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는 사라짐만 계속 지켜 보게 되요” 무너짐의 지혜
밤새 눈이 왔는데
눈이 내렸다. 밤새 눈이 소복이 쌓였다. 아침 뉴스를 듣고 눈이 온 줄 알았다. 뉴스에 눈이 내렸다 하여 창 밖을 내 보니 온통 하얀 세상으로 변해 버렸다.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울긋불긋 단풍이 절정이었으나 몇 차례 오락가락 하는 늦가을 비 때문이어서일까 이제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뭇가지에 눈이 쌓였다. 가지에 눈이 쌓이니 다시 옷을 갈아 입은 것 같다. 겨울에만 입는 하얀 옷이다.
늘 그렇듯이 학의천길을 따라 일터로 향하였다. 도보로 이십여분 거리에 있는 사무실까지 걷다 보면 생각이 정리된다. 그리고 그날 쓸 거리가 생각난다. 머리속에 줄거리를 구상하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오늘 잘 쓸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쓸 거리에 대하여 포커스를 맞추다 보면 이십여분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도착 할 무렵에는 어느 정도 마음속의 시나리오가 작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의천길에 보는 눈은 무거운 느낌이다. 눈에 잔뜩 습기가 끼여 있다. 그래서 눈이 내리자마자 일부는 녹고 일부는 쌓인다. 눈과 비의 중간형태라 볼 수 있다. 아마 영상의 날씨에서 눈이 내리기 때문일 것이다.
물기를 머금고 있는 눈은 내리자마자 녹는다. 펄펄 날리는 눈이 아니라 마치 비가 오듯이 내리는 눈이다. 마치 비가 오듯 하지만 비보다는 속도가 느리다. 그런 눈을 한참 쳐다 보고 있으니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바위가 꿈틀거리고
언젠가 설악산에 갔었을 때 경험한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폭포를 계속해서 바라보면 어느 순간 폭포주변의 바위가 꿈틀거린다고 하였다. 그래서 폭포 앞에 앉아 그 사람 말대로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에 눈을 집중하였다. 그렇게 집중하자 몇 분 있다 놀라운 현상을 보게 되었다. 폭포 양 옆의 바위가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춘천 청평사 구송폭포
폭포는 오로지 아래로만 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떨어지는 물에 집중하면 물이 거꾸로 올라가는 듯이 보이고 주변의 바위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린다. 이것은 한 곳에 집중하였을 때 일어나는 착시현상이다.
왜 이런 착시현상이 생겼을까? 따져 보니 움직이는 것에 집중하였을 때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만일 정적인 호수라면 착시현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폭포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 꼽듯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물을 주시하고 있으면 ‘분명히’ 착시현상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물기를 잔뜩 머금은 눈이 사방에서 내리는 것을 한참 바라보자 폭포에서 본 것처럼 세상이 꿈틀거리는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켰다.
램프의 불꽃을 보고 깨달은 수행녀 고따미
움직이는 것을 주시하였을 때 착시현상이 일어 날 수 있다. 비슷한 이야기가 법구경인연담에도 있다. 법구경 114번 게송에 대한 것이다. 수행녀 고따미가 아들을 잃고 부처님교단에 들어가 출가하였는데 깨달은 과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 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는 죽은 아이를 내려놓고 출가하여 수행녀가 되었다. 그후 포살당에서 램프의 불꽃을 보고 어떤 불꽃은 타오르고 어떤 불꽃은 깜박이는 것을 보고는 ‘ 이 세상의 뭇삶들이 타오르기도 하고 깜박이기도 하지만 열반에 든 자, 그만은 시설되지 않는다.’라고 깨우쳤다.
(법구경 114번 게송 인연담 , 전재성님역)
법구경 114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은 어느 여인이 죽은 아이를 업고 살리려고 하는데서 시작된다. 이미 죽은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약을 구하러 다니는 등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지만 어느 누구도 죽은 아이를 살려 줄 수 없었다. 마침내 부처님 앞에 이르자 부처님은 “아들이나 딸이나 다른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서 흰 겨자씨를 구해 오면 살려 주겠다.”라고 말씀 하셨다.
이에 고따미는 아들이나 딸이나 다른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을 찾아 나섯다. 그러나 집집마다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없다는 것과 마을마다 산자들보다 죽은 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고따미에게 부처님은 그녀에게 ‘생자필멸’의 도리를 일깨웠다. 그러자 그녀는 ‘흐름에 든 경지(수다원)’를 성취했다고 한다. 이후 고따미는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가 수행녀가 되었다.
인연담을 보면 수행녀 고따미가 램프의 불꽃을 보고 깨달은 것으로 되어 있다. 불꽃을 보고서 “이 세상의 뭇삶들이 타오르기도 하고 깜박이기도 하지만 열반에 든 자, 그만은 시설되지 않는다.”라고 이해 한 것이다.
이어지는 인연담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향실에서 몸을 나투어 그녀 앞에 나타나 그녀의 생각을 인가하고 ‘열반을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열반을 한 순간을 사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라고 가르쳤다. 그러자 그녀는 가르침을 듣고 네 가지 분석적인 앎과 더불어 거룩한 경지를 성취했다.” (법구경 114번 게송 인연담) 라 되어 있다. 수행녀 고따미는 불꽃을 응시하고서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고귀한 경지, 즉 아라한이 된 것이다.
빗방울을 보고 깨달은 이야기
움직이는 대상을 보고서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또 있다. 그것은 빗방울이다. 법구경 170번 게송을 보면 “물거품을 보는 것처럼, 아지랑이를 보는 것처럼, 이 세상을 보는 사람을 죽음의 사자는 보지 못한다.” (Dhp170) 이라 되어 있다. 이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빗방울’을 보고 깨달았다는 내용이 있다.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한 때 오백 명의 수행승들이 부처님께 명상주제를 받아 숲속에 들어가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특별한 것을 얻지 못하고 ‘각자에게 알맞은 명상주제를 얻자.’라고 생각하고 부처님께 돌아오는 도중에 아지랑이를 명상주제로 삼아 수행하면서 왔다.
그들이 승원에 들어서는 순간 폭우가 내렸다. 그들은 여기 저기 입구에 서서 급류의 힘으로 솟아올랐다가 부서지는 물거품을 보면서 ‘우리의 몸이 생겨나고 부서지는 것이 물거품과 같다.’라고 생각하며 그것에 주의를 기울였다.
부처님께서는 향실에 앉아서 수행승들에게 모습을 나투어 ‘물거품을 보는 것처럼, 아지랑이를 보는 것처럼, 이 세상을 보는 사람을 죽음의 사자는 보지 못한다.’라고 가르쳤다. 가르침이 끝나자 그 수행승들은 선 채로 거룩한 경지를 성취했다.
(법구경 170번 게송 인연담, 전재성님)
인연담을 보면 ‘폭우’를 대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폭우가 내리면 빠른 속도로 빗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때 마치 폭탄이 터지듯이 물거품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을 연속으로 보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마치 폭포에서 물이 끊임 없이 떨어지면서 포말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을 것이다. 더구나 온 세상이 비로 가득하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지혜롭게 관찰하였을 때
인연담에 따르면 부서지는 물거품을 보면서 ‘우리의 몸이 생겨나고 부서지는 것이 물거품과 같다.’라고 생각하며 그것에 주의를 기울였다고 했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마나시까라(manasikāra)’라 한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단지 멍하니 바라 보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포말의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Seyyathāpi bhikkhave, ayaṃ gaṃgānadī mahantaṃ pheṇapiṇḍaṃ āvaheyya tamenaṃ cakkhumā puriso passeyya nijjhāyeyya yoniso upa parikkheyya, tassa taṃ passato nijjhāyato yoniso upaparikkhato rittakaññeva khāyeyya kucchakaññe va, khāyeyya, asārakaññeva, khāyeyya kiṃ hi siyā bhikkhave, pheṇapiṇḍe1sāro?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이 갠지즈 강이 커다란 포말을 일으키는데, 눈 있는 자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하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실로 포말의 실체일 수 있는가?
(Pheṇapiṇḍūpamasutta-포말 비유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5,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갠지스강에서 부서지는 포말을 관찰하라고 하였다. 아마 강변이나 강가운데 물결쳐서 부서지는 포말을 관찰하라는 것으로 보인다. 바닷가에서 해안에 파도치는 현상과 같다. 이렇게 물결치는 것을 관찰한다는 것은 ‘동적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파도는 거품을 일으키며 사라진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끊임 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물이 다할 때 까지 물거품을 만들어낸다. 이런 동적현상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경에 따르면 ‘이치에 맞게 탐구’하라고 하였다. 이와 관련된 빠알리어가 ‘yoniso upaparikkheyya’이다. 주석에 따르면 “근거에 의해서 조사하려고 하다.”(Srp.II.321) 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이치에 맞게 탐구하다’라 하였고, 초불연 각묵스님은 “근원적으로 조사해 보면”이라고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CDB에서 “carefully investigate it”라 하였다.
빠알리어 ‘yoniso’는 ‘wisely; properly; judiciously’의 뜻이다. 빠알리어 upaparikkhā는 ‘investigation; examination’의 뜻이다. 따라서 ‘yoniso upaparikkheyya’의 뜻은 ‘현명하게 관찰’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에서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이라는 뜻을 가진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와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우리의 몸이 생겨나고 부서지는 것이 물거품과 같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갠지스강에서 포말을 일으키며 사라지는 파도치는 현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라고 하였다. 그것도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여서 바라 보라고 하였다. 그렇게 관찰하면 지혜를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어떤 지혜일까? 이는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라 하며 “무엇이 실로 포말의 실체일 수 있는가?”라며 묻는다.
포말의 경에 따르면 오온에 대하여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여 탐구하면 ‘실체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스승으로써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S22.95)라고 하였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물질은 포말과 같은 것이다. 견고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매순간 부서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쳐 포말을 일으키며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 몸에 대하여 “우리의 몸이 생겨나고 부서지는 것이 물거품과 같다.”라고 지혜롭게 주의 기울여 관찰할 것을 말씀 하신 것이다.
“나중에는 사라짐만 계속 지켜 보게 되요”
꼰단냐가 부처님에게 설법을 듣고 “생겨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라는 ‘지혜의 눈’이 생겨 났다고 하였다. 이렇게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하기 마련인데 단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몸과 마음에서 무수하게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수행을 하면 이런 사실을 더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사라짐’에 대한 것이다.
최근 정신과 전문의 전현수박사의 강연을 들었다. 미얀마에서 수행하고 책을 발간하였는데 출간에 대한 기념강연이었다. 강연에서 전현수박사는 위빠사나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스마트폰으로 녹취한 것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물질을 가지고 해요. 물질을 대상으로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구나’라고 무상이라는 것을 물질을 대상으로 알아요. 이것이 충분히 보아지면 그 다음은 보고 그것을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또 봐요. 그러면 또 아는 마음도 일어나고 사라져요. 그러면 또다시 그 의식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아는, 정신이 무상하다고 아는 마음을 또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나중에는 사라짐만 계속 지켜 보게 되요.”
(전현수박사, 사마타-위빠사나 강연에서)
전현수박사는 병원 문을 닫고 미얀마 파욱수행센터에서 2년 가까이 있었다고 했다. 강연 거의 대부분이 사마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말미에 위빠사나 이야기를 매우 간단하게 이야기하였다.
강연에 따르면 사라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면 사라진다’는 말이 있듯이 처음에는 물질을 대상으로 하여 관찰하였을 때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는 명상에서 일어난 일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여 집중이 되었을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은 마치 갠지스강물에서 포말이 일어나는 것처럼, 등불이 깜박거리는 것처럼, 빗물이 바닥을 때리며 포말을 일으켜 사라지는 것처럼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나아가 그 물질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마음을 또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는 마음도 일어났다가 사라짐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번에는 아는 마음을 있게 하는 의식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물질에서부터 대상으로 하여 아는 마음, 또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 이렇게 일어나는 현상을 대상으로 하여 계속 관찰하면 사라짐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열반’이라 하였다.
무너짐의 지혜(bhaṅgañāṇa)
이와 같은 전현수박사의 설명은 위빠사나 수행의 가장 큰 특징이다. 특히 사라짐만 계속 있게 되는 현상에 대하여 ‘수행이 무르익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무너짐의 지혜(bhaṅgañāṇa)’라 한다. 칠청정과 16단계 지혜에 따르면, 무너짐의 지혜는 여섯 번째 청정에 해당되는 ‘도에 대한 지와 견(patipadā-ñāṇadassa visuddhi)’ 에 속하고, 16단계 지혜 중에서 다섯 번째 지혜에 해당된다.
초불연 청정도론 해제에 따르면 무너짐의 지혜에 대하여 “위빳사나 지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다.”라 하였다. 무너지는 것을 연속해서 관찰하였을 때 수행이 급진전 됨을 말한다. 그래서 ‘무너짐의 지혜’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대상을 바꿈(vatthu-sankamana)이란 물질이 무너짐을 본 뒤, 물질이 무너짐을 본 그 마음도 무너짐을 봄으로써 첫 번째 대상으로부터 다른 대상으로 옮겨감이다. 통찰지의 전이(vivattana)란 일어남을 버리고 소멸에 머묾이다. 전향하는 힘(avajjana-bala)이란 물질이 무너짐을 본 뒤, 무너짐을 대상으로 가졌던 그 마음도 무너지는 것을 보기 위해 즉시에 전향하는 능력이다.
(청정도론, 21장 20절)
여기서 핵심은 ‘물질의 무너짐을 본 그 마음도 무너짐을 철저하게 관찰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오온이, 즉 나라는 철옹성 같던 개념이 해체되고 부서지고 무너지고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이 무너짐의 지혜에 대하여 ‘수행의 일대 전환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주가 무너지는 것 같은 두려움
무너짐만 관찰하였을 때 머지 않아 다 무너질 것이다. 이 몸과 마음이 무너지면 우주가 무너지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럴 때 공포감이 밀려 온다고 하였다.
이후 전개 되는 과정 ‘공포의 지혜(bhaya ñāna)’ 이다. 그리고 이어서 ‘위험의 지혜(ādīnava ñāna)’ ‘역겨움의 지혜(nibbidā ñāna)’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muñcitukamyatā ñāna)’ ‘깊이 숙고하는 지혜(paṭisaṅkhā ñāna)’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saṅkhārupekkhā ñāna)’ ‘수순하는 지혜(anuloma ñāna)’ 순으로 지혜가 일어남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지혜는 범부에서 성자가 되기 위한 지혜라 한다. 그래서 ‘종성의 지혜(gotrabhu ñāna)’를 거쳐 궁국적으로 ‘도의 지혜(magga ñāna)’ ‘과의 지혜(phala ñāna)’ ‘회광반조의 지혜(paccavekkhaṇa ñāna)’에 이르러 지혜가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자아론자에게 있어서 무상이란
언제나 그렇듯이 자연은 늘 극적이다. 불과 몇 달 전에 푸르던 은행나무는 어느 때 보면 노란 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러다 일제히 옷을 벗고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 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보니 하얀 옷을 두툼하게 입고 있다. 이처럼 자연은 변화무쌍하다.
이런 자연에서 무상을 본다. 그렇다면 이처럼 변화무쌍한 자연을 바라 보고 있는 나의 몸과 마음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일까? 아마 ‘자아론자’에게는 자연만 변화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설령 자신이 변한다고 해도 그것은 몸이라 할 것이다.
누구나 세월에 따라 늙어 가기 때문에 늙은 육신을 보면서 인생무상을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끝내 놓지 못하는 것이 있다. 마음만은 변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변치 않는 마음이 있어서 영원히 지속된다고 보는 것이다. 자아론자가 그렇다.
“그때그때의 조건에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마음도 예외가 없다. 그래서 맛지나니까야에 이런 말이 있다.
“이를테면 자매들이여, 기름 등불이 타오를 때에 기름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고, 심지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고, 불꽃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고, 불빛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자매들이여, 그런데 어떤 사람이 기름 등불이 타오를 때에 기름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고, 심지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고 불꽃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인데, 그 불빛만은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자매들이여, 그가 올바로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M146)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 어떤 것도 변하는 것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음을 말한다. 나의 변치 않는 자아가 있어서 그 자아는 변하지 않고 다른 것은 변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동시에 변하는 것이다.
세상도 변하지만 나도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몸과 마음과 함께 동시에 산천초목 삼라만상이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자매들이여, 누군가 여섯 가지 내적인 감역이 무상한데 여섯 가지 내적인 감역을 조건으로 체험하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영원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자매들이여, 그가 올바로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M146)
여기서 ‘여섯 가지 내적인 감역’은 6내입처를 말한다. 안이비설신의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6내입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느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느낌, 즉 수온은 12처에서 6내입처가 강조 되어 있다. 이는 느낌이 내부의 6내입처에서 주로 쌓이고 일어남을 알 수 있다. 이는 경에서 “그때그때의 조건에 따라서 그때그때의 느낌이 생겨나고, 그때그때의 조건이 소멸함에 따라서 그때그때의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M146) 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이처럼 느낌은 무상한 것이다.
그때 그때 오온이 변한다
무상함은 나의 몸과 마음에서도 매순간 일어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묻는다.
“이를테면 자매들이여, 나무심을 지닌 커다란 나무가 서 있는데, 뿌리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고, 몸통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고, 가지와 나뭇잎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고, 그 그림자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자매들이여,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무심을 지닌 커다란 나무가 서 있는데, 뿌리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고, 몸통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고, 가지와 나뭇잎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인데, 그 그림자만은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자매들이여, 그가 올바로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M146)
주변은 변하는데 자신만은 변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오온 중에 느낌을 예로 들어 “그때그때의 조건에 따라서 그때그때의 느낌이 생겨나고, 그때그때의 조건이 소멸함에 따라서 그때그때의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입니다.”라 하였다. 이런 변화에 대하여 그림자도 변한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변치 않는 자아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때 그때 오온이 변하는 것이다. 산천초목과 삼라만상이 변할 때 오온도 동시에 변한다. 이렇게 세상은 매순간 변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변화를 관찰하라고 하였다. 등불을 보고서 깜박이는 것을 관찰하고, 빗방울의 포말을 관찰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주의 깊게 관찰하면 보인다고 하였다.
죽었다 깨어나도 깨달을 수 없는 이유
사람들은 계절이 바뀌면서 자연이 무상함을 느낀다. 나이가 들었을 때는 인생무상을 느낀다. 이렇게 무상함을 느낀다면 누구나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무상과 인생무상을 보면서 깨달음에 이른 자는 매우 적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자아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아론에 입각하여 무상하다고 한다. 자신은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데 주변이 바뀐다고 생각한다. 특히 어떤 변치 않는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이렇게 견고한 자아가 형성되어 있다면 속된말로 ‘죽었다 깨어나도’ 깨달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깨닫는가? ‘무아론자’가 되어야 한다. 자연무상과 인생무상과 함께 오온이 무상함을 아는 것이다. 오온이 매순간 조건에 따라 그때 그때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불교적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날씨가 시시각각 변하듯이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도 시시각각 변한다.
“물거품을 보는 것처럼,
아지랑이를 보는 것처럼,
이 세상을 보는 사람을
죽음의 사자는 보지 못한다.” (Dhp170)
201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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