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금와보살을 보잣더니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1. 12:20

 

금와보살을 보잣더니

 

 

자장암 가는 길에

 

오늘날 불교 교세가 가장 강한 곳이 영남지방이다. 산이 많고 유교적 보수전통이 강해서일까 전국적으로 불자비율이 가장 높다. 그 중에서도 부산이 불자비율이 높을 뿐만 아니라 불자도 매우 많다.

 

2005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부산의 경우 부산인구 350만명 중에 불자가 39%로서 137만명에 달한다. 이는 불자가 서울인구 976만명 중 불자가 16%에 불과한 164만명과 매우 대조 된다. 그래서 부산을 불도(佛都), 불교의 수도라 하는가 보다.

 

부산 인근에 통도사가 있다. 불보사찰로서 잘 알려져 있다. 아는 스님과 법우들과 함께 통도사를 찾았다. 스님이 운전기사가 되어 길 안내를 하여 완전히 주객이 바뀐 양상이 되었다. 스님은 통도사뿐만 아니라 영축산 내의 이곳 저곳 암자에 데려다 주었다.

 

암자로 가는 길에 오로지 불교만 있는 것 같았다. 도시에서는 십자가 천지이지만 깊은 산속에 들어 가면 정반대이다. 커다란 산내에 이곳 저곳 암자를 보면 바로 이곳이 불국토나 다름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완전히 딴 세상이다. 그런 암자 중에 자장암이 있다.

 

하얀 색깔의 베롱나무가

 

자장암으로 가기 전에 극락암에 들렀다. 말로만 듣던 극락암이다. 극락암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치 모양의 다리이다. 저 다리를 건너면 극락세계로 가는 모양이다. 8월 말의 극락암에는 베롱나무가 한창이다. 특히 하얀 색깔의 베롱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별세계에 온 듯

 

차는 자장암으로 향하였다. 한참 깊은 산중으로 들어 가는가 싶더니 가파른 언덕이 나타났다. 풍광이 매우 보기 좋았다. 저 멀리 아스라이 높은 산이 보인다. 산이 높아서일까 구름이 걸려 있다. 더구나 가지가 척척 늘어진 낙락장송이 이곳 저곳에 있어서 별세계에 온 것 같다.

 

 

 

 

 

 

 

 

 

 

 

 

바위가 법당 안에

 

스님은 왜 자장암으로 안내 하였을까? 그곳에 금와보살(金蛙菩薩)’이 있기 때문이다. 절에 가면 대웅전을 향하듯이 자장암에 가면 금와보살이 사는 곳으로 향한다. 과연 금와보살을 볼 수 있을까?

 

금와보살이 있는 법당이 있다. 바위가 법당 안으로 돌출된 특이한 구조를 갖는 전각이다. 법당 안과 밖에 천연 그대로의 바위를 살려 건물을 지은 것이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고 오로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광경이다.

 

 

 

 

 

 

 

건물 안에 바위가 있는 현상을 독일에서도 보았다. 뮌헨 근교에 있는 백조의 성(Neuschwanstein)’이 그것이다.

 

오래 전에 독일출장 갔었을 때 뮌헨에서 당일치기 관광을 하였다. 그때 백조의 성 관광이 포함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백조의 성 내부에는 놀랍게도 천연 그대로의 바위가 있었다. 그것도 집채 만한 바위가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장면에 매우 놀랐다. 바위를 쳐 내지 않고 살려 둔 채 건물을 지은 것이다. 그런 현상을 자장암에서도 보게 되었다.

 

 

 

 

 

 

구멍 안에 무엇이 있을까?

 

법당 뒤에는 깍아 지른 듯한 절벽이다. 그 곳에 구멍이 하나 있다. 사람들은 눈을 가까이 대고 무언가 열심히 살핀다. 대체 그 구멍 안에 무엇이 있을까? 금와보살이 산다고 하였다. 금빛 나는 개구리를 말한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구멍을 들여다 보았다.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혹시 뭐가 있을까 해서 열심히 찾아 보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 누구나 하는 말이 아무 것도 없네.”이. 하지만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에 따르면 분명히 본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여러 번 오면 한번은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금와보살은 있기나 한 것일까? 단 한번에 보고자 하는 것이 지나친 욕심일까? 여러 번 오면 그 정성이 갸륵해서 한번은 보여 주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금와보살은 없다라고  나름 대로 결론을 내었다. 그런데 함께 같이 간 어느 법우님은 보았다고 하였다. 더구나 스님은 잘 보면 보인다고 하였다. 대체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구멍이 금와보살의 눈이라고

 

법우님은 무엇을 본 것일까? 그것은 구멍을 본 것이다. 우리들이 구멍을 통하여 금와보살을 찾으려 애썼으나 법우님이 본 것은 구멍 그 자체이다. 바로 그 구멍이 금와보살의 눈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형상으로 금와보살을 보고자 한다. 또 목소리로 듣고자 한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면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럴 경우 차라리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마치 지구 반대편에 원시종족이 살고 있는데 보지 못하였다고 하여 없는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과 같다. 심해에 듣도 보도 못한 생명체가 살고 있음에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하여 부정하는 것과 같다. 외계의 생명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인식의 지평을 넓혀야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또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수 많은 시각적 대상이 눈에 들어 오지만 매혹적 대상이 눈에 띄는 이유이다. 옆에서 아무리 큰 소리로 이야기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은 다른 대상에 소리 기울이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세상은 인식함으로써 존재 하는 것이다.

 

세상이 있어서 내가 존재 하는가? 내가 있어서 세상이 존재하는가? 전자는 유신(唯神)론적이라 볼 수 있고 후자는 유심(唯心)론적이라 볼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인식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엄연히 존재 하는 현상을 부정할 수 없다. 지구 반대편의 원시종족이나 심해의 생명체, 심지어 외계생명체는 존재 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오로지 자신의 눈에 의지 하여 ‘인식되지 않은 것은 없다라고 단정 할 수 없다. 그래서 인식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고 들리지 않는 것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

 

통도사 자장암에서 금와보살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금와보살을 본 사람은 있다. 형상이나 소리로 본 것이 아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若以色見我(약이색견아) 以音聲求我(이음성구아) 是人行邪道(시인 행사도) 不能見如來(불능견여래)”라 하였다. 이는 만약 모양으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라.”라는 뜻이다.

 

그런데 금강경에서 한줄이 빠졌다. 구마라집이 번역할 때 한 줄 빼 먹고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내용이 심오해졌다. 앞뒤가 연결이 안되면 난해 하기마련이다. 그래서 어렵게 보이고 갖가지 해석이 난무 하여 심오해진다. 어떤 말이 빠졌을까? 그것은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dhamma passati so ma passati, yo ma passati so dhamma passati)”라는 말이다. 상윳따니까야 박깔리의 경(S22:87)’에 나오는 말이다.

 

금와보살을 보잣더니

 

부처의 형상에서 부처를 찾는 것은 어리석다. 불상에서 단지 자신과 가족의 건강, 학업, 사업 등의 성취만을 발원한다면 쇠붙이에, 돌덩이에 비는 것이나 다름 없다. 타종교인이 우상숭배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형상에서 부처를 찾지 않는 것이다. 진리에서 부처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S22:87)” 라 한 것이다.

 

금와보살을 보잣더니 보지 못하였다. 잘 보면 보인다는 스님의 말이 화두처럼 들렸다. 마침내 한 법우님이 보았다고 했다. 구멍이 금와보살 눈이라 하였다.

 

 

 

 

 

 

 

 

 

 

 

 

 

 

 

 

 

 

 

 

2015-09-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