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스님들은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 천장사에서 하루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21. 11:10

 

스님들은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 천장사에서 하루밤

 

 

천장사를 향하여

 

1 2  천장사 템플스테이를 다녀 왔다. 홀로 떠난 일종의 구도여행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법회모임의 차기 템플스테이를 위한 사전 답사의 성격이라 볼 수 있다.

 

9 19일 토요일 오후 하던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출발하였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려고도 생각해 보았지만 깊은 산중 오지에 있기 때문에 승용차가 아니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승용차를 이용하여 오후 5시 약간 넘어 출발하였다.

 

서산에 위치한 천장사에 가기 위해서는 해미IC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천장사카페에 실려 있는 안내에 따라 29번길을 타고 고북면으로 들어 갔다. 면에서 일단 정차 하였다. 쌀을 사기 위해서이었다. 20키로 한포대를 구입하였다. 이렇게 쌀을 가지고 간 것은 일종의 공양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이 절에 갈 때 쌀을 가져 갔듯이 대중들이 먹을 수 있는 쌀이야말로 최상의 공양물로 여겼다.

 

3년만에 찾은 천장사

 

천장사는 이미 한차례 다녀 온 바 있다. 2012년의 일이다. 이에 대하여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은 법문을 해야 하는 이유, 천장사에서(2012-03-1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 때 당시 법회모임의 일부 법우님들과 함께 하였다. 봉고차를 한대 빌려서 모두 6명이 함께 갔었다. 그때 당시도 현 주지 허정스님이었다. 스님으로부터 차를 빵빵하게 얻어 마신 기억이 새롭다.

 

3년만에 천장사를 찾아 갔다. 그러나 밤길에 보는 천장사길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어서 주변의 아름다움 경관을 볼 수 없었다. 이전에 한번 가보았지만 혼자 밤길에 가는 천장사길은 멀고도 멀었다. 아주 한참 산속 깊은 곳에 계속 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더구나 아무도 다니지 않는 깜깜한 밤길에 오로지 헤드라이트에 의존하여 위로 위로 올라갔다.

 

천장사 가는 길은 포장 되어 있다. 요즘 어느 절에 가든지 아무리 깊은 산속이라도 절 입구까지 도로가 닦여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산에 있는 절길은 아무리 차가 다닐 수 있게 하였더라도 가파르다. 사륜구동의 레저용 차량이라면 모를까 일반 승용차로는 오르기 힘들다. 더구나 힘이 딸리는 소형승용차의 경우 가파른 오르막길을 더욱 더 오르기 힘들다. 마침내 사단이 생겼다. 2주차장을 앞두고 더 이상 차가 나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후진하여 내려 갈 수도 없다. 진퇴양난이었다. 간신히 차를 돌려 길거리에 방치 해 놓다시피 하고 걸어 올라 갔다.

 

베낭하나 메고 양손에는 과일을 들고 산길을 올라 갔다. 주변은 칠흑같이 어둡다. 초승달에서 반달로 변하는 시점이어서 인지 달빛도 소용이 없다. 하늘에 구름이 있는지 별도 그다지 밝지 않다. 이럴 때 스마트폰 손전등기능이 매우 유용하였다. 이전에 어플을 받아 놓았기 때문에 손전등기능을 활용하였다. 스마트폰이 후레시가 된 것이다.

 

나홀로 칠흑 같은 산길을 걸어 보기는 처음이다. 이럴 때 공포가 밀려 올 수 있다. 이전에 들었던 옛날이야기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나홀로 밖에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설령 무서운 존재가 나타난다고 해도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스마트폰 손전등에 의지하여 가파른 산길을 꽤 올라 갔다. 저 멀리서 불빛이 보일락말락한다. 무처 반가웠다. 다 온 것 같았다. 그러나 다 온 것이 아니었다. 2주차장 연등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2주차장에서 천장사까지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 가야 한다. 저 멀리 천장사 창문에서 불빛이 보인다. 다 온 것이다. 개가 요란하게 짓기 시작한다. 아마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본능적으로 짓나 보다. 그런데 이 개소리가 사실 손님이 왔다는 신호와 같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지스님이 마중 나왔다.

 

천장사에 도착하니 9시가 다 되었다. 이 시간이라면 모두 자는 시간이다. 절에서는 일찍자고 일찍일어 나기 때문에 9시에 취침하여 3시에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으로 4시에 새벽예불이 있기 때문이다. 취침시간임에도 불구하고 9시부터 10시까지 한시간 동안 차담을 하였다. 새로 지은 성우당이다. 2층은 객사라 볼 수 있고 아래층은 공양식당과 다실이 있다.

 

 

 

 

 

 

승가스님들이 아니다

 

다실에서 스님이 나누어 주는 차를 마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승보에 대한 것이 이슈가 되었다. 최근 스님은 백인대중공사를 앞두고 불교신문에 기고한 것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현 승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한글삼귀의문을 보면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렇게 하였을 때 모순이라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건전한 승가공동체를 구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왜 그렇게 말하였을까? 불교신문에 게제된 스님의 칼럼 승가’는 ‘스님들’ 아니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부대중 100인 대중공사가 막바지에 접어들어 이제 3회를 남겨두고 있다. 이번 달 주제는수행풍토 진작과 승가공동체 회복이라는 주제인데 사실 승가공동체 회복은 이제까지 다뤄 왔던 모든 주제를 포괄하는 중요한 주제다. 승가공동체 구성원간의 부익부 빈익빈의 모순구조를 해결하지 않고는 수행풍토를 바로세우고 화합승가를 이루기는 어렵다. 이번 대중공사에서 승가공동체 회복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그런데 논의에 앞서승가의 의미에 대해서 짚어보고자 한다. 상가(san.gha)는 중(), 화합중(和合衆), 교단(敎壇) 등으로 의역되고 승가(僧伽)로 음사되기도 한다. 음사된 승가(僧伽)는 다시 줄여져 승()이 되고 이것을 승려, 스님이라는 단수로 이해해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비구와 비구니를이라 부른 것은 상가를 의역한 중()에서 비롯한 것이고 스님이라고 부른 것은 음사된 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승가는 성스런 승가(聖衆)와 일반승가(世俗衆)로도 나뉘는데 성스런 승가는 승보(僧寶)라 하며 귀의의 대상이 되는 사쌍팔배의 성인들이고 일반승가는 과위를 얻기 위하여 수행하는 일반 스님들이다.

 

<깃발경>(S11:3)에는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잘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바르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참되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합당하게 도를 닦으니, 곧 네 쌍의 인간들이요(四雙) 여덟 단계에 있는 사람들(八輩)이시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공양받아 마땅하고, 선사받아 마땅하고, 보시받아 마땅하고, 합장받아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田)이시다라고 하여 성스런 승가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은 이 성스런 승가의 특징과 자질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念僧)은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하고(念佛)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念法)처럼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지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우리말 삼귀의에서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가 바르지 않게 번역됐다는 목소리들이 이어져 왔다는 점이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번역에서거룩한이라는 단어는 사쌍팔배의 성스런 제자들을 의미하고스님들이라는 복수는 승가의 의미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승가를 스님들이라고 번역해 사용할 때에 모순점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대중공사에서 나온승가는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라는 발언은 승가공동체가 가진 많은 재산을 활용해 승려노후복지가 정착되면 스님들은 노후걱정 없이 청빈하게 살게 돼 사회의 존경을 받고 수행과 포교를 잘 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승가라는 단어에스님들을 대입하면 “‘스님들은 부자여도스님은 가난해야 한다는 이상한 말이 된다. 또한스님들이라는 복수는 2인 이상의 스님들을 의미하는데 승가는 최소한 4인 이상이어야 승가라 할 수 있으므로 승가=스님들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발생한다. 정확히 말하면 스님이라는 용어는 비구(bhikku)나 비구니(bhikkuni)의 번역어에 해당하지 상가의 번역어가 아니다. 승가(僧伽)스님들이라고 번역하면 사방승가(四方僧伽), 현전승가(現前僧伽)등에서 보이는공동체의 의미를 표현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승가스님들이라고 번역한 현재의 우리말 삼귀의는 재고돼야 하며 승가의 의미부터 바르게 이해하고 나서승가공동체의 회복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승가’는 ‘스님들’ 아니다, 허정스님/천장사주지, 불교신문3138/2015919일자)

 

 

스님의 칼럼을 보니 불교신문 논설위원이라 되어 있다. 9 19일자 칼럼에서 승가는 스님들이 아니라는 파격적 주장을 하였다. 이런 주장이 파격적이라 한 것이 사실 크게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것을 본래 위치로 가져다 놓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스님들은 승가가 아니라 하였을까?

 

스님을 승보로 보았을 때

 

한국불교에서 스님을 승보로 간주한다. 한글삼귀의문에서는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 하여 거룩한 스님들을 승보로 보고 있다. 그래서일까 일반불자들은 스님보기를 부처님 보듯 한다. 왜 그런가? 한글삼귀의문 영향이 가장 크다고 보여진다. 스님들을 삼보 중의 하나인 승보로 간주 하기 때문에 개별 스님일지라도 승보로 보는 것이다.

 

승보는 어떤 개념일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삼보는 모두 동격이다. 모두 부처님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를 승보라 하였을 때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쌍팔배의 승가공동체는 모두 부처님과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삼보 중의 하나인 승보에 대하여 스님이라 하였을 때 스님은 자연스럽게 부처님과 동급이 된다. 이는 모순이다.

 

어느 누구도 부처님과 동급이 될 수 없다. 부처님을 가르침을 실천하여 부처님의 깨달은 경지에 올라 갈 수 있어도 부처님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한세계에서는 오로지 한분의 부처님만 있는 것이다. 만일 한 세계에 여러 명의 부처님이 있다면 부처님의 깨달음도 여러 개라는 뜻일 것이다.

 

한 세계에서는 한 부처님만이

 

석가모니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이는 과거불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에 출현하였던 어느 부처님도 깨은 것은 연기법이다. 그런데 한 세계에 여러 명이 부처님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받아 들일 수 없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하나의 세계의 경(A1.285)’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있다.

 

 

Aṭṭhānameta bhikkhave anavakāso, ya ekissā lokadhātuyā dve arahanto sammāsambuddhā apubba  acarima uppajjeyyu, neta hāna vijjati. hānañca kho eta bhikkhave vijjati, ya ekissā lokadhātuyā eko araha sammāsambuddho uppajjeyya, hānameta vijjati.

 

[세존]

수행승들이여, 하나의 세계에서 두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 동시에 출현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하나의 세계에서 한 분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 출현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있고 가능한 일이다.”

 

(하나의 세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1.285, 전재성님역)

 

 

여기서 거룩한 님은 아라한(arahanta)을 말하고,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은 정등각자(sammāsambuddhā)를 말한다. 모두 부처님에 대한 칭호이다. 경에서는 분명히 한 세계에 두 명의 부처가 출현할 수 없다고 하였다. 두 명의 부처출현에 대하여 그것은 있을 수 없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neta hāna vijjati)”라 하였다. 그러나 한 세계에 한 부처가 출현한 것은 그것은 있을 수 있고 가능한 일이다. (hānameta vijjati)”라 하였다.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불교에서 법회때 마다 독송하는 한글삼귀의문은 잘못된 것이다. 특히 승보에 대한 개념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 초기경전에서는 분명히 ‘승가에 귀의한다(Sangham saranam gacchami)’라고 되어 있으나 어찌 된 일인지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을 승보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그 결과 많은 문제점과 모순이 발견되었다. 이에 대하여 지금 이대로가 좋은가?”스님을 승보로 보았을 문제점(2015-01-1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스님을 승보로 보면 승가의 존속이유가 없어진다

2) 스님을 승보로 보면 자자와 포살이 있을 수 없다

3) 스님을 승보로 보면 스님에게 보시하게 된다

4) 스님을 승보로 보면 스님이 스님에게 귀의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스님을 승보로 보면 스님은 부처님과 동격이 된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 세계에서는 오로지 한 분의 부처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부처님과 동급의 스님들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하나의 세계에서 두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 동시에 출현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A1.285) 라는 가르침에 어긋난다. 또 스님을 승보로 보았을 때 승가의 존속이유가 없어서 자자와 포살이 있을 수 없다.

 

스님을 승보로 보았을 때 스님이 스님에게 의지하고 귀의하고 피난처로 삼게 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명백히 다른 것이다. 부처님은 자등명 법등명의 가르침에서 자신과 가르침 외 어떤 것에도 의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자신을 섬으로의 경에서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S22:43) 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다.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공동체 이외 그 어떤 것에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지 말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스님들은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

 

최근 허정스님은 수미산정 칼럼에서 스님들을 승보로 보았을 때 모순을 지적하였다. 그것은 스님들이라 하였을 때 이를 승가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한글삼귀의문에서 거룩한 스님들이라는 문구에 대하여 승가와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그렇다면 스님들을 승가로 보는 것이 왜 모순인가? 이에 대하여 허정스님은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승가는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라는 말이다. 둘째는 스님들이라는 복수와 승가의 구성요건에 대한 것이다.

 

 승가는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왜 이 말이 모순일까? 백인대중공사에서 승가는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매우 장려해야 할 말이고 실천해야 할 말이라는 시실이다. 현재 한국불교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불교는 매우 부자종교라 볼 수 있다. 수억평에 달하는 토지와 11조원에 이른다는 불교재산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년 이상 불교전통에 따라 수 많은 문화재와 문화유산이 있다. 하지만 어느 특정인이나 특정문중에서 차지하여 대물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자스님들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스님들은 더욱 더 가난해지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이는 세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승단에서도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만연하고 있음을 말한다.

 

스님들의 부익부빈익빈현상은 종단의 재산을 잘못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타개 하려면 모든 불교재산을 승가공동체에서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스님들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살아야 한다. 마치 중앙집권적 시스템을 갖춘 가톨릭과 같은 케이스이다. 그렇게 된다면 승가는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라는 말은 매우 타당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스님들을 승가로 간주하는 한 한국불교 현실에서 이 말은 명백히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는 패러디 해 보면 알 수 있다. “승가는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라는 말에서 승가 대신 스님들을 집어 넣으면 스님들은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가 된다. 이런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스님들을 승보로 보아 승가로 간주 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승가의 최소구성요건은?

 

다음으로 스님들을 승가로 보았을 때 이는 승가구성요건에 맞지 않는다. 왜 그런가? 허정스님의 칼럼에 따르면 “‘스님들이라는 복수는 2인 이상의 스님들을 의미하는데 승가는 최소한 4인 이상이어야 승가라 할 수 있으므로 승가=스님들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발생한다.”라 하였다. 이말은 매우 타당한 말이다. 일반적으로 복수의 의미는 둘 이상을 말한다. 그런데 승가의 최소 구성요건은 4인 이상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율장에 실려 있다.

 

승가의 최소구성요건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승가를 구성하는 최소인원과 갈마(2015-07-2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올린 글에서 승가를 구성하는 최소인원에 대하여 표로 정리하여 보았다.

 

 

 

구족계

(upasampada)

자자

(pavāraa)

출죄복귀

(abbhāna)

네 명의 승가

catuvaggo bhikkhusagho

제외

제외

제외

다섯 명의 승가

pañcavaggo bhikkhusagho

제외

(중부지방에 해당됨)

허용

제외

(중부지방에 해당됨)

열 명의 승가

dasavaggo bhikkhusagho

허용

허용

제외

스무 명의 승가

vīsativaggo bhikkhusagho

허용

허용

허용

스무 명 이상의 승가

atirekavīsativaggo bhikkhusagho

허용

허용

허용

 

 

 

표를 보면 승가를 구성 하는 최소인원이 4명임을 알 수 있다. 스님 4명이 함께 살아야 승가로 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4명의 승가는 구족계와 자자와  출죄복귀에 대한 갈마를 할 수 없다. 모든 갈마조건을 만족하는 승가공동체는 20명 이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스님들이라 하였을 때 이는 2인 이상을 뜻한다. 2인은 승가구성 요건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스님들을 승가로 간주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차담을 하다보면

 

조용한 산사 다실에서 차담을 하였다. 차담을 하다 보면 30분 이야기 할 것이 두 세 시간 간다고 하였다. 그만큼 차라는 수단이 사람간의 거리를 좁혀 놓기 때문이다. 차를 나누는 행위자체가 배려와 부드러움이 깔려 있어서 일 것이다. 그래서 차나 한잔 하시게라는 말은 불가에서 훌륭한 소통수단이다.

 

깊어 가는 산사에서 더 이상 차담을 나눌 수 없었다. 저녁 10시라는 시각은 산사에서 오밤중에 해당된다. 화려한 불빛으로 잠들지 않는 도시와는 대조적이다. 새벽 3시대에 도량석이 있고 4시에 예불이 있다하니 서둘러 숙소로 항하였다. 안거철에 수좌스님이 머물던 작은 방이다. 인법당내에 있다. 경허스님이 머물던 아주 작은 방 바로 뒷편으로 향하였다.

 

 

2015-09-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