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부처님의 자비사상이 구현된 자랑스런 문화유산 봉원사 영산재

담마다사 이병욱 2015. 6. 7. 13:22

부처님의 자비사상이 구현된 자랑스런 문화유산 봉원사 영산재

 

 

6 6일 현충일날 영산재를 보기 위하여 봉원사에 갔다. 바른불교모임에 참여 하고 있는 법우님의 제안으로 가게 된 것이다. 구미에서 개인의원을 열고 있는 법우님은 영산재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카톡방과 밴드에 공지를 하여 영산재 참여를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볼만한 가치가 있어서일 것이다.

 

영산재는 하루 종일 열린다. 원래 삼일 동안 진행하는 불교의식이지만 이날 영산재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8시간 동안 열렸다. 8시간 동안 절에서 놀아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봉원사로 향하였다.

 

봉원사에 처음 간 것은

 

봉원사는 낯선 절이 아니다. 서너 차례 와 보았다. 가장 오래 전에 와 본 것은 1984년이다. 친구의 장례를 봉원사 대웅전에서 치루었기 때문이다. 복학하고 나서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84 11월 음산한 날에 십명가까이 되는 친구들이 벽제 화장장에 함께 갔었다. 그날 영정을 봉원사 대웅전에 모셨다. 모든 행사가 끝났을 때 죽은 친구 어머니의 슬퍼하는 모습이 선하다. 음산한 저녁 봉원사길을 내려 올 때 모두 말이 없고 시무룩 하였다. 어느 친구가  “소주나 한잔 하고 가자고 제안 했다. 그러나 갈 길이 멀었는지 친구들은 집에 가기 바빠 무산 되었다.

 

그후 세월이 30년 흘렀다. 이제는 죽은 친구의 부모세대가 되었다. 카톡시대에 그날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소주나 한잔 하자던 친구가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죽은 친구는 당시 대학원에 다녔는데 애인과 자취하며 살다 연탄가스로 변을 당했다고 한다. 봉원사 대웅전에 가면 항상 그때 음산한 기분이 생각 난다.

 

영산재로 유명한 봉원사

 

봉원사는 영산재로 유명하다. 영산재는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재로 등재 되어 있는 자랑스런 우리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영산재라는 것이 있는 줄 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고 관심 있는 사람들만이 절을 찾는다고 볼 수 있다.

 

영산재는 6 6일 현충일날 열린다. 그래서일까 남북통일 기원 및 호국영령을 위한 영산재로 되어 있다. 명칭으로만 본다면 호국불교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러나 6 6일 현충일날 열린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전쟁과 관련하여 죽은 자들의 넋을 위로 하는 것이라 보여지기 때문이다.

 

수륙재가 무주유주고혼의 영령들의 넋을 위로 하는 대규모 의식이듯이, 영산재는 전쟁으로 억울 하게 죽은 자들의 넋을 위로 하는 큰 의식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영산재가 현충일날 열리는 것을 근거로 하는 추측이다.

 

사천왕문 건립을 위한 불사가

 

봉원사는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없다. 주택과 절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주택과 절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럼에도 최근 사천왕문 건립을 위한 불사가 진행중이다.

 

 

 

 

야단법석이 펼쳐지고

 

영산재가 시작 되는 오전 10시 봉원사 마당에는 이미 영산재가 시작 되고 있었다. 청명한 날씨에 습도는 적당하다. 햇살은 따갑지만 그늘에 들어 가면 시원한 전형적인 초여름 날씨이다. 이렇게 화창한 날에 영산재가 열리는 것도 행운이라 본다. 대웅전 앞 계단에는 수 많은 관람객들이 앉아 있고 마당에는 법석이 펼쳐져 있다. 법석 한켠에는 대형 영산회상도가 걸려 있다.

 

 

 

 

대구에서 온 법우님은 미리 대웅전 앞에 자리 잡고 앉아 있다.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법우님에 따르면 영산재를 조금공부했다고 하였다. 팔공산영산재라 한다. 조금 했다 하여 몇 달 하였는 줄 알았다. 더 자세히 물어 보니 물어 보니 몇 년 했다는 것이다. 우리말 조금이라는 말은 이렇게 고무줄처럼 늘어 나는 모양이다.

 

영산재란 무엇인가?

 

영산재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법우님의 설명을 듣자 이날 공연의 의미를 잘 알 수 있었다. 무려 8시간에 걸쳐 진행 되는 영산재는 대서사시와 같고 장편드라마와 같다. 이런 영산재를 제대로 보려면 영산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영산재를 소개 하는 팜플렛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올해로 27년을 맞이한 영산재는 봉원사와 함께 한국불교의 희망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세계인의 사랑 속에서 불교문화최고의 의식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수되고 전승되어온 영산의식은 석가모니 부처님 재시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시던 2559년전의 영산회상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 불교전통 의식이며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공연문화예술입니다. 또한 영산재는 산자와 죽은 자의 영혼을 잇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이 느끼는 슬픔을 극복하고 번뇌에서 벗어나 불법으로 인도함과 동시에 부처님의 참 진리를 깨닫게 하는 의식입니다.

 

(27회 영산재 인사말, 김구해스님-중요무형문화재 제 50호 영산재 보유자)

 

 

이날 행사를 주관한 구해스님의 인사말에 따르면 영산재는 죽은 자의 영혼을 초청하여 부처님의 설법을 들려 주어 천도하는 의식이라 하였다. 특히 전쟁 등으로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위한 것이라 본다. 이는 현충일 날 공연이 열리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뿐만 아니라 아직 천도 되지 않은 유주무주의 모든 고혼이 영산재의 대상이 될 것이다.

 

영산제는 주어진 순서대로 진행된다. 이에 대하여 안내를 알리는 팜플렛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날 영산재는 총 3부로 진행되었다. 1부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2시까지로 타종부터 식당작법까지 모두 19가지 의식이 진행된다. 2부는 오후 2시부터 오후 4시까지로 홍고부터 화청까지 모두 27가지 의식이다. 3부는 오후 4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운수상단서부터 회향까지 25가지 의식이다.

 

 

 

 

3부에 걸쳐 총 71가지 의식이 쉼 없이 진행된다. 그래서 3일간 진행되는 것이라 본다. 그러나 최근 영산재는 8시간으로 압축하여 보여 주고 있다. 그럼에도 바쁜 현실을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지루하고 긴 시간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알고 보면 마치 법화경의 영산회상장면을 보는 것처럼 감동으로 다가 올 수 있다. 그런 영산재에 대하여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을 보면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죽은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보살에게 재를 올려 그 넋이 정토(淨土)나 천계(天界)에서 태어나도록 기원하는 천도재(薦度齋)의 일종이다.

 

불교에서의 천도재는 보통 49()로 불리는데, 전문적인 범패승(梵唄僧)이 하는 경우는 그 규모에 따라 상주권공재(常住權供齋)·시왕각배재(十王各拜齋)·영산재로 나뉜다. 범패승이 아닌 일반 승려가 49재를 지낼 경우에는 삼보통청(三寶通請)으로 한다. 상주권공재는 보통 1, 시왕각배재는 2, 영산재는 3일이 걸린다.

 

영산재는 법화사상(法華思想)에 따라 석가모니불이 설법하던 영산회상(靈山會相)을 상징적으로 설정하고 지내는 의식이다. 즉 의식을 행하는 장소가 일시적으로 영산회상이 되는 것으로 영혼은 이곳에서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극락왕생하게 되는 것이다.

 

영산재는 대개 야외법회(野外法會)로 진행된다. 절 마당 등에 불보살을 모시는 상단(上壇), 신중(神衆)을 모시는 중단(中壇), 영가(靈駕)를 모시는 하단(下壇) 등 삼단(三壇)을 차리고, 야외에 불화를 거는 괘불이운(掛佛移運)으로 시작하여 괘불 앞에서 찬불의식을 갖는다.

 

그 뒤 천도 대상인 영혼을 모셔오는 시련(侍輦), 영가를 대접하는 대령(對靈), 영가가 생전에 지은 탐·진·치(貪瞋痴)의 삼독(三毒)을 씻어내는 의식인 관욕(灌浴)이 진행된다. 그리고 불전에 공양드리기 전에 의식 장소를 신성화하는 신중작법(神衆作法)을 한 다음 영가를 천도하게 해주는 불보살과 신중단에 공양을 올린다.

 

여기서 가장 중시되는 것은 불공(佛供)이다. 영산재가 다른 천도재보다 오래 걸리는 것은 불공 부분이 규모가 크고 장엄하기 때문이다. 불공이 끝난 다음에는 영가에 대한 제사인 시식(施食)이 진행된다. 이어 의식에 참여한 모든 대중이 참여하여 의식 도량을 도는 회향의식(回向儀式)이 있고, 마지막으로 의식에 청했던 대상들을 돌려보내는 봉송(奉送)을 행한다.

 

또 영산재에는 식당작법(食堂作法)이 있는데, 이는 영산회상의 모든 대중이 함께 식사한다는 상징적인 의식으로, 오관게(五觀偈)나 타주(打柱)춤 등 다양한 범패와 의식무용이 등장하여 의식 중에서 예술적 가치가 가장 높은 부분이다. 영산재는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어 해마다 서울 봉원사(奉元寺)에서 연행되고 있다.

 

(영산제,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을 보면 영산재가 어떤 것이 잘 알 수 있다. 실제로 봉원사에서 열린 영산재는 사전의 설명과 일치 한다. 이렇게 사전에 내용을 알고 공연을 보니 그다지 지루하지 않게 보았다.

 

초혼행사 대령(對靈)

 

영산재는 유주무주고혼을 초빙하는 것으로부터 시작 된다. 오전 10시에 영산재가 개막 되었지만 야단법석에서만 진행 되는 것은 아니다. 고혼들을 불러 들이는 초혼 행사는 절 밖에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꽃상여와 함께 절 밖에 있는 외롭고 불쌍한 영혼을 초빙하러 가는 행렬이 시작 되었다. 절 밖 주택가에 부도탑이 있는데 부도탑 옆 공터에서 초혼 의식이 진행되었다. 이를 대령(對靈)이라 한다. 대령에 대하여 안내 팜플렛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대령(對靈)이란 영가를 법회 도량으로 맞이한다는 뜻인데, 목마른 이에게 물이 필요하듯 이처럼 큰 법회의 절실함을 느끼는 중생이 있다면 다름 아닌 길 잃은 영가라 할 것이며, 더욱이 특정 영가의 천도를 목적으로 하는 법회라면 그는 마땅히 법회의 주인공이라 할 것이다.

(대령, 안내 팜플렛)

 

 

 

 

 

 

 

 

 

 

 

영산재의 주인공에 대하여 길 잃은 영가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고혼을 말한다. 왜 영산재를 하는 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이다.

 

작은 꽃상여가

 

영산재는 천도재와 같은 것이다. 다만 공연형식으로 대형화 한 것이 일반 천도재와 다른 것이다. 절에서 볼 수 있는 49재나 천도재와 달리 불교의식과 문화가 집대성되어 예술로 승화된 것이 영산재이다. 이날 대령의식 또한 영산재 아니면 볼 수 없다. 절 바깥에서 길 잃은 영혼을 초혼하는 장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외로운 영혼을 초혼하였다. 이들 영혼들을 이제는 절안의 야단법석으로 이운해야 한다. 작은 꽃상여가 다시 공연이 열리는 야단법석으로 향한다.

 

 

 

 

 

 

 

 

 

 

 

우주적 스케일의 영산회상

 

다시 야단 법석이다. 야단법석에는 대형 괘불이 걸려 있다. 야단법석하면 야외에 걸려 있는 대형괘불이 연상된다. 이를 석가모니변상도 또는 영산회상도라 한다. 이는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커다란 괘불로 묘사 한 것이다.

 

외로운 영혼들에게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을 들려 주어 천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괘불이 만들어졌다. 그렇다고 하여 괘불이 영산회상장면을 다 묘사한 것은 아니다. 법화경에 묘사된 영산회상 장면은 우주적 스케일이기 때문이다.

 

법화경에 묘사된 영산회상 장면을 보면 규모가 매우 크다. 가장 먼저 부처님이 비구 대중 1 2천인과 함께 있는 것부터 시작된다. 법회가 시작되자 보살마하살 8만인, 석제환인과 그의 권속 2, 여덟 용왕, 긴나라왕, 건달바왕, 아수라왕 등의 권속들과 함께 있었다고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우주적 스케일의 수 많은 대중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모여 들었다.

 

법화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삼매에 들자 하늘에서는 만다라꽃 등의 꽃비가 내리고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러자 모인 대중들은 환희하고 합장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법석에서 하일라이트 장면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백호광명이다. 경에서는 그때 부처님께서는 미간의 백호상으로 광명을 놓으시어 동방으로 1 8천의 세계를 비추시니, 두루하지 않은 데가 없어 아래로는 아비지옥과 위로는 아가니타천에까지 이르렀다.(법화경 서품)”라고 묘사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영산회장 장면을 축약하여 묘사해 놓은 것이 야단법석의 괘불로 걸려 있는 법화변상도이다.

 

 

 

 

외국인들도 관심을 갖고

 

영산재는 한 두 시간에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공연하면 3일이 걸린다고 한다. 절에서 먹고 자며 3일간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8시간으로 압축된 공연도 보는 사람에 따라 지루하고 따분 할 수 있다. 그러나 모인 사람들을 보면 모두 관심 있는 사람들인 것 같다. 특히 외국인들이 눈에 많이 띈다.

 

 

 

 

 

 

외국인은 관람객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산재에 참여 하는 외국인 스님도 있었다. 열린선원장 법현스님에 따르면 미국에서 온 혜민스님이라 한다.

 

 

 

 

 

인내를 필요로 하는 관람

 

영산재를 직접 본 것은 처음이다. 8시간 공연하는 것을 보기에는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일까 오전과 오후의 사람들이 다르다. 오전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으나 점심식사후 더위가 본격화 될 때 햇볕의 영향이어서인지 관람객들의 숫자가 줄어 들었다. 그럼에도 일년에 한번 열리는 영산재를 담기 위한 카메라맨들의 취재 열기는 매우 뜨겁다. 나중에 보니 야단법석 주변에 관람객들 보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진풍경이 연출 되었다. 그럼에도 영산재는 식순에 따라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대중에게 알리는 의식 건회소

 

영산재 장면을 모두 다 기록할 수 없다. 또 각 장면을 사진으로 모두 찍어 올리는 것도 한계가 있다. 8시간에 걸쳐서 진행되는 영산재에 대하여 짧은 지면으로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일부 장면을 동영상으로 담아 보았다. 상당작법 이전의 건회소장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건회소는 괘불을 이 자리에 모시게 된 연유와 법회를 시작하려 한다는 내용을 영산회상의 본존이신 석가모니부처님께 아뢰는 글이다. 고혼을 천도할 법회가 열리게 되었음을 대중에게 알리는 의식이다.

 

식당작법이 있는데

 

하루 종일 열리는 것이 영산재이다. 그래서 느긋한 마음으로 관람해야 한다. 절에 놀러 왔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볼 필요가 있다. 한 두 시간 보고 말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급한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래서 점심 또한 절에서 해결하였다. 삼천불전 아래에 있는 공양식당에 가니 무료로 배식하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절에서 먹는 밥은 소박하다. 비빔밥이 대부분이지만 동그란 큰 그릇에 밥과 나물과 야채가 있는 소박한 식단이다.

 

  

 

점심공양후에도 야단법석에서는 공연이 계속되고 있었다. 점심때이어서인지 영산재에 참여한 스님들이 마당에서 대중공양을 하고 있었다. 식순에 따르면 이를 식당작법이라 한다. 준비한 밥과 반찬등을 발우에 담아 야외에서 식사 하는 것이다.

 

 

 

 

 

식당작법이란 무엇일까? 설명문에 따르면 총림의 스님들이 대법회시 재당등의 장소에서 설판재자가 준비한 공양을 받고, 중승은 그 보답으로 법 공양을 베풀게 되는 일련의 의식을 말한다.”라고 되어 있다. 영산재가 8시간 되다 보니 스님들이 공양을 할 수 있는 의식도 삽입 된 것이라 본다.

 

대웅전에서 밖을 바라보면서

 

화창하고 쾌청한 날 조용한 산사에서 들썩거린다. 그러나 산사음악회등과 같은 떠들썩한 소리는 아니다. 범패음악과 함께 독특한 사성의 창법이 어우러진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아무 생각 없이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햇볕으로 인하여 대웅전 안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서늘한 기운의 대웅전에서 밖을 바라보면서 공연을 보니 특석이 따로 없는 것 같다.

 

 

 

 

 

 

 

전쟁광들에 의하여

 

영산재는 3부에 걸쳐서 무려 71가지 크고 작은 의식을 소화해 낸다. 이렇게 많은 의식을 모두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큰 줄기는 영가천도이다. 그것도 고독한 영가이다. 무주고혼을 말한다. 특히 전쟁으로 죽은 영가들이다. 이는 현충일날 영산재가 열리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제까지 인류의 역사를 보면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 이래 크고 작은 전쟁이 기록 되어 왔다. 기록 되지 않은 것까지 합하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조차 없다. 주로 젊은이들이 희생을 많이 당하였다. 전쟁에 동원되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상대방을 죽이고 상대방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전쟁은 증오심없이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역사이래 전쟁광들은 늘 증오심을 부추겼다. 어떻게 부추기는가? 역사 드라마를 보면 장수들은 전투에 임하는 병사들을 향하여 “어차피 한번은 죽는다. 목숨을 아끼지 말라!”라고 말한다. 이렇게 죽어나간 사람들이 인류역사이래 부지기 수이었다. 심지어 전쟁광들은 전사자가 죽으면 간다는 전사자의 천국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과연 전사자의 천국은 있을까?

 

상윳따니까야에 전사의 경(S42.3)이 있다. 어느 날 부처님이 어느 마을에 들렀다. 그 지역 촌장이 부처님에게 “세존이신 고따마여, 저는 전사들의 옛 스승의 스승으로부터 이와 같이 ‘전사는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워야 하는데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서 적들에 의해 살해되어 죽임을 당하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하늘에 태어난다’ 라고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촌장은 왜 이런 질문을 하였을까?  그것은 전사가 전장에서 열심히 싸워 죽으면 ‘전사자의 하늘(sarañjitāna devāna)’ 이라는 천상에 태어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말이 맞는지 부처님에게 확인 받고 싶어서 질문한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지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선의의 폭력일지라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장에서 병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적과 싸워 적을 죽였다면 살생을 한 것이다. 살생업을 지었기 때문에 결코 선처에 태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전사자의 하늘이라는 좋은 곳에 태어난다는 말이 있어서 촌장이 부처님에게 진짜 그런 곳이 있는지 물어 본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매우 충격적은 말을 한다. 촌장의 기대와는 정반대이다. 부처님은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촌장이여, 전사가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 그의 마음은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결박하거나 절단하거나 박멸하거나 없애 버려야 한다’ 는 생각 때문에 이미 저열해졌고 불우해졌고 사악해졌습니다. 그 전력을 다해서 싸우는 자를 적들이 살해하여 죽인다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지옥이 있는데 있는데 그곳에 태어납니다.

 (Yodhājīvasutta-전사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은 자들은 모조리 지옥에 태어날 것이라 하였다. 그것은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마음 상태 때문이다. 증오 없이 전쟁을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증오의 마음을 품고 죽음을 맞았다면 그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다음 생이 결정 될 것이다임종순간에는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 나기 때문에 증오의 마음을 가진 채 죽는 다면 악처에 태어나기 쉽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쟁에서 증오와 원한의 마음을 품은 채 죽는 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지옥이 있는데 있는데 그곳에 태어납니다.”라고 분명히 말씀 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전쟁터에서 죽은 자들은 좋은 곳에서 태어날 수 없다. 죽는 순간의 악의 때문이다. 증오심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으므로 극도의 증오심을 가진 채 죽었다면 태어날 곳은 악처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나라이든지 전쟁으로 죽은 자들을 위로 하는 의식을 매년 거창하게 행한다. 국립묘지를 만들어 전쟁으로 죽은 자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위령제를 지내 준다.

 

영산재의 하일라이트는 시식(施食)

 

영산재는 유주무주고혼의 영가를 초혼하여 부처님의 설법을 들려 주어 천도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전쟁으로 죽은 자들의 영혼을 초청하여 법문을 들려 주고 시식하여 되돌려 보내 주는 의식이 영산재이다. 이런 영산재를 매년 하고 있다. 국립묘지에서 매년 6 6일 전몰자들에 대하여 위령제를 지내듯이, 불교에서는 고혼을 초청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 주는 것이다. 그런 영산재의 한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영산재의 하일라이트는 시식(施食)이다. 시식이란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정토에 왕생시키기 위하여 천도재를 올릴 때, 또는 명절에 선망부모나 일체의 고혼들에게 법식(法食)을 베풀고 경전을 읽어 주는 불교의식을 말한다. 이날 영산재에서도 시식이 있었다. 영가들에게 법성게 등 각종 가르침을 알려 준 것이다.

 

 

 

 

시식이라는 말이 반드시 음식을 베푼다는 말은 아니다. 사람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지만 또한 가르침을 접하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 없다. 영산재에서 시식은 법식, 즉 법의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그럼에도 먹을 것 등이 마련된 제단이 있다. 영가의 위패와 함께 수박, 사과, 파인애플, 바나나 등의 과일과 함께 쌀, , 초 등이 보인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육법공양이다.

 

일반신도들도 삼배의 예를

 

겉으로 보기에 시식은 먹는 것과 관련 되어 보인다. 그러나 영가들은 먹을 수 없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 주는 법식이 시식인 것이다. 시식이 끝나자 법화변상도 앞에서 신도대표들이 섰다. 일반신도들도 법화변상도의 불보살과 영산재를 진행한 스님들에게 삼배의 예를 표하였다.

 

 

 

 

 

 

 

 

 

 

 

 

부처님의 자비사상이 구현된 자랑스런 문화유산

 

길고 긴 영산재 공연이 끝났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8시간 진행된 영산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보게 된 것은 대구에서 일부로 올라온 바른불교 회원 법우님 영향이다. 법우님이 홍보를 열심히 하여서일까 이날 모두 5명의 법우님들이 영산재에 동참하였다. 그래서 말로만 듣던 생소한 영산재를 볼 수 있었다.

 

영산재를 보면서 영가천도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초기불교에서는 아뜨만을 인정하지 않고 중유 또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 등으로 불쌍하게 죽은 영혼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 타의의 의해서, 전쟁광들의 선동에 동원되어 희생된 자들에 대한 기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나라든지 국립묘지를 만들어 놓고 위령제를 지낸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이었다.

 

영산재가 고려시대부터 전승되어 왔다고 하는데 이는 일종의 위령제 성격이다. 다만 일반 위령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부처님의 설법을 들려 주는 것이다. 이를 시식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영산재는 부처님의 자비사상이 잘 구현된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라 볼 수 있다.

 

장시간 영산재가 진행될 때 끝까지 자리 지킨 사람들은 많지 않다. 또한 그 뜻을 알고 보는 사람들 역시 많지 않다. 그러나 끝까지 자리를 지킨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라 본다. 아마 매년 찾는 사람들일 것이다. 학자처럼 생긴 어느 외국인도 그런 사람처럼 보인다.

 

 

 

 

2015-06-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