치 않는 것, 즉 업을 만드는 작자가 윤회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작자가 윤회하면 ‘아뜨만 윤회’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마음이 윤회한다고 볼 수 있을까?
마음이 윤회하는 것은 맞지만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윤회하는 것은 아니다. 조건에 따라 발생된 마음이 윤회한다. 아비담마 논장에 따르면 ‘재생연결식’이다.
논장에 따르면 임종순간에 ‘업’ 또는 ‘업의 표상’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이 일어난다. 그것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 난다. 조건발생하는 마음이 윤회 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업이 윤회하는 것이다. 거기에 업을 만드는 작자는 없다.
사람얼굴이 다른 것은 유전자의 영향이다. 그렇다면 성향이 다른 것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업이론으로 밖에 설명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물질에 기반한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대면 윤회가 부정되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거짓이 된다. 강병균교수의 글이 그렇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에서
우리가 존재 하는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한 곳이다. 존재 자체가 고통이다.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에 각자 고통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기 역시 고통이 다르다. 분명한 사실은 세상자체가 고통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다. 자신이 형성한 세상이다.
오온자체가 고통이다. 그래서 고성제이다. 이는 오온에 대하여 내것이라고 집착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온에 대하여 갈애를 일의키면 새로운 태어남을 유발하고 만다. 업으로서의 태어남이다. 업의 싱속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전하고 윤회하게 된다. 그 결과 세세생생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그 고통의 고리를 끊어 주신 분이 부처님이시다.
2015-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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