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에 이르려면
척척박사
교계뉴스를 보니 어느 스님이 박사를 네 개나 가지고 있다. 모두 스님이 되고 나서 딴 것이다. 불교와 관련 없는 일반 세속철학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스님의 학위를 보면 철학, 문학, 교육학에서 박사 네 개라 한다. 성대. 고대 등 여러 대학에서 받은 것이다. 스님은 왜 여러 개의 학위를 가지게 되었을까? 기사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박사학위를 여러 개 취득하는 것은 스님으로서 누가 무엇을 물어봐도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라고 했다.
스님의 이런 생각은 동국대 불교학과에 재학하던 시절, 부처님오신날 TV 중계를 보고 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님들은 목탁치고 염불하는 장면만 잡히고 그 의미에 대한 설명은 재가자 교수들이 하는 장면이 있었다.
자현 스님은 “‘스님들이 설명도 할 수 있도록 하자’고 도반스님과 다짐했다. 그때의 각오를 늘 마음에 두고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불교닷컴, 2015-08-12)
여러 개의 학위를 가지게 된 동기가 “스님으로서 누가 무엇을 물어봐도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이라 하였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동기는 TV에서 재가자가 해설해는 것을 보고 나서 자극 받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스님이라 하여 척척박사처럼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알아야 할까? 척척박사를 원한다면 철학이나 교육학 뿐만 아니라 법률도 알아야 하고 컴퓨터 프로그램도 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세상의 학문은 일생 공부 해도 이룰 수 없다. 수십, 수백 생을 거듭하면 모를까 척척박사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출가자가 세속철학공부 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세속철학을 배우면 악작죄
부처님은 세속철학을 익히는 것에 대하여 무어라 하였을까? 율장 소품에 따르면 이런 내용이 있다.
그런데 그때 여섯 무리의 수행승들이 세속철학을 배웠다. 사람들이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했다.
[사람들]
“마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는 재가자와 같다.”
(율장소품, 제5장 사소한 것의 다발, 32삼림)
여기서 세속철학이라 하는 것은 일종의 형이상학을 말한다. 이교도의 학문을 지칭하기도 한다. 가르침을 떠난 지식은 세속철학이라 볼 수 있다. 빅쿠들이 본분사를 잊어 버리고 세속철학을 익히는 것에 몰두 하였을 때 재가자의 비난이 뒤따랐다. 이에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속철학을 배우지 말아야 한다. 배우면 악작죄가 된다.”
(율장소품, 제5장 사소한 것의 다발, 32삼림)
세속철학 배우는 것에 대하여 악작죄로 규정하였다. 나쁜 행위라는 것이다. 속류지식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생계를 유지 하기 위한 방편으로 배우는 지식에 대해서도 “수행승들이여, 속류지식을 배우지 말라. 배우면, 악작죄가 된다.”라고 하였다.
세상에는 수 만가지 직업이 있다. 대부분 생계유지 수단이다. 수만 가지 직업에는 수 만가지 지식을 필요로 한다. 컴퓨터프로그래머라면 컴퓨터 언어부터 악혀야 한다. 법률가라면 법전을 꿰뚫고 있어야 할 것이다.
세속적 지식을 모두 다 알 필요 없다. 세속의 전문가에게 맡겨 놓아야 한다.그렇다면 스님이나 재가불자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누가 슬퍼하는가?
지식과 지혜는 다른 것이라는 것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혜에도 세속적 지혜와 불교적 지혜는 다른 것이다. 산전수전 다 은 노인의 세상 아 가는 지혜와 부처님이 설한 지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 사람들도 무상함을 느낀다. 계절이 바뀌었을 때, 늙어 갈 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때 자연무상 또는 인생무상을 느낀다. 그러나 거기까지 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은 세속의 무상과 다르다. 반드시 무상과 고와 무아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무상은 나를 기반으로 한 유아(有我)에 바탕을 두지만, 불교적 무상은 무아(無我)에 바탕을 둔다.
세상사람들은 무상하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슬퍼한다. 슬퍼도 내가 슬픈 것이다. 유아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은 철저하게 무아를 바탕으로 한다. 슬퍼도 내가 슬픈 것이 아니라 조건이 슬픈 것이다. 슬픈 대상을 보았을 때 조건 지어진 마음이 슬픈 것이다.
작은 수다원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는 연기법이다. 이 세상에 부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이미 원리로서 확정된 법이다. 이런 연기법을 아는 것이 불교적 지혜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8만4천가지 방편으로 설했고 수행을 통해서 입증해 주었다.
기본적인 불교적 지혜가 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 가면 가장 먼저 알려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정신(나마)-물질(루빠)의 지혜를 아는 것이다. 이 몸과 마음에서 모든 것이 일어남을 아는 지혜이다. 다음으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이다. 이런 지혜 역시 몸과 마음을 바탕으로 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만 알아도 커다란 지혜를 얻는다. 수다원이 될 발판을 마련했다 하여 작은 수다원(쭐라소따빤나)이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삿된 견해에 사로 잡혀 있다. 어떤 궁극적 실재가 있어서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안다. 이 세상이 있어서 내가 존재 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정신-물질을 아는 지혜, 원인-결과를 아는 지혜 두 가지만 알아도 신의 속박에서 해방 될 수 있다.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것
연기법은 원인과 결과의 지혜에 따른다. 그러나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조건이다. 그래서 연기법은 원인(hetu)과 조건(paccaya)과 결과(phala)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인-연-과’라 한다.
모든 현상은 조건 발생하고 조건 소멸한다. 한순간에는 하나의 일 처리 밖에 하지 못한다. 수 많은 형상이 시야에 들어 오지만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가장 강력한 대상만 보이는 것이다. 수 많은 소리를 동시에 듣지만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기차길 옆 아기가 잠만 잘도 자는 이유이다.
눈과 귀 등 오감으로 수 많은 대상을 접한다. 그때마다 의식이 일어난다. 의문을 통하여 시도 때도 생각이 일어난다. 시시각각 일어나는 마음은 연기된다. 불쾌한 대상이 떠 올랐을 때 뒤의 마음이 알아 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회전 된다. 결과는 괴로움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것이 불교적 지혜이다.
세상은 괴로움 그 자체이다. 괴로운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불교적 지혜이다. 그것은 연기법을 아는 것이다. 작은 이 몸과 마음에서 세상을 본다. 세상은 인식함에 따라 발생한다.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것이다.
세계의 끝에 이르려면
현자는 연기법을 안다.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연기법은 현자들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세속에서의 재산과 지위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가 아무리 돈에 많아도, 높은 지위에 있어도, 박사타이틀을 여러 개 가지고 있어도 현자라 하지 않는다.
현자는 이 몸과 마음에서 세상을 보는 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벗이여, 참으로 태어나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일어나지 않는 그 세계의 끝은 걸어서는 알 수 없고 볼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S2.26) 라고 말씀 하셨다. 육척단신의 이 몸 안에서 세상의 끝을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세존]
“그러나 벗이여,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도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 단신의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
“결코 세계의 끝에
걸어서는 이르지 못하지만
세계의 소멸에 이르면
괴로움에서 벗어남이 있네.
참으로 세계를 아는 슬기로운 이는
세계의 끝에 이르고 깨끗한 삶을 성취하며
고요함에 이르러 세계의 끝을 잘 알고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네.” (s2.26)
2015-08-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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