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은 함께 모여서 해야
게으르지 않기 위해
일요일 사람들은 무엇을 할까? 대부분 아침에 늦잠 잘 것이다. 일요일 하루만큼은 마음 놓고 쉬는 날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늦잠 자는 호사를 누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하는 일 없이 무료하게 보내는 사람이 일요일에 늦잠 자는 것은 게으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일요일에 늦잠 자지 않는다. 평소와 같이 일찍 일어난다. 추분도 지난 요즘 해가 늦게 뜨지만 여섯 시를 넘지 않는다. 다섯 시 가량 눈을 뜨면 “어 벌써 다섯 시네”하면서 자리를 박찬다. 그리고 요즘 새롭게 시작하는 운동을 한다. 몸을 실어서 하는 근육운동이다. 헬스장을 운영하는 친척의 권고에 따라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스쿼트 등을 한다.
일요일에도 사무실에 나간다. 개인 사무실이기 때문에 제2의 집이나 다름 없다. 평소와 같이 일찍 나간다. 7시 이전에 도착하면 9시까지 두 시간이 확보 된다. 그 시간에 글을 쓴다. 글을 쓰기 위하여 사무실에 일찍 나가는 것이다.
사무실에는 걸어 간다. 20여분 걸리는 거리이지만 쓸 거리를 생각하며 걷다 보면 지루하지 않다. 사무실에 도착 하면 대충 시나리오가 정해져 있다. 단지 모니터에 옮기기만 하면 된다.
하루도 빠짐 없이 글을 쓴다. 어떤 날은 두 편, 세 편도 쓴다. 이렇게 매일 쓰는 이유는 게으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한번 글을 놔 버리면 쓰기 싫어 진다. 그러나 매일 의무적으로 숙제 하듯이 쓰기로 작정을 한다면 습관이 된다. 한번 습관 들여 놓으면 고치기 힘들듯이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게으르지 않기 위해 글을 쓰는 면도 있다.
TV를 보며 시간 때우는 사람들
청명한 일요일이다. 일요일이 되면 사람들은 잘 보내려 한다. 그래서 멀리 놀러 가려 하는 것이 보통이다. 차를 타고 먼 곳까지 가다 보면 일주일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릴 것이다. 그러나 그때뿐이다. 행락철이 되면 귀경길이 막히기 때문에 좋았던 기분은 모두 반납된다.
일요일 하릴없는 사람들은 권태와 무료함에 못 이겨 한다. 그래서 TV를 시청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먹는 것으로 시간을 때운다. 일부 사람들은 등산등으로 단련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TV앞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시간을 때우는 것이 보통이다.
TV를 보며 시간 때우는 모습은 그다지 보기 좋지 않다. 게을러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특별한 취미생활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TV시청이외 딱히 할 일이 없다. 그런 TV에서는 온갖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는 것으로 가득하다. 특히 요즘 유행하는 먹방이 그렇다.
먹방과 같은 프로를 보며 군침을 흘린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수동적으로 TV시청 밖에 없는 사람이 남이 먹는 것을 보고 입맛 다신다면 한심해 보일 것이다.
일요일 집중수행하고자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일요일이다. 일요일 일찍 일어나서 글쓰기 등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지하철을 탔다. 목표지는 논현동에 있는 H명상원이다. 일요일 집중수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참여하고자 출발한 것이다.
H명상원에 도착하니 정오가 조금 지났다. 이미 오전 9시부터 집중수행시간이 시작 되었기 때문에 도중에 온 것이나 다름 없다. 집중수행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다. 한시간 간격으로 좌선과 경행을 번갈아 가며 한다.
점심을 먹고 1시부터 좌선을 시작하였다. 넓은 홀에는 두 사람 있었다. 매주 일요일 개방을 하기 때문에 누구나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찾아와 수행 하면 된다. 매주 세 번째 주 일요일의 경우 가평수련원에서 집중수행이 있고, 매주 네 째 주 일요일에는 금, 토, 일 이렇게 삼일간 집중수행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주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두 사람이 앉아 있다.
온갖 망상이 일어나
점심을 먹어서일까 포만감이어서일까 자리에 앉았으나 집중이 안 된다. 다리도 저려서 자세를 계속 바꾸어 본다. 그러나 앞에 있는 두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특히 한분은 제대로 좌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좌선하는데 익숙치 않다. 평소 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한 때만 해서 그런지 몹시 불편하다. 그리고 온갖 망상이 일어나 5분은 커녕 1분도 집중하기 힘들다. 마치 잠못자는 사람이 밤새 뒤척이듯이 온갖 망상과 다리 저림으로 수시로 자세를 바꾸면서 고통스런 한시간을 보냈다.
이곳 명상원에서는 늘 그렇듯이 한시간 좌선을 하면 또 한시간은 경행을 한다. 좌선시간이 길다고 볼 수 있다. 무상사에 다녔다는 법우님에 따르면 그곳에서는 40분을 넘지 않는다고 하였다. 서양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은 과도하다고 말한다.
경행시간은 한시간이다. 그러나 경행하기에 한시간은 긴 시간이다. 그래서 30분 가량 경행한 다음 먼저 온 두 명과 함께 차담을 하였다. 그렇다고 다실이 있어서 차도구를 갖추어 놓고 하는 차담이 아니다. 서서 머그잔에 티백을 넣어서 마시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앞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는 법우님과 대화 하였다. 좌선할 때 고통스러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전에 집중하였던 좋은 경험을 되살려 그렇게 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망상만 일어났다고 하였다.
그 법우님은이 말하기를 무언가 잘 하려면 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럴경우 “그냥 내버려 두세요”라고 말하였다. 이전에 잘 되었던 경험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잘 할려고 욕심 낸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서 법우님의 충고대로 내버려 두기로 하였다.
우 꼬살라 사야도 앞에서
두 번째 좌선시간이 되었다. 넓은 홀에 세 명 밖에 없었지만 집에서 홀로 하는 것 보다 훨씬 분위기는 좋았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모여서 함께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임을 알 수 있다.
홀에는 사야도의 커다란 초상화가 하나 있다. 미얀마 고승이라 한다. 마음 보는 수행처로 널리 알려진 쉐우민수행센터의 창시자 ‘우 꼬살라’ 사야도라 하였다. 지금은 작고 하였다고 한다. 그 제자는 ‘우 떼자니야’ 사야도라 한다. 이곳 H명상원의 법사가 스승으로 삼았던 두 분 사야도의 이름이다.
벽면에 커다란 초상화는 우 꼬살라 사야도이다. 사진으로 보았을 때 거의 90 가까이 되는 고령으로 보인다. 그런데 매우 청정해 보인다. 사진만 보아도 청정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 사야도 초상화를 향하여 자리를 잡았다. 초상화가 걸려 있는 벽면을 보고 자리 잡은 것이다.
“놓아버림, 놓아버림,…”하며
두 번째 좌선시간은 첫 번째 좌선시간과 달랐다. 우선 임하는 자세가 달랐다. 휴식시간에 법우님의 충고대로 놓아버리려 노력하였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놓아버림, 놓아버림,…”하였다.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머리에서 엉덩이까지 느낌을 확인하고 꼬끝에 호흡을 집중하였다. 얼굴 전면에서 집중하려고 노력하였다. 주변환경은 좋지 않았다. 도시의 건물이라 그런지 기계음이 들리고 더욱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바로 옆 건물에 있는 골프연습장이다.
골프연습장에서는 쉴 새 없이 “탁, 탁,…”하며 골프공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편에서는 좌선한다고 앉아 있는데 또 한편에서는 운동한다고 골프공을 때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면전에서 호흡에 집중하는 것에 대하여 ‘빠리무캉(parimukhaṃ)’이라 한다. 주변 기계음과 골프공치는 소리 때문에 사실상 코 끝으로 호흡에 집중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얼굴 전면에서 호흡으로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럴 때 마다 법우님이 말한대로 ‘놓아버림’을 주문처럼 생각하였다. 그러자 망상이 덜 했다.
그 상태로 죽 밀고 나갔는데
마침내 조금씩 집중이 되기 시작하였다. 의도적으로 면전에서 호흡을 보려고 노력하고 욕심내지 않기 위하여 놓아버림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내었을 때 망상이 약화되었다. 그 상태로 밀고 나가면 될 것 같았다.
계속 호흡에 의도적으로 집중하자 마침내 변화가 왔다. 이전에 느꼈던 가벼운 기분이다. 다리를 평좌로 하였을 경우 5분을 버티기 힘들었는데 전혀 반응이 없다. 다리에 통증도 없을 뿐더러 허리는 펴지고 미동도 앉게 된 것이다. 이 상태가 되면 더 이상 자세를 바꾸지 않아도 된다. 그 상태로 죽 밀고 나가면 된다.
자세가 안정되자 집중도 잘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수시로 생각이 일어나지만 이전처럼 몸을 비틀정도가 아닌 것이다. 단지 일어났다고 사라진다고 생각하며 지켜 보았다. 여기서 지켜 본다는 것은 이전에 들었던 기억을 되살린 것이다.
집중이 없는 알아차림은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러나 집중이 된 상태에서 일어난 생각은 치명적이지 않다. 그 생각으로 인해 판이 깨질 정도가 아니라 미세한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이전에 들었던 것이나 경전에서 보았던 내용이다. 이럴 경우 역시 판이 깨질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일어난 생각이나 한생각을 내긴 하지만 집중된 상태이기 때문에 알아차림이 유지 된다.
집중된 상태에서 알아차림이 진짜 알아차림이라 하였다. 지난번 여름 집중수행 당시 황영채 선생은 집중이 없는 상태에서 알아차림은 망상일 뿐이라 하였다. 왜 그럴까? 집중이 없는 상태에서는 알아차리더라도 망상에 끌려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좌선하면서 집중된 상태에서 한생각이 일어나거나 한생각을 내어도 대세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생각이 일어나도 단지 객관적으로 생각이 ‘일어났구나’라고 알아차리면 이전 생각이 되어 버린다.
한생각 낼 경우는 대게 들었던 내용이다. 휴식시간에 법우님에게 들었던 ‘놓아 버려라’가 대표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라는 것이 ‘기억’과 관련 있음에 틀림 없다. 호흡으로 집중에 들어 갈 때 이전에 배웠던 것이나 들었던 것, 보았던 것을 기억해내서 적용한다면 망상이 비집고 들어 올 틈이 없다.
45분 동안 자세한 번 바꾸지 않고
집중된 상태가 되면 자세가 자연스럽게 바르게 된다. 허리는 펴지고 팔과 다리, 몸 등이 부드러워진다. 매우 가벼워진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어떤 면으로 본다면 나른해 진다고 볼 수 있다.
몸은 가벼워 지면 마음도 밝아진다. 일어나는 생각이 있긴 하지만 판을 깰 정도는 아니다. 이런 상태를 죽 유지 하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되었을 것이라 여겼다. 어느 정도 시간이 되자 다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세를 바꿀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좌선을 시작한지 45분이 지난 것이다. 45분 동안 자세한 번 바꾸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아마 집중의 힘일 것이다.
마음이 빛난다는 것은
좌선중에 갑자기 밝아 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가도 어두워 진다. 밝아 졌을 때 이런 생각이 떠 올랐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보았던 ‘빛나는 마음의 경(A1.50)’이다.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Pabhassaram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upakkiliṭṭhanti.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로 오염된다.” (A1.49, 전재성님역)
이 구절은 대승불교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고 하였다. 이는 능가경에서 ‘여래장은 청정한 모습을 지녔지만, 객진번뇌에 의해서 오염되어 부정하다.’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초기경에서 말하는 빛나는 마음은 잠재의식으로 이해된다. 이에 대하여 ‘존재의 흐름(bhavaṅgacitta, 有分心)이라 하였다. 이런 마음에 대하여 “ 다가오는 번뇌에 의해서 오염된다는 것은 잠재의식과 함께 생겨난 것이 아니라 나중에 빠른 포착의 찰나에 나타나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에 의해서 마음이 오염된다는 뜻이다.”(33번 각주) 라고 설명되어 있다.
잠재의식이라 불리우는 바왕가찌따는 모든 존재에게 있는 마음이다. 태어나면서태어 죽을 때 까지 한 존재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마음이다. 그래서 죽기 전까지는 계속 유지된다. 그런데 경에서는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라 하였을 때 이는 바왕가찌따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로 오염된다’고 하였다.
번뇌를 일으키지 않으면 마음은 빛날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에서 벗어난다.”(A1.50) 라 하였다. 각주에 따르면 “여기서 ‘벗어나는’이라는 것은 포착의 순간에 탐욕의 여읨, 성냄의 여읨, 어리석음의 여읨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지혜에 상응하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 나타나면,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그 관계는 계행을 지키고 행실이 바른 자식이나 제자 때문에 부모나 스승이 ‘훌륭하게 공부시키고 훈계하고 가르쳤다.’고 칭찬하는 것과 같다.” (34번 각주) 라 하였다.
좌선 중에 마음이 빛나는 것은 번뇌가 일시적으로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경에서와 같이 마음은 빛나는 것인데 탐욕이나 성냄과 같은 오염원으로 가려져 빛이 바랜 것이다. 그래서 탐욕 등의 번뇌를 걷어 낸다면 마음은 빛날 것이다.
수행은 함께 모여서 해야
일요일 오후 한적한 도심의 수행처에서 반나절을 보냈다. 두 번째 좌선에서 집중이 되어 약간의 고요함을 맛 보았다. 이에 함께 하였던 법우님은 “글을 써서 그런지 참 빠르네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앞서 휴식시간에 한마디 해 주었던 법우님의 말이 컸다.
수행은 모여서 하는 것이 낫다. 외국인들이 수행하는 무상사에서 안거 등을 하며 보냈다는 어느 법우님의 말이 틀림 없다. 그 법우님에 따르면 숭산스님의 일화를 소개 하면서 “감자를 씻을 때 바구니에 넣고 씻으면 서로가 서로를 씻겨 주기 때문에 더 잘 씻겨 진다. 마찬가지로 수행도 여러 명이서 함께 해야 서로 향상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수행은 함께 모여서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잘하는 사람에게 배우고 잘 하는 사람을 따라 하다 보면 가장 잘 하는 사람과 같이 될 것이다. 그래서 숲속에 아라한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 몰려 가는가 보다.
한번 집중이 되고 나면 그 상태는 꽤 오래 지속된다. 경행을 하면 날아갈듯이 사뿐사뿐하다. 마치 정화된 물과 같다. 탐욕 등 오장애가 가라 앉았을 때 일시적으로 탐심이나 성냄, 들뜸 등이 일어나지 않는다. 지하철을 타고 귀가 할 때 평소 같으면 무료한 시간을 참지 못하여 검색을 하거나 간단한 글을 썼을 텐데 다만 눈을 감고 조용히 내려 온 것을 보면 변화를 실감한다.
2015-10-0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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