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보물이 있다, 포근한 절 영축산 망해사(望海寺)
KTX를 타고 울산으로
오래 전부터 계획 되었던 여행을 떠 났다. 부산지역 사찰순례이다. 한달 전에 기획 되었던 순례를 예정대로 떠난 것이다. 1박 2일 템플스테이 형식으로 기획된 여행은 독특한 것이다. 이제까지는 전세버스에 의존하였으나 KTX를 활용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발로 뛰는 여행이 되었다. 그것도 베낭을 메고 대중교통을 이용한 일종의 고행이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한다면 ‘구도여행’이 될 것이다.
법우모임에서 총무소임을 맡았다. 일년에 한 차례는 1박2일 템플스테이를 계획하고 있다. 올해의 경우 휴가철이 끝나고 약간 한가한 8월 22일과 23일을 목표로 하였다. 토요일 저녁 KTX로 부산에 가서 N선원 부산본원에서 일박한 후 다음 날 범어사와 태종사를 참배 하는 일정으로 잡은 것이다. 이렇게 저녁에 출발한 것은 토요일도 일을 하는 법우님들이 있기 때문이다.
토요일 저녁에 출발하면 거의 심야에 본원에 도착하게 된다. 그래서 일부 법우님들은 미리 출발하기로 하였다. 토요일 아침에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목적지는 울산에 있는 망해사(望海寺)이다. 망해사에는 인연 있는 스님이 살고 있다. 수 년전 함께 해외성지 순례할 때 모시고 간 ‘지원스님’이다.
망해사(望海寺)를 향하여
토요일 아침 일찍 KTX를 타고 울산으로 출발하였다. 울산역(통도사)에서 망해사까지는 택시로 약 삼십분 가량 걸리는 거리이다. 모두 세 명이 함께 하였다. 두 명은 스님과 인연이 있고 한분은 함께 동행하였다.
망해사는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좀처럼 기회가 나지 않았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절이고 또한 거리가 멀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1박 2일 부산지역 템플스테이를 계기로 가게 되는 인연이 되었다.
망해사는 울산 영축산에 위치해 있다. 영축산 하면 통도사가 떠 오르지만 반대편에 또 하나의 전통사찰이 망해사인 것이다. 도착하니 스님이 마중 나와 있었다. 소식을 듣고 절 입구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2013년 해외성지여행을 함께 한지 2년 만에 뵙게 되었다.
스님은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기골이 장대한 스님은 한눈에 보아도 호남형이다. 환갑이 넘은 나이이지만 거리낌이 없다. 성격이 약간 급하긴 하지만 매우 다정다감하다. 무엇 보다 스님상을 전혀 내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님은 먼저 사찰 안내를 해 주었다.
한국불교태고종 영축산 망해사
대웅전에 들어가니 어느 신도의 천도재가 열리고 있었다. 조용히 들어가 삼배를 하였다. 대웅전은 전면 3칸의 전형적인 팔작지붕형태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불이고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보살로 모셔져 있다.
재를 주관하는 스님을 보니 빨강가사을 입고 있다. 조계종의 경우 괴색가사이다. 가사색깔로도 종단이 구분된다. 망해사의 경우 태고종 사찰이다. 정식명칭은 한국불교태고종 영축산 망해사이다. 홈페이지(http://www.manghaesa.or.kr/ )를 보니 망해사 창건기가 설명 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제 49대 헌강대왕 때는 서울(경주)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이어져 있었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으며 풍악과 노래소리는 길거리에 가득하였고 바람과 비는 철마다 순조로와 나라는 퍽 태평하였다.
때에 대왕은 오늘날의 울산 세죽으로 나들이를 나왔다가 낮에 물가에서 쉬는데 문득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동해용왕의 소행이라 하는 일관의 조언에 따라, 왕은 그의 측근들에게 명령하여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세우게 하니 그 명령과 함께 구름과 안개가 걷히어 졌으므로, 이 땅의 이름을 개운포라 하였다.
왕은 서울에 돌아오자 이 영축산 경승지를 선정하여 용을 위해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망해사라고 하였다 한다. 그런데 그 때에 절을 세우라는 왕명이 있자 그것을 기뻐한 동해 용왕은 그의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앞에 나타나 왕의 성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며 음악을 연주했고, 그 중 한 아들은 왕을 따라 서울에 들어와서 정사를 도왔는데 그 이름을 처용이라 하여, 처용이 나온 바위를 처용암이라 하였다. 지금도 개운포 해중에는 이 바위가 남아있다.
이러한 연기가 있는 고찰이었는데 언제 어떻게 하여 폐사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으로 추정), 옛 터만 전해오던 것을 1957년에 전 주지이신 김영암 화상이 중건하고, 황무의 터에 버려졌던 유적등도 찾아내고 정리하여 망해사가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기틀을 잡았다.
현재 망해사에는 보물 제 173 호로 지정된 2기의 부도가 있으며, 이 밖에도 1960년 이후 발견 된 각종 기와, 그릇조각등도 보관되어 있다. 망해사에서 출토된 기왓장 가운데에는 '가정(嘉靖) 23년갑진'(조선 중종 39년,1544년) 이라는 글이 새겨진 기와도 발견되어서 이 때에 중건 불사가 이루어 졌었음을 추측케 한다. 이 기와 조각에 새겨진 내용은 망해사의 창건 후의 역사를 알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기록이기도 하다.
(영축산 망해사 창건연기)
창건연기를 보니 망해사는 신라 헌강왕 시절에 세워졌다. 9세기 말엽에 세워진 절로서 천년고찰이다. 그런데 망해사는 ‘처용’과 매우 관계가 깊은 절이라는 사실이다. 창건연기에 표현 된 바와 같이 용왕을 위해 절을 세웠고, 그 용왕의 한 아들이 처용이라는 것이다.
망해사에 보물이 있는데
스님의 안내로 대웅전 뒤로 가 보았다. 그곳에는 보물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일반사람들은 물론 불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망해사에는 보물이 있다. 그것은 ‘울주망해사지 승탑’이다. 안내판을 보니 보물 173호이다. 사찰에서 보물을 보기가 힘든데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찰에서 보물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서탑
보물 173호로 지정된 승탑은 매우 크다. 두 기 중에 서쪽 것은 비교적 온전하지만 동쪽 것은 많이 파손된 형태이다. 동탑의 경우 무너져 있던 것을 1960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세운 것이라 한다.
동탑
두 기의 승탑은 3층 탑이나 5층 탑과 같은 형태는 아니다. 부도 형태로 되어 있다. 그래서 승탑이라 한다. 안내판에 따르면 스님들의 유골을 모시기 위한 돌탑 형태라 한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지원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망해사의 대웅전터는 승탑의 윗쪽에 있었을 것이라 한다. 지금은 소나무와 대나무로 우거진 곳이다. 왜 그곳일까? 그것은 바다가 보이기 때문이다. 망해사라는 이름이 의미하듯이 옛대웅전 터에 서서 아래를 바라보면 바다가 보인다.
지금도 옛대웅전 터에서는 기왓장 등 유적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정식으로 발굴 된 적이 없다. 두 기의 승탑 위에 있었던 대웅전 터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우러져 있다
포근하고 아담한 절
망해사는 포근하고 아담한 절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규모이다.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앞쪽은 툭 터져서 바다가 보인다. 무엇 보다 울창한 숲으로 우거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수종이 매우 다양하다. 특히 남쪽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수종이 있다. 이제 붉은 빛깔의 꽃이 절정인 베롱나무, 동백나무, 팔손이나무, 호랑가시나무, 종려나무, 파초 등 매우 다양하다.
베롱나무
동백나무
팔손이나무
호랑가시나무
망해사에는 남쪽지방 특유의 희귀한 나무가 많다. 그 중에 호랑가시나무가 있다. 참고로 호랑가시나무는 천연기념물이다. 그럼에도 잘 보전 되어 번성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
호랑가시나무
좀처럼 보기 힘든 종려나무
절에서 종려나무를 좀처럼 보기 힘들다. 따뜻한 기후지역에서 볼 수 있는데 놀랍게도 망해사 대웅전 앞에는 종려나무가 우람한 자태를 보이고 있다.
종려나무
종려나무는 야자나무과에 속한 상록교목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종려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부처님이 종려나무 그루터기를 들어 설한 장면이다.
“그가 예전에 어리석었을 때는 집착의 대상을 얻어 떠맡았는데, 이제는 그것들을 버리고 뿌리가 잘린 종려나무처럼 만들어 사라지게 하여 미래에 다시는 생겨나지 않게 합니다.” (M140)
부처님은 뿌리가 잘린 종려나무의 비유를 들어 열반을 설명 하고 있다. 뿌리가 잘린 종려나무는 성장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 “끊어지고 뿌리 채 뽑히고 잘려진 종려나무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어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된다.”라고 말씀 하셨다. 갈애의 뿌리를 뽑아 버리면 더 이상 집착하지 열반을 성취할 것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절에서 왜 파초를 심을까?
망해사에 가면 여러 그루의 파초를 볼 수 있다. 아열대 식물인 파초를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들다. 종종 절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절에서 왜 파초를 심어 놓을까? 이는 혜가의 신심에서 유래 한다.
파초
절에 가면 대웅전 담벼락 탱화에서 혜가의 단비 장면을 볼 수 있다. 혜가스님이 달마대사에게 자신의 팔을 잘라 바치는 장면이다.
혜가는 달마대사를 향한 신심과 구도의 열정을 보여 주기 위하여 한쪽 팔을 잘랐다. 그때 팔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눈 속에서 파초 한 잎이 올라와 그를 바쳤다는 이야기가 선어록에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절집에서는 진리에 대한 굳센 믿음과 구도의 상징으로서 파초를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때묻지 않은 절, 자연스런 절
망해사는 작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절이다. 한마디로 때가 묻지 않았다. 또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인공적이거나 인위적인 것이 별로 없다. 따뜻한 남국에서 시푸른 초목이 마음껏 자란다. 꽃은 제 때에 피고 지고 연못에는 불긋한 물고기가 노닌다.
“저를 별종 취급하지 마십시오”
스님의 안내로 사찰 구경을 마치고 스님과 차담시간을 가졌다. 아주 작은 공간이 스님의 거처이다. 한평 정도 되는 매우 비좁은 공간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서재겸 잠자는 곳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넓직한 곳에 커다란 응접실이 있고 침실이 별도로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평 정도 되는 작은 공간에서 홀로 사는 것이다.
스님과의 인연은 오래 되지 않았다. 다만 해외성지순례를 두 차례 동행하게 되어 알게 되었다. 늘 소탈한 모습이다. 늘 “허허” 하고 웃는 모습이 연상 된다. 스님을 처음 보았을 때 한 말이 기억 난다. 공항 대합실에서 스님은 “저를 별종 취급하지 마십시오, 스님이나 신도나 모두 똑 같은 사람입니다.”라 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스님은 스님상을 내지 않겠다는 말로 받아 들인다. 왜 그런가? 스님들은 독특한 캐릭터가 있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스님들만의 톡특한 성격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어느 카톡방에서 비구니출신 법우님의 글을 보았다. 한때 비구니이었지만 지금은 환속에서 재가불자로서 살아 가는 법우님이다. 누군가와 대화 중에 이런 글을 남겼다.
“스님들 세계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폐쇄된 단체입니다. 최소한의 의식주로 살아도 이 공부 함에 하늘 같은 당당함으로 살아란 얘길 잘못 해석해서 진짜로 세상사람들 위에 있다는 쓰잘데기 없는 선민의식이 확실이 있는 좀 특이한 집단입니다. 그게 수행으로 이어지면 좋은 데 세상사에도 그리 군림하려하니 좀 웃기는 모양새가 되는 것 같습니다.”
비구니출신 법우님이 남긴 글이다. 이 법우님은 다른 회원과 언쟁하다가 도중에 퇴장하고 말았다. 법우님 글에 따르면 스님들은 일종의 선민의식이 있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비록 얻어 먹고 살아도 재가불자와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버렸다라는 것에서 오는 자부심일지도 모른다.
왜 당당한 삶인가?
재가불자들은 버리지 못하고 꼭 붙잡고 사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출가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 부모형제는 물론 버려야겠다는 생각마저 버리고 출가한 것이다. 이렇게 버린 사람들과 붙잡고 있는 사람들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 보다 더 클 것이다.
출가자와 재가자의 삶은 다르다. 그것은 소유로 드러난다. 재가자는 주로 소유하는 삶이지만 출가자는 무소유의 삶을 살아 간다. 무소유이기에 당당할 수 있다. 걸식에 의존하더라도 가장 청정한 삶을 살기에 아무리 잘나고 똑똑하고 재산이 많은 재가자도 부럽지 않은 것이다.
출가자의 청정한 삶은 무소유를 기반으로 한다. 또한 청정한 삶은 수행으로 완성된다. 그런데 일부 스님들인 하늘을 찌를듯한 당당함을 잘못 받아 들여 재가자에게 군림하려 한다는 것이다. “나는 스님이고 너는 재가자이다.”라는 사제와 신도의 관계를 말한다. 한마디로 스님상을 세우는 것이다.
지원스님은 스님상을 세우지 않는다. 어느 정도인가? 망해사를 순례 하고 난 다음 스님은 운전기사를 자처 하였다. 방문한 세 명을 봉고차에 태우고 통도사로 향한 것이다. 그곳뿐만 아니라 가장 아름답다는 극락암과 금와보살이 있다는 자장암까지 보여 주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을 때
지원스님에 대하여 별로 아는 바 없다. 다만 나이 들어 출가한 것으로 알고 있다. 망해사에서 산지는 10여년 되었다고 한다. 작고 아담하고 자연과 어우러진 절을 보니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할 바를 다 하고 수행자로 살아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이 반드시 출가를 의미 하지 않는다. 수행공동체에서 사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본다.
나이가 들어 늙어 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살아 왔던 날 보다 살 날이 훨씬 적을 것이라 생각하면 다급한 마음이 든다. 더 나이가 먹기 전에 더 건강이 나빠지기 전에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다리 꼬고 앉아 있는 것만 수행은 아닐 것이다. 자신에 맞는 수행방법을 찾아서 인생 후반부를 수행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고대인도에서 바라문 들은 어느 정도 해야 할 일을 다 해 마쳤을 때 출가 하였다.
고대인도에서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고 성직자 계급 이었던 바라문이 있었다. 그런데 정통바라문들은 인생을 네 주기로 살았다. 이를 인생사주기라 하여 학습기, 가주기, 임서기, 유행기의 삶을 살았다. 학습기에 배워서 가주기에 가업을 물려 받아 자신의 할 바를 다한다. 손자가 태어날 무렵 가독을 자식에게 물려 주고 숲에 들어가 산다. 이후 걸식에 의존하며 유행하는 삶을 살게 된다.
부처님 당시에는 바라문이 타락하여 사제로서의 역할만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타락한 바라문 이전의 삶에 대하여 큰 의미를 부여 하였다. 이는 법구경에서 “나는 그를 브라만이라 부른다”라는 정형구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정통브라만의 삶의 방식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브라만과 아라한을 동격으로 보아 “나는 그를 브라만이라 부른다”라고 한 것이다.
재가불자로 살다가 할 일을 다 해 마쳤을 때 수행자로서 살아 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본다. 정통바라문교 인생사주기에서 유행기에 해당되는 삶에 해당된다. 나이가 들어 할 일을 다해 마쳤을 때 수행자로서 삶을 말한다.
정진하여 흐름을 끊어라.
바라문이여, 감각적 욕망을 제거하라.
형성들의 부서짐을 알면,
바라문이여, 그대는 무위를 아는 님이다. (Dhp383)
바라문이 멈춤과 통찰로
피안에 도달할 때,
바로 그 님, 그것을 아는 님에게
모든 결박이 사라진다. (Dhp384)
이 언덕도 저 언덕도 여의어
차안과 피안을 여읜 님,
걱정이 없고 결박을 벗어난 님,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 (Dhp385)
인연이 선연이 될 수 있도록
한번 맺은 인연은 소중한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맺은 인연은 선연이 되어야 한다.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면 악연이 될 것이다. 이왕 맺은 인연이라면 악연 보다 선연이 나을 것이다.
지원스님과의 인연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더구나 인연이 유지 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준 법우님의 넓은 도량에 감사 드린다. 남쪽 따뜻한 곳에 위치한 망해사, 참으로 아늑하고 조용한 곳이다. 그리고 덜 알려진 절이다. 또한 포근한 절이다. 그곳에 가면 보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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