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별이 되고자
용도폐기 되었을 때
인터넷으로 주문한 구두가 도착하였다. 발의 사이즈만 알면 사는데 문제 없다. 사이트에서는 친절하게 구두 선택하는 방법도 명기 되어 있다. 발끝에서 끝까지, 엄지발가락에서 대각선으로 뒤축 까지의 길이에 더하기 10을 하면 그것이 구두 사이즈라 하였다. 발의 사이즈가 255mm라면 265mm 구두를 사면 되는 것이다.
새구두가 도착하자 이전에 신었던 신발을 쓰레기통에 갖다 버렸다. 용도폐기 된 것이다. 그 동안 신은 것이 고맙다고 하여 가지고 있을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 동안 사용하던 책상과 의자를 새것으로 바꾸었을 때도 버렸고, 깨진 커피잔도 버렸고, 수명이 다하여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전자제품도 버렸다. 이렇게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면 용도폐기 되는 것이다.
용도폐기 되었다고 해서 크게 아쉬워 하지 않는다. 유명인이라면 사용하던 물건을 경매라도 할 수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서 사용하지 못하는 물건은 짐만 될 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사람은 죽어도 추억은
사람이 죽으면 죽음과 함께 땅속에 묻혀 지거나 태워지게 된다. 불과 삼일 밖에 걸리지 않는다. 길어야 오일이다. 이렇게 서둘러 장사 지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더 이상 생명체로서 기능을 하지 않는 나무토막 같은 것이다. 더구나 죽은지 하루가 지나면 살이 문드러지기 시작하고 삼일이 되면 ‘구더기’가 나온다고 한다. 이러니 서둘러 장사 지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에 대한 추억까지 장사 지내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죽어도 추억은 남아 있다. 그러나 남겨진 유품은 대부분 폐기 된다. 마음속에 추억은 남아 있지만 사용하던 물건들은 추억을 가속화 시켜 슬픔을 증장시키기 때문에 폐기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옷가지 등이 남김 없이 버려지거나 태워진다. 이렇게 해서 한 존재가 세상에서 잊혀진다.
비가 오면 빗물이 스며 드는 낡은 구두는 용도가 다한 것이다. 새구두가 도착하면 미련 없이 버린다. 사람도 죽으면 신속히 장사 지낸다. 남는 것은 기억이다. 다만 ‘그 때 그런 일이 있었지’ 하는 정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언가 남기고자 한다. 구두가 옷가지 같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기억할 만 것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돌에 새겨진 인간의 정념
사람들은 잊혀 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누군가 자신을 기억했으면 하는 심리가 있다. 그런 것으로 기록물을 들 수 있다. 옷가지 등과 달리 기록물은 남는다. 마치 잊혀 지지 않기 위해 또 존재 하였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비석에 남겼다. 자신의 행적을 커다란 돌에 새겨 놓은 것이다. 종종 사찰에 가면 대사의 비문 같은 것이 있다. 이런 비문은 천년을 간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비문을 보고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인물인지 알게 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자 하는지 모른다. 사찰에서 불사명단이 바위 또는 전각 돌기둥 등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바위에 새기고자 하는 지금이나 가장 집착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가장 수승한 것은 문자로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그런 것들 중에 책만한 것이 없다.
왜 기록에 집착할까?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꼈던 것을 책으로 남긴다. 어떤 이는 매우 방대한 기록문을 남겼다. 또 어떤 이는 마치 일기 형식으로 그날그날 일어났던 일이나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것도 있다. 다행히 후대에 이런 기록물이 발견되면 중요한 역사적 사료가 된다. 그럴 경우 이름 석자가 기억될 것이다.
매일매일 기록을 하고 있다. 종이가 아닌 인터넷에 글쓰기이다. 먼저 컴퓨터 MS워드를 이용하여 초안을 잡는다. 이를 교정하여 블로그에 올리는 형식이다. 이런 생활이 십년 가까이 되다 보니 생활화가 되었다. 그 결과 수 천 개의 글이 생산되었다. 책으로 따진다면 수 십 권이 될 것이다.
왜 기록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나도 이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살았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구두나 옷이나 용도가 다하면 폐기 되지만 한번 작성된 글은 여간 해서는 없어지지 않는다. 마치 한 번 사 놓은 책이 버리기 전에는 닳아 없어지지 않는 이치와 같다. 과연 이런 글도 후대에 남아 있을까?
자비출판하는 것도
후대에 글을 남기려면 출판을 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 사주지 않는다면 자비를 들여서 출판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자신의 돈으로 기본수량을 출판하여 지인이나 도서관에 기증하는 방식이다.
전국 수백 개에 달하는 도서관에 무상 기증하였을 때 후대에 남을지 모른다. 비록 몸은 죽었지만 그가 남긴 저작물이 도서관에 보관 되어 있을 때 누군가 볼지 모른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하여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책을 출판하는 것이 자신을 알리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 볼 수 있다.
이름을 남기고자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지금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을지라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제까지 주변과 인류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더구나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 아무 대비도 없다면 단지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남기고자 한다. 그것이 ‘이름’이다. 물질로 된 몸은 가 버리지만 이름만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하였을 것이다.
대부분 죽음과 함께 이름은 곧바로 잊혀진다. 특히 평범한 사람들의 이름이 그렇다. 가족과 주변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지만 그들이 죽으면 아무도 알아 주는 사람들이 없다. 이렇게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출가의 목적을 달성하였을까?
이름을 남기지 않고도 잘 사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후회 없이 사는 것이다. 그렇다고 식욕과 성욕에 따른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다. 다시는 이 세상에 오지 않는 삶이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들은 출가하였다.
초기경전을 보면 하나의 정형구가 있다. 그것은 어떤 이가 발심출가 하여 “그 후 홀로 떨어져서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훌륭한 가문의 제자들이 그러기 위해 올바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위없이 청정한 삶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라는 정형구이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의 삶을 택한 잘 배운 양가집 자제가 출가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수 많은 출가자들은 모두 출가의 목적을 달성했을까?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이 있다. 출가자도 있고 재가자들도 있다. 가르침을 보면 항상 강조 되는 것이 탐진치의 소멸이다. 이는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손해 보는 듯 하다. 남들은 행복론이라 하여 모두 즐기는 삶을 살지만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욕망을 억제 하며 계율속에서 내면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 간다. 더구나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은 출가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또한 세상의 방식대로 사는 것을 거부하는 삶을 살고 있다.
사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무수히 많은 출가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과연 정형구에서처럼 출가의 목적을 달성하였을까? 만일 출가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면 부처의 말에 속아서 시간낭비만 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도 들 것이다.
“에이 기분 잡치네”
대부분 사람들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마찬가지라 한다. 그럴 바에는 즐기며 살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순간을 즐기는 삶을 살자고 한다. 그 즐긴다는 말이 바로 ‘행복’과 같은 말이다. 사람들이 행복론을 말하는 것은 즐기는 삶을 말한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재미는 식욕과 성욕에 따른 오감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다. 그래서 먹는 재미 등으로 사는 것이다.
이빨이 빠지고 소화기능이 약해져서 더 이상 먹지 못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인생이 재미 없다고 느껴 질 것이다. 이제까지 식욕과 성욕 등 오감으로 인한 재미로 살았는데 늙어지니 더 이상 재미가 없는 것이다. 나이든 노인들에서 볼 수 있다.
나이 든 노인에게는 특유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런 냄새 때문에 사람들은 접근을 싫어 한다. 식당에서 식사 할 때 등이 구부러지고 잘 걷지 못하는 노인이 식판을 들고 합석 하였을 때 순간적으로 “에이 기분 잡치네”라 할 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 되었지만 아마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반면 앞쪽에 젊고 싱싱한 여인이 앉았다면 기분이 달라질 것이다.
노인들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함부로 돌아 다닐 수도 없고 합석하여 식사하는 것도 폐가 된다. 나이가 들어 늙어 가는 것도 서러운데 더구나 젊은 사람들이 냄새 난다고 기피하는 것을 보면 더욱 비애감을 느낄 것이다.
“우리에겐 내일이 없다”
그저 욕망대로 한 평생 살아 온 노인들의 말년을 보면 비참하다. 더구나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이 세월만 보냈을 때 고독한 황혼이 되기 쉽다. 그래서 고독한 노인은 물기 없는 호숫가에 외로이 서 있는 날개 부러진 왜가리와 같고, 쏘아져 버려진 화살과도 같은 신세이다.
대부분 노인들은 젊었을 때 즐기는 삶만 살았다. 돈을 벌어 놓지도 못하였고 청정한 삶도 살지 않았다. 죽음과 함께 곧바로 장사 지내면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다. 살아 있다고 해도 단지 먹는 것으로 생이 유지된다면 사실상 죽은 존재나 다름 없다. 대부분 이렇게 살다 한평생 마무리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기대수명대로 산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분명한 사실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을 살지만 내일이 오리리라는 보장이 없다. 영화제목처럼 “우리에겐 내일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름 없는 별이 되고자
지금 젊다고 해도 지금 인생의 절정이라 해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무 것도 해 놓은 것이 없이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 한다면 나이 들어 외롭게 죽음을맞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매일매일 하루를 일생처럼 산다면 문제 없다. 딱 오늘 밤까지만 살겠다는 각오로 산다면 더 할 나위 없을 것이다.
오늘 밤까지만 산다고 생각하였을 때 오늘을 헛되이 보낼 수 없다. 오늘 하루를 가르침대로 살았을 때 내일 죽어도 좋은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계행을 어기고 삼매가 없이
백 년을 사는 것보다
계행을 지키고 선정에 들어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Dhp110)
지혜가 없고 삼매가 없이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지혜를 갖추고 선정에 들어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Dhp111)
게으르고 정진 없이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정진하고 견고하게 노력하며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Dhp112)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Dhp113)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Dhp114)
최상의 원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최상의 원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Dhp115)
부처님 당시부터 수 많은 사람들이 출가하여 가르침대로 살았다. 그들이 모두 이름을 남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르침대로 사는 그 순간 만큼은 하늘에 빛나는 별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름 없이 살아 가는 수행자들은 모두 하늘의 별들이다.
하늘의 별들은 누가 보건 말건 언제나 반짝이고 있다. 누가 알아주건 말건 자신의 할 바를 다하였을 때 가르침은 달성 된 것이 아닐까? 누가 알아 주건 말건 오늘도 내일도 자신의 할 바를 다 하였을 때 이름 없는 별이 아닐까?
2015-11-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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