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침체 되었을 때 재래시장으로
재래시장에 가면
종종 재래시장에 간다. 삶이 무료 하고 따분함을 느낄 때 기분전환 하는데 최고이다. 더구나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시장통에 있는 국밥집이 생각 날 때 슬슬 걸어 갈 때가 있다. 버스로 세 정거장 거리에 ‘남부시장’이 있고, 네 정거장 거리에 ‘중앙시장’이 있다. 그런 시장에 가면 뭐라도 하나 사 오게 된다.
시장에서 이곳 저곳 벌려 있는 좌판을 보면 삶의 활력을 느낀다. 요즘 밤을 좋아 한다. 좌판에서 굵은 공주밤을 팔고 있다. 오천원어치 사니 무게가 느껴진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산 ‘밤가위’로 벗겨 먹으면 깨무는 맛이 난다. 인공으로 된 간식거리가 아닌 천연간식을 먹는다.
재래시장은 뭐든지 싸다. 싼맛에 가고 인정에 끌려 간다. 사람사는 모습, 특히 서민들이 살아 가는 삶의 터전이자 삶의 생생한 현장이다. 마치 물고기가 파닥거리듯이 활력넘치는 시장통 분위기는 온갖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대형마트와 비할 바가 아니다.
재래시장도 현대화 되어 있다. 동서남북에 게이트가 있고 천정이 있어서 비바람에 보호 되어 있다. 노점에는 갖가지 채소와 과일 등 먹거리 뿐만 아니라 김밥, 떡복이, 호떡 등도 판매하고 있다. 한마디로 재래시장에 가면 없는 것 빼고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침체 되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재래시장에 간다. 재래시장 이미지가 서민적이어서일까 시장을 찾는 사람들도 서민들이다. 편리한 대형마트가 있음에도 도시의 중앙에 자리잡은 시장에 몰려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싸기도 하고 인정이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 사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일 것이다. 지금 무기력하고 침체 되어 있다면 재래시장을 둘러 볼 일이다.
삶이 권태롭다고 느껴질 때 또 우울하다고 느껴질 때 재래시장을 한 바퀴 돌면 활력이 생긴다. 이렇게 본다면 재래시장은 훌륭한 ‘힐링장소’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나올 수 없다. 무언가 하나라도 사갖고 나와야 한다. 대형마트에서 카트를 몰고 사는 것과 다르다. 그래 보았자 고작 몇 천원 단위의 물건 구매에 지나지 않는다.
가진 자들의 의무
생계를 위하여 길거리에서 파는 것은 비싼 것이 아니다. 고작 몇 천원 단위이다. 이런 노점은 재래시장 뿐만 아니라 주택가에서도 볼 수 있다. 반찬만을 파는 노점이 반짝 생겨 나기도 한다. 과일이나 채소를 파는 노점도 종종 볼 수 있다. 손으로 만든 두부나 묵을 파는 노점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외면한다.
사람들은 주차시설이 잘 되어 있는 크고 편리한 대형마트를 활용한다. 그곳에서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잔뜩 쇼핑을 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다. 그렇다고 대형마트가 가격이 싼 것도 아니다. 초창기에는 할인점이라 하여 시장 보다 저렴하였으나 이제 대형마트가 일반화 되다 보니 결코 싸지 않다. 싼 곳은 재래시장이다. 그리고 길거리 노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계형 노점을 이용하지 않는다.
노점에서 물건을 사 주어야 한다. 그래 보았자 몇 천원에 지나지 않는다. 생계를위한 노점에서 물건을 사 주었을 때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 나갈 것이다. 가급적 깍지 말고 부르는 대로 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가진 자들의 의무가 아닐까?
길거리에서 구입한 난(蘭)
재래시장 게이트를 빠져 나오다 ‘난(蘭)’을 발견하였다. 난을 보니 사고 싶은마음이 강하게 일어났다. 사무실에 난이 있기는 하지만 잎파리가 풍성한 난을 보니 마음도 풍성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난의 가격을 물어 보았다. 이만이천원이라 한다. 이럴 때 사람들은 깍고자 한다. 십프로 깍아 이만원에 흥정을 하였다. 그러자 남는 것이 없다며 원래 가격에 달라고 한다. 아마 계속 밀어 붙였으면 할인된 가격에 샀을지 모른다. 그러나 달라는 대로 주었다. 노점에서 물건을 사면 깍지 말라는 말이 있다. 콩나물가격 깍듯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노점에서 난을 구입하였다. 사무실을 장식하는 또 다른 식물가족이 생긴 셈이다. 난은 한눈에 보기에도 풍성해 보인다. 꽃이 피려는 듯이 꽃대가 여기저기 삐죽삐죽 튀어 나왔다. 꽃집에서 난을 살 수도 있었지만 노점에서 어렵게 살아 가는 사람에게, 그것도 달라는 대로 주고 산 난이다.
하나 둘 모으다 보니
사무실에 식물로 가득하다. 하나 둘 모으다 보니 사방이 식물이다. 선물로 받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 사 온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비싼 것들이 아니다. 노점에서 사온 것들이 많다.
사오기만 하고 돌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매주 물을 주고 있다. 건물에서 나오는 수도물이다. 그런데 수도물을 줄 때 마다 식물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광물이 없고 소독된 물을 주었을 때 영양소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물은 잘 자란다.
8년 전에 산 행운목은 천정에 닿을 듯하다. 7년전 동대문 시장 노점에서 5천원 주고 산 대나무의 한 종류 역시 천정에 닿을 듯 하다. 화원에서 사온 야자나무와 벤자민은 기세 좋게 뻗어 나가는 것 같다. 수도물만 주어도 식물은 잘 자란다.
식물에 약수를 주었더니
식물에 물을 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식물이 물만 먹고 사는데 이왕이면 좋은 물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요즘 ‘약수’를 주고 있다.
수리산 산림욕장 입구에 ‘수리천약수터’가 있다. 사무실에서 걸어서 약 20여분 거리이다. 베낭에 패트병 네 개를 넣고 일주일에 한 두 번 물을 뜨러 간다. 특히 점심이후 활력이 떨어질 때 자리를 박차고 가는 곳이 약수터이다. 이렇게 약수터에 한번 갖다 오면 기분전환이 된다. 더구나 등 뒤에는 묵직한 물이 있어서 뿌듯하기도 하다.
약수를 떠 오는 것은 차나 커피를 타 마시기 위해서이다. 물을 사먹을 수도 있지만 늘어나는 것은 패트병 뿐이다. 그래서 나른한 오후가 되면 자리를 박차고 약수터로 향한다.
약수터에서 떠 온 물이 패트병으로 여러 개 되었을 때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물값 절약도 되지만 무엇 보다 식물에게 줄 물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힘들게 떠 온 약수를 식물에게 골고루 뿌려 준다. 물쓰듯이 사용하는 수도물이 아니기에 주는데도 정성을 기울인다. 이런 약수는 광물질이 섞여 있어서 수도물과 비할바가 아니다.
식물도 함께 산다고 생각하면 가족과 같은 것이다. 주기적으로 물을 주고, 그것도 광물질이 풍부한 물을 주었을 때 할 바를 다한 듯한 느낌이다. 물만 주어도 자라며 더구나 때 되면 꽃을 피워 내는 식물을 보면 마치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2015-11-1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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