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차(茶)를 보내 주신 법우님
차(茶)선물을 받았다. 전혀 예상치 않은 선물이다. 인터넷으로만 알고 있는 법우님부터 받은 선물이다. 거의 십년지기라 볼 수 있다. 2005년 블로그를 처음 개설 하였을 때부터 정성껏 댓글을 달아 주신 법우님이다. 초창기 때 블로그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때 글로서 격려를 많이 해 주었다. 아마 나이로 보았을 때 큰 누님뻘 되는 것 같다. 비슷한 시기에 블로그를 하게 되어 서로 격려 하기도 하며 때로 조회수 경쟁을 벌였던 것 같다.
법우님은 잊을 만 하면 나타나서 글을 주신다. 그것도 긴 글로서 정성이 가득 담긴 글이다. 그러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가장 많이 쓴 말이 아마 ‘관세음보살’일 것이다. 이렇게 10년 알고 지내며 소통한 법우님이 최근 차를 보내 주겠다고 하였다. 아마 차와 관련된 글을 읽었나 보다. 이는 전혀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보내 주겠다는 호의를 거절 할 수 없어서 수락하였다.
택배를 받았다. 커다란 박스이어서 놀랐다. 더욱 더 놀란 것은 안에 내용물이다. 전혀 기대하지 않게 다양한 차가 여러 개 있었다. 그 중에는 그 유명하다는 ‘보이차’도 있었다. 법우님이 준 글에 따르면 2010년에 10년된 보이차를 샀다고 했다. 올해로 15년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귀한 차를 선물해 주신 법우님에게 감사 드린다.
뜻하지 않게 종종 선물을 받는다. 한 번은 경전을 선물 받았다. 상윳따니까야 통합본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와 관련된 글을 올렸다. 그랬더니 어느 법우님이 사 주겠다고 하였다. 그 법우님은 글을 오랫동안 보아 왔다고 했다. 더구나 성년이 된 아들에게 까지 소개 했다고 하였다. 그런 감사의 표시로 20만원대에 달하는 경전을 선물로 보내 온 것이다. 이에 대한 소감문을 ‘일곱권이 한권으로, 진화를 거듭한 ‘단행본 쌍윳따니까야’(2015-03-1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선물을 받을 때 늘 되돌아 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글을 쓸 때 혹시 보시를 암시하는 글을 쓰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 전혀 그럴 의도가 없음에도 경전이나 차를 보내 주겠다고 하였을 때 망설여진다. 성의를 보아서는 받아 주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마음을 내어 기쁨으로 보시한다면 받는 것이 원칙일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도 “탐욕을 떠난 자가 탐욕을 떠난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흔쾌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그 보시는 세간적 보시 가운데 최상이라고 나는 말한다.”(M142) 라 하였다. 여법하고 청정한 보시라면, 보시한 자는 주어서 기쁘고, 시물을 받는 자는 받아서 기쁘기는 마찬가지 이다.
주고 받는 것은 선한 행위이다. 특히 법보시와 재보시가 그렇다. 부처님 당시 수행승들은 탁발에 의존 하였는데 재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재가는 청정한 수행승에게 보시함으로써 공덕을 쌓고 수행승은 자애와 연민의 법보시를 함으로써 서로 공덕을 지었다. 지금도 남방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법시와 재시의 전통이 남아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법우님이 보내 온 포장물을 열어 보았다. 보이차를 비롯하여 모두 5종 16개이다. 금액으로 따지면 꽤 값이 될 것 같다. 이 중에 초코렛처럼 생긴 것을 뜯어 보았다. 겉표지에는 간자체로 ‘철관음(铁观音)’이라 쓰여 있다. 열어 보니 작은 알갱이형태이다. 그러나 우려내고 나면 커다란 잎으로 변한다. 맛을 보았다. 속이 후련할 정도로 끌어 당긴다. 우리나라 녹차와는 다른 맛이다.
차도구를 모두 갖춘 것은 아니다. 임시로 차를 우려 마실 수 있는 기본도구만 갖추어져 있다. 이렇게 차도구를 갖추어 놓고 손님과 함께 차를 마신 것은 이제 불과 두 달 째이다.
이전에는 차를 몰랐었다. 손님이 와도 봉지로 된 커피만 대접할 뿐 차담을 나눈다는 것은 생각 하지 못하였다. 다만 막연하게 차도구를 갖추어 차담 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다.
금년초부터 대외 활동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특히 불교 관련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차를 대접하였다. 차도구가 있어서 여러가지 다양한 종류의 차를 내 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손수 차를 끓이고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나누어 주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하다 보니 대화가 훨씬 부드럽고 수월해짐을 알게 되었다. 이른바 차담(茶談)인 것이다.
차의 효과를 본 적이 있다. 밤을 세워 이야기를 할 때 차는 매우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차를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은 맑아지고 어떤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이야기가 끊임 없이 계속 됨에 따라 밤을 세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차담이야말로 매우 효과적인 대화 수단임을 알 수 있다.
선사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누군가 “도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선사는 대답을 하지 않고 “차나 한잔 하시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는 쓸데 없는 질문을 차단하려는 것으로 보았다. 도가 무엇인지 깨달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물었을 때 난감 하였을 것이다. 이럴 때 선사들은 할과 방으로 일깨워 주었다.
선사들은 관념으로 도나 깨달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하는 법을 봄으르써 알게 하였다. 한대 맞았을 때 아픔을 느낀다면 이는 실제 하는 것이다. 단지 알음알이로 아는 것과 다른 것이다. 법을 본 것이다. 이렇게 고함(할)과 방망이(방)으로 일깨워 주려 했다. 하지만 이는 상근기에 해당된다.
만일 가르침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이 ‘도가 무엇입니까?’ 또는 ‘깨달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할까? 다짜고짜 고함지르고 방망이질 한다면 자비롭지 않은 행위라 볼 수 있다. 그럴 때 “차나 한잔 하시게”라고 말하면 훨씬 부드러울 것이다. 그리고 자비로워 보일 것이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차담하면서 오랜 시간 이야기하면서 쉬운 가르침부터 가르쳐 줄지. 이렇게 본다면 “차나 한잔 하시게”라는 말은 차담으로 대화로서 가르침을 베풀겠다는 자비의 말로 보인다.
차문화는 불교인들이라면 매우 친숙하다. 특히 스님들 세계에서는 거의 일반화 되어 있다. 어디를 가든 차도구가 갖추어져 있어서 차담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스님을 만났을 때 “차 한잔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적극적인 의사표시라 볼 수 있다. 어느 스님은 일부로 차담을 요청한다고 한다. 절에 찾아 온 재가자를 보았을 때 불러서 차담 하자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차담하다 보면 절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고 스님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차에 대하여 잘 아는 스님에 따르면 차를 함께 하면 30분 이야기 할 것을 여러 시간 대화할 수 있다고 하였다. 바로 이것이 차문화의 장점이라 하였다. 이렇게 차담을 하게 되면 어떤 사람도 대화 상대가 된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가 가깝게 지내게 된 것도 차때문이라 한다. 서로 다른 문화와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도 차만 마주하면 마치 오랜 친구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음을 말한다.
차를 보내 주신 법우님에게 감사드린다. 넷상으로만 소통한 법우님이지만 이렇게 귀한 선물을 받고 보니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전혀 의도 하지 않았음에도 차를 받게 되어 기쁘다. 좋은 사람들이 찾아 오면 이제 제대로 차대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2015-09-1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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