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온은 몸뚱아리가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십이처에서 이해해야
석가모니때문에 30년을 낭비하였다고?
유튜브강연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스님이 말하기를 자신은 석가모니 때문에 30년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석가모니때문에 30년을 낭비하였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30년은 석가모니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스님은 니까야 공부를 한 것이 아니다. 조사선 공부를 하였다. 그럼에도 석가모니 때문에 30년을 허비 하였다고 한다.
부처님은 조사스님이 쓰던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염화심이니 이심전심이니 하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 중에 ‘곽시쌍부(槨示雙趺)’가 있다. 가섭존자가 임종을 보지 못하고 나중에 왔을 때 관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말로서 법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법을 전달하는 하나의 선행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해이다. 잘못 알려진 것이다.
디가니까야 곽시쌍부의 원형이 있다. 경에 따르면 “그 후 존자 마하 깟싸빠가 꾸씨나라 시의 마꾸따반다나라는 말라 족의 탑묘에 세존의 화장용 장작더미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한쪽 어깨에 옷을 걸치고 합장하여 세 번 화장용 장작더미를 오른 쪽으로 돌아, 하단부를 열고 세존의 두 발에 머리를 조아려 절을 올렸다.” (D16) 라고 표현 되어 있다.
부처님 당시 인도의 풍습에 최대의 존경의 표시가 있었다. 그것은 발에다 머리를대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자가 부처님한테 가면 당연히 부처님 발에 머리를 대는 의식이 있었다. 이런 행위는 부처님에 대한 최대 존경의 표시이었다. 존경하는 사람이 죽었어도 마찬가지 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곽시쌍부이야기는 어떻게 나온 것일까?
곽시쌍부는 한역 장아함경을 근거로 한다. 장아함경에 따르면 부처님의 임종 시기를 놓쳐 늦게 도착한 가섭에게 관속의 두 발을 밖으로 내보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그 원형인 ‘디가니까야’에선 전혀 다르다. 즉 가섭이 세존의 화장용 장작더미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세 번 합장한 뒤 하단부를 열고 세존의 두 발에 머리를 조아려 절을 올렸을 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곽시쌍부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마하가섭존자가 부처님 발을 꺼내서 발에 정수리를 갖다 대고 최대의 예를 표한 것이다. 그럼에도 선종에서는 삼처전심(三處傳心)중의 하나라 하여 마음과 뜻으로 법이 전승되어 왔다고 한다. 이는 원음을 접하지 않아서 생긴 오류이다. 이런 오류를 믿어서일까 어떤 스님은 석가모니때문에 30년을 낭비하였다고 했다.
어떤 스님이 잃어 버린 30년은 부처님을 몰라서 잃어 버린 30년이다. 부처님을 처음부터 제대로 알았다면 방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님의 잃어 버린 30년은 부처님에게 속아서 30년이 아니다. 부처님을 모르고 가르침을 오해 하였기 때문이다.
범일스님의 니까야강좌를 듣고
요즘 ‘범일스님’의 니까야강좌를 듣고 있다. 유튜브에 수 십 편이 올려져 있다. 한 강좌에 보통 두 세시간이다. 그러나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다. 그것은 전에 들어 보지 못하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수 많은 초기불교 강좌가 있었지만 이번 만큼은 제대로 걸린 것 같다.
범일스님의 동영상강좌를 알게 된 것은 어느 인터넷카페를 통해서이다. 동안거에 들어가는 스님이 신도들에게 당부하였다. 일종의 숙제를 준 것이다. 숙제 내용 중에 “범일스님 유튜브 동영상 니까야 강의 보기(유튜브에서 "범일스님" 검색하면 동영상 볼수 있습니다)” (월요명상교실) 라는 문구를 보았다. 검색해 보니 보자마자 매료 되었다. 이제까지 찾던 것이다. 이렇게 인터넷바다에서는 뜻하지 않게 진주를 발견할 수 있는 행운도 있는 것이다.
초기경전을 근거로 글을 쓰는 입장에서 범일스님의 동영상 강좌는 매우 유익하다. 그동안 초기경전과 아비담마논장, 청정도론, 주석서 등을 통하여 나름대로 익혀 왔지만 동영상강좌를 들으니 정리가 되는 듯 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르고 지냈던 새로운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왜 위대한지 그리고 진리일 수밖에 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저렇게 진도가 안 나갈까?
범일스님의 동영상 강좌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출가하여 방향을 잡지 못하고방황하고 해매이는 스님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앞서 언급된 ‘석가모니때문에 30년을 낭비하였다’는 스님도 해당될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저도 굉장히 궁금했어요. 왜 사람들이 저렇게 출가를 해 가지고 이십년, 삼십년, 오십년을 살아도 사람들이 왜 저 모양일까? 왜 저렇게 진도가 안 나갈까? 이상하지 않는가? 여기에요. 만족을 못하거든요. 거기서 그 모습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만족을 못하고 더 할려고 그래요. 돈을 좀 더 많이 벌고 싶어 한다든지, 뭘 원하는 것이 있어요.”
(범일스님, 니까야 제12강 계의 구족_지계와 팔정도)
스님들이 출가해서 방황을 많이 한다고 한다. 갖가지 이유로 출가 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자포자기 하게 된다고 한다. 이는 한국의 수행풍토 탓이 매우 크다고 한다. 조사선을 주로 하는 한국불교에서 간화선 위주로 수행하였을 때 10년, 20년, 30년이 지나도 성과를 내지 못하였을 때 “석가모니 때문에 30년을 잃어 버렸다.”라고 말을 할 수 있음을 말하다. 그러나 부처님을 제대로 알았을 때 결코 잃어 버린 30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수행의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다시 말해 정견이 바로 서지 않았기 때문에 10년, 20년, 30년, 아니 평생을 헤매인다고 볼 수 있다.
‘여시아독 수트라’라는 책을 출간한 바 있는 범일스님은 초기경전, 그것도 니까야 위주의 경전강좌를 하고 있다. 어떤 이는 경전에 근거하여 교학을 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비유하지만 스님의 강좌를 들어 보면 결코 손가락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에 달 그 자체인 것이다.
범일스님은 강좌에서 경전공부하지 않고 참선만 하는 것에 대하여 “원하는 것이 있는 상태에서 몇 십년을 좌선을 하고 참선을 하고 수행을 하고 한다고 해도 되는 일이 아니에요.”라 하였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앉아 있어 보았자 세월만 흘러 갈 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음을 말한다.
정견과 정사유에 대하여
범일스님은 디가니까야 사문과경을 강의하기에 앞서 정견에 대하여 말하였다. 흔히 불자들이 알고 있는 정견, 즉 사성제를 아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대한 강연 중에 “일상생활에 만족하는 이유는 감각의 대문을 단속하기 위해서이다. 그게 정견입니다.”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수행에는 단계가 있음을 말한다. 계행의 단계에서는 감각의 대문을 지키는 것이 정견이라는 것이다. 이는 수행단계마다 정견이 있음을 말한다.
스님은 “수행의 단계마다 정견을 찾아 가는 것”이라 하였다. 또 정견과 정사유에 대하여 “정견은 수행의 각 단계마다 찾아 가는 사유가 바로 정사유입니다.”라 하였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 본다. 이제까지 교과서적인 정견과 정사유를 알고 있었으나 수행단계별로 정견이 있고 더구나 정사유는 정견을 찾아 가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바르게 제대로 알아야
또 하나 놀라운 것이 있다. 그것은 수행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이라 하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참선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수행은 어떻게든지 간에 부처님 가르침을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고 일목요연하게 이해를 하고 바로 알잖아요. 바로 알면 굉장한 이익이 있어요.
일상생활을 백퍼센트 만족하고 이십시간 감각의 대문을 단속한다든지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하지 않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이해만 하더라도 굉장한 이익이 있고 굉장히 발전이 빨라요. 경전공부해 보시면 그게 나와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아요. 그걸 꿰뚫면 이 세상이 가지런해져요. 반드시 공부를 할 수 있어요. 재가자든 출가자든 상관없이. 그 공부는 반드시 해야 해요.”
(범일스님, 니까야 제12강 계의 구족_지계와 팔정도)
부처님 가르침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이해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수행의 방향이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엉뚱한 길로 가듯이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면 허송세월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바로 알리기 위해서 투자 해야 합니다. 바로 알리기 위해 부처님은 90% 이상 투자하였습니다. 수행관련 부분은 얼마 안됩니다. 96% 이상을 바로 알게 하는데 할애 하였습니다. 수행을 안해도 계를 안지켜도 바로 알면 됩니다. 바로 알게 되면 초선, 이선, 삼선, 사선 등이 부럽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바르게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동영상강좌를 들어 보니 명확하게 드러난다. 마치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처럼 이제까지 들어 보지 못한 새로운 내용이다. 이런 강좌를 출가한지 30년이 넘어서 들었다면 억울해 할 것 같다. 앞서 스님처럼 ‘잃어버린 30년’운운 할 것이다. 그런 강연 중에 ‘오온’이 있다.
오온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오온에 대하여 불자들은 대략 알고 있다. 아무리 몰라도 색수상행식이 오온인 것은 알고 있다. 더구나 반야심경에서도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니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라는 말도 있어서 익숙하다.
반야심경에서 오온은 곧 부정된다. 그래서 ‘공중무색(空中無色)’ 이라거나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 이라 한다. 그래서 물질적 형상의 세계는 곧 텅빈 본질세계’라거나 정신적 요소인 느낌, 생각, 의지, 인식작용도 역시 물질적 형상처럼 고정된 실체가 없이 텅빈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불자들은 오온을 접할 때 ‘아니고(不)’ 또는 ‘없고(無)’라 하여 부정하는 것부터 접한다.
불교인들 중에 오온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초기경전에 오온에 대하여 설명이 되어 있지만 오온에 대하여 그 의미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런데 오온에 대하여 범일스님의 강좌를 들어 보니 명확해 졌다.
부처님 가르침은 십이처에서 이해해야
이제까지 스님이나 법사들은 오온에 대하여 단지 몸과 마음의 무더기로 이루어진 정신작용정도로 생각하였다. 몸이라는 물질과 수상행이라는 정신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범일스님은 이를 ‘12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이런 방식은 전혀 접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강연을 듣자 이내 고개가 끄덕여 졌다. 이와 같은 오온에 대한 강연을 녹취하였다. 먼지 12처의 중요성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십이처에서 중요한 사실은 이런 모든 일체가 일어나는 것들이, 인식되는 것들이 십이처내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앞으로 모든 부처님 가르침은 십이처에서 이해해야 바르게 이해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일체는 십이처내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일스님, 니까야 제23강 일체법 5)
십이처를 이해해야 다음 단계를 나아 갈 수 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십이처에 대하여 일체라 하였다. 왜 일체가 12처일까? 이는 바라문과 육사외도와 확실히 차별화 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체는 십이처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보고 듣고 하는 것들이 다 자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 이 몸안에서 일어나는 겁니다.”라 하였다. 이는 브라만의 ‘전변설’과 육사외도의 ‘적취설’을 부정하는 말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짐을 말한다.
범일스님은 12처의 중요성에 대하여 “일체는 12처이고, 12처에서 18계가 나와요”라 하였다. 그래서 12처를 이해하면 의식세계를 다 이해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더구나 “관전포인트는 일어나는 법들이 인식공간에서 일아나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깥에서 누가 만들었다는 것이 틀리죠.”라 하였다. 외부에서 원인을 찾지 말라는 것이다. 신이 있어서 자아와 세상을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요소가 있어서 이 세상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일체는 우리의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하였을 때 일어남을 말한다.
십이처는 의식영역이다!
십이처는 어떤 개념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에 따르면 “서로 구별되는 공간과 상관이 없는 여섯 가지 감각능력으로 구별된다.”(4권해제) 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감각능력에 대하여 인드리야(indriya)라 하였는데, 이는 인드라신이 신들에게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감각능력이 행위와 체험의 특수한 영역에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명명 되었다고 한다.
여섯 가지 감각영역에서 시각에 대하여 시각능력이라는 뜻의 짝꾸(cakkhu)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는 단순히 눈동자를 뜻하는 악키(akkhi)와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의에 대하여 각각 시각능력(cakkhu), 청각능력(sota), 후각능력(ghāna), 미각능력(jīva), 촉각능력(kayo), 정신능력(mano)라 한다.
12처는 여섯 가지 감역으로 설명된다. 감역에 대하여 한자로는 ‘처’라 한다. 그런데 여섯 가지 감역은 “의식이 작용하는 감역”이라는 사실이다. 여섯 가지 감역은 내적인 감역과 외적인 감역이 있다. 이를 다른 말로 6내입처와 6외입처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2처가 모두 ‘의식이 작용하는 감역’이라는 사실이다.
12처에서 안이비설신과 색성향미촉이 있다. 이와 같은 한자어는 물질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영역’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내입처인 안이비설신의와 외입처인 색성향미촉법에 대하여 감각영역을 갖는 감각능력(indriya)로 보는 것이다.
6내입처와 6외입처로 구성되는 12처는 의식영역이다. 이는 “여섯 가지 감각영역(감역)은 내부에 의식(viññāṇa)이 작용하는 감역이다.”(4권 해제)라는 말에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12처가 물질이 아니라 ‘의식영역’이라는 것을 범일스님이 강연에서 강조하였다. 한마디로 십이처는 의식영역인 것이다.
수상사(受相思)에 대하여
일체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이 내입처와 외입처에 대한 것이다. 이는 삼사화합으로도 설명된다. 상윳따니까야 ‘세상의 생겨남에 대한 경(S35.107)’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ㄴ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S35:107)”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감각기관과 감각대상과 감각의식 세 가지가 화합하여 세상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범일스님은 세상의 생겨남, 즉 일체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였을까? 녹취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안식이 생겼으면 정보를 받아 들입니다. 이때 안식은 색외입처에 있는 정보를 분별해서 알 뿐만 아니라 안내입처에 저장 되어 있는 정보를 알아요. 식이 접촉해요. 어떤 정보를 받아 들였를 때, 예를 들어 장미꽃을 보았을 때 장미꽃에 대한 정보가 들어 옵니다. 들어오자 마자 옛날 것과 비교해서 접촉을 해요. 비교해서 알아요. 이렇게 두 번 접촉하죠.
장미꽃의 모양 등의 정보는 저장되어 있습니다. 처음 보는 장미꽃인지 어제 보았던 것과 똑 같은 것인지 정보를 받아 들입니다. 그 정보를 알아 가지고 비교해서 안 정보를 가지고 다시 안내입처에 접촉하여 알아요. 이렇게 세 번 접촉해요.
어떤 정보가 육근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 와요. 들어오면 분별해서 아는 식이 맨 먼저 인식주체의 경험에 비교해서 알아요. 그 다음에 외입처에 축적된 정보를 또 접촉을 해서 알아요. 그리고 외입처에 축적된 정보를 안 사실을 내입처에 다시 전달해요. 그래서 세 번 접촉해요. 세 번 접촉하는 것에 대하여 수상사(受相思)라 해요.”
(범일스님, 니까야 제23강 일체법 5)
삼사화합에 대한 것을 ‘수상사(受相思)’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설명방법은 매우 독특하다. 이제까지 삼사화합에 따른 접촉으로 세상이 생겨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사실을 알고 보면 세 번 접촉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고(受) 생각하고(相) 행위하는 것(思)을 말한다. 그런데 이 수상사가 오온에서 수온과 상온과 행온에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온을 제대로 알려면 12처를 제대로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오온은 존재의 체험의 작용적 요소들
오온이란 무엇일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오온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물질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탁월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무엇이든지 이와 같은 것을 물질의 다발이라 한다.” (S22:48) 라 하였다. 여기서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은 한자어로 오온(五蘊)이라 한다.
오온이 있다면 오취온이라는 말도 있다. 오취온은 무엇일까? 초기경전에서는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물질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탁월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번뇌와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물질의 집착다발이라고 한다.” (S22:48) 라고 정의하였다. 오취온은 오온이 집착이 대상이 된 상태를 말한다.
오온은 색, 수, 상, 행, 식 이렇게 다섯 가지 쌓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체 쌓임을 뜻하는 칸다(khaṇḍa:溫)는 어떤 개념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해제에서 “존재의 다발은 의식이 있는 존재의 구성물들이고 살아있는 존재의 체험의 작용적 요소들이다.” (3권 해제) 라 하였다. 이는 오온중에 색(물질)에 대하여 알고 있는 상식을 깨뜨리는 말이다. 오온이 정신적 작용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범일스님은 색이 물질, 즉 몸뚱아리가 아님을 분명히 말하였다.
“판단하기 전에 느낌이 와요”
범일스님은 수, 상, 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수에 대한 것이다.
“수는 느낌이라 합니다. 보고 듣는 순간 느낌부터 받아요. 직감이라 하나요. 판단하기 전에 느낌이 와요. 천사같다는 등의 느낌이 와요. 이를 수라 해요. 느낌 중에 대표적 느낌이 있습니다. 강한 느낌입니다. 고락입니다. 저거는 괴롭다, 저거는 즐겁다라는 느낌 입니다. 사람은 고락을 쫓아 가거든요.”
(범일스님, 니까야 제23강 일체법 5)
느낌에 대한 설명이다. 이는 접촉하였을 때 판단하기 이전 단계라 하였다. 그런 느낌은 고락에 대한 것이다. 접촉하였을 때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을 말한다.
앨범에서 사진을 보듯이
다음으로 상(相)에 대한 것이다.
“그 다음에 상이라 했죠? 외입처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를 비교해서 알아요. 이것이 상입니다. 생각으로 아는 상입니다. 상이라는 것은 받아 들이는 정보들을 특징으로 분류하는 거에요. 살면서 좋았던 때, 아름다웠던 때가 있습니다. 이미지로 떠 오릅니다. 동영상이 아닙니다. 한 커트로 떠 오릅니다. 앨범에서 사진을 보듯이 떠오르지 동영상으로 안나가요. 영화는 정지화가 연속된 것입니다.
사람이 정보를 받아 들여 인식할 때는 이미지로 인식합니다. 정보를 받아들이면 이미지화 하고 개념화 해요. 언어와 그림이에요. 이것들이 쌓여요. 그렇게 분류한 것이 상이에요.”
(범일스님, 니까야 제23강 일체법 5)
상에 대해서 이미지와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미지에 대하여 정지화상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외입처에 정보를 비교해서 안다고 하였다.
입력되어 있는 정보와 비교하여
사(思)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범일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는 상을 옛날것과 비교해서 판단하고 알아내서 인식주체한테 다시 연락해요. 그래서 ‘내가 저것을 피해 가야겠다.’라든가 ‘저것을 더 접근해야겠다.’라고 판단해요. 그 정보를 주어서. 그것을 사라고 해요.
식이 색외입처를 접촉하고 나서 그 정보를 알아가지고 다시 안내입처에다 그 정버를 접촉해서 정보를 주면 인식의 주체인 내입처가 어떻게 행동할까 판단해요. 그래서 행동을 하고 안하고, 행동을 하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결정해요. 인식공간안에서 접촉이 외부에 몸에 행동으로 나가요. 그래서 사를 행으로 표현하기도 해요. 행과 같은 말로 써요.”
(범일스님, 니까야 제23강 일체법 5)
사는 세 번째 접촉에서 일어난다. 접촉이 일어났을 때 이미 입력되어 있는 정보와 비교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래서 사는 행과 같은 의미라 하였다.
흔히 오온에 대하여 알고 있는 상식이 있다. 오온에 대하여 색은 육신이고 수상행식은 정신작용이라는 것이다. 이는 오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외도로서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 하는 것이다.”라 하였다. 12처 입장에서 이해 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다. 범일스님도 처음에 그렇게 이해했다고 한다. 그래서 “12처에서 오온을 이해해야 해요. 그래야 부처님 가르침대로 오온을 이해는 거에요.”라고 말한다. 오온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앞서 언급된 수상사의 예를 들어 12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색온은 몸뚱아리가 아니다!
색온은 무엇일까? 12처와 관련하여 범일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6내입처, 6외입처, 6식이 있습니다. 자연에 있는 정보가 몸을 통해 가지고 감각기관을 통해서 의식공간에 저장이 되어 있어요. 안이비설신의 내입처에 저장되어 있고, 색성향미촉법이 외입처에 저장 되어 있어요. 이 저장이 색온입니다. 12처에 저장되어 있는 기본정보를 색온이라고 해요. 왜 색온이라 하는가? 외입처에 쌓여 있는 정보만 색온이 아닙니다. 색성향미촉법 모두 사대로 되어 있습니다. 사대는 물질입니다. 색을 물질로 보는 것 입니다. 물질이 바탕이 되어 축적 되어 있는 것이 색온입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의식공간안에는 물질이 없어요. 12처는 인식세계에서 인식공간안에서 일어나는 인식의 작용들이지 그 안에는 물질이라는 것이 존재하지가 않아요. 12처는 다 의식공간입니다. 일체는 내 안에 있는 인식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라고 이해 하자는 겁니다.
색온이 뭐냐? 몸뚱아리가 아닙니다. 인식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이것이 물질을 바탕으로 되어 있는 인식의 정보를 색온이라 합니다. 그러면 색성향미촉이 사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것을 색온으로 볼 수 있어요. 그런데 법도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되어 있죠. 그 다음에 안이비설신도 색을 봤다라고 해서 되어 있는 정보거든요. 색을 바탕으로 되어 있다고 봐야 되요. 그래서 안이비설신의 내입처에서 저장이 되어 있는 정보들도 색온이에요. 내입처와 외입처중에서 무엇을 더 강조했다? 외입처가 더 강조가 되 있다.”
(범일스님, 니까야 제23강 일체법 5)
범일스님이 강조한 것은 색온이 몸뚱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색온이 물질덩어리가 아님을 말한다. 색온은 “물질을 바탕으로 되어 있는 인식의 정보”라 하였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상식을 깨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이처에 대하여 모두 인식의 작용들이라 하였다. 이런 색온에 대하여 외입처가 더 강조 되어 있다고 하였다.
외입처가 강조된 수온(受溫)
오온에서 수온은 어떤 것일까? 12처와 관련하여 범일스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수는 내입처가 접촉할 떄 일어나는 겁니다. 육식이 내입처가 접촉하면서 일아나는 거에요. 그래서 분별해서 일어나는 느낌이에요. 수는 식이 내입처를 접촉하면서 일어나는 것들이에요. 그런 수가 쌓이고 쌓인 것을 수온이라 해요.
우리는 정보를 매순간 마다 받아 들이잖아요. 매순간마다 받아들이는 그 느낌이 쌓이고 쌓인거에요. 좋은 것 10번 나쁜 것 한번이면 좋은 것으로 받아 들여요. 쌓인 것에 영향을 받아요.
수온은 엄밀하게 보면 안이비설신의 여기에 다 쌓아져 있어요. 육식이 육내입처와 접촉을 일으켜서 어떤 정보를 받아 들였을 때 일어난 느낌들이 쌓인 것이 수온이에요.
그 느낌들이 어떤 느낌들이냐?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으로 대표가 되는 느낌이에요. 그런 느낌은 어디에 쌓여요? 12입처에 쌓여요.
색온이 12입처에 쌓이죠? 쌓이는데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 외입처에 중점을 두었어요. 수온은 어디에 저장이 되느냐하면 12입처에 저장이 되요. 저장이 되는데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 하면 내입처에 더 중점을 두어서 저장이 되 있어요.
외입처에 하나도 저장이 안되있느냐. 연관이 되 있어요. 왜? 괴로움을 주는 느낌은 내입처에 저장이 되는데, 괴로움을 주는 대상들은 외입처에 저장되요. (반대로) 즐거움 느낌은 12처에 저장이 되는데 외입처가 더 강조 되 있어요.”
(범일스님, 니까야 제23강 일체법 5)
수온은 수와 같은 개념이다. 첫 번째 접촉에 따른 것이다. 수온에 대한 포인트는 색성향미촉법이라는 외입처가 더 강조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색온이 외입처가 강조된 것과 차이가 있다.
이미지와 언어로써
상온은 어떤 것일까? 12처와 관련하여 범일스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상입니다. 어떤 정보를 받아 들였을 때 외입처에 저장이 되고 그 인식주체의 정보는 내입처에 저장이 되요. 그러면 6식이 외입처와 접촉을 해가지고 그 정보를 그대로 저장하면 색온이라 했죠? 그 정보를 좋은 것 싫은 것 좋지도 싫지도 않는 것, 옳은 것 그른 것 옳지도 그릇치도 않은 것, 나한테 이익이 되고 해롭고 그렇지도 않은 것,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고 그렇지도 않은 것, 이런 것으로 분류를 해요. 정보를 분류하고 언어를 써서 개념하여 분류를 해요. 그렇게 분류해서 축적이 된 것을 상온이라 해요.
상온은 어디서 축적이 되요? 십이처에 저장이 되요. 어디가 더 강조가 되요? 외입처가 더 강조가 되요.
(범일스님, 니까야 제23강 일체법 5)
상온은 앞서 언급된 상과 유사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는 두 번째 접촉에 따른 것이다. 이런 상온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외입처가 더 강조 되어 있다고 했다.
행동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행온은 무엇일까? 행온에 대하여 12처와 관련하여 범일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다음에 사가 행이라 했죠? 신구의 3행으로 볼 떄 행으로 본다고 했죠? 어떤 정보를 받아 들였을 때 6식이 내입처에 접촉하고 수가 되고 외입처에 접촉해서 상이 되고, 그 다음에 상에서 판단한 것 가지고 다시 내입처에다 전달을 해주어요. 그것을 사라고 했죠? 사는 오온에서 행과 똑 같은 말로 본다고 했죠? 이것이 행온이에요.
오온 중에 색수상행 네 가지를 알았어요. 오온을 통해서 어떤 정보를 받아 들였어요. 6식이 외입처와 접촉해서 정보를 분별해 가지고 저장을 하고 그것이 상온이라 그랬죠? 분별해서 알아 낸 정보를 다시 내입처에다 다시 전달해요. 다시 전달해가지고 내입처가 신구의를 통해서 행동을 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판단하고 결정해요. 그런 정보를 주는 거에요. 그런 정보를 주는 것을 행온이라 해요.
행온은 경전에 어떻게 설명 되 있느냐 하면 ‘해야 할 일, 하지 않아야 할일,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 이렇게 설명을 해요. 그래서 이 정보를 받아 들여 가지고 내가 해야 할 일, 하지 않아야 할일,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 이렇게 행동에 지침이 되는 그게 의지작용으로 나오는 거거든요. 그런 것을 판단하고 그런 경험들이 축적되는 것을 행온이라 해요.”
(범일스님, 니까야 제23강 일체법 5)
행온은 사로 설명한 것과 같다. 세 번째 접촉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색온과 수온과 상온과 달리 강조되는 입처가 보이지 않는다. 색온이 외입처, 수온이 내입처, 상온이 외입처가 강조 된다고 하였다. 이는 행온이 행동을 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의지작용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행온이라 한다.
계속 분별하여 알아 내는 것
식온은 무엇일까? 12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식온은 뭐에요? 6식의 경험들이 쌓여요. 어떤 정보가 들어 왔을 때 내입처 외입처 12처에서 쌓인 정보들을 계속 분별해서 알아내는 경험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 경험들 자체가 쌓여요. 뜨거운 물을 한번 만져 보고 두 번 만져 보고 세 번 만져 보고 자꾸 만져 보면 딱 만져 보면 70도다 80도 100다 다 알잖아요. 그렇게 해서 알아가는 경험들이 쌓여요. 그것이 식온이에요.”
(범일스님, 니까야 제23강 일체법 5)
식온에 대하여 ‘분별해서 알아내는 경험들이 쌓인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오온에 대하여 사람들은 단지 6근 6경의 입장에서 오온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오온에 대하여 설명할 때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만나서”라 한다. 하지만 이는 12처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12처를 이해하지 못하면 오온도 이해할 수 없고, 오온을 이해 하지 못하면 12연기도 이해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범일스님은 “색온을 육신이고 수상행식을 정신작용으로 분류하는 설명방식은 맞지 않아요. 색수상행식 모두 다 의식의 세계에서 일아나는 현상들을 설명하는 거거든요. 의식세계에서 오온 이외에 인식현상이 축적 되는 것이 없어요. 이게 전부에요. 여기서 매순간 오온이 바뀌어가요.”라 하였다.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면 햇갈려 버려요”
12처를 일체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일체는 세상을 말한다. 별도의 세상이 있어서 그 세상속에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이비설신의의 내입처와 색성향미촉법의 외입처, 즉 12처가 일체이자 세상인 것이다. 그래서 범일스님은 이렇게 설명한다.
“알기쉽게 설명하면, 12처에 정보가 축적이 되죠. 불교가 이런 줄 몰랐죠? (웃음) 후회하시죠? (웃음) 절에 온거. 부처님 가르침이 이래요. 이거 이해하기 쉽지 않아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처음에 가르치지 않으시려고 했던 이유도 그래요. 12처 이해시키는 거 되게 어려워요. 지금 사람들한테도 어려워요.
옛날 사람들 자연의 정보, 생물학적 정보 이런 것 개념이 없는 사람한테는 이거 어떻게 설명했는지 진짜 황당해요. 그런데 어휘들을 보면 내가 맞다 틀리다 점검할 수 있게끔 설명을 다 해 놓았어요. 색, 수, 상, 행, 식 이것들을 어휘들이 정확하게 설명이 되어 있어요.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면 햇갈려 버려요.”
(범일스님, 니까야 제23강 일체법 5)
설명에 따르면 12처를 이해 하기 쉽지 않다고 하였다. 특히 내입처인 안이비설신의와 외입처인 색성향미촉법의 12처가 의식공간이고, 또한 “인식의 정보를 색온이라 합니다.”라 한 것이 놀랍다. 그런데 이와 같은 12처를 제대로 이해해야 오온을 바르게 이해 할 수 있고, 또 오온을 바르게 이해해야 12연기도 바르게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바른 수행을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하면
범일스님은 12처와 오온에 대한 강연에서 반복설명을 하였다. 이는 가르침이 매우 심오하기 때문이다. 부처님 역시 중요한 가르침에 대해서는 반복적으로 말씀 하셨다. 사부니까야 이곳저곳에 중복된 내용이 많은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일스님은 오온에 대하여 “의식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식작용이 색수상행식 다섯 가지로 끝나요. 더 이상 다른 것 없어요.”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가 반복적으로 계속 일어나요. 다섯 가지 경험들이 자꾸 쌓여요. 그게 색수상행식이에요.”라 하였다.
범일스님은 오온이 의식작용임을 분명히 말하였다. 그리고 매순간 경험이 쌓이고 쌓인 것이 오온이라 하였다. 이것으로 부족하였는지 또 다시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색온은 12처에 저장되어 있는 안이비설신의색성향미촉법이라 했죠? 이거는 뭐냐하면 기본정보들이에요. 자연에서 섭취한 기본정보들이 바탕에 깔려 있는 거에요. 그 정보들을 내가 받아 들이고 인식한 기본경험들이에요. 이 기본 정보들을 색온이라 해요.
쉽게 예기 하면 시장가서 무우사고 콩나물 등을 사는데 그 원재료를 색온이라 해요. 기본자료를 가지고 국도 끓이고 찌게도 끓이는 등 요리를 하잖아요. 바꾸는 것을 그 다음단계라 해요. 기본정보를 바탕으로 해서 그 다음 정보를 추출하는 거에요. 그게 수상행이에요. 수상행이 그 다음단계이에요. 이것(색온)이 로머티리얼(raw matetial), 바탕에 있는 기본정보들이고, 그 기본 정보를 가지고 수상행이라는 정보를 (2차단계로) 다시 구축해요.
2차단계로 수는 느낌, 즐겁고 괴롭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들이에요. 그 느낌들을 주는 대상들을 다 분류를 해요. 소리를 예로 들면 색온 소리자체를 저장하는 거에요, 소리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안줘요. 그 소리를 반복적으로 들으면 느낌이 쌓여요. 쌓인 느낌을 판단해서 재분류를 해요. 그게 ‘수온’이에요.
상온은 기억에 도움이 되는 것, 옳은 것 그른 것, 이익이 되고 해가 되는 것, 예쁜것 안예쁜 것, 쁘고 하는 것, 싫고 좋고 하는 것들을 분류해요. (예를 들면) ‘이 대상은 나에게 이익을 주는 대상이다’ ‘이 대상은 나게 해를 주는 대상이다’라고 분별해서 다 재정리를 해요. 재정리를 한다고 해서 색온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컴퓨터에 기본 정보가 있으면 복사를 하여 재정리 하는 것과 같아요. 이건(색온) 처음부터 바탕이 되어 있는 거에요. 상온에서는 모든 재료들을 자기 임의대로 분류해요. 나한테 이로운 것 해로운 것, 좋은 것 나쁜 것, 예쁜 것 안예쁜 것, 이익이 되는 것 안되는 것, 옳은 것 그른 것, 이런 것들을 다 분류해요. 이 분류작업이 상온이에요.
행온은 해야할 것과 해야 하지 않을 것을 분류해요. 이런 소리는 내가 들어야 할 것, 이런 소리는 내가 안들어야 할 것,들어도 되고 안들어도 되는 소리를 분류해요.
(범일스님, 니까야 제23강 일체법 5)
범일스님은 오온 중에 색수상행에 대하여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다. 색수상행 모두 의식작용으로서 경험된 정보가 쌓인다고 하였다. 특히 색온에 대하여 로머티리얼(raw matetial)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요리를 할 때 재료를 말한다. 이 재료를 이용하여 요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수상행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식온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일까?
식은 입처가 없다!
범일스님은 식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식온은 뭐냐? 식온은 색수상행 이 네 가지가 축적이 되고 판단이 되서 재분류가 됐잖아요. 이것을 계속 움직이게 만들어요. 식은 입처가 아니에요. 색수상행은 입처에 저장이 되요. 식온은 창고가 아니에요. 식온은 입처가 아니고 움직여요. 수상사를 일으키는 것도 식이 움직여서 그렇잖아요.
식온은 법당과 공양간을 왔다갔다 움직이는 사람과 같아요. 식온은 색수상행을 움직여요. 돌아다니면서 계속움직여요. 그래서 정보를 받아 들이고 안받아들이고를 다 결정해요. 그래서 오온이 매순간 마다 바뀌어요.”
(범일스님, 니까야 제23강 일체법 5)
범일스님은 강연 내내 반복설명하고 있다. 이번에는 예를 들어 오온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향기가 날 떄 ‘이 향기는 괴로움을 주는 향기이다.’라 하였을 때 이는 수(受)이다. 그래서 ‘나는 이 향기를 맡기가 싫다.’라 하였을 때 이는 상(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방을 떠난다.’라 하였을 때 이는 행(行)이다. 이렇게 색수상행은 서로 연관이 다 되어 있다.
그런데 수상행을 움직이게 하고 결정하게 하는 작용을 식(識)이라 하였다. 그런 식은 ‘입처가 없다.’고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이런 말을 처음 들었다. 이제까지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오온에 대한 상식이 무너졌다.
‘식은 입처가 없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이런 이야기는 경전을 접해서는 알 수 없다. 오로지 앞서간 사람들로부터 들어야만 알 수 있는 사항이다. 따라서 입처를 가지지 않는 식은 입처를 가지는 색수상행을 돌아 다니며 결정하는 작용을 한다고 하였다.
“일체란 무엇인가?”
범일스님은 12처가 일체라 하였다. 이는 세상을 보는 눈을 말한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이 있어서 이 세상에 태어나 이 세상속에서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12처는 어떤 세상인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일체에 관하여 설할 것이니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수행승들이여, 일체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 이것을 바로 일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누군가 ‘나는 이러한 일체를 부인하고 다른 일체를 알려 주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공허할 뿐이다. 만약 질문을 받으면 그는 대답할 수 없고, 더 나아가 곤혹스러움에 쩔쩔 맬 것이다.”
(삽바경-Sabbasutta-일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23,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말씀 하신 일체는 오늘날로 말하면 시공간의 세계를 포함하는 일체의 세계를 말한다. 그런 일체는 여섯 가지 감각영역 내에서 이루어짐을 말한다. 이는 여섯 감역, 즉 12처에서 시공간이 파생되어 나온 것이지 그 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부처님이 말씀하기를 12처 이외 또 다른 일체가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누군가 이러한 일체를 부인하고 다른 일체를 알려 주겠다고 말한다면 아마 쩔쩔매게 될 것이라 하였다. 마치 오늘날 유일신교에서 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빗대어 말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여섯 가지 감역, 즉 12처를 제외하고 다른 것이 고려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있다’ 거나 ‘없다’거나로 말하는 존재론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것이다. 오로지 관찰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인식론적 세계를 말한다.
부처님이 주저한 이유
수행의 방향이 잘못된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이해 했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면 아무리 열심히 수행하여도 효과가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잃어 버린 30년 운운할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부처님은 깨닫고 난 다음 법을 펼치는 것을 주저 하였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이는 맛지마니까야에서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알 수 있다.
“내가 증득한 이 진리는 심원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여 사고의 영역을 뛰어 넘고 극히 미묘하여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경향을 즐기고 경향을 기뻐하고 경향에 만족해한다. 그러나 경향을 즐기고 경향을 기뻐하고 경향에 만족해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도리, 즉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 또한 이와 같은 도리, 즉 모든 형성의 그침, 모든 집착의 보내 버림,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을 보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이 진리를 가르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고통이 되고 나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왜 내가 지금 설해야 하나.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
흐름을 거슬러 가고 오묘하고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
어둠의 덩어리에 뒤덮인,
탐욕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하네.”
(왕자 보디의 경 , M85)
“바로 알면 굉장한 이익이 있어요”
수행하기 전에 교학을 먼저 알아야 하고 경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다. 그래서 범일스님은 경전공부 하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고 일목요연하게 이해를 하고 바로 알잖아요, 바로 알면 굉장한 이익이 있어요.”라 하였을 것이다.
2015-12-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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