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천장사 허정스님과 떠난 성지순례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24. 13:16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천장사 허정스님과 떠난 성지순례

 

 

 

신도들과 함께 성지순례

 

천장사에 갔었을 때 신도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였다. 천장사법회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에 대하여 천장사카페 암자에서 하룻밤(천장암홈페이지)’에 따르면 일요법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안내되어 있다.

 

 

“1.부처님의 원음 초기경전을 독송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말하는 불교"를 지향합니다.

 

2. "말할수 없는 지식"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대화와 토론은 의견의 교환으로 견해가 빠뀌는 자리이며

자신을 드러냄으로 청정해지고 당당해지는 시간이며,  

도반이 되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3. 일요법회가 끝나고 점심공양후에 

주변사찰을 참배하며 문화재를 답사하고

지역 스님들의 살아오신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갖습니다.”

 

 

여기서 세 번째 항에 주의한다. 그것은 법회가 끝나고 점심공양을 함께 한 후에 스님과 함께 성지순례를 떠나는 것이다. 주로 내포지역에 있는 수덕사 말사순례를 말한다. 미리 연락이 되어서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해당사찰의 주지스님이 차담을 마련해 준다고 한다. 이렇게 일년동안 다닌 성지순례지가 수 십군데 된다 하니 천장사신도들의 즐거움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큰 절 가는 길

 

천장사를 찾았을 때 순례지는 수덕사이었다. 천장사에서는 큰 절이라 부른다. 아마 천장사가 수덕사의 말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천장사 주지스님의 은사스님이 수덕사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요법회후 다른 절로 성지순례 가지 않고 수덕사로 간 것은 큰절에서 만공스님과 관련하여 학술대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덕사 말사 주지스님들이 모두 ‘황화루에 모였다고 하였다. 주지스님은 먼저 출발하였고, 신도들은 차담 후에 황화루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천장사에서 큰 절 가는 길은 두 가지 코스가 있다. 포장도로를 이용하여 돌아 가는 길과 산길을 이용하여 지름길로 가는 코스이다. 지름길로 가면 거의 반 이상 시간이 단축된다. 돌아 가면 30여분 걸리지만 산길로 가면 10여분 걸리기 때문에 천장사 신도들은 산길을 이용한다.

 

 

 

 

 

천장사 신도들은 거의 대부분 4륜구동 SUV차량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가파른 산길을 올라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포장 도로, 특히 산길을 잘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도 지름길로 가기 위하여 울퉁불퉁한 산길을 달렸다. 거침 없는 질주에 4륜구동 레저용 차량의 위력을 실감하였다.

 

만공스님의 방()과 할()

 

오후 수덕사 황화루에서는 만공스님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천장사 신도들도 뒷좌석에 앉아 참관 하였다. 넓직한 영화루에는 수덕사 스님들 뿐만 아니라 이곳저곳 말사에서 온 주지스님들이 많았다.

 

 

 

 

 

 

학술대회에서 중앙일보 대기자는 만공스님에 대하여 할과 방을 겸비한 선승이라 하였다. 그 예로서 만공스님과 원담스님의 일화를 예로 들었다.

 

원담스님이 사미로서 만공스님을 시봉 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원담스님이 만공스님에게 스님, 깨침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았다고 한다. 이에 만공스님은 다짜고짜 가지고 있던 주장자로 머리를 쳤다고 한다. 원담스님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만공스님이 네 이놈! 그래도 못 알아 듣겠느냐?”라며 벼락 같은 소리로 할을 한 것이다.

 

원담스님은 가만 생각하였다고 한다. 말을 해도 주장자를 맞을 것이고, 말을 하지 않아도 주장자를 맞을 상황이었다. 이에 원담스님은 아야, 아야하며 머리를 감싸며 아픈 시늉을 내었다고 한다. 이에 만공스님은 그 모습을 보면서 그만 하면 됐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이 선문답이다. 이에 대하여 발제자는 벽산방(德山棒)과 임제할(臨濟喝)을 잘 구사한 만공스님의 모습을 잘 드러낸 것이라 하였다.

 

주장자로 맞았을 때

 

일반사람들이 선문답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상근기의 수행자이어야만 그 의미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나이 어린 원담스님이 깨달음 또는 깨침에 대하여 궁금하였을 것이다. 이에 스승에게 물어 보는 것은 당연하다. 아마 부처님이라면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그것도 쉬운 가르침부터 시작하여 차츰 어려운 가르침에 이르기 까지 차제설법으로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자를 세우지 않고 경전이외에 별도의 전승된 가르침, 즉 마음과 뜻으로 전승되는 가르침을 중시하는 선종에서는 갑작스런 깨달음을 일러 주고자 하였다. 그래서 방망이()와 고함소리()이 등장한 것이다.

 

만공스님이 나이 어린 사미의 머리를 주장자로 친 것은 가르침을 알려 주기 위한 스승의 배려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때로 과격하고 거친 가르침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선종의 방과 할에 대하여 반지성주의라 하였다. 반문자주의라 하였다.

 

그럼에도 주장자로 머리를 맞았을 때 머리를 맞는 순간 무언가 느끼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상근기의 수행자라면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지만 둔한 수행자는 알아 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계속 맞게 된다. 열 방, 스무 방, 서른 방을 맞아도 못 알아 차릴 수 있다.

 

원담스님은 한 방 맞고서 고함소리에 질려 아야, 아야하며 아픈 시늉을 하며 머리를 감쌌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 한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머리로 또는 말로, 문자로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깨달음 또는 깨침이라는 것은 실제 하는 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주장자로 머리를 맞았을 때 그 아픈 것이 바로 실제 하는 법이다. 그 아픈 느낌은 망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실제로 아픈 느낌을 가져야 아픔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다.

 

경행을 할 때 발바닥의 감촉을 느낀다. 이때 다른 잡념은 사라진다. 이렇게 느꼈을 때 실제 하는 법이 된다. 다른 것은 모두 머리속에서만 존재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하는 법도 조건에 따라 생겼다가 조건이 다하면 소멸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원담스님은 주장자로 되게 한대 맞았다. 그 아픔이 얼마나 심했으면 스승이 그래도 못알아 듣겠느냐?”고 고함 쳤을 때 머리를 만지며 아픈시늉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스승의 가르침을 알아 들었다는 표시이다. 그러자 스승은 그만 하면 됐다라고 인정하였다. 스승이 제자에게 깨침을 준 것이다.

 

스승의 중요성

 

스승의 중요성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초기경전에서도 배울 만한 스승이 있다면 찾아 가라고 하였다. 설령 정원이 다 차서 들어 갈 수 없더라도 그곳에서 머물라고 하였다. 반면 스승으로부터 배울 것이 없으면 그곳을 나오라고 하였다. 이는 초기경에서도 확인 된다.

 

초기경에 따르면 숲속에 의지해서 지낼 때에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 새김을 새기고, 아직 집중하지 못한 마음을 집중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를 소멸하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위없는 안온에 도달했고, 또한 출가생활에서 조달해야 할 의복, 음식, 깔개, 필수약품을 조달하기 쉽다.’고 생각한다.”(M17)라고 하였을 때, 이는 좋은 수행처이다. 스승과 수행환경이 모두 좋은 것이다. 이런 수행처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초기경에 따르면 그 수행승은 목숨이 붙어있는 한 그 숲속에서 머무는 것이 좋으며, 그 곳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M17) 라고 하였다.

 

스승으로부터 배울 것이 없고 수행환경이 좋지 않으면 그 곳을 떠나야 한다. 이런 경우 그 수행승은 밤이건 낮이건 그 숲속에서 떠나는 것이 좋으며, 그 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M17) 라고 하였다.

 

부처님도 그랬다. 부처님이 출가하여 두 명의 스승의 제안을 뿌리치고 나온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알라라 깔라마와 웃따까 라마뿟따를 말한다. 부처님이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에 까지 이르렀지만 궁극적 목적은 아니었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그의 가르침은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 적정, 지혜,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M26 )라고 되어 있다. 이에 부처님은 스승을 떠나 홀로 수행을 하였다.

 

벽천암 무애스님

 

만공스님학술대회를 마치고 천장사신도들은 주지스님과 함께 어느 스님의 토굴을 방문하였다. 일종의 성지순례라 볼 수 있다. 수덕사 내에 있는 작은 암자에 지나지 않지만 수행자를 찾아 가르침을 듣는 것도 신행생활의 큰 즐거움일 것이다.

 

찾아 간 곳은 수덕사 입구에 해당되는 길에 작은 암자 벽천암이다. 처음 보았을 때 절 같지 않아 보였다. 잘 가꾸어진 별장처럼 보였다. 지붕에 기와대신 책장만한 널판지가 올려져 있어서 너와집이 연상되었다. 정원에는 작은 연못도 있고 꽃의 종류도 많아서 절 이라기 보다 근사하게 잘 지은 집처럼 보였다. 이런 구조의 암자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토굴이라 한다.

 

 

 

 

 

 

토굴에 사시는 스님은 천장사신도들을 반갑게 맞이 해 주었다. 미리 주지스님이 연락을 해 놓았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천장사의 성지순례는 이렇게 사전에 연락을 해 놓고 가기 때문에 주지스님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벽천암에서 살고 있는 스님의 법명은 무애스님이다. 법명 처럼 자유롭게 사는 것 같다. 그렇다고 막행막식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구도를 위하여 무려 13명의 스승을 찾아 갔다고 하니 무애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심지어 스리랑카에서 3년을 살다 왔다고도 하였다.

 

약간 다혈질의 스님은 거침이 없다. 말을 거칠게 하면서도 가르침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였다. 잘 들어 보니 초기경전에 근거한 이야기이다.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맞아라

 

스님은 신도들을 거실로 불러 들였다. 먼저 좌선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기본중의 기본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님이 말하는 좌선은 어떤 것일까?

 

스님은 먼저 가부좌 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왼발위에 오른발을 올려 놓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위빠사나선원 방식과 다르다. 위빠사나선원에서는 발을 포개지 않고 바닥에 평평하게 하여 바싹 끌어 당긴다. 이를 평좌라 한다.

 

스님은 눈을 실눈으로 해도 좋고 감아도 좋다고 하였다. 다만 강조한 것이 있다. 그것은 허리를 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당당해지는 것이라 하였다. 부처님을 뵙는 이 시간에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맞이 하라는 것이다. 이 말에 공감하였다.

 

 

 

 

 

 

 

 

 

 

 

좌선 할 때 자세가 중요하다. 자세가 구부정하거나 단지 눈만 감고 나태하게 임한다면 집중할 수 없다. 그러나 허리를 곧게 하고 자세를 바로 잡았을 때 당당해 질 수 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확인 된다.  염처경에 이렇게 되어 있다.

 

 

Idha bhikkhave bhikkhu araññagato vā rukkhamūlagato vā suññāgāragato vā nisīdati pallaka ābhujitvā uju kāya paidhāya parimukha sati upaṭṭhapetvā. So satova assasati, sato passasati.

 

여기 수행승이 숲으로 가고 나무 밑으로 가고 한가한 곳으로 가서 앉아 가부좌를 틀고 몸을 바로 세우고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여 새김을 확립하여 숨을 들이쉬고 새김을 확립하여 숨을 내 쉰다.” (M10, 전재성님역)

 

 

가부좌에 대한 것을 보면 몸을 바로 세우고(uju kāya)라 하였다. 빠알리어 uju‘straightly’의 뜻이다. 초불연에서는 상체를 곧추 세우고라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가부좌의 조건 중의 하나는 상체를 똑바로 세우는 것이다. 이는 우주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이 세상을 향하여 당당하게 나아감을 말한다.

 

빠리무캉(parimukha)에 대하여

 

경에서 빠리무캉(parimukha)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에 대하여 위빠사나 선원에서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번역에서는 얼굴 앞으로라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전면에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빠리무캉이 들어가 있는 구절은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여(parimukha sati upaṭṭhapetvā)라 되어 있다. 또는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라고 번역 되어 있다.

 

전면에 사띠하라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한 전재성님의 맛지마니까야 각주를 보면 “Vibh.252에 따르면, ‘새김이 정립되었는데. 코끝이나 윗입술의 가운데 잘 정립된 것을 뜻한다.” (220번 각주)라 하였다. 코끝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이어지는 문구 숨을 들이쉬고 새김을 확립하여 숨을 내 쉰다.”와 관련이 있다. 호흡관찰 할 때 코끝에 두라는 것이다. 실제로 선원에서는 코끝에서 호흡관찰을 하라고 한다.

 

전재성님은 빠리무캉과 관련하여 디가니까야 대념처경에서 좀 더 상세한 각주를 하였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parimukha sati upaṭṭhapetvā: 역자주: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여라는 관례적인 번역을 따른 것이나 얼굴 앞으로라는 말은 어원대로 해석하자면 얼굴 둘레로라는 뜻이다. 이것을 논서(Vibh.252)에서 새김이 정립되었는데. 코끝이나 윗입술의 가운데 잘 정립된 것이라고 해석하였으나 이는 틀린 것이다. 코끝은 윗입술 쪽이 아니라 코의 뿌리로 실제로는 코의 근원이 되는 부분으로 두뇌 한 가운데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곳을 기점으로 얼굴 둘레로(=머리 둘레로 새김을 확립한다는 뜻이다.

(1713
번 각주, 새김의 큰 토대의 경, 디가니까야 D22, 전재성님)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맛지마니까야에서 설명된 주석이 틀렸다고 하였다. 이는 논서에서 말하는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면서 코끝은 윗입술 쪽이 아니라 코의 뿌리로 실제로는 코의 근원이 되는 부분으로 두뇌 한 가운데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였다. 참고로 맛지마니까야의 판본은 2009년 개정초판이다. 디가니까야는 2011년 초판이다. 나중에 출간된 판본에서 이전에 출간된 각주가 잘못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주석에 근거하지 않은 개인적인 견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빠리무캉에 대하여 초불연 번역서에서는 어떻게 설명되어 있을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parimukha sati upaṭṭhapetvā)’란 명상주제를 향하여 마음챙김을 둔다는 말이다. 혹은 접두어 pari(둘레에, 원만히)는 철저히 파악한다는 뜻이고, mukha(, 얼굴)은 출구의 뜻이며,  sati(마음챙김)는 확립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parimukha sati(철저히 파악하여 출구가 되는 마음챙김)이다. (Ps.i.176)라고 무애해도에서 설한 방법에 따라서도 이뜻을 알아야 한다. 간략히 설하면 철저히 파악하여 [반대되는 심리현상인 잊어버림으로부터] 출구인 마음챙김을 [공부]짓고라는 뜻이다.” (청정도론,  VIII.161)

 

(355번 각주, 초불연 맛지마니까야, 대림스님)

 

 

빠리무캉에 대한 설명이 번역서마다 다르다. 전재성님은 코끝에 집중하는 것에 대하여 두뇌 한 가운데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였으나, 초불연에서는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철저히 파악하여 출구가 되는 마음챙김이라 하였다.

 

호흡을 보았습니까?”

 

전면에 사띠를 확립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늘 하는 말이 있다. 그 말은 호흡을 보았습니까?”라는 말이다. 수행처에 몇 달을 다녀도 심지어 수년을 다녀도 호흡 한번 보지 못하였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호흡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호흡을 볼 수 있을까?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좌선을 할 때 법사가 리드한다. 그래서 늘 하는 말이 있다. 처음에 느낌을 보는 것이다. 평좌를 하고 허리를 바로 세우고 난 다음 눈꺼풀의 느낌을 보라고 한다. 이는 눈꺼풀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눈이 무거운지 촉촉한지 느끼라고 한다.

 

이어 법사는 입술에서 느낌을 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입술의 감촉이 촉촉한지 등의 느낌을 알아차리라고 한다. 이어서 손으로 이동한다. 대게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놓기 때문에 손으로 전달되는 따듯함 등을 느끼라고 한다. 이어서 엉덩이로 향한다. 엉덩이로 전달 되는 딱딱한 느낌 등에 마음을 집중하라고 한다.

 

이렇게 머리 끝에서 엉덩이 끝까지 느낌을 훝어 내린다. 이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기 위한 예비동작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느낌을 관찰하였을 때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로지 마음을 두는 대상에 따라 부드럽거나 촉촉하거나 따뜻하거나 딱딱한 감촉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서 법사는 마음을 전면에 두라고 한다. 대게 코끝을 말한다. 전면에서 호흡을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들어 가고 나가는 호흡을 관찰하라고 한다. 이런 호흡관찰은 반드시 코끝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경에서 빠리무캉이라 하였을 때 이는 반드시 얼굴전면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호흡은 얼굴의 전면뿐만 아니라 측면, 또는 후면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얼굴 앞으로라는 말은 어원대로 해석하자면 얼굴 둘레로라는 뜻이라 하였다.

 

호흡을 보기 가장 쉬운 곳은 코끝이다. 그러나 반드시 코끝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코끝에서 떨어진 얼굴 전면에서도 볼 수 있고, 측면, 후면에서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몸 전체에서도 호흡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위빠사나선원에서는 호흡을 전면에서 보십시오라고 말한다.

 

무애스님의 즉문즉설

 

벽천암에서 무애스님은 천장사신도들을 위하여 참선지도를 하였다. 가부좌 하는 방법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특히 허리세울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자신과 우주의 대면이라 하였으며 당당하게 대할 것을 주문 하였다. 이에 스님들과 신도들은 잠시 입정의 시간을 가졌다.

 

무애스님은 참선지도가 끝나자 법담을 하였다. 질문을 받고 답하는 방식이다. 일종의 즉문즉설과도 같은 것이다. 참석한 신도가 8명이었다. 차례대로 질문을 하게 하게 하여 답변하는 형식이었다.

 

차례가 돌아 오자 스님이 생각하는 불교적 깨달음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이런 질문을 선사에게 한다면 방이나 할을 맞을 것이다. 그러나 무애스님은 아주 친절하게 자신이 생각하는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었다. 그것도 초기경전에 근거한 것이다.

 

무애스님은 삼명에 대한 설명, 사성제에 대한 설명을 짤막하게 해 주었다. 이런 답은 사실 기대 하지 않았다. 선사들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승을 찾아 13번 다녔고 더구나 스리랑카에서 살고 왔다니 부처님 근본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참가한 모든 법우님들은 돌아 가면서 평소 궁금한 것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이에 무애스님은 법명처럼 걸림없이 답하였다. 대부분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차담을 하다 보면

 

무애스님의 참선지도와 즉문즉설이 끝난 후 밖으로 이동하였다. 정원에는 차가 준비 되어 있었다. 스님과 차담 시간이 시작 된 것이다. 커피 좋아 하는 법우님을 위하여 커피도 제공 되었다. 그런데 차담을 하다 보니 즉문즉설시간 보다는 자유로웠다. 서로 대화가 오간 것이다. 아마 차담의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차담은 결국 법담이 되었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 가르침에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차담을 하다 보니 스님들의 세계도 알게 되었다. 차담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교계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알게 되었다. 만일 이대로 계속 차담 한다면 아마 해가 질 때까지, 아니 밤새도록 계속 될지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해가 늬엇늬엇 넘어가기 시작하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장사 일요법회의 연장선상인 성지순례가 마무리 된 것이다. 이렇게 천정사에서는 점심공양 후 주지스님과 함께 신도들이 각자 타고 온 승용차를 이용하여 순례를 떠난다. 도착해서 그곳 주지스님과 차담을 나누고 가르침에 대하여 논의한다. 망갈라경(Sn2.4)에서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라는 말이 떠 오른다.

 

 

Gāravo ca nivāto ca             

santuṭṭhi ca kataññutā,          
K
ālena dhammasavaa           

eta magalamuttama.          

 

존경하는 것과 겸손한 것,

만족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때에 맞추어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stn265)

 

 

Khantī ca sovacassatā           

samaānañca dassana,          
K
ālena dhammasākacchā           

eta magalamuttama.          

 

인내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stn265)

 

 

 

2015-09-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