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이 이 맛을 알어?” 먹방을 보면서
채널을 돌릴 때 마다 ‘먹방’이다. 먹는 방송을 말한다. 특히 저녁 먹을 시간에 집중적으로 방송 된다. 맛집을 소개 하는가 하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 준다. 한입 크게 물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며 ‘최고’라는 제스처를 한다.
요즘 먹방에서는 쉐프들이 직접 출연하기도 한다. 재료를 준비하여 요리의 전 과정을 보여 주며 마치 예술품 같은 요리를 만든다. 하지만 열과 성으로 만든 작품은 한입에 사라진다.
이전에는 먹방 프로를 보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경쟁적으로 방송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시청률이다.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보이는 것이 먹는 것이라 하니 경쟁적으로 방송한다. 큰 돈 들이지 않고 시간 때우기 식으로 방송을 해도 냄는 장사가 먹방이라 한다.
신조에 먹방이 크게 유행한 것은 2000대 말부터라고 한다. 처음에는 아프리카TV 등 인터넷방송에서 방송자가 먹으면서 소통하는 방송이 인기를 끌었는데, 이후 전방송으로 확산 되었다고 한다. 먹방프로는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현상이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한국인들에게 깔려 있는 불안감과 불행 때문이라 한다. 장기간 경기침체로 인한 보상심리가 발동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먹방을 보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여러 시간 정성을 다하여 만든 예술작품과도 같은 음식이 한입에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이 때 눈과 귀, 코, 혀, 목구멍 등 오감이 총 동원 된다.
사람들은 음식의 맛과 향기 등을 음미한 후 목구멍으로 넘긴다. 이때 행복을 맛 본다. 그러나 그 행복은 일시적이다. 남는 것은 맛에 대한 갈애 뿐이다. 집에서 여러 시간에 걸쳐 만든 정성스런 음식도 한순간이다. 사람들은 이런 음식에 목숨을 거는 것처럼 보인다.
황제식과 같은 음식도 목구멍을 지나면 똥이 돼서 나온다. 값비싼 와인도 맛과 향가를 음미한 후 목구멍을 넘기면 오줌이 되어 나온다.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여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이 똥과 오줌이 되어 나온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도 내일도 반복하는 것은 맛에 대한 기억이고 맛에 대한 갈애이다. 이럴 때 하는 말이 “니들이 이 맛을 알어?”가 될 것이다.
맛을 알아 버렸을 때 맛에 대한 갈애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런 맛에 대한 갈애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다. 식욕과 더불어 성욕 역시 인간의 근원적 욕구이다. 모두 맛에 대한 갈애라 볼 수 있다.
식욕과 성욕은 매우 유사하다. 그 중에 공통적 사항이 있다. 그것은 오감이 총 동원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수행자에게 식욕과 성욕은 제한된다. 특히 모든 욕망의 원천은 식욕이라 하여 음식에 대한 갈애는 억제 된다.
식욕과 성욕은 청정한 삶을 사는데 방해요소가 된다. 수행자가 독신으로 살며 탁발에 의존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탁발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 탁발이라는 것은 삶의 끝이다. 세상에는 ‘손에 발우나 들고다녀라!’라고 하는 저주가 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훌륭한 아들들은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 그러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결코 왕이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고, 강도가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고, 빚을 졌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는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떨어졌다. 괴로움에 떨어져 괴로움에 둘러싸여 있다. 적어도 괴로움의 다발들이 종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S22.80)
상윳따니까야 ‘탁발의 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탁발, 즉 빌어 먹는 것은 삶의 끝이라 하였다. 그리고 저주라 하였다. 왜 삶의 끝이고 저주일까? 주석에 따르면 삶의 끝은 가장 낮은 위치를 말한다. 하찮고 형편 없고 나쁜 것이다. 더구나 저주라 하였다. 이는 세상사람이 분노하면 “중옷이나 입고, 그릇을 들고 밥이나 빌러 다녀라!”라고 그들의 적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말이라 한다.
탁발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 참여이다. 그것은 청정한 삶의 실현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괴로움의 다발들(오온)이 종식되어야 한다.’라는 이유로 탁발 하는 것이다.
걸식하는 자들에게 맛에 대한 갈애가 일어 날 리 없다. 단지 몸의 기능을 유지 하기 위한 윤활유 역할로서 음식을 취하는 것이다. 이는 대승불교에서 약으로 알아 음식을 취한다는 말과 대조적이다.
오후불식이라는 말이 있다. 수행자들은 오후에는 일체 먹지 않는다. 요즘도 남방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오후에 먹지 않는다. 이런 전통은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다.
탁발에 의존하던 수행자 들에게 음식에 대한 집착은 버려야 할 오염원이다. 음식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갈애가 생겨나 더욱 더 맛 있는 음식을 찾게 된다. 그래서 무소유와 청정한 삶의 실현하는데 방해가 된다. 수행자들이 탁발에 의존하는 이유일 것이다.
재가불자 중에도 오후불식하는 사람이 있다. 지난 8월 초 국민휴가 기간에 집중수행에 참여 하였다. 그 때 호주에서 온 사람은 오후 불식 하였다. 그는 호주로 이민 가서 직장을 다닌다고 하였다. 아침에는 과일 등으로 간단하게 먹고 점심 한끼 제대로 먹는다고 하였다. 오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수행처에서 저녁에 제공되는 음식을 일체 먹지 않았다. 그런 생활 한지 일년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몸은 깡말라 있다. 오후에 먹지 않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했다.
너무 잘 먹어서 탈이다. 수백명이 식사하는 카페테리아에서는 매끼 마다 고기가 끊이지 않는다. 요즘 사람들은 매끼가 잔칫날이고 파티날과 같다. 이렇게 된 이유가 먹방프로의 영향이라면 지나칠까?
2015-09-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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