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법만 듣고도 깨우칠 수 있다고? 꽉 움켜쥔 스승의 주먹
“그거 약장사 아녜요?”
누군가 “이것만이 진리이다.”라고 말할 때 어떻게 보아야 할까? 범일스님의 유튜브 동영상 니까야 강좌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세상에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냐 하면 이런 말을 해도 아무도 반박을 못해요. 어떤 조사어록에 ‘이거 하나만 깨달아. 이 문제 하나만 풀면 세상만사 모든 문제가 다 풀린다.’ 이렇게 주장을 합니다. 달콤하죠? 세상에 그런 문제가 있습니까? 사람들은 그게 진짜인줄 알아요. 까 놓고 봐봐요. 수천년 인류역사를 봐서 세상에 그런게 어딧어요. 이거 하나 깨달으면 세상만사가 형통된다. 그거 약장사 아녜요?”
(∥ 범일스님 ∥ 니까야 제1강 불교 공부의 목적 / 감각의 대문 1)
조사어록에 근거하여 깨달음을 말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늘 하는 말은 이것만 단박에 깨달으면 만사형통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함에도 누구 하나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왜 그럴까? 아마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가르침에 무지 하기 때문에 “이거 하나만 바르면 다 낫는다”식의 만병통치약을 선전하는 약장사의 꼬임에 넘어 가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이 일 하나밖에 없거든”
불자들은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러다 보니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그런 줄 안다. 이것 하나만 깨달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말한다. 그래서 오로지 자신의 말만 믿고 따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존의 수행방법이나 교학체계를 깡그리 무시한다. 그런 실례가 있다.
조사선에 입각하여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M선원이 있다. M선원 K선원장은 ‘그것’을 강조한다.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수 많은 동영상강좌를 보면 “이것 뿐이야. 바로 이것 뿐이거든”말하며 오로지 ‘이것’만 알면 만사 오케이라 한다. 그래서 어느 동영상을 들어 봐도 이것이다. 몇 개 동영상강좌를 랜덤하게 찍어 녹취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생각이 전혀 필요없고 오직 이 일 하나다. 뭘 하든지 언제든지 이 일 하나밖에 없는 거거든. 하여튼 이거 하나 명확하게 하는 거 이게 공부니까.”
(능단금강경 02 (2014년))
이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고 바로 지금 이 자립 입니다. 바로 지금 이 일 하나에요. (탁탁) 바로 이 일이요. 항상 이 일 하나 밖에 없어.
(원오심요 52 (2014년))
이것이 한번 확인 되버리면 하는 일 마다 걸림이 없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아무 일 없습니다.
(부대사 심왕명 02 (2014년))
K선원장의 법문을 들어 보면 ‘이것’이다. 이것만 깨쳐 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대체 ‘이것’이란 무엇일까?
설법만 듣고도 깨우칠 수 있다고?
M선원 K선원장에 대한 불교TV동영상을 보았다. 불교TV에서 대담형식으로 진행된 프로에서 아나운서 진행자가 “조사선을 수행하는 곳이 아니라 설법하는 곳이라 하는데 차이는 무엇이죠?”라며 물어 보았다. 이에 K선원장은 “설법을 듣는 것으로 공부합니다. 따로 좌선이라든가 화두참구 한다든지 그런 것을 요구 하지 않고 들의시고 선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라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선원장의 설법만을 듣고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한다.
K선원장은 대학에서 박사과정일 때 선공부를 했다고 한다. 어느 스님을 스승으로 삼아 공부하였는데 몇 년간 설법을 듣다가 나름대로 ‘선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박사논문도 쓰고 나름대로 ‘견처’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K선원장이 M선원을 만든 계기가 있다고 하였다. 2001년 현대불교신문에 대혜종고의 ‘서장’을 나름대로 안목으로 연재한 것이 시작이라 한다. 연재기사를 보고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 사람들을 설법을 한 것이 오늘날 부산과 서울 두 곳에 있는 M선원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K선원장 이야기를 들어 보면 기존 방식은 모두 부정된다. 이는 조사선에서 주장하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온 살아 있는 법이 조사선이지 어떤 사상이랄까 어떤 이론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매 순간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 지적하고 가르켜서 깨어 나도록 하는 것이 전해 오는 것이고, 그것을 스스로가 실천하고 있는 것 입니다.”
(M선원 선원장 대담, 불교TV)
K선원장에 따르면 자신의 설법만 들으면 된다고 하였다. 별도의 교리나 좌선수행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법을 듣는 것으로 공부합니다. 따로 좌선이라든가 화두참구 한다든지 그런 것을 요구 하지 않고 들의시고 선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라 하였다. 이는 불자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 거리가 먼 것이다.
“다른 수단에 의지 하지 않아도 곧장 깨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학과 수행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K선원장은 자신의 법문만 들으면 된다고 한다. 이에 아나운서가 “어떤 수행방법에 의지함이 없이 공부가 되는지요?”라고 묻는다. 이에 선원장은 “어떤 수행이든지 자기 마음을 깨치기 위한 것, 본래(본래불)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수단에 의지 하지 않아도 곧장 깨칠 수 있습니다. 의지하는 것은 돌아 가는 것이고 조사선은 지름길입니다.”라 하였다. 그러면서 한결 같이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법문을 듣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또 이렇게 한다.
“기존 보고 듣고 배운 지식들 그걸 가지고 들으면 자기가 알고 있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어요. 자기의 견해와 생각과 관념들이 공부를 가로 막는 큰 장애물이거든요. 그거만 내려 놓으시면. 그걸 내려 놓고 설법하는 사람의 설법만. ‘도대체 무슨 얘기 할려고 하는가? 뭘 가르켜 하는가?’ 거기에만 관심을 집중해서 들으시면 인제 자기 한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M선원 선원장 대담, 불교TV)
K선원장은 오로지 자신의 설법에만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번뇌와 망상을 내려 놓게 되고 문제에 집중해 해결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바로 이것’을 지금 여기서 알아야 하며 그런 법은 지금 여기서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강조한다.
설법을 듣고 깨달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K선원장의 ‘이것’을 들어보면 만사형통인 것 같다. 자신의 설법을 집중해서 듣고 또 들었었을 때 ‘계합’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때인가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데 그렇게 되었을 때 “꽉 막혔던 어두움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저절로 편안해지고 눈앞에 밝아지고 ‘자기가 해결하고자 했던 일이 해결이 되었다’라는 그런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자신의 설법을 듣고 깨달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흐름에 들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법구경 인연담에서 전한다. 그런데 K선원장 역시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한다. 그래서 체험한 사람들이 수십명이 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남을 가르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마치 제자가 생긴 것 같다. 제자가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는 식이다. 이렇게 된다면 사실상 새로운 종교의 교주나 다름 없다. .
K선원장의 동영상법문을 들어 보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강조하는 것은 ‘둘이 아니다’라는 ‘불이’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불이중도’라 한다. 그런 부처님에 대하여 “석가모니가” 또는 “석가가” 라고 말한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누군가 ‘이것만이 진실이다.’ 거나 ‘이것만이 진리이다.’ 라고 말하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외도의 사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에 62가지 삿된견해가 소개 되어 있다. 그 중에 영원론자는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삿된 견해를 주장하는 외도들의 특징은 “오로지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맛지마니까야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M72)’에서 유행자 밧차고따가 부처님에게 . “존자 고따마여, 고따마께서는 ‘세상은 영원하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밧차여, 나는 ‘세상은 영원하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그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누군가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 하였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 ‘이것이야말로 진리’라는 주장은 선입견에 따른 것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라는 입증은 증상견에 따른 것이다.” (SA.II.14) 라 하였다.
누군가 ‘이것만이 진실이다.’라 하였을 때 이는 선입견이다. 누군가 ‘다른것은 거짓이다.’라 하였을 때 이는 자만이다. 이렇게 본다면 만병통치약을 선전하는 약장사는 선입견과 자만에 따라 대중을 유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형성된 것은 소멸하기 마련
외도들은 ‘이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동시에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라 하여 부정한다. 깨달음에 대하여 ‘이것만이 진짜다’라고 하며 ‘다른 것은 모두 틀렸다’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 진리 다른 것 거짓’을 외치는 외도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든지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 오로지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본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믿음을 제외하고, 만족을 제외하고, 형상에 대한 분석을 제외하고, 견해에 대한 이해를 제외하고 스스로 명쾌하고 분명한 지혜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스스로 명쾌하고 분명한 지혜를 지니지 않고, 훌륭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그 가운데 부분적인 지식만 분명하게 하면, 그것은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그 부분에 대해 집착한 것이다.’라고 나는 설한다.
이 모든 것은 형성된 것이고 거친 것이다. 그러나 형성의 소멸이 있다. ‘이것은 있다.’라고 알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보는 여래는 그것을 뛰어넘는다.
(다섯과 셋의 경, 맛지마니까야 M102, 전재성님역)
62가지 사견 중에 영원주의에 대한 것이다. 이것 만이 진리이다 하였을 때 이것은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형성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누군가 이것이라 하였을 때 이는 진리라고 볼 수 없다.
선입관 자만에 의한 견해는 부분적 지식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마치 부분을 전체인 것으로 착각함을 말한다. 그래서 부분적 지식만 나열하는 자들에 대하여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그 부분에 대해 집착한 것이다.”라 하였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
초기경전에는 영원주의나 허무주의 등 사견에 대한 이야기가 대단히 많다. 이들 사견에 대하여 어리석음에 기인한 것이라 하였다. 또 사견에 집착하면 악처에 떨어질 것이라 하였다. 또 사견에 대하여 진리가 아니라 부분적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이다.
우다나에 ‘다양한 이교도의 경(Ud66)’이 있다. 부처님당시 육사외도들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자와 똑 같다는 것이다. 그들은 코끼리의 특정 부위를 만지고서 코끼리는 “이렇게 생겼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어떤 태어날 때부터 봉사인 자들은 코끼리의 머리를 보았는데, 그들은 ‘폐하, 코끼리는 물항아리와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Ud6.4)”라고 표현 되어 있다.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어느 장님은 코끼리 머리를 만졌다. 그리고서 ‘물항아리’같다고 하였다. 귀를 만진 자는 ‘키질하는 바구니’와 같다고 하였다. 이렇게 예를 든 것이 ‘물항아리, 키질하는 바구니, 쟁기, 쟁기막대, 창고, 기둥, 절구, 곤봉, 빗자루’라 하여 모두 아홉 가지에 달한다. 즉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교의 유행자들은 눈이 멀었고 눈이 없어서 이익을 알지 못하고 무익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이익을 알지 못하고 무익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므로 ‘이러한 것이 진리이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이 진리이다.’라고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면서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른다.”
(Paṭhamanānātitthiyasutta- 다양한 이교도의 경, 우다나 Ud6.4, 전재성님역)
육사외도에 대하여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장님과도 같이 본 것이다. 한번도 코끼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물항아리 같다’는 등 갖가지 견해가 나오는 것이다. 더구나 자신들의 견해가 옳다고 싸운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논쟁하면서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른다.”라고 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자들이 논쟁하는 것을 눈뜬 사람이 보면 어떨까? 매우 재미 있어 할 것이다. 한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웃으며 깔깔댈지 모른다. 이와 같은 사견은 부처님 가르침을 몰라서 생겨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안다는 것은 눈을 뜨고 코끼를 보는 것과 같다.
꽉 움켜쥔 스승의 주먹
시장에 가면 손님을 끌기 위한 갖가지 방법이 동원 된다. 어떤 장사꾼은 ‘이것’만 먹으면 모든 것이 치료 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는 ‘이것’만 깨달으면 모든 것이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 한다. 마치 자신이 교주처럼 자신의 설법만 들으면 깨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기존의 수행방법과 체계를 깡그리 무시한다. 또 문자로 이루어진 경전에 대해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 하며 내려 놓을 것을 말한다.
어떤 이는 오로지 자신의 설법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 한다. 자신의 말만 믿으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라 한다. 그래서 오로지 이것을 강조한다. 이것외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일까 와서 들으라는 것이다. 마치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겨경(D16)’에서 ‘사권(師拳)의 비유’를 보는 것 같다.
스승은 주먹을 꽉 쥐고 펴지 않는다. 그러면서 주먹 안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무언가 있다고만 할 뿐 한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죽을 때 까지 보여 주지 않는 스승의 주먹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그것이 있다는 말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꽉 움켜쥔 스승의 주먹은 악취나는 것이다.
믿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들이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 하였다.마치 무엇이 있는 것처럼, 이것만 믿으면 깨달음이 있는 것처럼 유혹하는 자들이 많다. 이럴 때 불자들은 믿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벗들이여, 나는 이것을 세존 앞에서 듣고 세존 앞에서 받았습니다.이것이 가르침이고 이것이 계율이고 이것이 스승의 교시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의 말에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고, 그 말마디와 맥락을 잘 파악하여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법문에 들어맞지 않고 계율에 적합하지 않다면, ‘이것은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말이 아니다. 이 수행승은 잘못 파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해서 그것을 물리쳐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벗들이여, 나는 이것을 세존 앞에서 듣고 세존 앞에서 받았습니다. 이것이 가르침이고 이것이 계율이고 이것이 스승의 교시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의 말에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고, 그 말마디와 맥락을 잘 파악하여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법문에 들어맞고 계율에 적합하다면,‘이것은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말이다. 이 수행승은 올바로 파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첫 번째 탁월한 논증이라고 새겨야 한다.” (D16)
누군가 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또 어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이라 말하고 있다. 모두 자신의 이야기가 옳다고 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야 할까? 이에 부처님은 먼저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일단 들어 보긴 보되 판단은 유보하는 것이다.
판단기준은 빠알리니까야에
어떻게 진위를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 하신 경전을 보아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비추어 보아 맞으면 부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면 된다고 하였다. 역으로 맞지 않으면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법에 대하여 말 할 수 있다. 누구나 수행에 대하여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판단 기준은 경전에 따른다. 그것도 부처님의 원음이라 불리우는 빠알리니까야에 따른다. 그래서 니까야에 실려 있는 가르침과 맞으면 받아 들이고 틀리면 내쳐야 할 것이다.
2015-11-2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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