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면 향내를 따라 벌과 나비가 찾아 오듯
항상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매일 경전을 열어 보고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월이 9년 되었습니다. 거의 4,000개 가까운 글을 올렸습니다. 직접 쓴 것 이기에 거의 대부분 기억합니다.
넷상에 올린 글은 이제 하나의 자료저장창고가 되었습니다.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블로그내 검색기능을 활용하여 인용합니다. 자신의 글을 자신이 인용하는 것 입니다. 심지어 일부 문장은 그대로 활용 합니다. 일종의 자기 표절이겠지요.
매일 경전을 읽고, 매일 이미우이(Imee Ooi)의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때로는 게송으로 된 경전 문구를 외웁니다. 그리고 느낌을 매일 글로 표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 그분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또 부처님이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하였는지에 대하여 역시 어렴풋이나마 파악하였습니다.
가르침을 접할 때 마다 틀림 없음을 확신 합니다. 8만4천이라는 방대한 법문 중에 어느 한구절이라도 놓칠 수 없는 금과옥조와 같은 가르침 입니다. 근본교리에 대한 것만 아니라 수행의 가르침, 자애의 가르침, 평등의 가르침, 우정의 가르침, 심지어 재가의 세세한 일상적 삶에 대한 것까지 그야말로 가르침의 바다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전륜성왕이라 불리 우는 아소까대왕은 부처님 가르침만이 진실로 행복을 가져 온다고 믿었습니다. 깔링가전투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은 담마를 널리 전하고자 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세계 각국에 담마사절단을 파견합니다. 서쪽으로는 알렉산드리아, 남쪽으로는 스리랑카에 이릅니다. 칼에 의한 정복을 포기하고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추진 한 것 입니다. 담마위자야(Dhammavijaya)입니다.
가르침만이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가르침을 접하면 접할수록 강한 확신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삼보에 귀의 합니다. 이때 삼보는 모두 동격 입니다. 부처님(Buddha)과 가르침(Dhamma)과 가르침을 실천하는 성자들의 공동체(Sangha)는 모두 같은 레벨 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오로지 자신과 가르침에 의지 하라고 하였습니다. 자귀의 법귀의(自歸依 法歸依)입니다.
삼보 이외 다른 것에 의지 해서는 안됩니다 . 스님을 함부로 의지 해서도 안됩니다. 집도 절도 없는 스님을 의지 했다가 어는 날 훌쩍 떠나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생전의 법정스님은 “믿을 게 없어서 중들 말을 믿어 ?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중놈 말을 어떻게 믿어 ”라 하였습니다. 하물며 일반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겁니다. 설령 그 분이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갔다고 해도 ‘의지처’ 해서는 안됩니다. 성자에 의지할 수 있지만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자들의 공동체인 상가를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아야 합니다.
스승이 없는 시대입니다. 믿고 따르고 본받을 만한 스승이 있다는 것은 행운 입니다. 스승을 본받아 자신의 향상을 이룰 수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스승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M60)”라 하였습니다. 마땅히 따를 스승이 없다면 경전에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경전에 쓰여 있는 문구가 스승입니다. 멀리서 스승을 찾을 것이 아니라 손만 뻗치면 닿을 곳에 있는 경전이 스승 입니다.
스승이 없을 때 스승을 찾아 나설 수도 있습니다. 스승을 따르는 무리가 있는 처소를 말 합니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곳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니까야에 따르면 가르침이 여법하지 않으면 붙잡아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될 사람에 대하여 “그 수행승은 이와 같이 ‘나는 이 사람에 의지해서 지낸다. 이 사람에 의지해서 지낼 때에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 새김을 새기지 못하고, 아직 집중하지 못한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를 소멸하지 못하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위없는 안온에 도달하지 못하고, 또한 출가생활에서 조달해야 할 의복, 음식, 깔개, 필수약품을 조달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밤이건 낮이건 물어보고 그 사람을 떠나는 것이 좋으며, 그에게 머물러서는 안 된다.(M17)”라 하였습니다.
반면 여법한 곳이라면 나가라도 해도 버티고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 수행승은 이와 같이 ‘나는 이 사람에 의지해서 지낸다. 이 사람에 의지해서 지낼 때에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 새김을 새기고, 아직 집중하지 못한 마음을 집중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를 소멸하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위없는 안온에 도달했으나, 출가생활에서 조달해야 할 의복, 음식, 깔개, 필수약품을 조달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는 의복을 위하여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지 않았다. 나는 음식을 위하여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지 않았다. 나는 깔개를 위하여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지 않았다. 나는 필수약품을 위하여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람에 의지해서 지낼 때에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 새김을 새기고, 아직 집중하지 못한 마음을 집중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를 소멸하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위없는 안온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잘 생각하여 그 사람에게 머무는 것이 좋으며, 그 사람을 떠나서는 안 된다.(M17)”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자신의 향상을 위해서 스승이나 수행처를 선정하라는 말 입니다.
세상에 수행처는 넘쳐 납니다. 어는 스승이 여법한지는 겪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계행이 어떤지는 함께 살아 보면 알 수 있고 지혜가 있는지는 논의 해 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수 많은 수행처를 선정할 때 자신의 향상에 도움이 된다면 나가라고 해도 버텨야 하고, 자신의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붙잡아도 떠나야 합니다.
가르침을 접하는 목적은 지금 당면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함 입니다. 또한 미래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 하고자 함 입니다. 그래서 스승이 필요합니다. 또한 함께 길을 가는 도반이 필요 합니다. 스승도 도반도 없으면 경전에 의지 하면 됩니다. 그런데 가르침을 접하면 인격적 변화가 수반 되어야 한다는 사실 입니다.
수행으로 신비체험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인격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수행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약을 먹고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겁니다. 가르침을 접하였다면 인격의 변화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변을 감화시켜야 합니다. 마치 꽃이 피면 향내를 따라 벌과 나비가 찾아 오는 것과 같습니다.
2015-07-1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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