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초기불교를 구약에 비유한 조성택교수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11. 23:04

 

초기불교를 구약에 비유한 조성택교수

 

 

 

 

 

한형조교수에 따르면 승려 숫자만큼의 불교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승려는 티벳숭려라 한다. 요즘 논라이 되고 있는 현응스님의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강연에서 나온 말이다.

 

티벳승려 수 만큼의 불교가 있다고 하였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더 추가 한다면 학자 수 만큼의 불교, 더 나아가 불자수 만큼의 불교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형조 교수는 다양한 불교가 있는 것은 대단한 장점이다.”라 하였다. 그러면서 현응 스님의 불교가 있고, 이제열 법사의 불교가 있다고 본다.”라 하였다. 미디어붓다에서 읽은 기사이다.

 

현응스님의 강연과 관련하여 교계신문에서는 관심을 가지고 일제히 보도 하였다. 그러나 핵심만을 요약한 단편적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내용에 근거하여 비판글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 전문이 공개 되었다. 그것도 질의응답이 있고 질문자 사이에서의 대화도 볼 수 있다. 마치 녹음기를 틀어 놓듯이 현장을 보는 것 같은 글이다. 이학종기자가 작성한 깨달으면 기타도 있다고?(2015-09-07, 미디어붓다)’이다.

 

현응스님의 글은 여전히 논란 거리이다. 그것은 부처님가르침 입장에서 보았을 때 파격적이다. 아니 가르침을 부정하는 듯한 문구도 보인다. 가르침에 대하여 허무주의라 하였다. 이는 허무주의가 아니라고 애써 설명하는데, 나는 오히려 허무주의라고 생각한다. 우리 인생이 사실 허무하지 않나?”라는 구절에서 알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는 단멸론이란 말인가?

 

현응스님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조성택교수이다. 그는 초기불교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 입장을 가진 듯하다. 이제열법사의 경전적 근거가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나는 이제열 법사는 불교본질적인 입장에 있다고 본다. 원리적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다. 기독교에 구약이 있는데, 신약에 의해 재해석되지 않는 구약은 존재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대승에 의해 재해석되지 않은 초기불교는 문제가 아닌가. 다른 기회에 진지하게 논의하고 싶다.”

(조성택교수, 깨달으면 기타도 있다고?(2015-09-07, 미디어붓다)

 

 

조성택교수는 초기불교에 대하여 바이불의 구약과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이는 불교학교수로서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비교할 것이 없어서 구약인가? 이는 부처님과 가름침에 대한 모독이다. 그리고 불자들을 우롱하는 행위이다. 이적행위나 다름 없다. 대체 조성택교수가 믿는 불교는 무엇인가?

 

조성택교수가 생각하는 초기불교는 어떤 것일까? 놀랍게도 제가 생각하는 초기불교는 부처님 열반 후 500~1000년 정도 시점이 아닌가 한다.”라 하였다. 이런 분류 방식은 처음 접한다. 불멸 후 500년 이후라면 대승불교의 발생시기와 일치한다. 더구나 1000년 후까지 연장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현재 테라와다불교를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대승이나 테라와다나 똑같이 후대에 재해석된 불교로 보는 것이다.

 

조성택교수가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다. 불교근본주의라는 말이다. 마치 기독교 근본주의를 연상케 한다. 또 이슬람 원리주의를 떠 올리게 한다. 그런데 그는 원리적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다.”라 하였다. 많이 봐 준 듯 하다. 그렇다면 무어란 말인가? 원리주의 보다 한 단계 낮은 불교근본주의란 말인가?

 

조성택교수는 초기불교를 신봉하는 불자들에게 불교근본주의라는 딱지를 붙였던 때가 있다. 2011년 종교평화선언을 밀어 붙였을 때의 일이다. 그때 당시 조성택교수는 불교인을 위한 종교평화선언’, 소위 아쇼카선언의 입안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각종 매체 기고하면서 아쇼카선언에 반대하는 초기불교신봉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싸우면서 닮는 것인가?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의 지적대로 “한물간 지 오래인 서구 그리스도교를 열성적으로 추구”하는 한국 기독교의 단순한 맹목성을 지금 한국불교에서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이번 종교평화 선언은 한편으로는 종교근본주의자들의 ‘열린 태도’와 ‘각성’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쩌면 더 중요한 것으로, 진보적이며 열려있는 종교인들 간의 대화를 열기 위한 것이다. 이웃에게 대화와 평화를 제안하면서 내 종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조성택교수, 기독교 비판하면서 닮아가자는 건가, 법보신문 2011-9-15)

 

 

종교평화선언, 즉 아쇼카선언운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 주관하였다  이른바 열린진리관이라 하여 모든 종교는 근본이 같은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런 진리관은 길희성 등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타종교의 진리관과 같을 수가 없다. 무아, 연기, 열반이 어떻게 타종교 진리와 같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아쇼카선언은 대승불교에서 새롭게 해석한 불교관으로 모든 종교의 진리관은 같은 것이라 선언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뜻 있는 불자들은 반대 하였다. 하늘이 도왔는지 그때 당시 법전 종정스님이 재가를 하지 않아 물거품이 되었다.

 

조성택교수의 초기불교관은 매우 비판적이다. 이는 대승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경전을 근거로 묻는 이제열법사에게 사실상 근본주의 딱지를 붙여주고 있다. 더구나 초기불교의 역사성도 부정할 뿐만 아니라 바이블 구약에 비교하고 있다. 과연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만약 초기경전 내용을 모르고 그런 이야기 하였다면 한국불교의 수치에 해당된다. 만일 알면서도 그런 말 했다면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오늘날 한국불교에는 두 개의 기득권세력이 있다. 스님들과 학자들이다. 이들은 권위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권위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승복의 권위, PHD의 권위이다. 그들은 경전 같은 것은 관심도 없다. 오로지 자신들이 주장 하는 것이 진리인 것처러 말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경전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부처님의 가르침이 덜 완성된 것으로 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새롭게 해석한 불교를 내어 놓을 수 있을까? 설령 그들이 경전에 근거하지 않은 엉터리 이론이라 하더라도 승복과 PHD타이틀로 밀어 붙인다. 우리나라 불자들은 스님이 말이라면 곧이 듣고 PHD타이틀이라면 꿈벅 죽기 때문이다. 여기에 승복과 PHD를 겸하면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란 경전을 신뢰하지 않고 경전에 의지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티벳승려만큼 불교가 많다고 하였다. 이런 다양성이 장점이라 말하는 학자도 있다. 모든 불자들이 자신의 불교를 가지고 있다면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은 이 땅에서 발 붙이지 못할 것이다. 또 경전에 근거하여 이야기 하면 마치 덜 떨어진 사람처럼 취급한다. 새롭게 해석한 불교 이론을 내 놓아야 권위를 인정 받는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불자들은 가르침에 의지 한다. 이런 상황을 염려 해서일까 부처님은 자신과 가르침 외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나 보다.

 

 

2015-09-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