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독이 든 단지로 더럽힌다고 생각한다면” 부처님과 데바닷따
서의현승려가 돌아 온다는데
서부영화를 보면 악당이 돌아 오는 경우가 있다. 마을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악당이 돌아 온다는 소문에 마을사람들은 술렁인다. 돌아 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에서도 잊혀졌던 인물이 돌아 오려 한다. 그 이름은 서의현 전 총무원장이다. 지난 94년 총무원장 하다 물러난 승려를 말한다.
서의현승려가 돌아 온다고 한다. 이에 한국불교가 술렁이고 있다. 94년 당시 개혁의 축에 섰던 ‘실천승가회’소속의 스님들은 강경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서 한 스님은 “총무원장이 한 것이다.”라 하였다. 서의현승려 복귀의 배후로 현 총무원장스님을 지적한 것이다.
교단자정센터에서도 성명서가 나왔다. 서의현승려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하여 ‘도긴개긴’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외 각종단체와 뜻 있는 인사들은 칼럼과 기고문을 통하여 부당함을 호소 하고 있다. 그러나 현조계종 집행부는 서의현승려의 복권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제바달다에게 불은을 베풀었다고?
서의현승려의 복권과 관련하여 현조계종 종정 진제스님은 제바달다의 비유를 들었다. 스님의 교시에 따르면 원융화합을 이야기하면서 “부처님 당시 제바달다도 대중 앞에 참회하니 용서하고 화합승가에 동참할 수 있도록 불은을 베풀었다.”고 하였다. 과연 이말은 사실일까?
데바닷따는 승가의 분열을 일으킨 자로 유명하다. 자신이 교단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부처님을 여러 차례 살해하려고도 하였다. 이런 사실이 율장소품 ‘참모임분열의 다발’에 기록 되어 있다. 그런데 종정스님이 말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율장은 물론 경장 그 어디에도 부처님이 데바닷따를 용서하고 더구나 승가에 동참시켰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대체 종정스님은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말을 하였을까?
법화경 제바달다품에서
데바닷따와 관련하여 경을 찾아 보았습다. 법화경 제바달다품을 보면 수기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종정스님이 말한 내용과는 일치 하지 않는다. 법화경 제바달다품을 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때의 왕은 지금의 내몸이며, 선인은 제바달다였느니라. 제바달다는 선지식이었으므로, 나로 하여금 6바라밀·자비희사·33상·80종호·금색의 몸과 10력·4무소외와 4섭법과 18불공법과 신통력을 구족하여 등정각을 이루고 널리 중생을 제도하게 하였느니라.
이에 너희 사부대중에게 말하노라. 이 제바달다는 한량없이 오랜 겁을 지나서 반드시 성불하리니, 그 이름은 천왕 여래·응공·정변지·명행족·선서·세간해·무상사·조어장부·천인사·불세존이며, 그 세계의 이름은 천도이리라.
(법화경 제바달다품, 운허스님 옮김)
묘법연화경에서 부처님은 제바달다에게 수기를 주고 있다. 먼 훗날 한세계의 부처가 될 것이라 한다. 하지만 초기불교경전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
부처님을 살해하려 한 데바닷따
빠알리 율장소품에 ‘참모임분열의 다발’이 있다. 경에 따르면 데바닷따는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눈이 어두워 교단의 지도자가 되고자 한다. 아자따삿뚜에게 접근하여 신통력으로 마음을 사로 잡은 후 왕이 되도록 교사한다. 그래서 “왕자여, 그대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십시오. 나는 세존을 죽이고 부처님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아자따삿뚜는 데바닷따의 교사로 부왕 빔비사라왕을 왕권을 탈취하였다. 데바닷따는 교권을 탈취하고자 부처님을 살해 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데바닷따는 가장 먼저 사람을 보내서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 앞에서 어떤 흉악한 무기도 무력화 되었다. 오히려 부처님에게 교화되어 진리의 눈을 뜨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데와닷따는 직접 살해 하기 위하여 깃자꾸따산에서 산책을 하던 부처님을 바위를 던져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무사하였다. 다만 돌조각에 맞아서 발에 피가 났을 뿐이다.
데바밧따의 살해 계획은 실패로 돌아 갔다. 마지막으로 포악한 코끼리를 풀어 죽이려 하였다. 하지만 부처님은 자애의 마음을 가득채워 코끼리를 길들였다. 그래서 데바닷따의 살해 계획은 모두 실패로 돌아 갔다.
승가분열을 조장하는 다섯 가지 엄격한 계행
데바닷따의 쿠데타계획은 실패로 돌아 갔다. 다음으로 획책한 것이 승가분열에 대한 것이다. 조화로운 모임을 상징하는 승가를 분열하여 화합을 깨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다섯 가지 엄격한 계행에 대하여 요구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숲속에 거주해야 합니다.
마을에 들어가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2)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탁발식을해야 합니다.
초대에 응한다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3)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분소의를 착용해야 합니다.
장자의 옷을 착용한다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4)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나무밑에서 자야 합니다.
지붕밑으로 간다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5)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어류와 육류를 먹지 말아야 합니다.
어류와 육류를 먹는다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율장소품 참모임분열의 다발, 데바닷따의 음모)
이와 같은 요구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만 두어라”하며 허용하지 않았다. 다만조건부로 하여 “원한다면, 숲속에 거주해도 되고, 원한다면 마을에 거주해도 좋다.”라고 하였다. 이런 조건부 허용은 거주와 탁발과 분소의에 해당된다. 나무밑에서 자는 것에 대해서는 팔월만 허용하였다. 또한 어류와 육류와 관련하여 “보지 못했고, 듣지못했고, 의혹이 없는 그러한 세 가지 청정을 지닌 물고기나 고기라면 허용한다.”라고 하였다.
“선한 자가 선을 행하는 것은 쉽다”
부처님은 데바닷따에게 승가를 분열하고 파괴하는 것에 대하여 엄중하게 경고하였다. 그럼에도 데바닷따는 부처님과 별도로 승가를 만들어 포살과 자자를 행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Sukaraṃ sādhunā sādhuṃ,
sādhuṃ pāpena dukkaraṃ;
Pāpaṃ pāpena sukaraṃ,
pāpamariyehi dukkara”
[세존]
“선한 자가 선을 행하는 것은 쉽다.
악한 자가 선을 행하는 것은 어렵다.
저열한 자가 악을 행하는 것은 쉽다.
고귀한 자가 악을 행하는 것은 어렵다.”
(율장소품 참모임분열의 다발, 데바닷따의 음모)
첫 번째 구절에서 “선한 자가 선을 행하는 것은 쉽다(Sukaraṃ sādhunā sādhuṃ)”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우다나 주석에 따르면 “선한 자는 올바로 실천하는 자이고 선을 행하는 것이란 자신과 타인에게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이다. 싸리뿟따와 같은 제자나 연각불이나 올바로 깨달은 님이나 세간의 다른 선한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에게 안녕과 이익을 주는 선한 일을 쉽게 한다.(UdA.318)”라고 설명되어 있다.
두 번째 구절 “악한 자가 선을 행하는 것은 어렵다(sādhuṃ pāpena dukkaraṃ)”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데바닷따 등의 악한사람들으 자신과 타인에게 안녕과 이익을 주는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UdA.318)”라 하였다.
선한 자는 자신과 타인을 위해 선을 행하기가 쉽다고 하였다. 이는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친구로 여기기 때문에 타인도 친구로 여긴다. 그래서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고귀한 자가 악을 행하는 것은 어렵다(pāpamariyehi dukkara)”라 하였을 것이다.
악한 자는 자신과 타인에 대하여 악을 행하는 것이 쉽다고 하였다. 이는 자신을 적으로 여기기 때문에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도 서슴없이 한다. 자신을 적으로 여긴다면 타인도 적으로 여길 것이다. 그래서 “저열한 자가 악을 행하는 것은 쉽다.(Pāpaṃ pāpena sukaraṃ)”라 하였을 것이다.
새내기 수행승들 오백명을 교사하여
데바닷따는 다섯 가지 엄격한 계율을 부처님이 받아 들이지 않는다고 하여 부처님을 비방하였다. 또한 사정을 잘 모르는 새내기 수행승들 오백명을 교사하여 가야싸싸 산으로 들어 가서 별도의 교단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승가의 분열과 파괴 공작으로 보고 상수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를 가야싸싸 산에 파견하였다.
사리뿟따는 데바닷따가 잠들었을 때 새내기 수행승들 오백명에게 설법하였다. 경에 따르면 ‘예지의 기적’에 대한 교계법문이라 한다. 목갈라는 ‘신통의 기적’에 대한 교계법문을 하였다.
예지의 기적과 신통의 기적은 디가니까야 ‘께왓따의 경(D11)”에 실려 있다. 먼저 예지의 기적을 보면 “께밧따여, 그리고 또한 예지의 기적이란 어떤 것입니까? 께밧따여, 세상에 수행승이 ‘그대의 마음은 이와 같고, 그대의 마음은 이러한 것이고, 그대의 마음은 이러하다.’라고 다른 뭇삶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마음의 작용을 읽고, 사유를 읽고, 숙고를 읽는 것입니다. (D11)” 라 되어 있다.
신통의 기적에 대한 것을 보면 “께밧따여, 신통의 기적이란 무엇입니까? 세상에 수행승이 하나에서 여럿이 되고 여럿에서 하나가 되고,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자유로운 공간처럼 장애 없이 담을 통과하고 성벽을 통과하고 산을 통과하고, 물속처럼 땅속을 드나들고, 땅 위에서처럼 물 위에서도 빠지지 않고 걷고, 날개 달린 새처럼 공중에서 앉은 채 날아다니고, 그는 손으로 이처럼 큰 신비를 지니고 이처럼 큰 능력을 지닌 달과 해를 만지고 쓰다듬고, 하느님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육신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다양한 신통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D11)”라 되어 있다.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새내기 수행승들에게 주로 신통에 대한 법문을 하고 훈계를 했다. 왜 이런 법문을 하였을까? 그것은 데바닷따가 신통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바닷따의 신통은 이득과 명예를 추구하는 순간 사라졌다. 그런 신통도 세속적인 신통에 불과 하였다. 그러나 두 상수제자가 설하는 신통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신통으로서 데바닷따의 신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오백명의 수행승을 데려 왔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데바닷따는 경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 뜨거운 피를 입에서 쏟아 냈다”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런 표현은 산자야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볼 수 있다.
부처님이 되고자 한 데바닷따
데바닷따는 부처님이 되고자 하였다. 한 세계에서는 한부처님만이 있음에도 교권을 탈취하여 부처님 자리에 앉고자 한 것이다. 한세계에 두 명의 부처님이 있을 수 없다. 과거칠불이 깨달은 것을 보면 모두 연기법이다. 따라서 정법이 살아 있는 한 한세계에는 한부처님만이 있게 된다.
데바닷따는 부처님을 죽이려 하였고 교단을 분열시켜 부처님이 되고자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데바닷따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데바닷따는 나를 모방하는 비열한 자로서 죽을 것이다”라 하였다. 그리고 “데바닷따는 나쁜 곳에 떨어지고, 지옥에 떨어져, 한 우주기 동안 지나도 제도 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은 법화경 제바달다품에서 보는 것과 전혀 다르다. 부처님은 데바닷따를 용서하지도 않았고 수기도 주지 않았다. 더구나 종종스님이 “부처님 당시 제바달다도 대중 앞에 참회하니 용서하고 화합승가에 동참할 수 있도록 불은을 베풀었다.”라고 말한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다.
“한 우주기 동안 지나도 제도 될 수 없다”
율장소품에 따르면 데바닷따는 “한 우주기 동안 지나도 제도 될 수 없다. (kappaṭṭho atekiccho)”라고 하였다. 여기서 한 우주기라 하는 것은 깝빠(kappa)를 말한다. 우리말로 ‘일겁’에 해당된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우주는 일겁마다 주기적으로 파괴된다. 이를 겁화라 하는데 불의 의해서 파괴 되는 우주는 색계초선천까지이다. 이렇게 본다면 데바닷따는 우주가 파괴 될 때 까지 아비지옥에 있게 된다.
부처님은 데바닷따와 같이 이익과 명성과 악한 욕망에 정복된 자에 대하여 한 우주기 동안 지나도 제도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데바닷따는 치유될 수 없는 괴로운 곳, 지옥에 떨어져, 한 우주기 동안 지낼 운명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치유될 수 없는(atekiccho)”이라는 말은 “제도될 수 없는”이라는 말과 같다.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에 의해서 막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지옥에 태어나는데는 치유가 없기 때문에 치유할 수 없는 것이다.(ItA.II.99)”라고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을 살해 하려 하고 교단을 분열시켰던 데바닷따는 아비지옥에 떨어져 한 우주기 동안 제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승경전 법화경에서는 수기를 주어 미래의 부처가 되리라 하였다. 법화경의 방편품을 보면 “아이들 장난으로 풀 나무 붓이거나 혹은 꼬챙이로 부처님 모양 그린 이들 이와 같은 여러 사람들 공덕을 점점 쌓아 큰 자비심을 갖추어 모두 성불하였나니”라는 게송이 있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공덕으로 언젠가는 성불하리라고 보는 것이 대승보살사상이다. 데바닷따가 비록 악인이었지만 부처님과 맺은 인연이 있기 때문에 그 인연 공덕으로 언젠가 성불하게 되리라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법화경 제바달다품은 대승보살사상이 잘 구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오역죄를 저지르면
초기경전에서 데바닷따는 구원받지 못하였다. 이는 오역죄에 따른 것이다. 오역죄는 1)어머니를 살해하는것, 2) 아버지를 살해하는것, 3) 아라한을 죽이는것, 4) 악심을 품고 부처님의 몸에서 피가나게 하는것, 5)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오역죄를 저지르면 아비지옥에 태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오역죄 중에서 부처님의 몸에 피가 나게 하는 것과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은 데바닷따와 관계가 있다. 그래서 아비지옥에 떨어져 우주가 파괴 될 때 까지 제도되지 못한 것으로 초기경전에서는 기록 되어 있다.
게송으로 그 뜻을 더욱더 분명하게
데바닷따는 대승경전에서에서와 같이 구원 되지 않았고 종정스님이 “부처님 당시 제바달다도 대중 앞에 참회하니 용서하고 화합승가에 동참할 수 있도록 불은을 베풀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율장소품에서 부처님은 데바닷따에 대하여 “세 가지 악한 상태에 마음이 사로잡힌 데바닷따는 치유될 수 없는 괴로운 곳, 지옥에 떨어져 한 우주기 동안 지낼 운명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그 뜻을 더욱더 분명하게 하였다.
[세존]
1)
Mā jātu koci lokasmiṃ,
pāpiccho udapajjatha;
Tadamināpi jānātha,
pāpicchānaṃ yathāgati.
“누구도 악한 욕망을 품고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악한 욕망을 품은 자의
그와 같은 운명을 알게 되리라.
2)
Paṇḍitoti samaññāto,
bhāvitattoti sammato;
Jalaṃva yasasā aṭṭhā,
devadattoti me sutaṃ.
현자라고 여겨지고
자기를 닦은 자라고 간주되어,
데바닷따는 그 명성으로 인해
불타오르듯, 널리 유명해졌다.
3)
So pamādaṃ anuciṇṇo,
āsajja naṃ tathāgataṃ;
Avīcinirayaṃ patto,
catudvāraṃ bhayānakaṃ.
그는 여래를 모욕하고
동등하다고 맞서
두려운 아비지옥의
네 문에 들어섰다.
4)
Aduṭṭhassa hi yo dubbhe,
pāpakammaṃ akrubbato;
Tameva pāpaṃ phusati,
duṭṭhacittaṃ anādaraṃ.
악업을 짓지 않고
미움을 여읜 님을 해치려는 자는
마음을 증오로 채우고
존경을 잃고 악에 떨어진다.
5)
Samuddaṃ visakumbhena,
yo maññeyya padūsituṃ;
Na so tena padūseyya,
bhesmā hi udadhī mahā.
바다를 독이 든 단지로
더럽힌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 수 없다.
그것보다 바다가 크기 때문이다.
6)
Evameva tathāgataṃ,
yo vādenupahiṃsati;
Samaggataṃ santacittaṃ,
vādo tamhi na rūhati.
여래, 올바로 가신 님,
고요한 님을
그릇된 주장으로 해치고자 하여도
그 주장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7)
Tādisaṃ mittaṃ krubbetha,
tañca sevetha paṇḍito;
Yassa maggānugo bhikkhu,
khayaṃ dukkhassa pāpuṇe
그 님을 벗으로 삼아
현자라면 그를 섬기리.
수행승은 그의 길을 따라
괴로움의 소멸을 얻는다.
(율장소품 참모임분열의 다발, 데바닷따의 음모)
“바다를 독이 든 단지로 더럽힌다고 생각한다면”
부처님은 데바닷따를 용서하지 않았다. 악한 욕망을 품고 부처님과 맞서려 하였을 때 아비지옥에 떨어졌다고 하였다. 그런데 다섯 번째 게송을 보면 “바다를 독이 든 단지로 더럽힌다고 생각한다면(Samuddaṃ visakumbhena, yo maññeyya padūsituṃ)”이라 하였다. 바다는 부처님을 말하고 독은 데바닷따를 뜻한다.
악인 데바닷따가 아무리 교단을 빼앗으려 해도 그 역량은 바다에서 독이 든 단지와 같다는 것이다. 독이 든 단지를 바다에 풀었을 때 독의 효과는 없다. 악인 데받닷따가 부처님을 살해 하려 하고 교단을 분열시켜려 하였지만 모두 무위에 그친 것은 부처님이 바다와 같은 존재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데바닷따가 제도 되었다는 이야기는 초기경전에 보이지 않는다.
2015-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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