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앞에 사띠를 확립하고
일요일이다. 요즘 가을철 좋은 계절이라서 이곳 저곳에서 축제가 한창이다. 코스모스축제, 세계 춤 경연 등 전에 듣지 못하던 축제와 문화제라는 이름으로 지방자치단체에서 경쟁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더구나 연휴를 맞이 하여 단풍놀이 겸해서 멀리 나가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일까 수도권의 고속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고 하였다.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날이 일요일이다. 주오일제라 하지만 서민과 소시민, 자영업자들이 부담 없이 쉴 수 있는 날이 일요일이다. 황금 같은 연휴, 금쪽 같은 일요일을 어떻게 보낼까? 대부분 밖에 돌아 다니거나 집에서 TV시청하며 보내는 사람들이 대부분 일 것이다. 그리고 외식을 하거나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이런 때 수행처에 다녀 왔다. 이번이 두 번째 이다.
수행처에 갔는데
두 주 연속으로 수행처에 갔다. 전주에 갔었을 때 어느 정도 성과를 보았기 때문에 이번 주도 기대하며 갔다. 일요일을 편히 쉴 수 있지만 수행처에서 보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이주 연속으로 간 것이다.
일요일 수행처는 개방되어 있다. 누구나 와서 자유로이 좌선과 경행을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찾아 간 날에는 모두 5명이 함께 하였다. 바로 전주에 3명인 것 보다는 2명이 더 많다. 원래 9시부터 개방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점심먹고 도착 하였다. 1시에서 2시까지 좌선이고, 2시부터 3시까지 경행, 3시부터 4시까지 좌선 순이다. 좌선이 두 타임이 있는 것이다.
“먼저 이완하십시오”
첫 번째 좌선에 임하였다. 그러나 실패 하였다. 늘 그렇듯이 번뇌망상으로 가득 하였다. 그래서 집중할 수 없었다. 번뇌만 일어나다 보니 5분을 버티기 힘들었다. 자주 자세를 바꾸다 보니 시간만 지나가고 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첫 번째 타임은 버리기로 하였다. 다음 타임에는 잘 해 보자고 다짐하면서 편하게 보냈다.
경행시간은 1시간이다. 그런데 1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30여 분 경행을 하니 지루하고 다리만 아프다. 후반부에는 머그잔에 티백을 넣어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마침 전주에 도움을 주었던 법우님이 가까이 있길래 몇 가지 물어 보았다.
법우님에게 첫 번째 타임에서 집중이 되지 않은 것을 말하였다. 혹시 방법이 잘못 되지 않았는지 물어 본 것이다. 실참수행경력이 있어 보이는 법우님은 ‘이완’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집중하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호흡을 전면에 만들어 하려다 실패 하였다고 하자 “먼저 이완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강제로 호흡을 만들어 하려 하면 할수록 경직된다는 것이다. 방법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긴장을 풀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완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집중할 수 있음을 말한다.
법우님은 전주에 ‘놓아버림’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었다. 잘 하려고 하는 마음을 놓아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놓아버림, 놓아버림..”하며 긴장을 풀었더니 집중이 되었다. 그 집중이라는 것은 깊은 집중이 아니라 전면에 사띠 하며 알아차리는 약한 집중을 말한다.
얼굴 앞에 사띠를 확립하고
위빠사나수행에 대하여 지혜수행이라 한다. 이는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사마타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집중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전면에 사띠하는 것이다. 이렇게 얼굴 전면에 사띠하는 것에 대하여 전문용어로 ‘빠리무캉(parimukhaṃ)’이라 한다. 빠리무캉은 대념처경에 나오는 말이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Idha bhikkhave bhikkhu araññagato vā rukkhamūlagato vā suññāgāragato vā nisīdat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여기 수행승이 숲으로 가고 나무 밑으로 가고 한가한 곳으로 가서 앉아 가부좌를 틀고 몸을 바로 세우고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여 새김을 확립하여 숨을 들이쉬고 새김을 확립하여 숨을 내쉰다.”(D22, 전재성님역)
전재성님 번역에 따르면 빠리무캉에 대하여“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여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라 하였다. 이 말에 실감 하였다. 법우님의 조언대로 이완을 한다음 곧바로 얼굴 전면에 마음을 두었다. 그 때 경전에서 읽은 구절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여”이 생각났다. 얼굴 앞에서 사띠를 확립하는 것임을 알았다.
얼굴 앞에서 사띠를 확립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한마디로 ‘마음을 잡고 있다’는 말이다. 마음이 달아 나지 못하도록 ‘면전에 묶어 두는 것’이다. 이렇게 면전에 마음을 두었을 때 밝아 진다. 밝아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면 계속 지켜 보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경에서는 “새김을 확립하여(satiṃ upaṭṭhapetvā)”라 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확립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마음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붙들어 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단단히 고정시켜 놓는 것이다. 마치 콩크리트 치는 것처럼 굳세게 묶어 두는 것과 같다.
주석을 보면
빠알리어 문구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와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라고 번역하였다. 이 문구와 관련하여 M27의 주석에서 위방가를 빌어 “이 마음챙김은 잘 확립되었다. 코 끝이나 입(얼굴)의 표상에 잘 확립되었다.”라 하였다. 또 무애해도를 참고 하여 “철저히 파악하여 [반대편의 법인 잊어버림으로 부터의] 출구인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나서”(889번 각주) 라는 뜻이라 하였다.
번역서의 각주나 주석의 내용은 주석을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주석의 내용 보다는 원문에 실려 있는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라는 문구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어떻게 해야 사띠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핵심내용이다.
번뇌망상과 기억
전면에 사띠를 확립하게 되면 마음이 현재의 마음이 도망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치고 들어 오는 마음이 있다. 잡념, 망상, 번뇌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띠를 유지하면 판을 뒤집을 정도가 아니다. 알아차리면 사라진다. 이는 얼마나 사띠를 확립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사띠가 느슨하다면 치고 들어 오는 번뇌에 휘말려 버릴 것이다. 그때 재빨리 빠리무캉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망상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다시 면전에 사띠를 확립하는 것이다.
사띠중이라도 번뇌망상은 일어난다. 그러나 판을 뒤집을 정도는 아니다. 만일 사띠확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번뇌망상이 일어났다면 휘둘려 버릴 것이다. 5분도 버티지 못하고 자세를 바꾸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첫 번째 타임에 그랬다. 그러나 법우님의 이완 이야기, 그리고 잘 하려고 하는 마음을 놓아 버림을 늘 마음속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기억하였다.
사띠확립 중에 가르침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치명적인 것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치고 올라 오는 번뇌망상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생각해 낸 다든가 법우로부터 들은 말을 떠 올리는 행위는 안전하다. 그래서 사띠에 대하여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기억의 의미가 또 하나는 면전에서 마음을 붙들어 매는 역할이다.
다리저림이 너무 심해서
두 번째 타임이 시작 되자 마자 느낌을 훑어 내리고 곧바로 면전에 사띠를 두었다. 눈을 감고 얼굴 앞에 마음을 두자 밝아졌다. 그 밝아짐을 계속 붙들어 매 두고자 하였다. 마음이 다른 곳에 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도중에 번뇌망상이 치고 올라 왔지만 곧바로 복원 되었다. 이렇게 앉아 있다 보니 자세를 바꾸지 않게 되었다. 몸도 이완 되었는지 가벼워 졌다. 그러나 문제는 다리 저림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되자 다리가 저리기 시작하였다.
평좌(平坐)를 한 오른쪽 발 부위의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처음에는 무시하려 하였다. 다리가 저려도 면전에 마음을 두면 잊어 버린다. 그러나 갈수록 심했다. 다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마치 골절상을 입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계속 아프지는 않다. 주기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파도가 밀려 오는 것 같다. 1파가 지나면 2파가 오고, 또 3파가 오는 식이다.
주기적으로 통증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대로 조금만 지나가다가는 다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자세를 바꾸기로 하였다. 시계를 보니 거의 45분이 흘렀다. 45분 동안 자세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세를 바꾸고 5분 가량 다리를 자유롭게 하였다. 그러나 사띠는 약하게 확립되어 있었다. 다시 자리를 잡고 좌선을 시작하였다. 불과 5분의 휴식을 주었는데 다리가 언제 아팠느냐는 듯 멀쩡하였다. 나머지 10분 동안도 면전에 사띠를 확립하며 보냈다. 끝나는 종소리가 났을 때 성공적으로 좌선을 마친 듯 하였다. 마치 잠을 잘 잔 후에 개운 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집중수행하면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도 빠리무캉을 해 보았다. 그러나 소음과 흔들림 등으로 인하여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무료 하지 않았다. 40여 분을 탔지만 금방 도착한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철을 타고 간다든가 누군가를 기다릴 때 눈을 감고 빠리무캉하면 시간이 잘 갈 것 같다.
빠리무캉하는 것에 대하여 걸어 가면서 할 수 없다. 이는 눈을 감아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좌선시에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경에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바로 세우고”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다. 또 될 수 있으면 한적한 곳이 좋다고 하였다. 경에서 “숲으로 가고 나무 밑으로 가고 한가한 곳으로 가서”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처가 가장 좋다. 집에서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모여서 함께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더구나 지도해 주는 스승이 있고 경험이 있는 도반이 있어서 금상첨화라 볼 수 있다.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일요일 두 번째로 수행처에 나가 좌선을 하였다. 두 번째 일요일을 맞이 하여 빠리무캉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경전상에 언급되어 있는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여”라는 짤막한 문구가 핵심인 것이다. 얼굴 앞에서 마음을 두는 것이다. 붙들어 매듯이 두는 것이다. 그리고 일어나는 번뇌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오랫동안 유지 될 수 있다. 이렇게 사띠가 유지 된 상태에서 번뇌가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할 수 있다. 이렇게 관찰하였을 때 대념처경에서는 이렇게 표현 되어 있다.
Mattāya anissito ca viharati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그는 세상의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D22)
2015-10-11
진흙속의연꽃
'지행합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장 낮은 자세로 자신의 할 바를 묵묵히, 지행합일 김광하님의 무주상보시 (0) | 2016.12.18 |
---|---|
관음선종의 거주식 선원(residential Zen center)에 대하여 (0) | 2016.09.04 |
마음의 전구가 켜졌을 때 (0) | 2015.11.22 |
수행은 함께 모여서 해야 (0) | 2015.10.04 |
묵묵히 자신의 할 바를 다 하는 군포교 현장 (0) | 2014.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