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스님은 왜 출가하셨나요? 얘기해 주세요”하동 용화사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1. 3. 11:34

 

스님은 왜 출가하셨나요? 얘기해 주세요”하동 용화사에서

 

 

 

하동 용화사를 향하여

 

천장사 순례단은 화엄사 참배를 마친 후 용화사로 이동하였다. 용화사는 하동군 악양에 있다. 구례 화엄사에서 하동 용화사까지 30여 키로 미터의 거리에 있다. 도중에 소설 토지의 무대 악양면을 보았다. 비록 차창에서 본 것이지만 커다란 분지 형태로 한눈에 보기에도 안온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용화사는 악양면 끝자락 섬진강을 마주 보고 있다. 섬진강 저편은 전라도 땅이다. 이렇게 섬진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지방이 갈린다. 그런데 단지 지역만 갈린 것이 아니다. 사람도 갈라 놓았고 말씨도 갈라 놓았다. 불과 몇 십분 전 까지만 해도 나긋나긋한 전라도 말씨를 들었으나 강건너로 오니 억양이 강한 경상도 말씨가 들렸다. 그래서일까 용화사 주지스님도 경상도 말씨이다.

 

 

 

 

 

 

10월 31일 오후 늦게 용화사에 도착 하였다. 저녁을 용화사 인근 식당에서 해결 하였다. 스님들은 5시가 되면 식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스님시간에 맞추다 보니 저녁을 일찍 먹게 된 것이다. 거의 해질 무렵 용화사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감나무가 반겨 준다. 대봉이라 불리우는 끝이 뾰족한 감나무가 이곳 저곳에 가지가 찢어 질 듯 열려 있다.

 

 

 

 

 

용화사는 어떤 절일까?

 

용화사는 어떤 절일까? 섬진강을 따라 달리는 도로에서 비켜 나와 산길을 올라 가면 전망이 탁 트인 곳에 용화사가 있다. 섬진강 저 멀리 전라도 땅의 능선이 횡으로 달리고 있다. 그 너머에 가장 높은 구례 백운산이 보인다.

 

 

 

 

 

용화사 입구에 특이한 입간판을 보았다. 그것은 지리산 용화사라는 문구 아래 대한불교조계종 골굴사 분원 재)선무도大金剛門하동연수원이라는 글씨가 그것이다.

 

 

 

 

 

 

 

불교무술 선무도로 유명한 곳이 골굴사이다. 그런데 용화사가 분원이라 한다. 이렇게 분원이 된 것은 주지스님과의 차담으로 알게 되었다은사스님이 몇 달 전에 인수한 절이라 하였다. 그래서 용화사는 조계종 절이기도 하지만 재단법인 선무도대금강문소속이기도 하다.

 

용화사가 골굴사 분원이라 하니 주지스님도 선무도에 대하여 알 것 같았다. 차담 할 때 물어 보니 선무도 수련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템플스테이 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법문 뿐만 아니라 선무도 수련도 가르쳐 줄 계획이라 하였다.

 

용화사는 전통사찰이 아니다. 창건 된지 이제 22년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용화사 주지는 관오스님이다. 두 달 전 하안거를 마치고 곧바로 용화사 주지로 왔다고 하였다. 골굴사 은사스님이 절을 인수하여 관오스님에게 맡긴 것이다.

 

저녁예불에 참석하고

 

천장사에서는 어떻게 하여 용화사를 순례코스로 잡았을까? 그것도 하루 밤 묵어갈 코스로 잡은 것일까? 그것은 천장사 현직 전직 주지스님들과의 인연 때문이다. 지난 여름 하안거때 관오스님은 천장사에서 한철을 살았고, 선일스님이 천장사 주지로 있을 때도 함께 살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전현직 주지스님과의 인연, 그리고 천장사 신도들과의 인연으로 용화사에서 일박 하게 된 것이다.

 

용화사 저녁예불에 참석 하였다. 천장사 스님과 신도 일행 16명과 용화사 관오스님 1명 이렇게 17명이 참가 하였다. 그런 용화사에는 현재 두 명이 살고 있다. 주지스님과 처사 한 분이다. 주지를 맡은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도량정비 등 할 일이 매우 많다고 하였다.

 

 

 

 

 

 

차담시간을 가졌는데

 

저녁예불이 끝나고 차담시간을 가졌다. 용화사 법당 아래에 있는 대중방이다. 주방도 있어서 공양식당이라 볼 수 있고 잠을 잘 수도 있는 넓은 방이다.

 

 

 

 

 

어떻게 세상과 소통할 것인가

 

관오스님은 선방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런데 주지를 맡음에 따라 의욕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세상과의 소통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일요법회를 활성화 하겠다고 하였다. 일요법회시간에는 아함경 강의를 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스님이 초기불교에 대하여 관심이 있고 실제로 스님은 인도에서 2년간 살다 왔다고 하였다.

 

스님은 세상과의 소통을 위하여 템플스테이를 활성화 시키겠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혼자 머물기 위하여 오는 사람은 사절이라 하였다. 자녀와 함께 가족이 와서 머물다 가는 것은 대환영이라 하였다. 이는 평소 스님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스님은 가족템플스테이를 위하여 별도의 공간도 만들 계획이라 하였다. 그래서 스님이 이제까지 살면서 배우고 익힌 것을 알려 줄 계획이라 한다. 그 중에 선무도도 포함 되어 있다고 하였다.

 

관오스님은 한 눈에 보기에도 부지런하게 생겼다. 작은 키에 동작도 빠르고 말도 달변이다. 이전에 천장사에 살 때 건축 일 온갖 궂은 일을 도 맡아서 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포부가 매우 크다. 용화사를 잘 정비하여 누구나 찾아 와서 쉴 수 있는 사찰로 만들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일반사람들과 소통하려 하는데 선과 무 즉, 선무도 정신으로 가족템플스테이 전문사찰의 꿈을 가지고 있다.

 

관오스님의 의지로 보아 조만간에 용화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질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떤 불자들을 대상으로 할까? 아마 하동불자들을 대상으로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하동에 너무 많은 절과 암자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현재 하동에는 일반사찰이 95개가 있고, 토굴이 150개 가량 있다고 한다. 아마 지리산을 끼고 있어서일 것이다. 이렇게 많은 절과 토굴이 있다면 하동군민을 대상으로 하기에는 힘겨울 것이다. 그래서 전국구가 될 수밖에 없다. 전국의 국민과 불자들이 대상이 되는 것이다.

 

스님은 왜 출가하셨나요? 이야기해 주세요?”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커다란 대중방에 죽 둘러 앉았다. 앉아서 차와 과일을 들며 담소 하였다. 이렇게 담소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스님들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진다. 어느 나이 든 여성 법우님이 짓궂은 질문을 하였다. 주방을 보면서 어쩜 이렇게 깨끗해요?”라고 말하면서 우스개 소리로 우렁각시라도 숨겨 놓았나요?”라고 짓궂은 질문을 하였다.

 

여성 법우님은 계속 질문하였다. 이번에는 스님의 출가에 대하여 관심을 보였다.그래서  스님은 왜 출가하셨나요? 이야기해 주세요?”라며 조른다.

 

불자들이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스님의 출가이다. 그래서 왜 출가 하였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불교방송을 들어 보면 사회자가 넌지시 출가이유를 물어 본다. 대게 출가이유를 상세히 설명해 준다. 하지만 스님에게 들에게 출가이유를 물어 보는 것은 실례라 한다. 특별한 인연이 아니면 출가이유를 말하지 않는 것이다.

 

법우님의 계속 되는 질문에도 스님은 출가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스개 소리로 장가를 못가서 출가했지라며 얼버무린다. 법우님은 이번에 선일스님에게 똑같이 물어 본다. 천정사 전주지이었던 선일스님은 친절하게 출가이유를 알려 주었다.

 

선일스님의 출가이야기

 

선일스님은 전형적인 수행승이다. 잠시 2년간 천장사 주지직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 출가이래 줄곧 선방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감관이 매우 맑다. 때묻지 않고 청정한 기운을 엿볼 수 있다출가이유에 대하여 고등학교 다닐 때 불교와의 인연을 들려 주었다.

 

선일스님이 고등학교 다닐 때 불교학생회 가입 권유를 받았다고 하였다. 교실을 돌아 다니며 권유를 받았을 때 한번 들어나 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학생회를 이끄는 재가법사의 열정적인 법문에 매료 되었다고 한다. 소위 명문대에 갈 수 있었음에도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한 법사는 기쁨으로 지도 하였는데 그런 영향이어서인지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출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스님이 수행의 길로 들어 선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군대에서의 일 때문이라 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출가 하여 절에 살다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하나의 사건에 휘말려 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생노병사와 관계되는 큰 사건이었다고 한다. 그 사건으로 군대감옥이라는 영창을 살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사건으로 인하여 평생 수행의 길로 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스님은 제대하고 풀리지 않는 그 사건을 떠 올리며 왜 그런 문제가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알고 싶었다고 하였다. 이전에는 막연하고 낭만적인 불교이었으나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근원적인 문제에 매달린 것이다. 그래서 남들 다 가는 강원에도 가지 않고 곧바로 선방으로 직행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스님의 문제는 풀렸을까? 물어 보니 해결했다고 하였다. 그것은 알음알이가 아닌 참선을 통한 수행의 힘으로 극복하였음을 말한다.

 

삶은 문제의 연속이다

 

누구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삶은 문제의 연속이다. 한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문제 중에는 쉬운 문제도 있고 어려운 문제도 있다. 쉬운 문제는 대게 시간이 지나면 풀리는 것들이다. 지금 병이 나서 괴로움을 겪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낫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풀리는 문제의 전형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 난제가 있다. 그것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말한다. 이런 난제에 봉착하면 신()이나 불()을 찾게 된다.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그제서야 사람들은 교회나 절을 찾게 된다. 교회에 가서 절대자에게 매달리고 절에 가서 부처님의 가피를 바란다.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기도로서 초월적 존재의 힘에 의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이나 부처님에게 맡겨 버리는 것이다.

 

신이나 불에게 자신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떠 넘긴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것일까? 과연 신이나 불은 자신의 능력 밖 문제를 해결해 줄까? 대부분 사람들이 교회나 절에 가는 것은 아쉽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잘 나갈 때는 종교에 의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과정에서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문제 즉. 건강, 수능, 사업, 치유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비로소 찾게 된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2004년 봄에 절을 찾았다. 이전에는 절에 간 적이 없었다. 이전에는 정서적으로 불자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자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난제이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 되지 않는 문제에 봉착 하게 되었을 때 참으로 답답하였다. 그래서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라며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해결방법을 불교에서 찾고자 하였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늘 바쁘다. 마음 놓고 쉬는 날은 일요일 하루뿐이다. 이렇게 삶에 얽매여 있다 보니 불교교양대학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불혹이 되기 전에 가 보려고 하였지만 직장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다. 또 직장이 있는 근처에 교리를 알려 주는 절도 없었다. 이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몇 년이 훌쩍 지나갔다.

 

불혹을 넘겼을 때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불교와 인연을 맺어야 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풀리지 않는 인생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 뿐이었다. 그렇게 또 몇 년을 보냈다. 그러다 직장을 분당으로 옮기게 되었다. 사무실의 장을 맡고 있어서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그래서 강남에 있는 도심포교당에 등록을 하였다. 자동차를 이용한 먼 거리이지만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시간에 빠지지 않았다.

 

불교교양대학 3개월에 의문이 해소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것이 있다는 정도로 맛만 보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마치 자동차에 시동이 걸린 것처럼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였다. 여기서 공부라 하면 선가에서 말하는 공부가 아니라 그저 책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 저것 책을 접하고 자료를 찾아 보았다.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있는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아상가 교수의 사성제 강의를 듣고

 

능력밖의 문제는 기도나 책을 읽는 것으로 해결 되지는 않는다. 기도로 책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문제도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 자신의 힘으로는 안되는 것, 운명적인 것은 기도한다고 해서 책을 읽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도피할 수도 없다. 삶에 꽉 묶여 사는 현대인들에게 도피처는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의 돌파구가 보였다. 그것은 한 강좌를 듣고 나서 부터이다. 불교TV BTN 사이트에서 스리랑카 아상가 교수의 초기불교 강좌를 인터넷으로 접하였다.

 

아상가 교수는 사성제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물론 영어로 했다. 자막이 있어서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책을 백번 읽는 것 보다 아상가 교수의 사성제 강의 하나만 못한 것 같다. 그것은 괴로움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강의를 녹취하여 글로 정리하였다.

 

 

1) 오취온(五取蘊) 고통의 근원인 이유, 아상가교수의 사성제강의 고성제(2010-08-04)

2) 영원에 대한 집착과 죽음의 본능, 아상가교수의 사성제강의 집성제(2010-08-07)

3) 열반은 생에서 이루어야, 아상가교수의 사성제강의 멸성제(2010-08-09)

4) 팔정도와 야타부따냐나, 아상가교수의 사성제 강의 도성제(2010-08-19)

5) 부처나 아라한은 공덕을 짓지 않을까, 아상가교수의 ‘업과 재생(rebirth)’강의를 (2010-10-11)

 

 

부처님은 고성제를 설하면서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 하였다. 이와 같은 선언에 누군가 아니에요,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 , , ,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 이렇게 8고를 말하였을 때 이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리로서 받아 들이게 된다.

 

지금 당면한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괴로움의 원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갈애가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듯이

 

문제에 부딪쳤을 때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학생이 시험문제를 받았을 때 먼저 문제문을 읽어 보는 것에서 시작 되는 것과 같다. 지금 산산조각 나듯이 갈갈이 찢어지는 고통에 직면하게 되었을 떼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라는 의문과 함께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 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성제에서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것이다.

 

괴로움이 무엇인지,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다름 없다. 시험지에서 문항을 읽고 내용을 파악하였다면 답을 쓰기만 하면 되듯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의 길로 가면 된다.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다

 

풀리지 않는 문제, 능력 밖의 문제를 접하고 불교에 입문하였다. 답은 분명히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성제이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였을 때 틀림 없는 진리이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라 하였을 때 틀림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 들이게 되었다. 설령 초기경전에 초월적인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한번 믿음이 생겨 나면 모두 수용하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고 나서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다. 오늘도 내일도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서 살아 간다. 부처님이 풀리지 않는 문제, 능력 밖 문제에 대한 해법을 주신 것이다. 한때 방황하였으나 부처님께 안식처를 얻었다.

 

 

1.

Yo ca pubbe pamajjitvā

pacchā so nappamajjati,

So ima loka pabhāseti

abbhā muttova candimā.

 

예전에는 방일하여도

지금은 방일하지 않은 자

그는 세상을 비추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2.

Yassa pāpa kata kamma

kusalena pithiyati,

So ima loka pabhāseti

abbhā muttova candimā.

 

저질러진 악한 일을

선한 일로 덮으니

그는 세상을 비추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3.

Yo have daharo bhikkhu

yuñjati buddhasāsane,

So ima loka pabhāseti

abbhā muttova candimā

 

참으로 젊은 수행승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그는 세상을 비추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4.

Disā hi me dhammakatha suantu

Disā hi me yuñjantu buddhasāsane,

Disā hi me te manuje1 bhajantu

Ye dhammamevādapayanti santo.

 

나의 적들은 법문을 들어라.

나의 적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라.

나의 적들은 가르침으로 이끄는

훌륭한 사람들과 사귀어라.

 

 

5.

Disā hi me khantivādāna

avirodhappasasina,

Suantu dhamma kālena

tañca anuvidhīyantu.

 

나의 적들은 인욕을 설하고

원한이 없는 것을 찬양하는 자에게

올바른 때에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따라 수행하라.

 

 

6.

Udaka hi nayanti nettikā

usukārā namayanti tejana

Dāru namayanti tacchakā

attāna damayanti paṇḍitā.

 

관개하는 사람은 물꼬를 트고

활 만드는 자는 화살촉을 바로잡고

목수는 나무를 바로잡고

현자는 자신을 다스린다.

 

 

7.

Daṇḍeneke damayanti

akusehi kasāhi ca,

Adaṇḍena asatthena

aha dantomhi tādinā.

 

어떤 사람들은 몽둥이나

갈구리나 채찍으로 다스린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이

몽둥이 없이 칼 없이 다스려졌네.

 

 

8.

Ahisakoti me nāma

hisakassa pure sato,

Ajjāha saccanāmomhi

na na hisāmi kañcana

 

예전에 살해하는 자였던 나는

이제는 살해하지 않는 자이네.

오늘 나에게 진실한 이름이 있으니

아무도 ‘해치지 않는 자’였네.

 

 

9.

Coro aha pure āsi

agulimālo ti vissuto,

Vuyhamāno mahoghena

buddha saraamāgama.

 

예전에 나는 흉적으로서

앙굴리말라라고 알려졌다.

커다란 폭류에 휩쓸렸으나

부처님께 안식처를 얻었네.

 

(앙굴라말라의 경,M86)

 

 

 

가르침을 듣고 토론하는 것은

 

다음 날 새벽이 되었다. 용화사에서 하루 밤 잠자리는 불편하였지만 잠자기 위해 온 것도 아니고 잘 먹기 위해서 온 것도 아니다. 남자와 여자방이 따로 있어서 남자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스님의 숙소에서 잤다.

 

스님의 숙소에서 2차 차담을 가졌다. 주지스님이 팽주가 되어 차를 나누며 신행과 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렇게 법담을 나누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부처님은 잡담은 하지 말고 법담을 장려 하였다. 그래서 수행자로부터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은 부처님도 장려 하신 사항이다. 이는 테라와다불교 예불문이자 수호경인 위대한 축복의 경(Magalasutta, Sn 2.4)’에서 이렇게 표현 되어 있다.

 

 

santuṭṭhi ca kataññutā,          
K
ālena dhammasavaa           

eta magalamuttama.          

 

존경하는 것과 겸손한 것,

만족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때에 맞추어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stn266)

 

 

Khantī ca sovacassatā           

samaānañca dassana,          
K
ālena dhammasākacchā           

eta magalamuttama.          

 

인내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stn267)

 

 

 

동트기 전 새벽예불

 

동트기 전 어둠에 쌓였을 때 새벽예불이 있었다. 새벽 5시에 시작 되는 예불에 대부분 참가 하였다. 새벽예불이 끝나고 각자 기도시간을 가졌다. 대부분 내려 가고 일부 법우님들이 앉아서 금강경과 천수경을 낭독하고 관음정근 시간을 가졌다. 관음정근 할 때는 108배를 겸하였다.

 

 

 

 

108배를 오랜만에 해 보았다. 이를 운동으로 생각하면 굽혔다 폈다 하는 굴신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신심 깊은 불자들은 항상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을 떠 올리면서 절한다고 한다. 그렇게 신심으로 할 경우 환희심이 난다고 하였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밥상

 

아침 먹을 시간이 되었다. 법우님들이 집에서 싸온 먹거리를 풀어 놓았다. 겉절이 김치가 나오고 멸치볶음, 버섯 등 한상 가득 하였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밥상은 이 세상 어느 것 보다 훌륭했다. 모두들 감탄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접하였다.

 

 

 

 

 

 

 

 

 

 

 

 

정법이 사라졌을 때

 

아침공양을 마치고 산책을 하였다. 절에 뒷길이 나 있는데 팻말에 꿈꾸는 골짜기 가는길이라 하였다. 산 중턱에 올라 가자 전망이 탁 트인 곳이 나왔다. 아래에는 섬진강이 달리고 있고 섬진강 너머에는 굽이굽이 첩첩산중이다.

 

절에 미륵부처님이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미륵보살이다. 미륵보살은 섬진강을 굽어 보고 있다. 56억년 후에 오신다는 미래불 미륵부처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법이 사라지면 암흑의 시대가 계속된다. 그러다 부처가 출현하면 다시 정법시대가 된다. 이는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과거칠불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미륵불의 출현을 예고한다는 것은 언젠가 정법이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정법이 사라졌을 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을 때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까?

 

 

2015-11-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