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장점만 보고 가렵니다”조직이나 단체에서 필요한 교훈
똑똑하고 부지런한 상사
작은 일에 분노 하는 사람이 있다. 속된 말로 ‘쪼잔해’ 보인다. 더구나 중책을 맡은 이가 그것도 사회적 저명인사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버럭’한다면 한순간에 기대가 무너진다.
지나치게 꼼꼼한 이가 있다. 빈틈이 없어서 작은 실수라도 용납되지 않는다. 서류의 문구 하나에 일일이 간여한다. 내용보다 형식이다. 이런 이가 책임자로 있으면 일하기 힘들다.
조직이나 단체에서 리더는 어떤 형이어야 할까? 실무형이어야 할까 위임형이어야할까? 이럴 때 나올 수 있는 말이 있다. ‘똑게’와 ‘똑부’라는 말이다.
똑게는 ‘똑똑하고 게으른’ 리더를 말한다. 부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일하기 편한 타입이다. 권한을 위임하여 맡겨 버리고 보고만 받는 타입이다. 리더로서 최적이다. 똑부타입이 있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상사형을 말한다. 모든 권한을 행사하며 세세한 것까지 챙긴다. 실무자가 리더가 된 듯하다. 이런 상사를 가진 부하는 괴롭다.
최악의 리더는 어떤 타입일까? ‘멍부’라 볼 수 있다. ‘멍청하고 부지런한’ 타입이다. 지혜가 없이 모든 일에 관여 하는 타입도 해당된다. 이런 상사를 두었을 때 발전을 기대 할 수 없다.
성향이 맞는 사람끼리
사람들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조직이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거기에는 이끌어가는 리더가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리더의 역량이다. 한마디로 리더의 그릇이 미래를 좌우한다.
리더의 역량에 따라 사람이 모인다. 그릇이 크면 인재들이 모이고 반면 그릇이 작으면 쪼잔한 사람들로 넘쳐난다. 사람들은 리더를 따라 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끼리끼리 논다. 유유상종이라 한다. 초기경전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세계에 따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S14:4)
성향이 맞는 사람끼리 관계를 맺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어느 날 부처님 앞에 많은 수행승들이 거닐었다. 그런데 무리를 지어 걷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싸리뿟따가 많은 수행승들과 함께 거니는 것을 보았는가?”(S14.15) 라며 물어 보았다.
부처님은 왜 이와 같이 말씀 하셨을까? 이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 모든 수행승들은 위대한 지혜를 지닌 자들이다.” (S14.15)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사리뿟다존자는 ‘지혜제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지혜가 많이 계발된 자들이 몰려 들었다.
부처님은 사리뿟따 뿐만 아니라 목갈라나, 깟사빠, 아누룻다 등을 추켜 세웠다. 목갈라는 ‘신통제일’이므로 신통을 가진 자들이 주변에 몰려 들었고, 깟사빠는 ‘두타제일’이므로 두타행을 듣고자 하는 자들이 몰려 들었고, 아누룻다는 ‘천안제일’이므로 하늘 눈을 가진 자들이 자연스럽게 몰려 들었다. 이외에도 우빨리에게는 계율을 수호하는 자들이, 아난다에게는 많이 배운 자들이 몰려 들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데바닷따이다. 왜 데바닷따인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 모든 수행승들은 사악한 욕망을 지닌 자들이다.” (S14.15) 라 하였다. 부처님의 교단을 탈취하려는 데바닷따 주변에는 데바닷따와 비슷한 성향이 모여 들고 무리 지어 다닌 것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이 리더에게 몰려 다니는 현상을 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S14:4) 라고 말씀 하셨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
초기경전에서 유유상종의 교훈은 사실상 데바닷따를 표적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어지는 확장 된 경에 따르면 부정적 의미의 유유상종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똥은 똥과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S14.5) 라 하였다. 침은 침과, 고름은 고름과, 피는 피와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고 하였다.
우유는 우유와 관계를 맺고, 기름은 기름과 관계를 맺는다. 버터는 버터와, 꿀은 꿀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다. 물은 물과 관계를 맺고 기름은 기름과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리고,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특징이 있다. 그것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리고,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은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그렇다면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이띠붓따까에서 이렇게 표현 되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있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부끄러움을 아는 것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할 수 없다면,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다라고 정의할 수 없을 것이고, 세상은 염소, 양, 닭, 돼지, 개, 승냥이이처럼 혼란에 빠질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하므로,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It.36)
부처님은 이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양심과 수치심이다.
여기서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주석에 따르면 “부끄러워할 만한 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의 위범에 대하여 부끄러워하는 것(Dhs.30; Pug.24)”이라 하였다.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임을 말한다.
창피함은 어떤 것일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비난의 두려움을 받을 만한 것에 대하여 비난의 두려움을 아는 것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의 위범에 대하여 비난의 두려움을 아는 것(Dhs.31; Pug.24)”이라 하였다. 역시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비난 받는 것이 창피함과 다르다.
부끄러움에 대하여 내적인 발생으로 본다. 또 창피함에 대해서는 외적인 발생으로 본다. 그래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양심이라 하고 창피함에 대하여 수치심이라 한다. 이는 내적으로 가책을 받는 것에 대하여 부끄러움이라 볼 수 있고, 외적으로 비난받는 것에 대하여 창피함이라 볼 수 있다.
이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가지 원리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은 그들과 어울린다. 데바닷따도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이었다. 그런데 데바닷따를 따르는 무리들 역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고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만을 일삼는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들에 대하여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고 하였다.
잘 배운 자는 잘 배운 자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부지런한 자는 부지런한 자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새김이 있는 자는 이와 관계를 맺고 어울리고, 지혜로운 자는 지혜로운이와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그러나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자는 잘 어울리지 못한다. 지혜로운자와 어리석은 자가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런 경향은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내적 외적으로 부끄럽고 창피한 행위이다. 경에서는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을 예로 들었다. 만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라면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을 자신의 아내로 할 것이다. 이는 동물들의 행위와 다름 없다. 그래서 경에서는 염소, 양, 닭, 돼지, 개, 승냥이의 예를 들었다.
부처님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에 대하여 이 세상을 수호하는 밝은 원리라 하였다. 이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인 것이다. 만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회라면 짐승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의 장이 되어 버릴 것이다.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축생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이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가지 원리이다.
강남좌파에 대하여
조직이나 단체에서 구성원들을 보면 경향을 알 수 있다. 특히 자발적 모임의 단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그 단체의 리더성향에 따라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든다. 결국 리더를 따라 가게 되어 있다.
요즘 ‘강남좌파’라는 말이 있다. 강남은 중산층이 많이 사는 곳으로 좌파와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강남좌파라는 명칭을 붙여 주는 것은 중산층으로 살면서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그들의 애로를 들어 주고 그들과 함께 하는 자들을 말한다.
강남좌파들은 때로 위선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그들이 의식적으로 따로 노는 경향도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고학력 중산층인 강남좌파들이 위선적인 행동을 보일지라도 사회양극화 방지나 인권, 평등개념 등에 함께 하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아 줄 수 있다.
강남좌파들이 NGO 단체의 장을 맡고 있는 것을 많이 본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으로 인하여 장을 맡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을 것이다. 그러나 자발적 모임에서 장을 맡은 강남좌파들의 행보를 보면 때로 괴리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위화감이다. 여러 채의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외제차를 몰고 다닐 때 부를 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연하의 여인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을 때 정서적으로 거부감을 느낄 때도 있다.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는 단체에서 장을 맡고 있다. 자발적 모임의 단체에서 장을 맡은 것은 사회적 지위가 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명망가이기 때문에 단체의 얼굴로 내세우기에 손색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강남에 살며 부동산을 여러 채 소유하고 더구나 외제차를 몰고 다니면 이를 어떻게 볼까? 이에 대하여 두 띠나 아래의 여인과 함께 살고 있다면 또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모임이나 단체에서는 도덕을 생명으로 한다.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순수한 자원단체 성격의 모임에서는 티없는 도덕성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하여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거나 두 띠 아래의 여인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것에 대하여 비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서적으로 거부감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청정함을 요구한다. 특히 단체의 장을 맡으려면 지혜와 덕성이 있어야 한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안다면 책 잡힐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청정하게 사는 자가 리더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조직이 청정해지고 청정한 사람들이 모여 든다.
띰바루(timbaru)열매 같은 가슴의
부끄러움과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패망의 길로 들어 서는 것과 같다. 숫따니빠따에 ‘파멸의 경(Sn1.6)’이 있다. 나이 든 노인이 젊은 여자를 취하는 것에 대하여 “젊은 시절을 지난 남자가 띰발루 열매 같은 가슴의 젊은 여인을 유인하여 그녀를 질투하는 일로 잠 못 이룬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 (stn110) 라고 표현 되어 있다.
경에서 젊은 여인의 가슴을 ‘띰바루(timbaru)’열매로 표현하였다. 띰바루 열매는 멜론과도 같이 큰 과일이다. 이는 매우 관능적인 여인상을 말한다. 마치 고대인도 조각상에서 관능적인 여인의 부조상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젊음의 시기가 지난 노인이 젊은 여인을 유인하였다고 하였다.
띰바루(timbaru)
Strychnos nux-vomica and Strychnos ignatii
옛날에는 환갑이 지난 노인이 후처를 두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요즘도 재산이 있고 능력이 있다면 젊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 할 섯이다. 그러나 나이든 노인이라면 젊은 여인을 만족시켜 주기 힘들 것이다. 한마디로 힘이 없는 것이다. 그럴 경우 철없는 젊은 여인은 “힘도 없으면서..”라고 무시할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경우 노인은 젊은 여인이 바람이라도 피우지 않을까 노심초사 할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그녀를 질투하는 일로 잠 못 이룬다면”이라 한 것이다.
환갑이 다 된 나이에 젊은 여인과 결혼 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길 것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중산층에다 더구나 사회적 지위까지 있다면 띠 동갑이 아니라 두 띠동갑, 세 띠동갑이라도 취할 수 있다. 그런 뉴스를 종종 본다.
만일 환갑이 다 된 여인이 두 띠동갑 아래의 연하남과 로맨스를 하여 결혼하였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미쳤다’라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환갑이 다 된 능력있는 남자가 두 띠동갑 아래의 여인을 맞이 하였다면 어떻게 볼까? 아마 ‘미쳤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손자 볼 나이에 자식까지 두었다면 고개를 갸웃 할 것이다.
인생을 살만큼 살 나이가 되었다면 탐욕없이 성냄없이 어리석음 없이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젊은 여인을 취하여 가정을 꾸렸다면 욕망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끌리는 대로 욕망대로 사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화도 잘 낸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분노 한다. 마치 분노로서 권력을 표출하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지혜가 생겨나는 자는 욕망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옅어져 간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공부를 하면 할수록 지혜로운 자가 되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삶의 모습만 보아도 그가 지혜로운 자인지 아닌지 파악할 수 있다.
고대인도의 정통바라문들은 인생사주기를 살았다. 학습기, 가주기, 임서기, 유행기의 삶을 말한다. 손자가 태어날 때쯤 집을 나와 숲속에 머문다. 이후 유행기라 하여 걸식을 하며 돌아 다니며 산다. 이렇게 사는 이유는 이유는 무엇일까? 청정한 삶을 위해서이다. 무소유의 삶이다. 그리고 성적교섭이 없는 삶이다. 이런 삶에 대하여 부처님은 새로운 해석을 하였다. 그래서 법구경에서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라 하였다.
나이가 들어도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마치 숫따니빠따 ‘파멸의 경’에서의 사람과 같다. 경에서와 같이 “젊은 시절을 지난 남자가 띰바루 열매 같은 가슴의 젊은 여인을 유인하여 그녀를 질투하는 일로 잠 못 이룬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 (stn110) 라는 구절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청정한 삶(Brahmacariya)이 있는 곳
어느 조직이나 단체이든지 책임자가 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자는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지혜로운 자이어야 한다. 만일 그 자리에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정서적으로 거부감을 일으키는 자가 앉아 있다면 청정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청정은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는 청정을 의미한다. 비록 출가자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것이지만 청정한 삶은 어떤 것일까?
청정한 삶(Brahmacariya)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다. 그 중에 일반적인 것 두 가지를 들라면 가르침을 실천하는 하는 삶과 성적교섭이 없는 삶이다. 가르침과 관련하여 팔정도를 실천하는 삶이라 하였다. 또 한편으로 출가수행자들에게 요구 되는 것은 성적교섭이 없는 삶이다. 그래서 청정한 삶에 대하여 성적교섭이 없는 삶이라고도 한다.
청정을 추구하는 집단에서는 청정한 사람들이 모여 들게 되어 있다. 탁월한 경향을 지닌 자들은 그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정하지 못한 집단의 경우 청정을 추구하는 자들이 버틸 수 없다. 그래서 짐을 싸 가지고 나가 버린다. 이는 초기경에서도 확인 된다.
부처님은 공부가 안 된다면 그곳을 떠나라고 하였다.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이 숲속에 의지해서 지낼 때에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 새김을 새기지 못하고, 아직 집중하지 못한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를 소멸하지 못하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위없는 안온에 도달하지 못하고, 또한 출가생활에서 조달해야 할 의복, 음식, 깔개, 필수약품을 조달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밤이건 낮이건 그 숲속에서 떠나는 것이 좋으며, 그 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M17) 라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수행에 대한 향상이 없는 수행처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는 수행처의 리더에 크게 좌우된다.
리더가 청정하지 못하면 청정하지 못한 자들만 모여 들게 되어 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도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야하리라.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으니.”(Dhp 61) 라 하였다.
청정한 자들과 어울려야 자신도 청정해진다. 청정한 수행처를 발견하면 정원이 다 찼음에도 들어 가야 한다. 어떻게 들어 가는가? 경에 따르면 “그 수행승은 목숨이 붙어있는 한 그 숲속에서 머무는 것이 좋으며, 그 곳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M17) 라 하였다.
“저는 장점만 보고 가렵니다”
사람들은 크고 작은 모임을 가지고 있다. 그 모음에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리더이다. 리더의 역량에 따라 조직이나 단체의 미래가 결정된다. 리더의 그릇이 작다면 ‘똑부’와 같은 것이다. 똑똑하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하에 결정하려 한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조직원은 들러리가 된다.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정서적으로 위화감이 생겼을 때 더욱 더 견디기 힘들다. 그럴 경우 짐 싸가지고 나가는 것이 상책이다. 이는 자신의 향상을 위해서이다. 이는 ‘수행에 대한 향상이 없는 수행처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부처님의 말과 같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리더의 단점이 있음에도 머물러야 하는 이유도 있다.
만일 단점만 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혼자 사는 사람들로 넘쳐 날 것이다. 아무리 미운 사람도 잘 뜯어 보면 좋은 면이 있기 마련이다. 그 좋은 면만 바라 보았을 때 살만 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저는 장점만 보고 가렵니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이런 말에 공감 한다.
상대방의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장점이 있기에 버틸 만 한 것이다. 상사가 ‘똑게’형이라면 다행이지만 ‘똑부’형 상사라도 배울 점은 있을 것이다. 비록 힘든 상사를 만나서 힘들긴 하지만 “저는 장점만 보고 가렵니다.”라고 생각한다면 결국 승리 하는 것이 된다. 결국 오래 버텨 살아 남는 사람이 승리하게 되어 있다. “저는 장점만 보고 가렵니다.”라는 마인드가 있기 때문에 모든 조직이나 단체가 유지 된다. 그 다음은 자신의 것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2015-09-1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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