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후기

젊음의 교만, 건강의 교만, 삶의 교만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2. 12:23

 

젊음의 교만, 건강의 교만, 삶의 교만

 

 

영화 ‘7 4일생

 

‘7 4일생이라는 영화가 있다. 월남전쟁의 실상을 알리는 반전영화라 볼 수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다리가 잘린 불구이다. 전쟁에서 다리가 다쳐 휠체어에 의지 하여 살아 가고 있다.

 

 

 

 

7월 4일생 (1989)

 

 

 

60년대 말 당시 반전 분위기가 절정에 달 했을 때 주인공은 자원해서 입대 하였다. 이유는 제복입은 군인의 모습이 좋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청년에게 특수부대 군복이 좋아 자원하여 군인이 된 것이다. 그 결과는 참담 하였다. 제복에 매료 되어 군인이 된 것은 다름 아닌 프라이드(Pride) 때문이다. 이때 프라이드는 긍지일까 아니면 자만심일까?

 

참 잘 들어 오셨습니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에서도 프라이드를 강조한다. 들어 가면 참 잘 들어 오셨습니다.”라 말하며 한 가족이 된 것을 축하 한다. 공동체가 된 것을 표시 하기 위하여 제복을 착용하게 하고 뺏지를 부착 하게 한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법회에 참석하면 법사는 참 좋은 인연입니다.”라며 말하며 함께 하게 된 인연공덕을 말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다른 곳과 차별화 하여 다름을 강조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잔뜩 프라이드를 갖게 만든다. 이때 프라이드는 긍지일까 아니면 자만심일까?

 

프라이드(Pride), 긍지인가 자만인가?

 

프라이드에 대하여 사전을 찾아 보면 자부심, 자랑, 자존심, 긍지라 되어 있다. 자만심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빠알리어 마나(māna)’를 보면 conceit(자만, 자부심)라 되어 있다. 2의 뜻으로 pride(자부심, 자랑, 자존심, 긍지)라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프라이드라는 말은 긍지와 자만이라는 양면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긍지와 자부심이 지나치면 자만이 되기 쉽다. 자만이라 하면 대게 우월한 자의 자만이 연상된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데라든가 나는 너희들과 달라라는 말이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자들이 나는 ~이다(I am~)”라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자만을 말한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동등감과 열등감도 자만으로 본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열등감도 자만으로 본다. 상대방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열등감 역시 자만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이는 초기경전에 따르면 “동등하다거나 뛰어나다거나 못하다고 여기는 자 그 때문에 사람들과 논쟁하게 되노라. 이 세 가지 자만심에 흔들리지 않는 자 동등하다거나 뛰어나다는 것 존재하지 않도다.(S1.20)”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기를 남과 비교하여 동등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Sn4.5)”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열등감도 자만임에 틀림 없다.

 

탐욕을 뿌리로 하는 자만(māna)

 

초기경전에서 자만이라는 말은 매우 많이 등장한다. 자만은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 자만은 해로운 마음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탐욕, 성냄 등과 함께 14가지 해로운 마음 중의 하나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자만은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이다.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을 보면 탐욕(lobha), 사견(diṭṭhi), 자만(māna) 이렇게 세 가지이다. 왜 이렇게 분류 하였을까? 그것은 경전을 근거로 한다. 맛지마니까야 뱀에 대한 비유의 경(M22)’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Chayimāni bhikkhave diṭṭhiṭṭhānāni. Katamāni cha? Idha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ariyāna adassāvī ariyadhammassa akovido ariyadhamme avinīto, sappurisāna adassāvī sappurisadhammassa akovido sappurisadhamme avinīto

 

Rūpa 'eta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Vedana 'eta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Sañña 'eta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Sakhāre 'eta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Yampida diṭṭha suta muta viññāta patta pariyesita anuvicarita manasā, tampi 'eta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Yampida diṭṭhiṭṭhāna 'so loko so attā, so pecca bhavissāmi: nicco dhuvo sassato avipariāmadhammo, sassatisama tatheva hassāmī'ti tampi 'eta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Sutavā ca kho bhikkhave ariyasāvako ariyāna dassāvī ariyadhammassa kovido ariyadhamme suvinīto, sappurisāna dassāvī sappurisadhammassa kovido sappurisadhamme suvinīto -

Rūpa 'neta mama, nesohamasmi, na meso me attā'ti samanupassati. Vedana 'neta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Sañña 'neta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Sakhāre 'neta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Yampida diṭṭha suta muta viññāta patta pariyesita anuvicarita manasā, tampi 'neta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Yampida diṭṭhiṭṭhāna 'so loko so attā, so pecca bhavissāmi: nicco dhuvo sassato avipariāmadhammo, sassatisama tatheva hassāmī'ti tampi 'neta mama, nesohamasmi, nameso attā'ti samanupassati.So eva samanupassanto asati na paritassatīti.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섯 가지 견해의 관점이 있다. 여섯 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배우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은 거룩한 분을 존경하지 않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리지 않아서, 참사람을 존경하지 않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리지 않아서, 물질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고, 느낌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고, 지각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고, 형성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긴다.

 

또한 그들은 보고 듣고 감지하고 분별하고 획득하고 추구하고 정신적으로 성찰한 것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긴다. 또한 그들은 이와 같은 견해의 관점, 즉 ‘이것이 세계이며, 이것이 자아이다. 나는 죽은 뒤에도 상주하고 견고하고 지속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와 같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라는 관념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긴다. (M22)

 

 

경에서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 (eta mama, esohamasmi, eso me attā)”라는 말이 있다. 주석에 따르면 이것은 나의 것이다.(eta mama)’라는 말은 갈애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이는 탐욕을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나이다.(esohamasmi)’라는 말에 대하여 자만에 대한 집착(mānagahā)’이라 하였다. 이는 자만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eso me attā)’에 대해서는 견해에 대한 집착이라 하였다. 이는 사견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은 탐욕, 자만, 사견 세 가지로 분류 된다. 아비담마가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경전에 따르면 자만은 이것이야말로 나이다.(esohamasmi)”라 하였다. 이는 내가 누구인데라 하는 것과 같다. 그런 자만의 특징은 오만함으로 나타난다. 또 건방진 역할도 한다. 허영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자만은 광기로 나타난다고도 하였다.

 

젊음의 교만

 

자만은 극복되어야 할 해로운 마음이다. 초기경전에서 자만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문구를 보았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젊음의 교만라는 말이 있다. 관련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Kiñca bhikkhave atthavasa paicca 'jarādhammomhi jara anatīto'ti abhiha paccavekkhitabba itthiyā vā purisena vā gahaṭṭhena vā pabbajitena vā.? Atthī bhikkhave sattāna yobbane yobbanamado yena madena mattā kāyena duccarita caranti vācāya duccarita caranti manasā duccarita caranti. Tassa ta hāna abhiha paccavekkhato yo yobbane yobbanamado so sabbaso vā pahīyati, tanu vā pana hoti. Ida kho bhikkhave atthavasa paicca 'jarādhammomhi jara anatīto'ti abhiha paccavekkhitabba itthiyā vā purisena vā gahaṭṭhena vā pabbajitena vā.

 

[세존]

수행승들이여, 무슨 이유로 나는 늙음에 종속되었으며 늙음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여자나 남자나 집에 있는 자나 출가한 자나 자주 관찰 해야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젊은 시절에 젊음의 교만이 있는데, 그 교만에 빠져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 그가 그 사실을 관찰하면, 젊은 시절의 교만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버려지거나 약해진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이유로 나는 늙음에 종속되었으며 늙음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여자나 남자나 집에 있는 자나 출가한 자나 자주 관찰 해야 한다.”

 

(hānasutta -사실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57, 전재성님역)

 

 

경에서 젊음의 교만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yobbanamado’의 번역이다. 이는 ‘yobbana(youth) +mado(Pride)’의 의미이다. 여기서 mada에 대하여 교만으로 번역하였다. Mada에 대한 뜻을 보면 ‘pride; intoxication; conceit; sexual excess.’로서 마나(māna) 와 유사한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다만 ‘sexual excess’라는 뜻이 있어서 젊음의 방종이라는 뜻도 포함 되어 있다.

 

젊은 사람들은 이 젊음이 영원토록 지속 될 것처럼 착각한다. 그래서 건강한 몸을 함부로 하기 쉽다. 막행막식을 일삼으며 젊음과 청춘을 마음껏 즐기려 한다. 이런 경향은 매스컴 탓도 있다.

 

광고를 보면 지금 이 순간을 즐겨요라며 젊음을 만끽 하는 청춘들이 나온다. 하지만 달이 가고 해가 감에 따라 노쇠하여 진다. 마침내 늙게 되었을 때 늙음에 종속된다. 그런 늙음에는 남녀나 승속이 따로 없다. 젊은 시절 젊음에 대한 자만, 교만, 방종, 광기에 대하여 후회하게 된다.

 

젊은 자들은 교만하지 않은지 잘 관찰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그것은 나는 늙음에 종속되었으며 늙음을 벗어날 수 없다.(jarādhammomhi jara anatīto)”라고 관찰 하는 것이다.

 

경을 요약하면

 

앙굿따라니까야 사실의 경(A5.57)’에서는 모두 다섯 가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늙음, 질병, 죽음, 헤어짐, 업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관찰해야 하는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젊음의 교만(yobbanamado)

나는 늙음에 종속되었으며 늙음을 벗어날 수 없다.(jarādhammomhi jara anatīto)”라고 관찰한다.

 

2) 건강의 교만(ārogyamado)

나는 질병에 종속되었으며 질병을 벗어날 수 없다. (vyādhidhammomhi vyādhi anatīto)”라고 관찰한다.

 

3) 삶의 교만(jīvitamado)

나는 죽음에 종속되었으며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maraadhammomhi maraa anatīto)” 라고 관찰한다.

 

4) 사랑하는 것에 대한 탐욕(piyesu chandarāgo)

나는 모든 사랑하는 것과 마음에 드는 것과 헤어지고 이별해야 한다.(sabbehi me piyehi manāpehi nānābhāvo vinābhāvo)” 라고 관찰한다.

 

5)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인 악행(kāyaduccarita vacīduccarita manoduccarita)

나는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의 원인자이고 업의 친연자이고 업의 의지처이고 내가 선이나 악을 지으면 그 상속자가 될 것이다.(kammassakomhi kammadāyādo kammayonī kammabandhū kammapaisarao ya kamma karissāmi kalyāa vā pāpaka vā tassa dāyādo bhavissāmi)”라고 관찰한다.

 

 

다섯 가지에서 네 가지를 보면 고성제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늙음에 대하여 젊음의 교만,  질병에 대하여 건강의 교만, 죽음에 대하여 삶의 교만은 고성제에서 노, , 사에 대한 것이다. 사랑하는 것에 대한 탐욕은 고성제에서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에 대한 대한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 말씀은 사성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악행(duccarita)에 대한 것이 있다. 이는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악행에 대한 것이다. 행위에 대하여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 하라고 하였다.

 

부자의 자만, 배운자의 자만, 태생의 자만

 

영화 7 4일생을 보면 주인공이 제복에 매료 되어 특수부대 군인이 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 하였다. 단지 제복이 멋있어 보여서 그 일원이 되었지만 대가는 혹독한 것이었다. 조직이나 단체의 일원이 되었을 때 잔뜩 프라이드를 불어 넣는다. 제복을 입히고 뺏지를 주어 차별화 시키기도 한다. 긍지와 자부심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문제 없지만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자만이 생겨 나게 된다.

 

오늘날 부자들은 부자끼리 모여 산다. 특정지역에 모여 살며 출입을 통제한다. 타워펠리스를 들어 가려면 세 개의 문을 거친다고 한다. 고가의 아파트 단지에서도 출입은 통제 된다.

 

부자들은 부자들끼리 몰려 살며 같은 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그들끼리 교류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이 처한 현실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기득권 수호에 관한 것이다.

 

대체로 부자는 자신이 노력을 하여 부를 일구었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거나 열심히 일하지 않는 자들을 경멸한다. 게을러서 가난하게 산다고 생각한다. 이는 부자의 자만(dhana-māna)’에 해당된다.

 

많이 배운자들은 그들끼리 교류하며 지낸다. 자신의 학력과 학식이 높다고 생각하여 못 배우고 우둔한 사람을 만나면 잘난체하고 우쭐해 하는가 하면 심지어 깔보는 행위를 한다. 이는 배운자의 자만(paññā-māna)’이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이 있다. 좋은 집안에서 훌륭한 부모를 잘 만나 남보다 뛰어난 용모나 신체적 조건을 갖는 자들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잘난체하고, 떠 벌리고, 남들을 열등하게 생각 하거나, 천하게 보는 계급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는 태생에 따른 자만(jati-māna)’이다.

 

이상 세 가지 자만은 모두 불선업을 짓는 행위이다. 불선업을 많이 짓게 되면 그 행위에 대한 과보가 반드시 따를 것으로 본다.

 

사소한 행위에서도

 

자만은 극복되어야 한다. 어떻게 극복 되어야 하는가? 행위에 대한 과보를 아는 것이다. 사소한 행위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작은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A4.22)”라 하였다. 이런 행위의 두려움은 결국 윤회의 두려움이다. 행위가 익으면 과보를 받게 되어 윤회 할 수밖에 없다.

 

지금 젊다고 하여 늙음을 벗어 날 수 없다. 지금 건강하다고 하여 질병을 벗어 날 수 없다. 지금 지금 살아 있다고 하여 죽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하여 헤어지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많이 가졌다고 하여 끝까지 유지 되지 않는다. 지금 조금 더 배웠다 하여 현자라 하지 않는다. 좋은 가문에 태어났다 하여 내생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다. 모든 것은 행위에 따른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소한 행위에서 두려움을 보라고 하였다. 이는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 하는 것이다.

 

 

Vyādhidhammā jarādhammā atho maraadhammino,
Yath
ā dhammā tathā santā1 jigucchanti puthujjanā.

Aha
ñceta jiguccheyya eva dhammesu pāisu,
Na meta
patirūpassa mama eva vihārino.

Soha
eva viharanto ñatvā dhamma nirūpadhi,
Ārogye yobbanasmiñca jīvitasmiñca ye madā,

Sabbe made abhibhosmi nekkhamma
daṭṭhu khemato
Tassa me ahu uss
āho nibbāna abhipassato.

N
āha bhabbo etarahi kāmāni patisevitu,
Anivatt
ī bhavissāmi brahmacariyaparāyaoti.

 

 

[세존]

질병에 종속되고 늙음에 종속되고

그리고 또한 죽음에 종속된

그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어리석은 사람들은 혐오하네.

 

내가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혐오를 품는다면

그렇게 존재하는 나에게

옳은 일이 아니네.

 

나는 이와 같이 살면서

집착대상을 여읜 상태를 알아

젊음의 도취와 건강의 도취와

생명의 도취가 있는데

 

모든 도취를 이기고

여읨 가운데 안온을 발견하고

열반을 보면서

나는 용맹하게 정진하네.

 

감각적 욕망을 섬기는 것은

결코 나에게 불가능하리.

청정한 삶을 궁극으로 하는

나에게 퇴전은 없으리라.” (A5.57)

 

 

2015-09-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