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자비의 분노 정의로운 폭력이라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9. 11:28

 

자비의 분노 정의로운 폭력이라고?

 

 

 

 

인간은 먹고 마시며 배설하는 재미로 살아 간다. 이런 재미가 없으면 무슨 맛으로 살아 갈까?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더욱더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좋은 느낌을 넘어 갈애가 일어나고 갈애가 더욱더 강화 되어 집착단계에 이르면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괴로운 자는 행복을 원하고

 

인간은 안락을 추구한다. 편안해 지고 싶은 욕구이다. 그런데 안락은 즐거움과 동의어라는 사실이다. 또한 즐거움은 행복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안락, 즐거움, 행복은 같은 말이다. 이를 빠알리어로 수카(sukha)라 한다.

 

욕망을 충족시키고 나면 행복이 찾아 온다. 하지만 그것은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조건에 따라 발생된 일시적이고 잠정적 느낌이다. 조건이 사라지면 즐거운 느낌도 사라진다. 이때 불만족, 불쾌를 경험한다. 괴로움이다. 때로 고통이다. 그리고 불행이다. 이를 빠알리어로 둑카(dukkha)라 한다.

 

만족과 불만족, 쾌와 불쾌, 즐거움과 괴로움, 행복과 불행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분명한 사실은 사람들이 안락과 행복을 추구한다는 사실이다. 즐거운 느낌을 위하여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괴로운 자는 행복을 원하고 행복한 자는 행복을 더 많이 원한다. (Dukkhī sukha patthayati, sukhī bhiyyopi icchati, Vism.17.238)”라고 하였다. 지금 행복한 자는 이 즐거움이 더 유지 되기를 바라고, 지금 불행한 자는 어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세 가지 사유가 있는데

 

모든 존재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애(metta)이다. 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연민(karuna)의 마음이다. 이와 같은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내는 바탕은 무엇일까? 그것은 올바른 사유에서 기인한다. 팔정도에서 말하는 정사유이다.

 

정사유에는 욕망을 여읜 사유, 분노를 여읜 사유, 폭력을 여읜 사유 이렇게 세 가지로 설명된다. 여기서 여의다라는 말은 제1의 뜻이 일찍 사별하는 일을 겪다.’의 뜻이다. 딸을 시집보내다.’의 뜻도 있다. 멀리 떠나보내다.’의 뜻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여의다멀리 떠나보내다의 의미로 순수한 우리말이다. 이 세 가지 사유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출리(出離)에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불해(不害)]에 대한 사유라 하였다.

 

현자들은 절대 감각적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다. 감각대상을 보았을 때 즉각 알아차린다. 욕망의 추구가 재난임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덧없다는 것을 안다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즐거움 뒤에 남는 것은 뿐이라는 것을 안다. 이것이 욕망을 여윈 사유(nekkhammasakappo)이다.

 

현자들은 분노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일반사람들이 분노한다. 분노는 외적 분노와 내적분노가 있다. 밖으로 표출하는 분노가 가장 천박하다. 내적으로 분노가 표출 될 때는 불쾌하고 싫어하는 느낌이 발생된다. 하지만 현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는다. 법구경에서도 거칠지 않고 교훈적인 진실한 말만 하므로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는 님.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Dhp408)”라 하였다.분노가 여의면 자애의 마음이 채워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분노를 여읜 사유를 하면 모든존재가 행복하기를!”바라는 자애의 마음이 생겨난다. 이것이 분노를 여읜사유(avyāpādasakappo)이다.

 

현자들은 폭력을 싫어한다. 폭력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정의로운 폭력일지라도 불살생계율에 어긋난다면 그만 두어야 한다. 이렇게 폭력을 여읜 사유를 하면 연민의 마음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존재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바라는 연민의 마음을 낼 수 있다. 이것이 폭력을 여읜 사유(avihisāsakappo)이다.

 

자비의 분노 정의로운 폭력이라고?

 

사람들은 탐욕과 분노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폭력이 난무한다. 신체적 폭력뿐만 아니라 언어적 폭력도 폭력에 해당된다. 그런 바탕은 정신에서 나온다. 모두 의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애와 연민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분노하는 자에게 자애의 마음이 나올 수 없다. 분노와 자애는 상극일 뿐만 아니라 한순간에 두 마음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게 연민의 마음이 나올 수 없다. 폭력과 연민은 상극일 뿐만 아니라 역시 한순간에 두 마음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분노와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자비의 분노일지라도 분노는 분노일 뿐이다. 설령 그것이 정의로운 폭력일지라도 폭력은 폭력일 뿐이다. 자비의 분노로 사람을 교화 시킬 수 없다. 정의로운 폭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오로지 욕망과 분노와 폭력을 여의었을 때 가능하다.

 

청정한 삶의 완성

 

자비의 분노를 내기 전에 먼저 분노를 여읜 사유를 하면 모든존재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어서 내 마음이 편안해진다. 정의로운 폭력을 행사하기전에 먼저 폭력을 여읜 사유를 하면 모든 존재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연민의 마음이 일어나 역시 내마음이 편안해 진다.

 

올바른 사유를 하면 지혜가 계발 되어 편안하고 안락하고 행복해진다. 그리고 내가 청정해진다. 그래서 내가 청정해지면 국토도 청정해진다. ‘청정한 삶 (brahmacariya)’은 어떤 것인가? 초기경전에 이렇게 표현 되어 있다.

 

 

수행승이여, 이와 같은 고귀한 길이야말로 청정한 삶이다. 그것은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두고 청정한 삶의 완성이라 한다.”(S45.6)

 

 

탐진치가 소멸되었을 때 청정한 삶의 완성이라 하였다. 청정한 삶은 수행의 완성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팔정도의 실천으로 완성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자비의 분노, 정의로운 폭력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2015-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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