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천장사의 토론식 일요법회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22. 19:57

 

천장사의 토론식 일요법회

 

 

천장사 일요법회에 참석 하였다. 오전 10시에 시작 되는 일요법회에 열 대여섯명이 모였다. 주로 서산, 홍성, 당진 등 내포지역 사람들이다. 서울에서 한차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천장사일요법회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천장사 카페를 통하여 활동모습을 접하였다. 그러나 단편적이다. 주로 사진만 나열 되어 있어서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종종 일요법회 관련 글이 있지만 어떤 내용의 법회인지 알 수 없었다.

 

자기소개 시간에

 

법회가 열리기에 앞서 소개시간이 있었다. 처음 참석한 사람들에 대한 소개를 말한다. 이날 처음 참석하였으므로 자신을 간단히 소개 하였다. 이름과 필명을 말하였다. 그리고 주지스님과의 인연을 곁들였다. 그랬더니 어떤 법우님이 매우 놀라기도 하고 반가워 하는 모습을 보았다. 법우님은 평소 진흙속의연꽃 블로그에서 글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렇게 만나 보게 되어서 매우 놀랍다고 하였다. 이렇게 필명을 알아 본 사람이 두 명 있었다.

 

종종 소개할 때 필명을 알아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 정도로 글이 많이 퍼졌기 때문이라 본다. 어느 절에서 옆에 있는 법우님이 이분이 진흙속의연꽃이에요라고 소개 하였다. 그러자 한 분이 아는 척 하며 진짜 진흙속의연꽃이세요?”라 하는 것이었다. 매우 뜻밖이라는 표정이다. 그러면서 매우 반가워 하는 모습이었다.

 

토론식 일요법회

 

천장사 일요법회는 토론식이다. 초기경전을 읽고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하고 모르는 것에 대하여 질문하는 방식이다. 먼저 경전을 함께 독송한다. 교재는 일아스님이 편찬한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이다. 벌써 수 년째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날 호흡에 의한 마음챙김의 삼매수행에 대하여 독송하였다.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짤막한 길이의 경이다. 내용은 집착을 버려버림으로써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특히 가정생활과 관련된 내용이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경에서 만일 가정생활과 연관된 기억과 생각을 버리고 싶다면,”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세속적 기억과 사념에 대한 것이다.

 

재가자에게 있어서 가정생활은 번뇌 그 자체에 해당된다. 이렇게 본다면 재가자에 대한 법문의 성격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가정생활에서 일어나는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경에서는 들이쉬고 내쉬는 숨의 마음챙김을 통한 집중에 면밀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호흡관찰을 통하여 번뇌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

 

살다보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차라리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의문(意門)을 통하여 통하여 들어 오는 이러저러한 생각을 막을 수 없다. 왜 그런가? 그러한 생각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생각이 내 것이라 한다면 들어 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일어나는 생각과 흘러 가는 생각에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내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어나는 생각이 내 것이라 착각한다. 

 

과거 불쾌하고 안 좋았던 기억들이 떠 오를 때 그 생각을 대상으로 하여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생각을 일으켜서 망상으로 발전된다. 내 돈 떼먹고 달아난 그 인간이 갑자기 떠 올랐을 때 분노의 마음이 생겨나서 증오의 감정이 가득하게 된다. 그럴 때 죽일 놈!”하며 마음속으로는 이미 살인을 한 것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자신만 괴롭다. 상대방은 전혀 영향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번뇌, 망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호흡관찰을 통하여 마음챙김하라고 하였다.

 

무언가 하나를 만들어 명상하자고

 

호흡을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앉아야 한다. 자세를 갖추고 앉아서 호흡만을 관찰 하였을 때 호흡에 집중하기 때문에 그 순간만큼은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빚쟁이생각은 끊임 없이 일어난다. 이럴 경우 또 하나 방법이 제시된다.

 

이번 천장사 일요법회에서 주지스님은 무언가 하나를 만들어 명상하자고 하였다. 호흡을 볼 수 있으면 좋지만 일상에서 보기는 힘들다.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돈 떼어 먹고 간 그 인간이 떠 올랐을 때 호흡을 들여다 보기 힘들다. 이럴 때는 만들어진 대상, 즉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좋다고 하였다.

 

불자들은 틈만 나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한다.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불자들도 있다. 사람에 따라 지장보살, 문수보살 등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였을 때 일시적으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 생각 내서 번뇌를 끊는 것이다.

 

화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화두를 들며 이뭐꼬?”하며 의심이라는 번뇌를 이용하여 더 큰 번뇌를 사라지게 하는 방법이다. 이는 마치 독을 독으로써 제독하는 것과 같다.

 

빠진 구절

 

경에서는 일시적 번뇌에서 벗어나는 방법에서부터 궁극적으로 번뇌에서 벗어나는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다. 모두 호흡관찰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는 경의 내용이 모두 포함된 것은 아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본과 비교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구절이 빠져 있다.

 

 

그가 몸이 한계에 달한 느낌을 느끼면, ‘나는 몸이 한계에 달한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 그가 목숨이 한계에 달한 느낌을 느끼면, ‘나는 몸숨이 한계에 달한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 그리고 그는 몸이 파괴되고 목숨이 다한 뒤에는 세상에 느껴진 모든 것이 향수되지 않고 식어버릴 것이다.’라고 분명히 안다.” (S54.8, 전재성님역)

 

 

이와 같은 구절에 대하여 부처님은 등불의 비유를 들어 계속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 기름과 심지를 조건으로 등불이 켜지면 그 기름과 심지가 소모되어 연료가 떨어지면 불이 꺼지듯, 몸이 한계에 달한 느낌, 목숨이 한계에 달한 느낌, 몸이 파괴되어 목숨이 다한 느낌을 분명하게 알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느낌에 집착하지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경과 관련하여 상윳따니까야 완전한 탐구의 경(S12.51)’에서는 십이연기로 설명하였다.

 

초기경전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마치 거대한 그물망과도 같다. 그래서 한구절이라도 팔만사천법문에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 경에서 호흡관찰을 통하여 번뇌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하였지만 궁극적으로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는 경의 말미에 이것은 무상한 것이고 집착할 것이 아니고 기뻐할 일이 아니다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집중이 된 상태에서는

 

호흡관찰을 하게 되면 집중이 된다. 집중이 되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마치 없던 것이 갑자기 하고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이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다. 이럴 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

 

집중이 안된 상태에서는 번뇌에 끄달려 갈 것이다. 그러나 집중된 상태에서는 단지 바라만 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이것이 알아차림이다. 그래서 위빠사나수행처에서능 집중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알아차림은 모두 번뇌라 하였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알아 차리기는 하지만 끄달려 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알아차림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호흡관찰에 따라 집중이 된 상태에서는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볼 수 있기 때문에 끄달려 가지 않는다. 그래서 집중이 된 상태에서 알아차림은 번뇌가 아니다.

 

일상에서 번뇌 벗어나기

 

일어나는 생각을 막을 수 없다. 과거의 안 좋았던 기억을 모두 지울 수 없다. 일어나는 생각, 저절로 흘러 가는 생각은 끊임 없다. 이렇게 본다면 생각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생각을 통제할 수 없다면 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내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이 내 것이라고 착각한다.

 

빚쟁이가 떠 올랐을 때 분노하고, 감각적 대상을 접하였을 때 탐욕이 발생하는 것이 나의 의지가 무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잘못된 생각은 호흡관찰을 통한 집중으로 알아차리면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지만 늘 앉아서 호흡관찰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럴 경우 없는 것을 하나 만들어 그것에 집중하면 된다. 관세음보살 같은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대상을 하나 만들어 거기에 집중하면 일시적으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가피를 입는 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진짜 가피는 있는 것일까?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관세음보살보문품이 있다. 관세음보살신앙의 근원이 되는 경전이다. 법화경내에 있는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보면 칠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누구라도 지극한 정성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그 염피관음력으로 모든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수갑과 쇠고랑에 손발이 채워지고 몸이 묶였을지라도 관세음보살 이름만 부르면 이것들이 다 끊어지고 풀어져 곧 벗어나리라.”라 하였다.

 

관음신앙은 독특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유신론적이고 타력적 신앙이라고 비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구를 보면 타당하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또 만일 중생이 음욕이 많더라도 관세음보살을 항상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음욕을 여의게 된다. 혹은 성내는 마음이 많더라도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그 마음을 여읠 수 있으며, 혹은 어리석음이 많더라도 관세음보살을 항상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그 어리석음을 떠날 것이다.”(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운허스님역, 동국역경원)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 어여쁜 여인을 보았을 때 생각이 일어 날 수 있다. 그럴 경우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라고 염하면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왜 그럴까?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순간 어여쁜 여인에 대한 마음은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이는 없는 것을 만들어 그 것을 대상으로 하였을 때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럴 경우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것은 사마타수행이라 볼 수 있다.

 

40가지 사마타 명상주제가 있는데

 

관세음보살 대신에 무엇이든지 대입 할 수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40가지를 제시한다. 이른바 40가지 사마타 명상주제를 말한다. 그 중에 불수념이 있다.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어떻게 불수념하는가? 초기경전 문구를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처럼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깨달은 님, 세상의 존귀한 님이다.(S11.3) 라고 염하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에 대하여 계속생각하는 것은 부처님을 대상으로 하여 사띠하는 것이다. 그러면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외 초기불교에서는 땅의 까시나 등 40가지 사마타명상주제가 있다.

 

이왕이면 부처님을 염하는 것이

 

 

일요법회 시간에는 경전을 독송하고 묻고 질문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이것이 천정사 일요법회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날 토론에서도 어느 법우님은 직장에서 발생한 번뇌에 대하여 어떻게 벗어나면 좋을지 질문하였다. 이에 대하여 하나를 만들어 번뇌에서 벗어날 것을 제시하였다.

 

한생각 내서 번뇌를 끊을 수 있다. 그것이 관세음보살일수도 있고 아미타불일수도 있다. 그외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마치 독을 독으로 제독하듯이 작은 번뇌로 큰 번뇌를 물리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방법은 될 수 없다.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호흡관찰을 통한 집중이 있어야 한다. 집중된 상태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발견하였을 때 모든 것이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아차려야 함을 말한다.

 

어떤 유혹적 대상을 보았거나 갑자기 내 돈 떼어 먹고 달아난 그 인간이 떠 올랐을 때 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런 훈련은 집중이 된 상태에서 알아 차려야 한다. 그래야 일어는 현상을 명료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찾는 것만 해도 일시적으로 번뇌에서 벗어 날 수 있음을 말한다.

 

하나의 명상주제를 정하여 일상에 적용하는 것은 수행방법이라 생각된다. 이왕이면 부처님 그 분을 생각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불수념에 대한 문구가 길다면 마치 주문 외우듯이 나모 땃사 바가와또 삼마삼붓닷사라고 염하면 어떨까? 이에 대한 뜻풀이는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합니다.”이다.

 

2015-09-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