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와다 빅쿠들은 돈을 받지 않는다
올린 글은 얼마나 영향력 있을까? 상당한 영향이 있다고 본다. 누군가는 꼼꼼히 읽어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입력하는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누구에겐가는 받아 들이기에 따라 영향을 받을 것임에 틀림 없다.
이전에 글을 쓸 때는 별 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날그날 느낌에 따라 주제가 정해지고 미리 구상한 시나리오대로 썼다. 그러다 보니 마구 쓴 것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보고 있는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잘 아는 사람이 지금 보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세 번째 강독회에서
휴휴재 니까야강독 모임을 가졌다. 매월 셋째 주 토요일저녁이므로 이번에 세 번째이다. 서로 돌려 가며 읽는 것에 의미를 두었으나 자료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준비된 프린물을 중심으로 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삼귀의와 자애경낭송에 이어 맛지마니까야 ‘가르침의 상속에 대한 경(M3)’을 돌아 가며 낭독하였다.
부처님은 재물의 상속자가 아닌 가르침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탐욕과 성냄 등 8쌍으로 된 16가지 오염원을 소멸 시켜야 한다. 이에 대하여 ‘중도’로서 설하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팔정도’이다. 수행을 통하여 단계적으로 오염원을 소멸 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부처님 가르침은 ‘돈오점수’라 볼 수 있다.
처음으로 참석하신 법우님 세 분이 오셨다. 모두 여성으로서 나이가 육십이 넘어 보였다. 그럼에도 먼 곳까지 가파른 계단을 올라 와서 대면하게 되었다. 좋은 인연이라 본다. 비록 단 한번에 그치고 말 인연일지라도 법에 대하여 논의하였다면 이전에 쌓은 공덕의 결과라 본다.
세 분 중의 한분은 미얀마에서 수행하였다고 한다. 여성임에도 진리에 대한 열정은 젊은이나 스님 못지 않다. 이럴 때 나이는 숫자에 불과 하다고 할 것이다. 법우님에 따르면 미얀마빅쿠들은 돈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하나의 사례를 들고 있다.
어느 한국분이 오백만원을 빅쿠에게 보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금과 은을 받지 않는 계율에 따라 놓고 간 돈에 대한 대중공사가 선원에서 열렸다고 한다. 격론 끝에 오후에 사용될 물병을 구입하는 데 사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하였다. 오백만원이 한국에서는 적은 금액이지만 미얀마에서는 큰 돈이기 때문에 수 년간 물을 구입하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미얀마빅쿠들은 돈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도 탁발은 가능할까?
돈을 받지 않는 빅쿠들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부처님이 살던 방식 그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돈을 일체 받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또 탁발에 의존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탁발은 가능한 것일까?
한국불교에서는 탁발을 금지하고 있다. 수행자의 ‘위의(威儀)’를 상실하기 때문에 금하는 것이라 한다. 반대로 미얀마 등 테라와다 불교국가에서는 탁발의 전통이 살아 있다. 그런데 탁발하는 모습이 오히려 수행자의 위의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빌어먹는 다는 것은 무소유와 청정함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런 탁발의 전통은 출가와 재가의 공생관계를 의미하고 서로 공덕을 쌓는 행위이기도 하다. 가급적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테라와다에서 탁발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런 행위이다.
법우님에 따르면 한국에서도 최근 탁발의 전통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호두마을에서 탁발이 그것이다. 검색해 보니 ‘천안 호두마을 위빳사나 수행처에서 되살린 초기불교 탁발전통’이라는 제목과 함께 빅쿠들이 탁발하는 장면이 소개 되어 있다.
추운 겨울 날씨임에도 맨발로 발우를 들고 마을로 탁발나가는 모습을 보니 남방 테라와다 불교국가의 모습 그대이다. 한국스님들이 입는 회색승복과 달리 테라와다식 빨간 가사를 입고 눈을 아래로 내려 뜨며 걷는 모습이 남방과 다를 바 없다. 눈이 내리거나 영하의 날씨에서도 과연 맨발로 다닐 수 있는 것일까? 계행을 지키고자 한다면 부처님 가르침대로만 살고자 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인다.
호두마을에서는 빅쿠상가에 의하여 탁발이 시행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서울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법우님에 따르면 호두마을의 빅쿠상가의 빅쿠가 서울에서 머물면 탁발을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탁발을 하는 것일까? 더구나 서울에는 기독교세가 매우 강하고 불교세는 미약한데 가능한 것일까?
서울에서도 부처님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탁발을 한다고 하였다. 가사를 입은 빅쿠가 발우를 들고 길거리에 나가서 가게를 차례로 돈다는 것이다. 다만 가게에 들어 가는지 알 수 없다. 아마 밖에서 조용히 서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돈으로 주면 사양한다고 하였다. 먹을 것 이외에는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테라와다 빅쿠들은 돈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스님들 타락에 일조하는 재가자들
부처님의 출가제자들은 금과 은을 받지 않는다. 이는 구족계라 불리우는 비구계에서도 계율로서 정해져 있다. 부처님도 “싸끼야의 아들을 따르는 수행승들에게 금과 은은 허용되지 않습니다.(S42.10)”라 하였다. 부처님은 “나는 금과 은을 허용해도 좋을 어떤 이유나 구입해야 할 어떠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S42.10)”라 하였다. 빅쿠들이 금과 은을 가지고 있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금과 은을 갖는 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금과 은은 요즘 말로 돈과 같은 것이다. 빅쿠들에게 금과 은을 준다는 것은 돈을 주는 것과 같다. 그런데 한국의 불자들은 스님들에게 돈봉투를 준다. 이뿐만이 아니다. 스님들이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과연 율장정신에 맞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교계를 잘 아는 이에 따르면 신도들이 사 준다는 것이다. 스님을 부처님 여기듯 하는 돈 많은 보살들이 개인적으로 돈도 주고 자동차도 사 준다고 하였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타락하는데 있어서 스님들이 계행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것 못지 않게 더 큰 문제는 재가자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스님을 존경한다면 계행을 지키도록 해야 하나 거꾸로 계행을 어기게 만드는데 일조 하고 있음을 말한다.
스님들이 돈을 만지면 타락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타락할 수밖에 구조로 되어 있는 것 같다. 탁발의 전통이 사라졌으므로 무소유와 청정을 실현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이는 금과 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래서일까 테라와다불교에서는 한국의 스님들에 대하여 빅쿠로 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단지 머리깍고 승복을 입은 재가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하였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지 일백년이 되었을 때
부처님은 금과 은을 받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준엄한 명령과 같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열반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부 빅쿠들은 금과 은을 받기 시작하였다. 베살리에서 진보적 빅쿠들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율장소품에 ‘칠백결집의 다발(Sattasatikakkhandhaka)’이라는 제목으로 기록 되어 있다. 이른바 십사논쟁에 따른 이차결집을 말한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지 일백년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베살리의 밧지족 수행승들이 열 가지 사항을 제기 하였다. 율장소품에 실려 있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ppati siṅgiloṇakappo, kappati dvaṅgulakappo, kappati gāmantarakappo, kappati āvāsakappo, kappati anumatikappo, kappati āciṇṇakappo, kappati amathitakappo, kappati jaḷogiṃ pātuṃ, kappati adasakaṃ nisīdanaṃ, kappati jātarūparajatanti.
1) 소금뿔 휴대와 관련된 실천은 허용된다.
2) 손가락 두 마디와 관련된 실천은 허용된다.
3) 마을 안과 관련된 실천은 허용된다.
4) 처소와 관련된 실천은 허용된다.
5) 승인과 관련된 실천은 허용된다.
6) 관례와 관련된 실천은 허용된다.
7) 젓지 않은 버터밀크는 허용된다.
8) 미발효술을 마시는 것은 허용된다.
9) 테두리 없는 좌구는 허용된다.
10) 금과 은은 허용된다.
(Sattasatikakkhandhaka-칠백결집의 다발, 율장소품)
열가지 사항에 대하여 한문으로도 번역되어 있고 한글로도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종래의 한역은 난해하기 그지없고, 그에 대한 한글역은 더욱 어렵다.(1318번 각주)”라 하였다. 아마 여러 가지 언어로 중역되고 더구나 개인의 견해가 추가 되어서 일 것이다. 이럴 경우 원문을 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 할 것이다.
열가지 사항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dasa vatthūni’ 라 하고, 한자어로 ‘십사(十事)’라 한다. 십사 중에 열번 째 항을 보면 “금과 은은 허용된다.(kappati jātarūparajatanti)”라 하였다. 이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이다. 부처님은 어떤 경우에도 금과 은을 받지 말라고 하였고, 더구나 금과 은을 받아아야 할 아무런 필요를 느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진보적인 빅쿠들은 금과 은을 받기로 결의한 것이다.
베살리 빅쿠들의 십사는 제2차 결집의 원인이 되었다. 율장소품에 따르면 야사 깔란다까뿟따(yasa kākaṇḍakaputta)라는 빅쿠가 베살리에 도착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싸끼야의 아들들에게 금과 은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야사 깔란다까뿟따 빅쿠는 여러 나라를 유행하다가 베살리에 도착하였다. 어느 빅쿠들의 처소에 머물렀는데 전에 보지 못하던 장면을 목격하였다. 그것은 빅쿠들이 재가자들로부터 금과 은을 받는 장면이다. 이에 대하여 야사는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으로 잘못된 것이라 강력하게 성토하였다. 그리고 재가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싸 깔란다까뿟따]
“벗들이여, 참모임에 일 까하빠나, 반 까하빠나, 사분지일 까하빠나, 일 마싸까를 보시 하지 마시오.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에게 금과 은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은 금과 은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은 이미 보석과 황금을 버렸고 금과 은을 떠났습니다.”
(Sattasatikakkhandhaka-칠백결집의 다발, 율장소품)
이것은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이다. 그럼에도 베살리의 빅쿠들은 오히려 사죄하라고 공격한다. 그러면서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재가의 남자신자들을 꾸짓고 모욕하고 불신을 조장했다. 자, 우리들은 그에게 사죄조치의 갈마를 행합시다.”라고 말한다. 이럴 경우 적반하장이라 할 것이다. 비법이 힘을 발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변질된 상가의 모습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스님들은 재가자로부터 돈을 받는 것을 당연시 하고 보시를 많이 하면 할수록 더욱더 복받을 것이라 말한다.
“공포의 묘지를 늘리며, 다시 태어남을 받아 들인다”
율장소품에 따르면 야사 깔란다까뿟따라는 빅쿠를 내세워 베살리 빅쿠들의 십사의 문제점을 낱낱이 밝혀 내고 있다. 그래서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르침이라 하고, 계율이 아닌 것을 계율이라 말하는 베살리 빅쿠들을 성토한다. 그러면서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제따와나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을 때 말씀 하셨던 것을 다음과 같이 상기 시켜 준다.
부처님은 해와 달의 오염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구름은 해와 달의 오염인데, 그 오염으로 가려지면, 해와 달은 빛나지 못하고, 빛내지 못하고, 비추지 못한다.”라 하였다. 즉, 구름, 안개, 연무, 아수라왕의 라후 이렇게 네 가지는 해와 달의 오염이기 때문에 빛을 잃게 만드는 것이라 하였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빛나지 못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음주, 성교, 금과 은, 잘못된 생활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오계를 준수하지 않는 생활태도를 말한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그 의미를 더욱 더 분명하게 한다.
어떤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은
탐욕과 분노에 물들고,
사람들은 무명에 덮여
사랑스런 형상을 즐긴다.
곡주와 과일주를 마시고
성적인 쾌락에 몰두한다.
그들은 어리석어
눈멀어 금과 은을 받는다.
어떤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은
잘못된 생활로 산다.
이러한 오염은 태양의 후예인
부처님께서 말한 것이다.
어떤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은
오염으로 가리워지면,
더러운 먼지와 티끌로
빛나지 못하고, 비추지 못한다.
맹목의 어둠에 가려져서
갈애의 노예가 집착하여,
공포의 묘지를 늘리며,
다시 태어남을 받아 들인다.
(Sattasatikakkhandhaka-칠백결집의 다발, 율장소품)
부처님은 금과 은을 분명히 받지 말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금과 은을 받는다면 이는 부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나 다름 없다. 어둠에 가려서 갈애의 노예가 된 자들은 “공포의 묘지를 늘리며, 다시 태어남을 받아 들인다.(Vaḍḍhenti kaṭasiṃ ghoraṃ, ādiyanti punabbhavanti)”라 하였다.
어떻게 결론났을까?
베살리 빅쿠들이 금과 은을 허용하기로 결의 하였을 때 이에 대하여 유행하던 빅쿠는 이의를 제기 하였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뜨거운 십사논쟁이 발생하였다. 결말은 어떻게 났을까? 이에 대하여 율장소품에서는 말미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레바따]
“존자여 금과 은은 허용됩니까?”
[쌉바까민]
“벗이여, 허용되지 않습니다.”
[레바따]
“어디에서 금지 되었습니까?”
[쌉바까민]
“라자가하 시에서 입니다. 쑷따비방가에 있습니다.”
[레바따]
“무엇을 범했습니까?”
[쌉바까민]
“금과 은에 대한 속죄죄 입니다.”
[레바따]
“존자들이여, 참모임은 제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 열 번째 사항은 참모임에 의해서 결정되었으므로 이 사항은 삿된 원리이고 삿된 계율로서 스승의 가르침을 떠난 것입니다. 여기에 나는 열 번째 산가지표를 던집니다.”
(Sattasatikakkhandhaka-칠백결집의 다발, 율장소품)
십사 중에 열 번째 항목 금과 은에 대한 것이다. 빅쿠들은 금과 은을 받아서는 안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는 부처님 말씀에 근거 한 것이다. 부처님이 라자가하에 계실 때 그렇게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또 숫따비방가에 있는 ‘상실죄법’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결정과 관련하여 율장소품에서는 “이 계율의 결집에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칠백수행승이 참여하였다. 그러므로 이 계율의 결집을 칠백결집이라 부른다.”라 하였다. 이른바 이차 결집을 말한다.
테라와다 빅쿠들은 돈을 받지 않는다
이차결집은 열 가지 계율에 대한 것이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것일 수 있으나 허용하면 구름이 해를 가리듯이 수행자의 삶을 빛바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베살리 빅쿠들에 의해서 훼손된 계율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테라와다 빅쿠들은 돈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2015-07-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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