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의 가르침

“저희들은 닷새마다 밤을 새며 법담을 나눕니다”부처님도 장려 하신 담마토크

담마다사 이병욱 2015. 7. 8. 18:44

 

저희들은 닷새마다 밤을 새며 법담을 나눕니다부처님도 장려 하신 담마토크

 

 

꼬삼비에서 아담마와딘(adhammavadin)’에 의하여 승단의 분열이 일어났다. 이에 부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습하려 하였으나 이 어리석은 자들은 몽매하다, 이 자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라고 말씀 하시고 꼬삼비를 떠났다.

 

부처님은 비법을 설하는 자들을 멀리 하였다. 진리 아닌 것, 가르침 아닌 것을 설하는 자들은 부처님의 제자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꼬삼비를 떠나 사왓티를 향해 떠났다. 도중에 발라까로니까(Bālakaloaka)’마을을 들렀다. 그곳에는 바구(Bhagu)존자가 있었다.

 

스리랑카의 세족식(洗足式)

 

바구존자는 멀리서 부처님을 오시는 것을 보자 자리를 마련하였다. 부처님을 맞이 하는 제자의 모습에 대하여 율장대품에서는 자리를 마련하고 발 씻을 물과 발받침과 발걸레를 준비하여 맞이히고 발우와 옷을 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 당시에는 신발을 신지 않았음을 말한다. 맨발로 유행한 것이다. 그래서 발에 흙이 묻을 수밖에 없다. 씻을 수 있는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발 씻을 물을 준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발 씻을 물이 준비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부처님의 발을 씻어 드려야 할까? 수 년전 법보신문에 연재된 기사를 보았다. 스리랑카불자들이 빅쿠의 발을 씻어 주는 장면에 대한 것이다. 나이 든 여성불자가 장로인듯한 나이 지긋한 빅쿠의 발을 씻어 주는 장면이다.

 

또 하나의 사진을 보았다. 어느 재가불자가 스리랑카 여행가서 찍은 사진이다. 여행기 스리랑카의 사찰에는 부엌이 없다.(2012-10-10)’라는 글에서 유심히 본 것은 빅쿠의 발을 씻겨 주는 장면이다.

 

스리랑카에는 청식제도가 있는데 이는 빅쿠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공양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진을 보니 남자불자가 빅쿠의 발을 씻어 주고 있다. 마치 타종교의 세족식을 보는 것 같다. 이에 대하여 글을 올린 이는 세족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다.

 

 

한편 스리랑카에서는 신도 집에 초대받아 가면, 현관 입구에서 그 집의 주인 남자가 직접 발을 씻어준다. 맨발로 수행하는 스님들이 많고, 비록 샌들을 신었지만 먼지투성이기 때문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물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그들의 오랜 관습이다. 이것은 그들이 수행자를 맞이하는 예의이자 성스러운 의식이다. 이런 세족의식(洗足儀式)을 받을 때, 과연 자신이 이 분들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을만한가를 반성하게 되고, 더욱 더 수행 정진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스리랑카의 사찰에는 부엌이 없다, 2012-10-10)

 

 

 

 

스리랑카에서는 맨발로 다니는 스님들이 많다고 한다. 집으로 초청하여 공양을 할 때 먼지투성이의 발을 씻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초청한 주인이 직접 빅쿠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이다. 이런 세족식은 옛날부터 전해 오는 아름다운 관습이라 한다. 그러나 율장대품에 따르면 이와 다르다.

 

부처님은 손수 발을 씻었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부처님은 손수 발을 씻었다. 이와 관련하여 율장대품에서는 세존께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 두 발을 씻었다. (Nisīdi bhagavā paññatte āsane, nisajja kho bhagavā pāde pakkhālesi.)”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이 스스로 발을 씻은 것이다. 이는 스리랑카 관습과는 다른 것이다.

 

부처님은 발을 씻고 나서 축원의 말을 해 준다. 그것은 나는 그대가 잘 지내기를 바란다. 나는 그대가 평안하기를 바란다. 나는 그대가 탁발하며 지내는데 어려움이 없기를 바란다. (kacci, bhikkhu, khamanīya; kacci yāpanīya, kacci piṇḍakena na kilamasī)”라는 말이다.

 

우유와 물처럼 조화롭게

 

부처님은 가까운 곳에 있는 아누룻다와 난디야, 낌발라 존자가 있는 곳을 찾아 가신다. 역시 이들 존자들은 발 씻을 물을 준비해 놓는다. 부처님은 손수 발을 씻고 축원의 말을 해 준다. 그런데 부처님은 세 명의 수행승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Kacci pana vo anuruddhā samaggā sammodamānā avivadamānā khīrodakībhūtā aññamañña piyacakkhūhi sampassantā viharathā

 

[세존]

아눗룻다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서로 화합하고 서로 감사하고 다투지 않고 우유와 물처럼 조화롭게 서로 사랑스런 눈빛으로 대하며 지내기를 바란다.”

 

(율장대품, 10장 꼬삼비다발, Pālileyyakagamanakathā)

 

 

부처님은 서로 화합할 것을 강조 하였다. 이는 꼬삼비에서 승단분열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유와 물처럼 조화롭게(avivadamānā khīrodakībhūtā)”라 하였다. 여기서 ‘khīrodakībhūtā’‘khīra(milk)+odakī(water)+bhūtā(existed)’의 형태이다. 우유와 기름처럼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avivadamānā khīrodakībhūtā의 뜻은 우유와 물처럼 조화롭게가 된다.

 

서로 사랑스런 눈빛으로

 

기름과 물은 섞이지 않는다. 물과 우유는 섞입니다. 부처님 제자들의 모임인 상가에서는 출신별로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치 우유와 물이 함께 있는 것과 같았다. 이렇게 다양한 출신과 다양한 성향으로 구성된 상가에서 필요한 덕목은  조화이다. 이와 관련된 말이 화합(samagga)’서로 감사하는 것(sammodamānā)’다투지 않음(avivadamānā)’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서로 사랑스런 눈빛으로(piyacakkhūhi)”라고 하였다. 마치 연인이 눈을 마주 치는 것처럼 살라는 것이다. 이렇게 산다면 싸움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는가

 

어떤 모임에서든지 조화가 깨지면 분열하게 되어 있다. 물과 우유처럼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 살지만 누군가 돌출행위를 하면 조화가 일시에 깨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조화롭게 살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리더격인 아누룻다는 부처님에게 이렇게 말한다.

 

 

“Idha mayha, bhante, eva hoti – ‘ lābhā vata me, suladdha vata me, yoha evarūpehi sabrahmacārīhi saddhi viharāmī ’’ ti. Tassa mayha, bhante, imesu āyasmantesu metta kāyakamma paccupaṭṭhita āvi ceva raho ca; metta vacīkamma… metta manokamma paccupaṭṭhita āvi ceva raho ca. Tassa mayha, bhante, eva hoti –

 

“ ‘yanūnāha saka citta nikkhipitvā imesayeva āyasmantāna cittassa vasena vatteyya ’ nti. So kho aha, bhante, saka citta nikkhipitvā imesayeva āyasmantāna cittassa vasena vattāmi. Nānā hi kho no, bhante, kāyā, ekañca pana maññe citta” nti.

 

[아누룻다]

세존이시여, 여기 저는 이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와 같이 청정한 벗들과 함께 사는 것은 참으로 나에게 이로우며 참으로 나에게 아주 유익한 일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여기 존자들을 향해 여럿이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자애로운 신체적 행위를 일으키며, 여럿이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자애로운 언어적 행위를 일으키며, 여럿이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자애로운 정신적 행위를 일으킵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저에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자신의 마음을 버리고 이 존자들의 마음에 따라 살면 어떨까?’ 세존이시여, 그래서 저는 자신의 마음을 버리고 이 존자들의 마음에 따라 살고 싶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몸은 여럿이지만 마음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율장대품, 10장 꼬삼비다발, Pālileyyakagamanakathā)

 

 

아누룻다가 있는 모임은 매우 조화로운 곳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저희들의 몸은 여럿이지만 마음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Nānā hi kho no, kāyā, ekañca pana maññe citta)”라는 구절이 말해준다. 몸은 다르지만 하나로 숨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름 아닌 일심동체(一心同體)’이다.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져 있음을 말한다.

 

일심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자애로운 마음(metta)’을 내는 것이다. 이는 여럿이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자애로운 마음을 내는 것이라 하였다. 그것도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내는 것이라 하였다. 과연 이런 조화로운 모임이 이 세상에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상가에 있었다는 것이다.

 

자애의 마음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율장대품에 따르면 나는 자신의 마음을 버리고 이 존자들의 마음에 따라 살면 어떨까? (yanūnāha saka citta nikkhipitvā imesayeva āyasmantāna cittassa vasena vatteyya)”라 하였다.

 

자신의 마음을 버렸을 때 조화로워질 수밖에 없다. 조화가 깨지는 것은 아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을 놓아 버리고 타인의 마음을 서로 따라 갈 때 한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희들은 닷새마다 밤을 새며 법담을 나눕니다

 

부처님은 아누룻다 일행을 칭찬하였다. 그리고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할 것을 말씀 하셨다. 이에 아누룻다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하자 부처님이 어떻게 해서 그대들은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며 정진하며 지내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에 아누룻다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 Idha, bhante, amhāka yo pahama gāmato piṇḍāya paikkamati so āsana paññapeti, pādodaka pādapīha pādakathalika upanikkhipati, avakkārapāti dhovitvā upaṭṭhāpeti, pānīya paribhojanīya upaṭṭhāpeti. Yo pacchā gāmato piṇḍāya paikkamati, sace hoti bhuttāvaseso, sace ākakhati bhuñjati, no ce ākakhati appaharite vā chaḍḍeti. Appāake vā udake opilāpeti. So āsana uddharati, pādodaka pādapīha pādakathalika paisāmeti, avakkārapāti dhovitvā paisāmeti, pānīya paribhojanīya paisāmeti, bhattagga sammajjati. Yo passati pānīyaghaa vā paribhojanīyaghaa vā vaccaghaa vā ritta tuccha so upaṭṭhāpeti. Sacassa hoti avisayha, hatthavikārena dutiya āmantetvā hatthavilaghakena upaṭṭhāpema, na tveva maya, bhante, tappaccayā vāca bhindāma. Pañcāhika kho pana maya, bhante, sabbaratti dhammiyā kathāya sannisīdāma. Eva kho maya, bhante, appamattā ātāpino pahitattā viharāmā ’’ ti.

 

 

[아누룻다]

세존이시여, 저희들 가운데 가장 먼저 마을에서 탁발하여 돌아오는 자가 자리를 마련하고, 음료수와 세정수를 마련하고 남은 음식을 넣을 통을 마련합니다.

 

 마을에서 탁발하여 맨 나중에 돌아오는 자는 남은 음식이 있으면, 그가 원한다면 먹고,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풀이 없는 곳에 던지거나 벌레 없는 물에 가라앉게 합니다.

 

 그는 자리를 치우고 음료수 단지나 세정수 단지나 배설물통이 텅 빈 것을 보는 자는 그것을 깨끗이 씻어내고 치웁니다. 만약 그것이 너무 무거우면, 손짓으로 두 번 불러 손을 맞잡고 치웁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그것 때문에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닷새마다 밤을 새며 법담을 나눕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저희들은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있습니다.”

 

(율장대품, 10장 꼬삼비다발, Pālileyyakagamanakathā)

 

 

아누룻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부처님당시 빅쿠들의 일상을 알 수 있다. 특히 청소에 대한 것을 보면 한마음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먼저 본 사람이 치우는 것이다. 그것도 말 없이 치우는 것이다. 다만 들기가 무거우면 손짓으로 불러 함께 치운다고 하였다.

 

정진과 관련하여 아누룻다는 법담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저희들은 닷새마다 밤을 새며 법담을 나눕니다.(Pañcāhika kho pana maya, bhante, sabbaratti dhammiyā kathāya sannisīdāma)”라 하였다. 5일 마다 담마에 대하여 토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밤을 세워(sabbaratti)토론 한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dhamma)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토론하는 것을 말한다.

 

교학과 경전을 무시하는 듯한 선종

 

숫따니빠따 위대한 축복의 경에서 부처님은 법에 대하여 토론 하는 것을 장려 하였다. 이는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samaānañca dassana Kālena dhammasākacchā)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수행자가 잡담을 해서는 안되지만 담마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토론 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것도 율장대품에 따르면 닷새마다 밤을 새며 토론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가르침을 기억하고 새기고 토론하는 것은 빅쿠들의 주요한 일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국불교에서 교학과 경전을 무시하는 전통과는 매우 비교 된다.

 

정각원 토요법회를 인터넷으로 보았다.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불교대학 교수인 종호스님의 법문 (2013 6 8 정각원 토요법회)을 들어 보면 교리와 경전에 대한 무용론을 보는 것 같다. 스님은 마라톤을 예로 들며 아무리 이론적으로 많이 알아 보았자 뛰어 보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아무리 많이 알아도 깨달아 보아야 알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선사의 깨달음에 대한 법문을 들어 보면 교리나 가르침에 대하여 아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일까 선종에서는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을 이야기하고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을 이야기하는지 모른다.

 

부처님도 장려 하신 담마토크

 

부처님은 토론을 장려 하셨다. 부처님도 토론자이었다. 외도와 토론에서 굴복시키는 장면을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제자들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또 기억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되새기곤 했을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았거나 잘못 들었거나 의미가 불분명한 것에 대해서는 토론을 통하여 익혀 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담마에 대한 토론을 장려한 것이라 본다.

 

빅쿠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해 내려 하였던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 본다. 이는 사띠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사띠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기억이다. 여기서 기억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라 본다. 이는 새김의 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힘이라 한다. (A5.14)”라는 경전적 근거도 있다. 사띠(새김)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 제자들은 가르침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되새기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담마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그것도 밤을 새워 토론 한 것이다. 그 외는 침묵을 유지하였다. 이에 대한 말이 sannisīdāma’이다. 여기서 sannisīdāma‘to be quiet’의 의미이다. 담마이외의 말은 하지 않는 것이다. 잡담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번역에서는 “dhammiyā kathāya sannisīdāma”에 대하여 sannisīdāma에 대한 번역이 빠져 있다. 이 구문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법담을 나눕니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완전히 다 번역하면 법담을 나누거나 침묵합니다로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2015-07-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