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오후불식하는 스님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1. 2. 11:54

  

오후불식하는 스님

 

 

천장사법우님들과 함께 12일 사찰순례를 다녀 왔. 천장사 주지 허정스님과 전주지 선일스님, 그리고 천장사 신도분들을 함께 하였는데 모두 16명이다. 목적지는 지리산 일대의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이다. 순서대로 열거 하면 화엄사, 용화사, 쌍계사, 연곡사, 사성암, 봉명암이다. 이렇게 5사 순례를 하였는데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와 경상도에 있는 절들을 다녀 왔다.

 

시월의 마지막 날에

 

시월의 마지막 날인 토요일 출발지 천장사에 모였다. 서산, 홍성 등 내포지역에사는 법우님들과 서울에 사는 법우님들이 9시까지 성우당에 모였다. 출발에 앞서 간단히 차담을 하고 일정을 점검 하였다. 스님 두 분 포함하여 16명이기 때문에 인원이 적어 전세버스가 아닌 승용차로 출발하였다.

 

차는 모두 4대가 동원 되었다. 한차에 4명이 탑승하여 네 차로 출발하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문제 있을 수 있다. 요즘 대세인 카톡을 이용하여 소통하는 방식으로 하였다각차로 가지만 휴게소에서 모이고 또 목적지에서 모이기 때문에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단풍철이기 때문에 교통혼잡을 염려 하였으나 염려에 그쳤다. 서울과 수도권에서는 교통체증이 일상이다. 그러나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남의 나라 일처럼 여겨졌다. 뻥 뚫린 고속도로와 국도를 이용하여 쾌속질주 하였다.

 

스님과 함께 하는 사찰순례

 

화엄사는 큰 절이다. 그러나 한번도 가보지 못하였다. 이는 큰 절이기 때문이다. 사찰순례하면 대게 큰 절에 가지 않는다. 대찰은 한번쯤 다녀 왔을 것이라 생각하여 후보지에서 제외된다. 또 대찰은 관광지 같은 느낌이 들어 기피한다. 그래서 사찰순례를 떠나면 남들이 가 보지 않은 곳, 일반인들이 잘 가지 않는 곳, 숨어 있는 산사가 대상이 된다. 이번 12일 순례에서는 대찰과 작은 절이 골고루 섞여 있어서 조화를 이루었다.

 

이번 순례에 특징이 있다. 그것은 이제까지 방식과 다른 것이다. 이전에는 법우님들끼리 전세버스를 대절해서 순례 하였다. 그러다 보니 해당사찰을 둘러 보는 것에 그쳤다. 스님들과 대화는 물론 차담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스님과 함께 하는 순례의 경우 장점이 많다. 이번 천장사순례가 그랬다.

 

침향차를 대접받고

 

주지스님과 인연있는 스님이 화엄사에 살고 있다. 화엄사 학감 대산스님이다. 전에 주지스님과 인도에서 함께 공부하였다고 한다. 화엄사 주차장에 도착하자 대산스님이 마중 나왔다. 일행은 모두 학감실이 있는 봉향각으로 이동하였다.

 

대산스님은 일행을 학감실로 안내 하였다. 넓은 학감실에는 16명이 들어가도 널널할 정도로 공간이 넓다. 대산스님은 차를 대접하였다. ‘침향차라 하였다. 향나무를 재료로 하여 만든차라 하였다. 매우 귀하고 비싼차라 하였다. 그래서일까 차를 대하는 느낌이 달랐다.

 

 

 

 

 

침향차는 다른 차와 달리 무색투명하다. 겉으로 보아 맹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약간 기름기가 있다. 그리고 독특한 향내가 난다. 음미하면 독특한 침향차 맛을 느낄 수 있다.

 

 

 

 

 

 

 

빨강가사를 입고 있었는데

 

대산스님은 매우 젊어 보인다. 그런데 어디선가 많이 본 듯 하다. 허정스님에 따르면 인도 뿌네 대학에서 함께 공부하였다고 하였다. 또 인도성지순례를 함께 했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허정스님의 블로그에서 보았다. 그때 당시 빨강가사를 입고 있었다.

 

대산스님은 왜 빨강가사를 입고 있었을까? 이야기를 들어 보니 티벳불교에서 계를 한번 더 받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한국불교에서 계를 받았고 인도에서 또 한번 계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인도에서 머물 때 티벳불교 가사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당시 사진을 찾아 보았다. 허정스님의 블로그에 인도 성지순례 사진 몇장(2010-12-24)’라는 제목의 글에 실려 있다. 당시 이 사진을 보고서 빨강가사를 입은 스님이 누구인지 궁금하였는데 이제 알 수 있었다.

 

 

 

 

 

 

 

 

 

 

 

 

글을 쓰다 보면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 허정스님의 블로그에서 빨강가사를 입은 스님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화엄사 학감실에서 학감으로 있는 대산스님을 보았을 때 낯이 익었다. 마치 TV에서 본 유명인을 실제로 보았을 때 알아 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대산스님을 사진으로 접한 적이 있었으니 이번에는 구면인 셈이다.

 

현재 대산스님은 티벳식 빨강가사를 입고 있지 않다. 귀국해서 다시 한국식 승복을 입고 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허정스님이 인도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2011년 귀국했고, 이후 선운사 초기불교 승가대학원에서 수학했다. 2014년부터 화엄사 승가대학에서 학감으로 있으면서 학인 스님을 지도 하고 있다.

 

필명을 알고 매우 놀라워하는데

 

여럿이서 모인 가운데 스님에게 이것 저것 물어 보았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관계에 대해서 물어 보았더니 시간을 가지고 지혜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초기불교를 접하고 인도유학을 갖다 온 스님들과 오로지 한국불교만 접한 스님들과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편가르기나 흑백논리로 접근하기 보다 점진적으로 알려 주자는 것이다. 이를 테면 대승불교 경전상에 나온 가르침들이 모두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는 것인데 이런 것들 것 알려 주면 수긍한다고 한다.

 

대산스님은 외국에서 공부해서 그런지 열려 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잔브람스님의 수행법에 크게 공감하고 있는 듯이 보여진다. 스님의 말에 따르면 아잔브람의 수행법에 대하여 뻥 뚫린듯한기분이라 하였다.

 

대산스님과 대화 중에 필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허정스님이 필명을 알려 준것이다. 이에 대산스님은 무척 놀라는 듯 하였다. 이렇게 놀란 이유는 글의 내용과 실제모습이 매칭 되지 않아서라고 하였다. 글에서는 매우 강한 느낌을 받았는데 실제로 보니 매우 부드럽다고 하였다. 실제로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대산스님이 가이드가 되어

 

대산스님이 팽주가 되어 차를 나누어 주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한 침향차를 마시고 화엄사 관람에 나섰다. 대산스님이 가이드가 되어 일행들에게 이것 저것 설명해 주었다.

 

화엄사에는 국보가 네 개 있다고 하였다. 보물보다 더 가치 있게 쳐 주는 것이 국보인데 네 개나 있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다고 하였다. 화엄사에서 국보 네 개는 무엇일까? 그것은 각황전, 각황전 내의 탱화, 석등, 사자석탑이라 하였다. 이외에도 수 많은 보물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화엄사는 국보와 보물로 가득한 성지중의 성지라 볼 수 있다.

 

국보는 이런 것이다

 

화엄사 하면 각황전이다. 마치 경복궁 근정전을 연상케 하는 2층 구조의 커다란 전각이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골동품처럼 보인다.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고색창연하다.

 

 

 

 

 

 

내부로 들어가 보았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불상이 압도한다. 2층 구조이지만 내부는 터져 있기 때문에 대불안치가 가능한 것이다. 대불을 중심으로 한바퀴 둘로 보게 되어 있다.

 

 

 

 

 

 

 

뒤편으로 가 보니 국보 탱화가 커다란 두루말이함에 보관되어 있다. 바로 위에는 탱화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려 주는 사진이 걸려 있다. 영산회상도이다.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 당간지주에 걸어 놓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다.

 

 

 

 

 

 

대불 뒷편에는 또 하나의 불상이 있다. 그것은 아미타불이다. 전면에는 석가모니부처님상이 있어서 주불이다. 그런데 뒷면에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후면에는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다른 절에서 볼 수 없는 사다리이다. 기둥에 사다리가 설치 되어 있는데 어떤 용도일까? 대산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이층으로 올라 갈 때 사용되는 것이라 한다. 이는 전각이 2층 구조로 되오 있어서 2층이 회랑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다리가 되어 있지만 2층으로 올라 갈 수 없다. 이전에는 사다리를 이용하여 회랑을 돌며 관람이 가능하였다고 한다. 전각 내부가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다.

 

 

 

 

 

 

화엄사에 또 하나의 국보가 있다. 그것은 대형석등이다. 설명에 따르면 한국최대라 한다. 각황전 바로 앞에 있는데 높이가 6.4미터에 달한다. 사람이 옆에 서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큰 석등인지 알 수 있다.

 

 

 

 

 

화엄사는 큰 절이다. 그래서일까 스케일이 크다. 2층 구조의 각황전과 석등을 보면 여타 절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마치 왕이 사는 궁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일까 대웅전 올라가는 돌계단도 궁궐에서 볼 수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해학적인 금강역사

 

큰 사찰에서 천왕문을 볼 수 있다. 이를 사천왕문이라고도 한다. 이곳 화엄사에도 사천왕문이 있다. 그래서 보기에 매우 험하게 생긴 사대왕천이 무기를 들고 서 있다. 그런데 화엄사에서 다른 사찰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금강문이다.

 

금강문은 사대왕천 바로 앞에 있다. 절에 들어가면 일주문을 지나 다음 단계가 금강문이다. 금강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금강문에 있는 금강역사는 사천왕문의 사대왕천에 비하여 지위가 더 낫다. 그런데 화엄사 금강역사상을 보면 그다지 무섭지 않게 생겼다는 것이다.

 

 

 

 

 

 

 

 

 

 

 

 

금강역사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이다. 그래서 매우 험상굿고 무서운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화엄사 금강역사상은 무섭다기 보다 해학적이다. 그렇다면 외국의 금강역사상은 어떨까?

 

입모양으로 본 금강역사상

 

먼저 중국소림사 금강역사상이다. 2011년 중국성지순례당시 촬영한 것이다. 이를 숭산 소림사에서 중국불교(2011-05-2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중국소림사 아형 흑색 금강역사상.

 

 

 

 

 

 

 

중국소림사 훔형 푸른색 금강역사상

 

 

 

중국 소림사 금강역사상을 보면 무시무시하게 생겼다. 얼굴과 몸통이 모두 검은 역사는 아형으로 입을 크게 벌리고 고함치듯이 금방이라도 주먹으로 내려 칠 것 같다. 얼굴과 몸통이 푸른 빛을 띠고 있는 역사는 훔형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데 칼로 제압할 듯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 되어 있다.

 

일본 금강역사상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에 대하여 그들은 거대함을 추구하였을까, 도다이지(東大寺) 노사나대불(2012-06-1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일본 동대사에서 본 금강역사는 중국역사상 못지 않게 무시무시하다. 두 기의 역사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 동대사 입을 크게 벌린 아형 모습의 금강역사상

 

 

 

 

 

 

 

일본 동대사 입을 다문 훔형 모습의 금강역사상

 

 

 

동대사의 금강역사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생겼다. 무기를 들고 크게 분노하는 모습이다. 두 기의 특징을 보면 입 모양에서 차이가 난다.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과 크게 벌린 것이 있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중국의 역사상과 일본의 역사상은 형태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역사상은 어떠할까?

 

화엄사 금강문에서 본 금강역사상은 두 기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 이는 중국과 일본의 것과는 다른 것이다. 어떤 문제가 있을까? 검색해 보았다. 다음과 같은 자료가 있다.

 

 

석굴암 금강역사상은 8세기 동아시아 금강역사상의 보편적인 특징을 지녔다. 간다라나 인도 본토의 금강역사상과는 달리 쌍으로 만들어졌고, 손에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격파자세를 하고 있다. 또 그 중 1구는 입을 연 아상으로, 나머지 1구는 입을 팍 다문 훔상이다. 바로 이 세 가지 특징, 즉 아형과 훔형에, 이들이 서로 쌍을 이루며, 맨손인 금강역사상은 중국에서 6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형식이다.

 

(석굴암 금강역사상에 관한 가지 문제)

 

 

자료에서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그것은 두 기의 역사상의 입모양이다. 하나는 아형이고 하나는 훔형이라 하였다. 이는 입을 크게 벌린 형태와 입을 다문 형태를 말한다. 석굴암 금강역사상도 그렇게 되어 있다.

 

 

 

석굴암 금강역사상

 

 

석굴암 역사상을 보면 입모양이 아형과 훔형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생김새도 매우 무섭게 생겼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중국 소림사와 일본 동대사의 금강역사상과 유사하다. 그런데 화엄사의 역사상은 두 기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 더구나 무섭게 생기지도 않고 해학적으로 생겼다.

 

오후불식하는 스님

 

화엄사 승가대학 학감 대산스님의 안내로 순례단은 화엄사 관람을 마쳤다. 나오는 길에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서로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 대산스님이 오후불식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왜 중요한가? 오후불식한다는 것은 가급적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에서는 탁발을 하고 있지 않다. 수행자의 위의를 손상한다고 하여 60년대에 금지 시켰다. 그럼에도 어렸을 적 시골에 살 때 종종 탁발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여전히 탁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법과 율대로 살겠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탁발의 전통이 있는 테라와다에서는 하루 한끼 밖에 먹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국불교는 모든 면에 있어서 테라와다불교와 다르다. 가장 차이 나는 것이 탁발이다. 그리고 오후불식이다. 한국불교에서는 탁발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후 불식도 지키지 않는다. 대부분 스님들이 밥 세끼를 다 먹는다. 그런데 대산스님이 오후불식한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한국불교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대산스님의 오후불식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생각해보았다. 탁발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세 끼를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오후에는 밥을 먹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법과 율을 준수하고자 하는 의지로 볼 수 있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계행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오후불식한다는 것은 계를 지키며 가르침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것 같다.

 

 

2015-11-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