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기득권 스님들과 학자들, 경에 대한 무지인가 직무유기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7. 09:53

 

기득권 스님들과 학자들, 경에 대한 무지인가 직무유기인가?

 

 

 

 

 

현응스님의 글이 떴는데

 

최근 교계신문에 흥미로운 기사가 떴다. 그것은 현응스님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교육원장이라는, 그것도 중책을 6년 동안 맡고 있는 스님의 입에서 나온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는 파격적이다.

 

현응스님의 강연에 대하여 한편으로 공감하고 또 한편으로 인정하지 못한다. 반쪽짜리 깨달음관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스님의 깨달음관에 대하여 비판적 글을 보았다.

 

허정스님 말하기를

 

매일 문안인사 드리듯이 방문하는 사이트가 있다. 서산 천장사 주지 허정스님이 운영 하는 카페 암자에서 하루밤이다. 스님이 최근 올려 놓은 글에 공감한다. 스님의 글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편의상 문단을 나누었다.

 

 

깨달음이 올바른 이해라고?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스님이 9 4일 열린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주제의 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을 접하면서 “드디어 터질 것이 터졌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 현응스님과 같은 차를 타고가다가 현응스님이 “나는 개인적으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는 수행의 층위를 믿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때의 충격이 되살아났다.

 

현응스님의 입장을 정리해보면 ‘오늘날 깨달음의 수준을 너무 높게 잡아 깨달음을 언어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하고 불가지한 경지로 묘사하고 깨달음을 얻으면 세상만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수행 방법론에만 관심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면 조계종단의 2000여 명의 스님들이 1년에 6개월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선원에서 안거수행을 하고, 수십 년 이상 참선 수행하는데도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을 보기는 힘들다.

 

그런데 내가보기엔 깨달음이란 그렇게 높은 경지가 아니고 연기와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깨달음이며 그러한 깨달음을 얻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마하박가>에 따르면, 녹야원 첫 설법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하고 납득시키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며칠이었으며 부처님은 가르침을 청할 때 삼매와 선정을 통해 수련하라고 지도하지 않고 질문과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다.’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현응스님의 문제의식은 좋다. 실제로 한국불교에서는 깨달았다고 하는 선지식들에게서 보여지는 행동과 말이 기대에 못 미쳐서 스승없이 공부하는 수행자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경전을 읽고 도반끼리 토론하고 탁마하는 문화도 사라져서 서로가 답답해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행자들이 전통적으로 대승경전과 선어록만을 배워왔고 화두 드는 법만을 배웠지 부처님의 생애가 어떠했고 부처님은 어떤 방법으로 수행했으며 무엇을 깨달으셨는지를 자세히 배우지 못해서 발생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현응스님처럼 깨달음과 정견이 다르지 않다고만 이야기 하면 다시 깨달음을 하향평준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이를테면 정견에도 2가지 종류가 있고 깨달음에도 4가지 단계가 있는데 이러한 차별을 무시하고 스님은 정견= 깨달음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전에서는 왜 깨달음과 정견이 다른 용어로 설명되고 왜 다른 내용으로 설명되고 있는지, 왜 부처님은 정견의 종류와 깨달음의 종류를 단계별로 설명하셨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자기의 생각의 영역을 넘어선 내용들은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잠시 판단중지해도 되련만 성급하게 자신의 견해를 내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깨달음이라는 화두를 우리 모두에게 던져주어 다시 각자에게 깨달음이 무엇인지 정리하게끔 하려는 걸까? 아니면 모든 불교의 사상과 전통이 한반도에 도래한 작금의 현실에서, 마땅히 다양한 사상과 전통이 부딪치고 튕겨지며 갑론을박의 치열전쟁이 들불처럼 일어나야 하는데도 너무 조용한 우리불교계의 현실에 대한 천둥같은 외침일까?

 

문제는 경전의 내용에 대한 해석의 문제라면 얼마든지 싸워 보겠는데 경전 자체에 대한 부정은 참으로 난감하다.

 

처음부터 이 싸움은 시작도 못하고 각자의 믿음 안에서 살아가자고 쉽게 결론이 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신통이나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는 수행체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그와 관련된 많은 교리들을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그러니 신중히 판단하고 깊이 사유할 일이다.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이고 ‘바른견해를 갖는 것’이라 했으니 먼저 바른견해에 대해서 살펴보자. 부처님은 올바른 견해를 2가지로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올바른 견해는 어떠한 것인가? 비구들이여, 나는 올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가 있고, 비구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가 있다.(M.117 큰 사십경)

번뇌와 함께하는 정견(유루의 정견)과 번뇌가 없는 정견(무루의 정견)을 구분해서 설명하는 것은 올바른 견해에도 수준이 있음을 의미하고 설법을 듣는 이의 수준을 배려한 대기설법이기도하다.

 

유루의 정견은 보시의 공덕에 대한 믿음, 제사의 공덕에 대한 믿음, 인과법칙에 대한 믿음, 내생에 대한 믿음, 스승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고 이것들을 부정하는 것이 바로 삿된 견해이다.

 

범부중생은 번뇌가 있는 정견으로 공부를 시작하고 성스런 정견을 얻어 성자로 나아간다. 그 성스런 정견을 얻은 첫 번째 성인을 예류자라고 말하는데 이 사람은 10가지 족쇄중에서 유신견(有身見),계금취(戒禁取) 의심() 3가지를 버린 사람이다.

 

이렇게 10가지 족쇄의 유무로 4가지 단계의 성자를 나누는 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처럼 “나의 가르침은 바다처럼 점점 깊어진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하며 견도 수도 무학도라는 수행체계와 연결되는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의 가르침과도 상통한다.

 

현응스님이 말한 바른견해는 무루의 정견에 가깝다. 무루의 견해는 오근과 오력의 구성요소중에 하나인 지혜의 능력(慧根), 지혜의 힘(慧力) 그리고 칠각지의 하나인 탐구의 깨달음 고리(擇法覺支)와 같은 것들이다.

 

이 바른견해는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고 바른 사유와 바른 마음챙김과 함께하며 바른 선정을 발생시키는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된다.

 

또한 경전에서 바른 견해는 고통,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된 결과 그리고 고통의 소멸로 이끄는 수행법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른견해를 갖춘 것을 예류자로 설명 하기도 하므로 무루의 바른견해=예류자의 견해=견도라는 등식이 성립할 것이다.

 

그렇치만 예류자의 견해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의 견해와 같은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유신견(有身見), 계금취(戒禁取), 의심()이라는 3가지 족쇄를 소멸했다는 관점에서는 같은 견해일 수 있겠으나 예류자에게는 아직 감각적 욕망(kāmarāga), 적의(paigha), 색계에 대한 탐욕(rūparāga), 무색계에 대한 탐욕(arūparāga), 자만(, māna), 들뜸(掉擧,uddhacca), 무명(無明,avijjā)이라는 족쇄들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예류자의 바른견해란 아라한과는 다른 차원의 견해라고 보아야한다.

 

‘연기와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깨달음’이라고 말할 때 그 깨달음이 아라한의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여러 가지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연기와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서 예류자가 갖는 무루의 바른견해를 갖춘 사람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 또한 말로는 연기와 공에 대한 이해를 갖추었다는 사람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이해의 정도가 천차만별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마하박가를 보면 초전법륜경을 통해서 먼저 꼰단냐가 예류과를 얻는 장면이 나온다. 오비구는 차례로 예류과를 얻고 부처님 밑으로 출가하여 다시 무아상경을 듣고 오비구 모두는 아라한과를 얻는다. 너무나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기에 현응스님처럼 며칠동안에 대화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나오지만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보면 그들이 그렇게 쉽게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본다.

 

우선 부처님 자신이 설법을 망설일 정도로 자신이 깨달은 내용이 어렵다고 생각했다는 점, 이 세상에 깨달음의 내용을 알아들을 만한 사람을 찾다가 깨닫기 이전에 자신의 스승이었던 두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차선책으로 오비구를 찾아 그 먼길을 갔다는 점, 오비구는 이미 치열한 수행을 해오던 수행자들이었다는 점, 오비구가 처음에 초전법륜경을 듣고도 아라한과를 못 얻고 예류과의 깨달음만을 얻었다는 점, 나중에 다시 깊은 가르침을 설할 때 오비구가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점, 부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고 법을 설하신다는 점,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생각해보면 누구나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오비구처럼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피상적인 관찰임을 알 수가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불교공부의 순차적인 과정을 말한다면 먼저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유루의 바른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존재자체를 무조건 긍정하고 찬탄하는 중생심을 넘어 존재자체가 종기같은 것임을 대화와 토론하여 이해하게하여야 한다.

 

이때 이해한다는 것은 삶의 방향이 세속적인 성공과 즐거움을 쫒는 것에서 일대 대반전이 일어나 대화와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의 가치관과 삶의 자세가 바뀌게 되는 일이 현실에서 증거로 나타나야한다.

 

그래서 몸과 마음에 대한 애착이 떨어져나가고 고정관념이 없이 열린사고를 하며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자신이 이해하고 경험한 이치가 더욱 확고해지는 경험을 하는 자를 바른 견해를 얻은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응스님은 자신의 주장을 펴면서 이것은 “학술적 이론적 규명이 아닌, 한국불교 현실을 개선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이라고 말했지만 초기율장을 읽고 지금과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점, 현재 종단의 교육체계를 초기경전을 중심으로 혁신하여 가르치고 있는 책임자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글에 대한 논란을 피해 갈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 덧 붙이자면 초기불교를 전공했다는 분도 경전에 나온 신통력은 모두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고 믿는 분도 있고 ‘명색’을 모두 정신으로 봐야 한다는 분도 있고 윤회를 인정치 않는 스님도들도 많다. 이렇게 대승경전이 아닌 초기경전을 보면서도 경전에 나와 있는 설명을 믿지 않고 자기방식대로 취사선택을 하면서 경전을 이해하려는 태도는 생각보다 훨씬 많이 우리의 불자들에게서 발견된다.

 

토론자로 나선 조성택 교수도 ‘이루는 깨달음’이 아닌 ‘이해하는 깨달음’에 대한 현응스님의 견해에 공감했다. 그는 “석가모니부처님은 ‘도인’이 아니라 행동가로, 그래서 부처님을 가리켜 ‘명행족’ 즉 지혜와 실천을 두루 갖춘 분이라고 하는 것”이라며 “지금의 한국불교는 지혜만을 추구할 뿐 실천 없는 불교가 돼 버렸다”고 꼬집었다.

 

특히 깨달음을 체험으로 보고, 체험한 깨달음만을 유효하다고 보는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을 언급하며 “깨달음을 소수의 선택된 자들만이 체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특권화 시켰다”며 “이는 독단적 오만이며 수행의 일상성과 사회성을 도외시하는 편견”이라고 비판했다.

 

(깨달음이 올바른 이해라고?, 허정스님, 천장사주지, 2015-09-05)

 

 

한국불교를 이끌어갈 차세대 지도자

 

오랜만에 접하는 허정스님의 긴 글이다. 그리고 작심한 듯 비판하고 있다. 이런 스님의 글은 불교닷컴이나 불교포커스 등 교계신문에 거의 대부분 실린다. 이는 스님의 글에 공감하기 때문 일 것이다.

 

스님의 글 쓰는 스타일을 알고 있다. 그것은 스님과 오랫동안 소통해 왔기 때문이다. 스님으로부터 법보시등 도움 받은 것도 있다. 글쓰기에 많은 도움이 되는 자료를 받은 바도 있다.

 

허정스님과는 20007년 이래 온오프 라인에서 교류해 왔다. 특히 온라인에서 자주 본다. 그렇다고 댓글 등으로 소통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블로그에 들어 온 것만 확인 되도 상당한 힘을 받는다.

 

허정스님의 인터넷필명은 후박나무이다. 후박나무라는 필명을 보았을 때 반갑다. 그리고 살피게 된다. 올린 글에 대하여 잘못 된 것이 없는지 짚어 보기도 한다. 스님의 교학적 배경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런 허정스님은 한국불교를 이끌어갈 차세대 지도자라 본다.

 

허정스님과 현응스님의 관계는?

 

허정스님이 현응스님의 글을 비판한 것에 대하여 여러 차례 보았다. 참고로 허정스님에 대하여 현응스님이 직접 불학연구소장으로 발탁한 바 있다. 2011년 말의 일이다. 허정스님의 블로그를 보고서 발탁했다고 한다. 블로그관리만 잘 해도 발탁 되는 시대인가 보다.

 

허정스님과 현응스님이 틀어지게 된 원인중의 하나가 글에 보인다. 그것은 현응스님이 경전을 모두 다 믿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글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는 수행의 층위를 믿지 않는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신통도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검증의 잣대

 

오늘날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 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수행을 좀 했다는 일부스님이나 많은 공부를 했다는 일부학자들은  수행체험과 과학적 근거를 들어 내세와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런 불신은 경전에 등장하는 신통이나 초월적이고 신비한 이야기에 대하여 단지 후대에 방편으로 삽입 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사향사과나 윤회를 인정하지 않으면 초기경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하였지만 세속적 정견인 업자성정견도 설하였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 하는 것이다.

 

세속적 정견을 무시한다거나 사향사과 등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단멸론으로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단멸론자둘은 신통이나 내세, 윤회를 부정한다. 자신의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적용하기 때문이다.

 

무지인가 직무유기인가?

 

허정스님은 현응스님의 글을 보고서 드디어 터질 것이 터졌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교육을 총괄하고 있는 스님의 입에서 가르침을 부정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 일 것이다. 이는 기득권층의 가르침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있음을 말한다.

 

오늘날 한국불교를 이끌어 가는 두 개의 축이 있다. 것은 스님들과 학자들이다. 그런데 교계신문 기고문이나 논문 등을 통한 기득권층의 불교관을 보면 충격적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단멸론적 견해를 종종 보기 때문이다.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면 중구난방이 된다. 이는 정견이 없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분명하게 사성제를 아는 것이 정견이라 하였다. 또 세속적 정견으로서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업자성정견도 설하였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 나오는 사항이다.

 

스님들이나 학자들이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경에 대한 무지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독특한 견해라 볼 수 있다. 만일 전자라면 경전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이라 볼 수 있어서 한국불교의 수치이다. 후자라면 개인의 이익과 명예, 칭송을 위한 것으로 가르침을 제대로 전하지 않아 직무유기에 가깝다.

 

 

2015-09-0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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